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반란군은 토벌군으로
* * *
나는 신덕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반란군은 살려둘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어쨌든 그대는 대광현의 수하. 이대로 상경조정에 올려 요왕으로서 대역죄인 대광현을 잡을 것이다.”
일단 나는 발해의 요왕이기도 하다. 반란은 용납할 수 없지.
“그 무슨! 이 반란은 나 혼자 한 일이오! 태자 전하와는 무관하니 태자전하까지 묶지 마시오!”
“힘있는 자가 곧 법이네.”
이 시대는 결국 전국시대다. 살아남는자가 강한 것이고, 강한 자가 역사를 쓴다.
당연히 강한 자가 곧 법이되는 세상이다.
발해는 지금 약자의 길을 걷고 있고, 나는 이미 강자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니 발해도 결국 내 밑으로 들어온다.
신덕이 내 밑에 쓰러진 것은 그 서곡이라 할 수 있다.
“무슨.”
“여기서 자네가 나를 잡으려 한 것은 사실. 여기다 내가 ‘신덕은 배후에 대광현이 있다는 것을 요왕에게 들키자 요왕을 잡으려 했다’고 소문을 내면 어떻게 되겠나?”
“허.”
놈은 죽어가는 마당에 나를 째려본다.
자, 승자는 패자에게 아량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나라는 인물은 결코 그런 대인배는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딱 하나다.
“자네가 나를 잡으려 했을 때부터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거야.”
“그럴. 수가.”
“그러니 더는 나에게 뭐라 하지 마시게.”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다는 것 정도는 신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빠지기 힘들었을 테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반군들이 왜 죄다.”
말갈족들은 사태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듣거라. 이 말갈놈들아!”
“저. 저 자는 누군가?”
누구긴 누구야. 내가 바로 요동의 3왕이지.
“나는 백제국의 부여왕이자, 발해의 요왕이다. 이미 너희들을 후원하기로 한이 신덕이 잡혔으니. 그대들도 더는 저항하지 말고 대세를 따르라.”
말갈놈들은 허술해진 반군 본진을 보고 다들 혼란스러워 보였다.
결국 말갈이 반란을 꾸민 것은 서경 조정을 믿은 탓이다.
서경이 뒷배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발해에 대한 반란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말갈. 읍!”
신덕이 다시 말갈군을 선동하려 하길래 입을 틀어막았다.
“말갈군을 선동할 생각이라면 그만두시게. 이미 밑바닥이 보였고, 내가 죽지 않는 것도 알고 있지 않은가.”
현실을 깨달아야지.
“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대체 어떤 분이기에.”
“대고구려의 시조이신 동명성왕께서 보내셨지. 다시 삼한이 분열될 테니 삼한을 다시 하나로 통일하고 저 서쪽의 오랑캐를 토벌하라고.”
그 오랑캐란 거란을 비롯한 중원놈들이다.
시장이고 나발이고 나는 중원을 아주 정말 개판으로 만들 생각이다.
“크윽.”
“그러니까. 자네는 내가 이끌어갈 삼한천하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네.”
이미 놈의 뼈는 다 박살나서 죽기 직전이다.
반란군놈의 머리통은 모두 싹 박살내야지.
굳이 칼로 마지막 예우는 해주지 않았다. 아직 할 말이 있는 듯 보이니까.
“아국의 전하를 잘 부탁드리오. 부디 목숨만은. 이 못난 신하가 부추긴 탓이 오. 절대 태자께서는 아무런 잘 못도 없으시니.”
“선처하지.”
“고맙소이다.”
신덕은 그 말을 끝으로 죽었다.
모자란 놈이기는 해도 자기 주인을 위해 싸우는 모습은 참으로 볼 만했다.
그래. 대광현 정도야 살려줄 수는 있지.
상식적으로 대광현은 원 역사에서도 그리 잘난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나에게 방해될 일도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말갈의 추장들이 나타났다.
이제 남은 것은 이놈들을 설득해서 반란을 평정하는 것. 뭣하면 저놈들도 내다 던질 각오는 해야겠지.
“이 모든 것이 서경 분조의 계략이다. 서경의 태자는 너희들을 거사가 끝나면 반군으로 규정해 토벌할 생각이었다.”
내 말에 말갈군들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믿으라는 말이오?”
“믿지 못하면 다 죽을 뿐이지. 자, 상경에도 수비군은 있을 테고, 뒤에서는 거란족과 백제의 군대가 몰려온다. 그런 마당에 너희들은 뒷배를 잃었다. 그런데도 정녕 우리를 상대할 수 있다 여기느냐?”
신덕은 확실히 반군수장으로서 말갈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아무리 멍청해도 신덕 혼자 자기들을 후원한다고 여기지는 않았겠지.
“““······.”””
그제야 사태파악을 했는지 말갈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바빴다.
여기에 나는 더 일격을 넣기로 했다.
“나 요왕의 백제군을 무찌르고 상경을 점령한다한들 서경에 태자가 황위에 올라 다른 부의 군대를 동원한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될 거 같나?”
점점 동요하기 시작하는 말갈놈들. 그래. 너희들 수준은 고작 그 정도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지금은 발해에 예속된 몸이고, 완안아골타의 금나라시절 여진족이나 누르하치의 후금과는 달리 매우 세력이 적은 상황이다.
아무리 멍청해도 생존본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
“아주 운이 너무 좋아서 그들도 무찌른다 치자, 내가 백제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5만이 또 달려올 수 있다. 너희들이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
내가 못을 박자 말갈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결국 추장으로 보이는 한놈이 소리를 쳤다.
“우리도 이판사판이오! 이대로는 살기 힘든데 어찌하라는 말이오?”
먹고 살기 힘든 민초의 난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말갈족이 사는 지역은 척박하기 짝이 없다.
그런 마당에 상경은 지원할 생각을 안 하니 화가 치밀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 대화가 성립될 것이다.
이참에 나는 조금 전에 무너뜨린 막사를 세워 말갈족과의 회담장을 만들었다.
“자, 그럼 대화가 될 거 같군. 뭐가 뭔지 허심탄회하게 털어놔 보시게.”
“우리들이라고 반란을 일으키고 싶겠소? 말갈의 식구들이 모두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천정은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않고 있소이다!”
내놓을 수 있을 리가. 당장 대인선은 지금 서경을 주시하고 있는데다가, 피해를 수습하느라 머리를 굴리고 잇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독부를 찾아가 보기라도 하지.”
“찾아가봤자 국난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를 수습할 때까지만 기다리라 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이오? 당장 지금의 가독부와 태자가 권력다툼을 하고 있는데 어느 세월에 나라를 수습한다는 소리요?”
아, 그렇지. 당장 살얼음판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지. 대 발해국의 요왕으로써 당장 이 불쌍한 것들을 먹여살려야 하지 않는가?
“좋네. 내가 해결해주지.”
“그게 무슨.”
“나는 요왕이며 동시에 백제의 왕자네. 본국과 요동의 식량사정이 넉넉하니, 말갈에 베풀 수 있을 걸세.”
아주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남쪽에서 끌어올릴 식량이 없는 건 아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식량을 내놓는 만큼 나도 받는 것이 있어야지.
“그냥 내어주지는 않을 것이고.”
“무기를 내놓게.”
제법 눈치 좋은 말갈족 추장들에게 대놓고 무기를 요구했다.
“우리보고 무장을 해제하라는 말이오? 그럼 가독부가 군대를 보내지 않겠소이까?”
“내가 가독부를 잘 타이르겠네.”
애초에 그놈이 지금 보낼 입장일까? 못 보낼 것 같은데.
아니, 그야 그렇거든. 지금 아무리 봐도 발해의 사정은 심상치 않은데.
“거란족을 어린 아이 하나 남기지 않고 발해 땅에서 도륙한 가독부요. 그런 가독부가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소이까? 지금 우리에게는 작은 칼하나라도 무장을 해야 할 때요.”
음, 그날의 참변은 끔찍했다.
심지어 거란족 대학살을 벌일 때는 말갈의 추장들도 가족부의 곁에서 똑똑히 지켜봤으니 더 그렇겠지.
반란을 일으킨 말갈족은 대인선을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말이지. 그렇기에 대인선은 말갈족들을 더 못 잡는다.
“걱정 마시게. 그러니 더 못하네.”
“무슨 말씀이시오?”
“이번 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백성이 요군에 피해를 보았네. 그런 마당에 남은 거란족들을 모조리 죽였지. 겨우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내가 다스리는 요동에 의탁하였고, 지금은 말갈족 한 명이 아쉬운 때라 이 말이네.”
사람 한 명이 아쉬운 시기 말갈족들을 굳이 학살해서 민심을 더 동요시키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다.
“일리가 있기는 하오. 허나 요왕이 우리를 도울 까닭이 있소이까? 우리를 평정하고 전부 뺏어가면 천정의 한자리를 꿰찰 수 있지 않겠소?”
그것도 말이 된다.
발해에게는 지금 말갈족 한 명이 아쉬운 시점이라지만, 반군을 잡는다면 그 역시 공이 될 터였다.
특히 수만의 반란을 평정하면 요왕인 나는 백제인이라도 가독부의 신임을 받을 것이 아닌가.
“말갈족 치고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야. 그대들의 충심이 나에게 머물기를 바라네.”
내가 말갈족을 무시하는 어투에 말갈족들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다가는 뒷말을 듣고 이번에는 해괴한 얼굴이 되었다.
“가독부를 배신하고 요왕을 따르라?”
“그렇네. 어차피 이미 한 번 들고 일어난 몸. 나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중원은 뒤집어졌고, 거란은 앞을 볼 수 없으며 발해는 부자간의 다툼이 있으니 천하에 안전한 곳은 오로지 요왕인 내가 있는 요동 뿐이지. 그리고 나 역시 발해의 신하. 내 밑에 있다고 한들 내가 그늘이 되어줄 터이니 가독부가 그대들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야.”
내 말에 말갈족들도 일리가 있다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다면 요왕께 충성을 맹세하리다.”
“나 역시 요왕을 따르겠소.”
“우리 식구들만 먹여살려주시오.”
얼떨결에 반란군 말갈족을 모조리 품에 끌어안았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제 발해 북변의 말갈족들이 모두 내 품으로 들어왔으니, 훗날 고려든 거란이든, 발해의 천명을 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문제가 전부 해결된 것은 아니오.”
“무슨 말인가?”
아직 반군이 더 남았나? 확실히 흑수말갈이 걸리기는 하는데.
“확실히 신덕이라는 장수가 우리의 뒤를 봐준다고 하였으나, 먼저 부추긴 것은 흑수말갈이오.”
“흑수말갈?”
그럼 본래 흑수말갈이 먼저 부추기고, 그 다음 신덕. 그 다음 마음먹은 다른 말갈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건가?
아니, 기다려봐. 그럼 이곳에는 흑수말갈이 없다고?
“우리와 달리 얼마 전부터 집요하게 약탈을 시작하는 무리인데. 이미 막힐부까지 세를 뻗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건 들어서 알고 있는데. 냄새가 난다.
“흑수부가 자네들을 부추겼다고 한다면.”
이거 좀 판이 또 커지겠는데?
흑수부가 뒤에서 그런 수작을 벌였다면 이미 흑수부도 준비는 하고 있을 것이다. 발해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날 준비.
“흠. 그럼 흑수부를 토벌해야 하나.”
굳이 더 클 때까지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가능하시겠습니까?”
“흑수부놈들은 보통이 아닙니다.”
“말갈 전체로 따지면 그놈들은 완전히 잡아죽여도 되는 건가?”
혹시 동족이라 하여 보호하고 싶다 이런 건 없겠지.
“애초에 같은 말갈족 중에서도 워낙 호전적인 놈들이라, 우리 역시 그다지 친하지는 않습니다.”
그거 완전 아싸 아닌가. 말갈들 중에서도 고립되었다면 말은 다한 셈이지.
그렇다면 흑수말갈은 이 기회를 잘 이용해서 다른 말갈들을 흑수말갈 밑에 두려할 거다.
“우리가 거란과의 싸움에서 군대를 낼 때 요지부동으로 있었던 놈들이기도 하구요.”
뒤에서 힘을 키웠다는 이야기다.
그런 놈들이 크게 될 놈들이기는 한데, 시대가 안 좋다. 나는 그 놈들을 그냥 둘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그놈들을 잡아죽여야지. 추장들도 나를 따르게. 나를 따라 흑수부를 토벌한 척은 해야 가독부가 의심하지 않을 것 아닌가.”
““예. 전하.””
반란군이었던 말갈족들은 내 휘하로 들어와 흑수말갈 토벌에 나섰다.
이 정도라면 대인선도 말갈은 용서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