59.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 *
“조선왕. 무슨 생각이시오? 왜 갑자기 군대를 움직이는 거요?”
내가 군사를 움직이자, 야율덕광이 찾아와 내게 따졌다.
“지금 당장 임황을 쳐야겠네.”
“갑자기 어째서?”
마치 내 계획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대답하자, 야율덕광이 볼멘소리를 낸다.
“어째서냐니. 보아하니 저놈들도 슬슬 자기들이 다급한 것을 아는 모양이니, 지금 쳐서 끝장을 봐야지. 안 그런가?”
이미 조사온에게 넘어간 야율덕광이다. 내 말에 그는 불만이 있는 듯,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야 그렇다고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잖소.”
“태자도 군을 움직이시지.”
“그리 하겠소.”
야율배는 군을 움직여 임황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야율덕광의 후미를 공격할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때에 맞춰 임황에서도 병력이 나왔다.
그리고 백제군 뒤에서는 야율덕광의 군대가 나타났다.
관흔에게 지휘를 시키고 내가 뒤로 나온 것이 천만다행이다.
“조선왕의 뒤를 칠 것이다! 총공격하라!”
“후, 네놈이 내 뒤를 칠 거라고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
“엇?”
내가 설마 직접 나올 줄은 예상도 못했는지. 야율덕광이 당혹스러워한다.
“뭘 멍청한 표정을 짓느냐. 이미 네놈의 배신은 예상하고 있었다.”
“대.대체 이게 무슨.”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야율배가 나를 배신했을리는 없고.
“덕광황자님! 후미에서 태자 야율배의 군대가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어떻게 타이밍이 이렇게좋을까.
“이제 알겠느냐? 나는 네놈의 배신을 알고 있었지.”
“그걸 어떻게.”
“척하면 척 아니겠냐? 내가 왜 내 군사를 두고 너에게 성의 포위를 맡겼겠냐?”
“설마, 처음부터 다 이때를 준비한 건가!”
그냥 네가 걸려든 것 뿐이지만, 여기서는 내 위신을 세울 필요가 있다.
“어, 음. 그렇다. 너는 멍청하게도 낚이더군.”
“젠장! 대요제국을 네놈에게 넘길 것 같은가!”
“대요는 지랄맞는 소리. 너희들은 지금 발해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처지가 아니더냐? 여기서 너희는 죽을 것이다.”
“야율배. 진작 그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이제 와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일까.
이미 늦었고, 너는 오늘 죽게 된다.
“대백제의 장졸들이여! 오늘 요나라의 국운은 우리 백제인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그 시작으로 나는 야율덕광을 죽일 것이다!”
백제군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빌어먹을! 이렇게 된 이상, 네놈의 목을 베고 죽을 것이야!”
“지랄하네. 덕광아! 너도 네 애비처럼 죽을 것이다!”
활의 시위를 당겼다.
푸욱!
“끄아악!”
조금 전까지 이를 갈던 야율덕광이 내 화살에 목이 꿰였다.
나처럼 금강이 아닌 이상, 화살을 이길 수 없겠지.
“너희들의 황자가 죽었다! 아직도 계속할 참이냐!”
야율덕광의 병력은 야율덕광이 죽자 서로 눈치를 보더니, 무기를 버렸다.
남은 것은 임황부다.
“자, 이제 임황을 공격할 것이다! 요나라의 늙은 여우 술율평을 끌어내리고 북방의 평화를 되찾자!”
항복한 요군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임황부의 군대를 쳤다.
“전하! 놈들의 반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군사를 지휘하던 관흔이 식은땀을 흘렸다.
“내 직접 선봉에 설 것이네. 백제군은 나를 따르라!”
말을 타고 적진을 향해 달렸다. 적장은 조사온. 굳이 전쟁은 질질 끌 필요가 없다. 놈을 죽이고 임황의 병력을 항복시켜야 한다.
“조사온! 네놈이 적장이렸다!”
“대요의 군사들이여! 조선왕을 죽이고 대요의 영광을 되찾아라!”
호오라, 기어이 나와 한판 싸우겠다고?
아직 야율덕광이 발린 것을 모르나 보지?
“조사온아. 술율평에게서 듣지 못했느냐? 내가 죽지 않는다고? 한족놈이 거란의 앞잡이짓을 하는 걸 보니 답이 나오는구나!”
“흥! 인간인 이상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다더냐! 오냐, 좋다. 어디 안 죽는지 보자꾸나! 궁수들은 놈에게 활을 쏴라!”
병신같은 놈. 도발에 뻔히 낚인다.
나를 비웃는 조사온의 군대가 날린 화살이 전부 튕겨져나갔다.
그 광경에 적군은 그대로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봤냐?”
“역시 우리 왕자님! 화살따위는 전부 빗겨나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진정한 천자가 아니십니까!”
관흔이나 병사들은 오히려 사기가 충천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거봐, 나 안 죽는다니까.”
“말도 안 돼! 화살을 쏴라! 계속 쏴라!”
화살만 버리고 있다. 불쌍한 놈. 술율평이 경고하지 않았나. 굳이 죄없는 놈까지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래도 최소한의 피해로 전쟁을 줄이려면 어쩔 수 없지.”
간만에 들이박을란다.
“백제의 장졸들이여! 놈들의 기세가 꺾였다! 저놈들을 잡고 오늘밤은 임황부에서 마음껏 먹고 즐기자!”
나는 소수의 기병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어차피 화살은 나 혼자 다 맞는다. 심지어 기병대는 금나라의 중장기병을 모티브로한 중기병들이다.
“자.잠깐, 무.무슨 이런 인간이!”
“아 보통 인간이 아니라고요.”
그러고 보니 조사온이라는 인물은 요나라 내부에서는 제법 중요한 인물이다.
군사적인 재능이 출중한 인물. 여기서 저 녀석을 살려두면 훗날 두고 두고 후 환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이는 것이 좋겠지. 조금 피해를 보더라도 놈을 향해 전력으로 돌진했다.
“자.잠시만. 마.막아라! 막아! 방패병은 무얼하느냐!”
팽배수들이 앞으로 나서지만, 이놈들 주제에 감히 나를 어쩔 수 있을까. 금강앞에는 장사 없다.
나는 팽배수들을 넘어뜨리고 그대로 조사온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빠직!
조사온의 얼굴이 함몰되었다.
제 아무리 무예가 좋아도 전장에서 구르다시피한 나를 이길 수는 없다.
얼굴이 그대로 박살 난 조사온은 그대로 말에서 낙마했다.
저거 죽은 거 아닐까. 눈알이 튀어나오거나 그런 건 없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니 죽은 것 같다.
“조사온이 죽었다! 임황부의 군사들은 계속 나와 해볼 테냐?”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덕광 때처럼 항복제의를 했다.
여기서 굳이 더 싸워서 피해를 볼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데, 꼴에 수도를 지키는 군사들이라 그런지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장군의 복수를 하자!"
"임황을 지켜라!"
이미 승기는 확실히 기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맞서 싸우려는 것을 보니 어지 간히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넘치나보다.
“호오라. 너희들은 다른가보구나. 오냐, 좋다. 끝까지 해봐라! 관흔장군!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저놈들을 싹 죽이게!”
“예!”
우두머리가 죽었어도 술율평의 병사들은 열심히 내 백제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우두머리를 잃은 군사가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지휘부가 무너진 병사들은 속절없이 일방적인 학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심지어 술율평은 직접 나서지도 않았다.
아마 임황부에 틀어 박혀있을 있을 것이다.
한참 전투를 치른 끝에 살아남은 요군은 임황부 성으로 들어갔다.
튀는 거 하나는 잽싸다.
이대로 밀고 들어가고 싶지만, 야율배가 트집을 잡을지 모른다. 조사온과 야율덕광을 잡은 이상, 함부로 임황을 노릴 수는 없다.
차라리 조사온이 도망쳤다면 따라서 임황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한 대때렸다고 나가 죽는 나약한 놈이니 어쩔 수 없다.
괜히 조사온 잡는다고 난리쳤다.
이번 전투로 백제의 피해도 꽤 만만치 않다.
이러다 생각보다 피해가 크면 임황을 먹는 것이 어려워질수도 있을 텐데.
전투가 끝난 후, 야율배와 합류한 나는 피해상황을 보고받았다.
“관흔장군 아군의 피해는 어떻소?”
“1천이 죽고, 3천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직 충분히 싸울 수 있겠군. 그렇다면 문제는 야율배다. 아까 보니 야율덕광의 군대와 수차례 싸우면서 피해가 꽤 있던데. 만일 야율배의 군대가 생각보다 피해가 크다면 이번 전투 후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야율배. 피해상황은?”
“절반의 피해가 났소이다.”
절반이나 죽었다면, 야율배가 황위에 오르는데 결국 내 병력의 도움만 받은 꼴이 된다.
천이 겨우 넘는 병력으로는 임황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그렇다고 임황의 병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야율배의 병력은 막을만한 병력이 아직 남아있다.
이것으로 결정났군. 임황을 점령하는 전투는 전부 우리 백제군이 맡게 되었다.
“태후가 사자를 보냈습니다.”
“어디 또 무슨 개소리를 하나 들어나 보자.”
사자들은 밖에 조사온과 야율덕광의 목이 걸려있는 것을 봤는지, 막사로 들어오면서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있었다.
그래도 사자를 죽일 만큼 예의가 없지는 않다.
일단 들어보고 죽여도 늦지는 않으니까. 칼로 화답이라고 했던가.
“태후께서는 조선왕을 온전히 독립시켜 대요에 속한 조선왕이라는 지위가 아니라 요동을 아예 내어주겠다 하셨습니다.”
“내 땅으로 인정하겠다고?”
“예. 전하. 그러니 부디 군사를 물려. 내정간섭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군.
자기들이 불리해지니 한 발 물러서는 척하면서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독립시킴으로서 조선왕은 요와는 완전히 상관이 없는 인물로 내정간섭의 명분을 없앨 셈이겠지.
척하면 척이다.
내가 없으면 야율배까지는 어떻게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겠지. 술율평이 그나마 낼 조건으로는 그 정도가 다일 것이다.
“조선왕. 어찌할 것이오?”
“여기서 끝낼 거 같은가. 사자들은 내쳐라.”
천만의 말씀. 임황부라도 점령해야겠다.
곧바로 사자들은 내쳤다. 그리고 임황부에 대한 공격을 명했다.
“무슨 생각이오? 임황부를 점령하라니. 당초의 계획과는 다르지 않소?!”
“그럼 별다른 방법이 있는가?”
“그건!”
“포위만 하다가 군량만 축내네. 그렇다고 이땅에서 약탈할 수도 없는 일. 정말 그런 걸 원하나?”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다가는 군량도 떨어지고 술율평에게 역습을 받을 수도 있다.
술율평은 거기까지 계산했을 것이다.
어차피 군량도 떨어지고 있고, 설마하니 수도까지 쳐들어 올 리 있을까. 술율평이 생각한 것은 딱 거기까지다.
“그래도 그렇지. 대요제국의 수도요. 자칫 잘 못하면.”
“지금은 황위만 생각하시게. 황제가 있어야 나라도 있는 법이야. 알겠는가?”
이미 야율배도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여기서 임황을 점령하지 않고 회군이라도 하게 되면 그때는 일이 더 커진다.
야율배는 황위도 노릴 수 없을 테고, 이미 야율덕광도 죽고 큰 피해를 입은 임황은 술율평이 이끌어가도 어려울 것이다.
이참에 승자를 확실히 결정지어야지.
“차라리 한 번 회군하였다가.”
“이보게. 태자. 우리가 군량인 넉넉한 줄아나? 시간이 지나면 다 끝이네. 요나라는 혼란에 빠질 테고.”
이도 저도 아닐 바에는 그냥 임황을 점령하여 황제의 위에 올라 나라를 수습해야 한다.
“크흠.”
“용기를 가지게. 누가 뭐래도 다음 황제는 야율배. 자네야. 자네가 혼란한 나라를 수습해야 하지 않는가.”
“하. 알겠소.”
결국 야율배의 묵인과 동시에 임황부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미 도시 전체가 마비되다시피 한 임황은 내 군대를 막을 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첫 시작은 포병대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미 며칠간 불꽃놀이와 전투로 임황부는 혼란에 빠졌다.
그 틈에 포격이 떨어진다? 말 다했지.
퍼엉! 콰앙! 퍼벙!
한동안 포격을 퍼붓자 성 위의 군사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성내로 우리를 유인해 치려고 하거나. 성내에서 시가전으로 끝을 보려 할 수도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하필 사다리가 없다는 점인가.”
처음에는 이 군대로 해결될 거 같아 공성무기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급조한 사다리들을 성벽에 대고 오르고 있으나, 아예 성문을 부수는 쪽이 나을 것이다.
“요군이 무너졌다! 임황부의 성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라! 진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