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47화 (47/154)

47. 천황은 못말려

* * *

“전하. 발해의 사신 대봉예공이 당도하였습니다.”

대봉예라면 환영이지. 안 그래도 꼴보기 싫은 면상을 너무 오래보고 있었다.

“나는 친우를 만나야겠으니, 황태후께서는 이만 나가보시지요.”

아직 황제도 제대로 뽑히지 않은 마당에 태후로서 권력을 자랑하는 술율평이다.

이 여편네는 나를 한참 날카롭게 째려보더니 순순히 물러났다.

저 여자도 발해의 사신과 마주하기는 껄끄러울 것이다.

“어서 오시오. 공. 서경유수로 임명되셨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서경을 감독하기 위해 내린 관직이오만. 이제는 그만하고 싶소이다.”

대봉예는 이번에 서경유수로 부임했다.

당연히 서경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분조를 어떻게 해볼 셈인 것이다.

그런다고 대광현이 알아듣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가독부께서 공을 그만큼 믿는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음.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리가 아니오.”

아닌 말로 대광현이 반란 일으키면 가장 먼저 죽을 테니까 뭐. 그놈이 지금 아버지와 살얼음판이니 빠른 시일 이내로 대광현이 독립하겠다고 하면 대봉예의 목은 그 자리에서 위험할 것이다.

“발을 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제 아내가 그럽디다. 힘들 때는 그냥 놓아버리라고.”

그래서 내가 유금필을 놓아버렸지. 대봉예도 그렇게 하면 될 뿐이다.

지금 발해는 누가 봐도 너무 불안정하다.

대광현이란 놈은 지 아비한테 반기를 들까말까 고민 중이고.

만일 반기를 들면 어떻게 될까?

“흠.”

“발해를 놓아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변명을 이것저것 대면서 요동에 눌러 앉으셔도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배신하라는 말이 아니다.

급한 불은 꺼보고, 불은 피하자 이거다.

하는 김에 요동에서 내가 내실을 다질 수 있게 도와주면 그것도 좋고.

“한 번 생각해보겠소이다.”

“말씀만 하시오. 내 공의 자리는 둘 터이니.”

“아이고. 그래만 준다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대봉예와는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늘어놓았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대봉예는 발해 내부에 꽤 튼튼한 기반이 있다는 것 같다.

그러니까. 요동에서 교역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지금 요동은 내가 남쪽에서 가져온 군량이 상당히 남아있다.

거란놈들이 남겨둔 것도 많고, 이것으로 발해와 거래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말갈은 어떻습니까?”

“말갈이 문제인데. 지금 흑수부가 힘을 키우는 것 같으니 이거야 원.”

걱정하던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기어이 이탈했다는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뒤에서 키우는 것이오.”

흑수말갈이라. 그놈들은 예전부터 그랬지.

발해 멸망 이후부터 여진이라 불렸던 놈들.

설마 흑수말갈이 벌써부터 힘을 키울 셈인가?

지금 상황을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금나라의 여진도 거란의 요나라가 여진족을 신경 쓸 틈이 없자 점차 통합하고 힘을 키운 것이 아닌가.

발해는 지금 힘이 약하다. 그러니 발해에서 이탈하려 하는 걸 수도 있다.

“이렇게 무기를 공수하기 어려울 것인데.”

말갈이 통합될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발해가 약해지기를 바랬으나 말갈족을 제어 못할 정도로 떨어지면 곤란하다.

군대를 다시 보내야 하나.

“음, 무기라. 발해의 무기를 사들이는 것이라면 말갈족부터 처리해야 하오.”

“흑수부만 처리하면 되는 겁니까?”

지금 발해에 남은 위협은 이탈하는 말갈과 분조다.

이탈하는 말갈인 흑수부는 처리하면 그만이고.

“무슨 생각이 있소?”

“우리가 군대를 낼 터이니 흑수부의 병력을 토벌하는 대신 무기를 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식량도 드리겠습니다.”

식량만 내어주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참에 흑수부를 토벌해서 무기란 무기는 우리가 다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점점 발해에 우리 백제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음. 나쁘지 않군.”

“그런데 상경의 말갈을 토벌하기 힘들 지경이오?”

“커흠. 이 말을 해야 하나 모르겠는데.”

대봉예는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염려되는지 두리번거렸다.

“동맹인데 어떻습니까. 말씀하시지요.”

“이미 한 번 패배했습니다.”

“예?”

이미 한 번 패배? 발해군이?

초반에 밀리기는 했으나 부여부와 장령부, 막힐부에서 거란을 상대로 저항하고, 야율아보기의 대군을 상대로 일본군과 함게 적들을 학살한 발해군이 흑수부한테 졌다고?

이거 어쩐지 역사가 반복되는 기분이다.

요나라도 완안부의 여진을 토벌하려다 실패하지 않았던가.

“흑수부 토벌을 위해 북진시키던 중앙군 1만이 패배하였소. 지금 2차 토벌전을 하기 위해 다른 말갈군을 전부 끌어올리고 있지만 성공할지 장담할 수는 없소이다.”

“혼례를 마치고 나면 내 군사를 이끌고 가겠습니다.”

나한테 충성하는 거란 놈들의 힘을 볼 때다.

“흑수부 토벌을 돕겠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리고 이것을 명분으로 요동에서 저와 교역을 맡는 담당이 되면 좋지 않습니까.”

“음, 그거 나쁘지 않은 방법이로군.”

대봉예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들어보니 대봉예는 발해의 권력쟁탈에서 벗어나고 싶은 중립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분조와 같은 이상형태로 왕위에 오르는 건 바라지 않는 인물이다.

얼른 상경 근처의 흑수부를 토벌하고 상경 중심으로 나라가 돌아갔으면 싶겠지.

이 기회에 내가 얻을 건 다 얻어야한다.

* * *

혼례는 소박하게 치러졌다.

요나라 입장에서도 국혼에 크게 관심을 쏟을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국내 문제가 더 중요했고, 무엇보다 내 문제가 가장 컸다.

나 역시 화려한 건 바라지 않았다.

“흥! 무엄하도다!”

저런 아직 철이 없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를 신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도 양심이 있지. 지금 아내 하나면 충분하니 차라리 나중에 좋다는 남자 있으면 방생하거나 굳이 나를 따라오겠다면 다 크고 다시 국혼을 치르는 것도 방법이다.

“발해와 백제, 일본 등에서 황녀의 스승으로 둘 만한 인재를 모조리 불러들이세요.”

“예. 전하.”

나중에 백제가 아니면 안 되는 몸으로 만들어주지.

* * *

일본

금강이 승승장구하며 요동에서 새로운 천하를 준비하는 이때, 일본에서는 천황이 귀족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발해를 구하기 위해 갔던 지원군이 크게 다쳤다. 승리한 것은 좋은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피해가 났다.

귀족들은 거란의 병력이 20만이 넘었다는 소리에 한 번 놀라고, 그들과 싸워 승리한 것에 기뻐하였으나, 일본군 중 1만 이상이 죽었다는 소리에 충격을 먹은 귀족들도 여럿 있었다.

상한 군사를 모두 합치면 절반이 넘는데. 어찌 안 그럴까.

“폐하! 연합군에서 아국의 군대만 절반이 상했습니다. 백제도 큰 피해를 보았다 하나, 백제와 우리가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지난 백강의 치욕을 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아국은 그때 4만이 넘는 군대를 지원하였다가 피해만 입고 물러났습니다.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으나, 백제의 땅만 넓혀주는 꼴이 되었으니, 우리가 왜 시절의 취급을 받을까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천황은 죽을 맛이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니.

애초에 신라에서 많이 털어먹은 자들이 저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당장 농사를 해야 하는 장정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폐하께서는 한 줌의 신라땅을 얻기 위해 수만에 달하는 일본의 사내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간토의 고구려인들도 문제입니다. 지금 그들은 우리 일본인이면서 발해까지가 전투를 치렀습니다!”

간토에 있던 고구려인들은 모두 자원하여 일본군 또는 백제군에 소속되어 거 란군과 싸우기도 했다.

백제와 발해만 좋은 짓을 해버린 것이다.

“애초에 너무 무리한 전쟁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장원제도가 널리 퍼진 마당에 신라땅을 얻자는 이유로 이런 무리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귀족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전처럼 백제는 신라 신하국이라고 치부하며 무시했어야 했습니다. 천황께서는 백제가 그리도 좋으시면 백제의 천황을 하지 그러셨습니까?”

그 말에 살짝 울컥했다.

이게 다 그저 저 자신만을 위한 일이었던가.

아니다. 일본을 위한 일이었다. 백제에는 미안하지만 신라땅을 얻어 대륙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할 셈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좁은 섬에서 벗어나 지방 호족들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을 테니까.

“낸들 이렇게 될 줄 알았겠나?”

“설령 신라의 약탈이 지금껏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그만한 피해를 본 것을 알고 계셔야 할 것입니다.”

백제의 도움으로 신라를 마음껏 약탈했다.

그럴 때마다 고려라는 놈들이 와서 막아대는 바람에 힘들었으나, 충분히 피해를 입힐 만큼 입혔다.

“소신들은 폐하의 신하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죽인 군주를 따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 폐하. 설령 백제가 고려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한다 한들. 우리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은 일본보다 작으니 약속을 지키겠다 하겠으나, 다시 통일한 이후까지 백제가 약속을 지킨다고 할까. 그게 가장 문제였다.

“어쩌면 그 탓에 우리의 병력을 줄인 것은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들이 하고 싶은 건가?”

“소신들은 더는 폐하를 뵙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독립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귀족들이 독립을 선언하는 무례를 저지르면서도 천황은 그들을 벌하지 못했다.

개선한 일본군들도 대다수 귀족들의 군대다.

중앙집권화가 약화된 이때, 괜히 토벌하겠다고 자극하면 더 안 좋다.

“후지와라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제에 원군을 내는 것은 실책이었습니다. 이번이 지난 나당연합군의 때와는 다르다 쳐도 거란은 2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합니다. 발해를 그 거란으로부터 구해야 했으니, 아군의 피해가 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때보다 더 심각하다.

“그.그렇지.”

“하지만 귀족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심지어 백제의 금강왕자는 아예 요동에서 거란으로부터는 조선왕에 봉해지고, 대씨의 고려로부터는 요왕, 백제본국으로부터는 부여왕에 임명되었다 합니다. 당장 금강이 그렇게 날아오르고 있는데, 귀족들이 배아파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천황은 왕권강화를 위해 사위인 금강에게 모든 병력을 맡겼다. 그런데 그게 실책이었다.

아니, 어쨌든 발해의 멸망을 막는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으나, 피해를 수천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거란의 병력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제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일단 금강왕자가 폐하의 사위입니다. 그러니 일본 황실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금강왕자가 지배하고 있는 요동이 우리 땅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귀족들이 납득하겠는가?”

그 귀족들이 과연?

“조금이라도 진정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제에서의 반발은?”

도와줬다고는 해도 명실공히 백제땅이다. 그런 땅을 두고 일본의 땅이라고 하는 격이니 백제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백제가 무슨 반발을 하겠습니까? 결국 요동을 얻은 것은 우리 덕이 아닙니까.”

“그럼 어떻게 임명하자는 건가?”

적당한 자리가 없다. 막상 일본의 관직을 주자니 요동은 너무 떨어져있고, 북방의 대국들은 전부 왕의 지위를 내렸는데, 일본황실의 사람인 금강에게 단순한 관직을 내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았다.

귀족들도 만족하지 않을 테고.

“일본요동군연왕이라 임명하시지요.”

“음. 나쁘지 않군.”

일본역사상 전무후무한 직위. 일본요동군연왕.

그 직위하나로 揷뺐?백제의 외교관계가 크게 바뀌는 줄도 모르고, 천황은 일본 열도 천하에 요동은 일본땅인 것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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