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55화 (55/154)

55. 개수작

* * *

요하 하류에 머물고 있던 야율배는 내가 사람을 보내자마자 득달같이 요동으로 달려왔다.

“대체 왜 군사지원을 안 해주는 것이오!?”

“이보게. 태자.”

이 자식은 나한테 군사를 맡겨놨나.

이 정도면 얄미워서라도 군사를 지원하기 싫다.

“말씀하시게. 대체 왜? 말했듯이 지금 내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니까 그러네!

내 목이 날아가면 자네는 멀쩡하겠나?”

“아니, 뭐. 그게 맞는 말이지.”

아직 말갈을 완전히 동화시키지 못했다.

이 와중에 야율덕광의 군대와 한판 붙다가 말갈이 들고 일어나면 곤란하다.

“그런데 대체 왜!?”

“여기서 싸우면 결국 어느 한쪽은 죽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잘 생각해보게. 그런데 태후가 가만히 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내가 이딴 걸 황제의 자리에 올려주겠다고 지지해주고 있다니.

“이런 덜떨어진 인사 같으니. 잘 생각해봐. 지금 요나라는 분열을 할 때가 아닌데. 왜 태후가 가만히 있겠는가?”

“설마 어머니가 이 상황을 바랬다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네와 야율덕광이 싸우기 바로 직전의 상황을 원하고 있다는 뜻이지.”

조금 더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요나라를 안에서부터 바깥까지 잡아먹는 것이다.

“어머니가 무엇하러. 설마 지금 상황에서 요의 실권을 잡겠다?”

“당의 측천무후는 당태종과 당고종. 2대에 걸쳐 황제를 모셨다가 기어이 여제의 자리에 올랐지. 심지어 자식들도 잡아먹은 인간이 바로 그 측천이야.”

“자네는 선황제도 비명에 죽게 하더니 모자관계를 이간질시키는 건가?”

알려줘도 지랄이네.

“아니, 아들을 떠나서 제 3자의 입장에서 보게. 그렇게 보이지 않나? 자네 아버지가 죽고 지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나?”

“그거야. 그렇지만.”

“이 싸움에서 둘 중 한 명이 이겨도 요나라는 태후에게 넘어갈 걸세.”

“어째서요?”

진짜 얘는 머리가 없나?

“상식적으로 형제를 죽인 아들을 술율평이 황제로 세우겠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는 분인데, 형제를 죽인 아들도 떨구고 자신이 여제가 되었다가 친척에게 적당히 황위를 넘길 수도 있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러니 별대책없이 자식들끼리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겠지.

그 늙은 여우가 권력을 탐내기 시작한 거다.

내 말에 야율배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네. 그리고 나 역시 이제 막 발해의 내란을 막고 와서 지친 형편이야.”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어쩌기는 지금은 시간이 필요하지.

지금 요동에서 군사를 일으킬 상황도 아니고. 당연히 술율평의 의도대로 요나라가 굴러가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내가 요나라를 먹기 전에 술율평이 망가트리게 만들 수는 없지. 그 여자의 손에 나라가 좋게 돌아가도 내가 먹기 힘들어지니 곤란하다.

“자네와 내게는 지금 시간이 필요해. 태후의 의중을 알게 된 이후에 덕광과 싸우든 말든 하게나. 내 그때는 지원하지.”

“알겠소. 그럼 시간은 어떻게 벌자는 거요?”

그래. 잘 물어봤다.

“그래서 내가 야율덕광을 불렀지.”

“휴전이라도 하려고?”

“그래.”

“미쳤다고 그놈이 여기 오겠는가?”

야율덕광에게는 떡밥을 던졌으니 올 수밖에 없다.

“전하! 야율덕광이 요동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왔는데?”

“······.”

“자네는 숨어있게. 내 야율덕광과 대화를 하고 부르지.”

“알겠소.”

야율배랑 야율덕광을 한자리에 둘 수는 없지.

야율배의 동생 야율덕광은 예상한 대로 역시 나를 싫어했다.

“조선왕이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나를 직접 이곳에 부를 줄은 몰랐소이다.”

“아주 나를 향한 독기가 철철 넘쳐흐르시는 구만.”

이게 보통의 반응이지.

야율배가 이상한 거다. 자기 아비를 죽인 자를 아군으로 삼는 미친놈 보다는 이런 놈이 더 상대하기 편하지.

“요나라 황위에 대해 거론만 하지 않았어도 이리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오.

어디 내 어머니에 말해보시오.”

나는 야율덕광에게 야율배에게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했다.

황후 술율평은 욕심이 많은 측천무후의 환생이나 마찬가지라고.

내 말을 듣던 야율덕광은 처음에는 손을 불끈 쥐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놈은 의외로 감이 좋은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오. 그래서?”

“전쟁 때는 적이었으나, 지금은 어쨌든 황실로 묶여있는 관계가 아닌가? 이대로 요가 무너지면 내게도 곤란하네.”

야율배에게 암살자를 보냈어도 생각이 없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생각이 있으니 야율배를 처단하려 한 것이다.

다만, 실패했고, 결국 지금은 술율평이 여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자고?”

“태자가 나에게 찾아와서 군대를 빌려달라 했지.”

“그래서 한 번 붙자는 거요?”

하여간 오랑캐라 그런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둘이 싸울 때가 아니네. 둘이 싸우다 사이좋게 자멸하면 결국 술율씨의 세상이 되겠지.”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소!”

“그렇지. 그러니 자네 형제가 싸울 때가 아니야.”

“조선왕에게 좋은 안이라도 있소?”

“없는 건 아니지.”

휴전기간을 두고 야율배와 야율덕광이 아예 나라를 양분하는 것이다. 어차피 분열 시킬 거라면 확실히 분열시키는 거지.

“말씀해보시오.”

“결국 태후가 힘이 빠질 때가 되어야 하네. 그러자면 한동안은 나라를 갈라야겠지. 휴전기간을 가지고 수년간 자네가 서쪽, 야율배가 요하를 걸친 동쪽을 다스리는 것이 어떻겠나?”

야율배는 머리가 없으니, 이런 타협은 내가 하는 것이 맞다.

“흐음.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오?”

“그럼 태후를 칠 수 있겠나?”

“허, 그건.”

가능했으면 진작에 했겠지. 태후를 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한데. 야율덕광 이놈은 태후를 노리기보다 자기 형인 야율베를 노렸다.

이게 무슨 뜻일까?

차선책으로 야율배를 죽이는 것으로 황위를 이을 명분을 가지겠다는 소리다.

물론 그런 짓한다고 들어줄 술율평이 아니다만.

“거봐. 못하지 않은가. 자식된 도리로 그래서도 안 되고, 형제가 합해서 어머니를 떨어트리면 모르지만.”

야율덕광이라면 몰라도 야율배는 못한다. 그럴 깡도 없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야율덕광과 함께 일을 도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흠.”

“설마 그런 생각은 하고 있나?”

“그리하는 것이 일단 요를 지키는 길이 아니겠소?”

나에 대한 복수심은 넘치는 주제에, 나라 생각은 하는구나.

그럼 이놈이 더 위험하다.

야율배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나한테 의탁할 정도로 멍청한 놈인데. 이놈은 원역사에서도 중원까지 침공하는 기염을 토했으니.

“나쁘지는 않겠지. 그게 대국적인 결단으로 이어지는 길이니까. 그렇다면 태자와도 이야기를 해야겠군.”

“형님이 이곳에 있소?”

그건 예상할 줄 알았는데.

“일단 나에게 군사를 빌리러 와 있지.”

“한심하군. 자기 힘으로 안되어 남에게 의탁하다니.”

그러게나 말이다. 그 덕에 요에 내정간섭도 할 수 있을 거 같다만. 애초에 자기 형 뒤통수 치는 것도 좋게 볼 일은 아니지.

“나를 죽이려 들었던 아우님이 아니신가?”

“아우가 보낸 살수에 공포에 떨면서 도망친 형님이 아니신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요. 일단 그 어머니를 끌어내립시다. 그 다음 요나라를 가지고 사내대장부로서 황권을 다투자는 거요.”

사내대장부. 좋은 어감이다.

적어도 대놓고 나라를 분열시키겠다는 발언만 아니라면 말이다.

태후가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서 그렇지. 본래는 황제가 되어야 할 인물인데. 그놈의 권력이 야율배와 야율덕광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덕광이 이렇다면. 뭐야. 조선왕도 이야기가 된 것이오?”

네가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하니 내가 나서준 거다.

이런 식으로 이놈이 나를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네. 요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하루빨리 태후의 권력을 죽여야 하니까.”

“허. 이거 참. 나보다 조선왕께서 더 말이 많군.”

“뭐 나한테는 태후가 원수라서 말이야.”

발해원정을 계획한 여자.

언젠가 또 발해나 백제에 위협이 될 인물이다.

“발해 원정 때문에 그러시오? 결국 우리가 참패하지 않았소?”

“그래도 원정을 꾸린 것은 태후가 아닌가?”

만일 이대로 태후가 계속 권력을 잡고 있는다면, 훗날 다시 거란이 거병하여 발해와 백제를 노릴지도 모른다.

“미리 말하는데, 나는 내 어미의 목숨을 조선왕에게 내어줄 수 없소.”

“나도 마찬가지요.”

지 어미를 끌어내린다면서 목숨은 소중한가보다.

나도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단순히 그 여자가 내 행보에 방해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상관없네. 나는 그 여자가 끌어내려 지는 것만 바랄 뿐. 이것으로 모두의 의견은 같다고 보는데?”

내 말에 야율배가 미간을 좁혔다.

“잠깐, 그럼 설마 함께 태후를 끌어내리자?”

“지금까지 그 말인데?”

“날 죽이려 한 아우를 믿으라는 소리요?”

음, 나 같아도 믿지 못하지. 당장 양검과 용검만 해도 믿을 수가 없어서 내쫓아냈다.

“저 자를 믿을 수 없다면 나를 믿으시게.”

태후를 끌어내리기 위해 두 형제가 힘을 모았다.

여기에 저울추라 할 수 있는 나까지 합류했다.

“그럼 어머니를 어떻게 끌어내리냐 하는 것인데.”

“역시 군대가 답이겠지. 나는 2만의 군대를 동원하지.”

직접 가는 것이 좋을 텐데.

“무슨 그런 대군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형님의 말이 맞소. 지금 우리도 동원가능한 병력이 많지 않은데. 그 무슨 소리오?”

내가 임황이라도 점령할까 그러나. 이번에는 야율배와 야율덕광 둘이 불만을 토했다.

나도 2만이나 되는 군대를 내기는 싫다.

내가 다스리는 요동이 커야 얼마나 크겠나? 2만으로 승부를 보면 요동의 안보가 위험해진다.

“얼마나 가능하길래?”

“나는 5천이요.”

“지금 당장 내가 모을 수 있는 군대도 많지 않소. 2천이 한계요.”

내 군사보다 적다는 건가. 그렇다면 뒤통수 맞을 염려는 없다. 발해원정에서 주력군이 궤멸한 타격이 크구나.

황제 후보가 둘이나 참가한 시점에서 거란의 병력들이 함부로 움직일 리도 없고, 임황도 여기서 멀지 않다.

“태후를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면 무력시위가 답이지. 설마 점령하자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리가! 큰일날 소리하지 마시오!”

그러니까 무력시위가 답이지.

“그러니까. 나도 ‘조선왕’으로서 두 황자도 아닌 태후가 직접 정치를 한다는 것에 죄를 묻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으로 할 것이네.”

“허. 참으로 대단하시오. 미리 다 생각해둔 계책이라는 말이오?”

조금 전에 떠올리긴 한 거 같은데.

“그럴 리가. 만일을 대비한 것이지. 별다른 생각은 없었네. 준비가 되는 대로 통보하시게. 그때까지는 서로 싸우지 말고. 만일 싸운다면 나도 어떻게 할지 모르니.”

“알겠소이다.”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술율평만 처리하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면 그 다음부터는 야율배를 내 수하처럼 부려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헌데, 실제 조선왕의 군대는 얼마나 강한 것이오?”

“보고 싶나?”

하긴 야율배나 야율덕광이나 대체 무슨 군대를 가지고 있길래 내가 이토록 자신만만한 것인가. 궁금할 거다.

그래서 하나 보여줬다.

최근에 있는 대로 예산을 투자하고 있는 화포병과 중기병들에 대해서. 그리고 야율배와 야율덕광은 경악했다.

현시점 북방 최강이라 할 수 있는 거란의 군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지닌 군대.

“저 무기는 지난번 우리 군을 몰살시킬 때 사용한?”

“그렇네. 바로 저 무기지. 일본놈들에게 빌려줬었네.”

야율덕광이 수상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미 내가 전쟁 당시 일본군 뒤에서 다 수작부린 것을 아는 모양인데. 꼬우면 나보다 강해지면 될 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