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46화 (46/154)

46. 찾는 사람이 많다.

* * *

거란 태자라는 놈이 나와 한배를 타고 싶은지 정말 자신을 지원해야 할 이유를 일일이 열거했다.

“요나라 내부에서는 발해에 보복해야 한다며 외치는 귀족들도 있으니 문제지.

알다시피 발해의 가독부 대인선이 거란인을 도륙하지 않았는가?”

발해를 치는 김에 다시 요동을 칠 수 있다. 이 말인데.

“확실히 그런 선택을 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지만.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 아닌가. 그걸 가지고 왜 요가 화내는 건가?”

내통한 것도 요나라요. 전쟁을 일으킨 것도 요나라다. 그런 주제에 화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체면이라는 거지.”

“난 그래도 백제출신이네. 내가 지지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힘을 실어주고는 싶은데. 아무리 내가 조선왕이라고 해도, 그들이 나를 무시하면 끝이 아닌가.

이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테지만, 나는 마냥 기쁘지 않다.

“조선왕이 가진 군대 역시 수만이네. 당장 저번 전쟁에서 수많은 병사가 죽었네. 조선왕이 나를 지지해준다면 황제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확실히 내가 가진 군대는 무시하기 힘들겠지.

3만의 군대가 태자를 지지한다. 명분도 확실하다.

그런데 야율도욕이 의외로 황제 자리에 욕심이 있는 인사다.

태자라면 당연하겠지. 그런데 막상 이렇게 보니 또 감회가 색다르다.

“긍정적으로 생각은 해보겠네. 일단 오늘은 물러가시게.”

야율도욕이 물러나자 가만히 우리 둘의 대화를 듣던 최승우가 입을 열었다.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저들이 분열할 조짐이 있겠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기회로군.”

이렇게도 기회가 빨리 찾아온다는 말인가.

신라가 정신차리고 있어서 분열되지 않았다면 발해의 멸망을 막고 지금의 나처럼 거란의 분열을 노리지 않았을까.

“현재 요나라에서는 야율덕광을 따르는 무리들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야율배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추가 얼추 맞을 것입니다.”

“흠.”

발해가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아니다. 그놈들도 지금 자기 코가 석자다. 특히 대광현 그 미친놈은 불속성효자짓을 하다 결국 상경의 조정이 살아남자 그대로 상경에 처박혀 있다.

상경에 돌아가면 좆될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사실 대인선은 자식도 여럿 있다. 그러니 언제든 대광현을 대신할 자식들은 넘쳐난다.

“여러모로 우리에게는 좋은 상황입니다. 서경의 대광현도 지금 상경의 조정으로 인해 위축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 덕에 한동안 우리는 여기서 삼국통일을 위해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거란족들로 이루어진 기병대만 하더라도 상당합니다.”

그놈들은 정말 강하더라.

전쟁 여파인지 요동성 근처에 발해출신 도적들이 침입한 적이 있다. 그들을 처리할 때 거란족 기병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그냥 아예 이대로 남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완산주 조정의 뜻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도 아직은 때가 아닌 줄 압니다.”

고려가 약한 지금 거란군과 백제 기병을 보내 두드리고 남쪽에서 신검이 북진하면 고려를 숨막히게 조일 수 있다.

“아직은 아니라니. 그럼 언제가 좋다는 말입니까? 유금필도 고려로 가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실은 고려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반란이라도 일어났나?

“무슨 말입니까?”

“고려의 왕건은 수시로 북진을 외치며 북진을 고려의 국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백제가 먼저 그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그 강성한 군사력으로 말입니다. 호족들이 흔들릴 만하지 않습니까?”

“흐음. 그렇겠군요.”

확실히 흔들릴 만하다. 그만큼 백제의 위업은 대단하다는 뜻. 이거 잘 만하면 신라도 자연스럽게 우리 쪽으로 갈아타겠군.

신라도 신라 나름이다. 지금껏 눈칫밥으로 살아온 신라다. 백제가 우윈지 고려가 위인지 지금 즘이면 서라벌에서 생각도 하겠지.

심지어 재해권을 백제가 장악했으니 일본을 상대하는 것도 우리 밖에 없다 이 말이다.

“심지어 전하에 대한 소식도 고려까지 퍼져 있습니다. 6만의 대군을 끌고 가서 위기에 빠진 발해를 구하고 20만의 요군을 격파하였으니 말이지요.”

“그것이 삼한의 패권을 뒤흔들 정도로군요.”

하기야 고려는 대야성에서도 물러난 처지인데, 후백제는 일본이라는 든든한 후원국과 저 발해로 나아가 요나라 20만을 깨트리는 기염을 토한 왕자가 있으니, 슬슬 고려가 의심스럽기는 할 것이다.

“예. 전하께서는 단순히 발해의 패망을 막으려 하신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만큼의 성과를 달성한 것입니다.”

“그만큼의 성과라.”

“이제 요와 발해. 두 나라 사이에서 잘 조율해가며 이득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지금은 잠시 노는 타임이다.

신검이 내 말대로 태자가 되었으니, 백제 내부는 문제 없다.

그렇다면 중원도 건드려봐야지.

중원에 내 명성이 알려졌다고 했으니까 나쁘지 않다.

“중원은 어떻습니까? 우리와 교역할 만한 나라가 있습니까?”

“중원은 이미 분열되었습니다. 통일하기 위해 서로 뒤엉켜 싸울 테니, 군수물자를 판다면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쪽에서 올라올 피난민들도 있겠지요.”

전쟁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튈 것이다.

일본도 지금은 불안하고, 중원의 어느 나라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고, 거란은 오랑캐의 땅이며 발해 역시 내분. 그렇다면 남은 곳은 요동 밖에 없다.

완벽하다.

“인구도 크게 늘릴 셈이시로군요. 헌데 무기는 아국에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어찌하실 겁니까?”

“이번 전쟁으로 발해는 많은 군력을 잃었습니다. 그 와중에 말갈과 서경, 상경간의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예.”

“말갈은 다른 말갈부를 이용하여 처리한다해도, 서경 상경간의 반목은 결국 나라가 안으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전후복구를 위한답시고 식량지원 대신 무기를 받아 중원에 팔지요.”

그럼 돈은 꽤 벌 거다.

“확실히 발해의 군마와 무기는 질이 좋기로 중원에서도 유명합니다. 충분히 거래해볼 수 있겠군요.”

“요나라는 야율도욕. 아니, 귀찮으니 중국식으로 부릅시다. 야율배를 지지하겠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이참에 그놈에게 은혜를 입히는 것도 좋겠지. 암.

“예. 그리해야 세력의 균형을 맞추고 요가 다시 일어서는 시기를 늦출 수 있을 겁니다.”

“고려는 왕건이 호족들을 얼마나 잘 포섭하냐에 따라 달려있겠죠.”

“그보다 황녀를 보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부인이 될 몸입니다. 아직 어리다고 하니 위로해주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위로해봤자 거란족 여자고 첩일 뿐이다. 심지어 어린 것도 너무 어리고.

나는 어린 애를 밝히는 몸이 아니다.

“놔라! 이거 놔라! 조선왕인지 누구인지를 만나봐야겠다!”

그리고 부르지 않아도 지가 온다.

“허. 참 대단도 하군.”

역시 어려서 그런가. 위, 아래도 구분 못하는 것이 딱. 어린 애답다.

“송구합니다. 전하! 당장 황녀님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조선왕이면 왕답게 나를 대접해야 하거늘 어찌 찬밥신세로 대합니까? 전쟁에서 이겼다고 기고만장하시는 겁니까?”

이거 참 당돌한 애다. 이것도 후일 흑과거가 되지 않을까.

“아이고. 미안합니다. 잘나신 황녀님.”

“나를 우롱하십니까?”

이 어린 것에 일일이 우롱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솔직히 난 얘가 내 부인이라고 하기에도 내가 범죄자라는 느낌이라 싫다.

21세기에서 이렇게 한참 어린 애를 부인으로 삼는다면 쇠고랑이나 찰 것이다.

얼마 전에도 요시코가 나에게 그랬다.

황녀의 나이가 한참 어리면 적어도 초경은 맞이하고 건드리라고. 요시코는 그냥 혹시 모르는 마음에 한 소리겠지만. 진지하게 내가 아동성애자로 보이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이고. 조선왕이 황녀님을 몰라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흥!”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습니까? 황녀님.”

“이만하면 상판떼기는 그럭저럭인 거 같고. 선황제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강한 무예실력을 가졌다는데 참이십니까?”

글쎄 검이나 창으로 싸운다면 모르겠는데, 궁술하나는 내가 자신이 있다.

“하하하. 하늘이 도운 일일 뿐이지요.”

“하늘이 두 번 도우면 요나라가 망하겠습니다!”

하는 짓이 영락없는 어린 애네.

그런 어린 애 상대로 같은 수준에서 놀아주는 나도 우습고.

“허허. 황녀께서 무척이나 전하가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이 할배는 누구야? 나는 요나라의 황녀야!”

술율평을 그대로 닮은 건가.

“이쪽은 조선왕인 나를 보필하는 상좌평 최승우라고 합니다. 황녀님.”

“흥. 그래봤자 할배지.”

“그래서 황녀님은 제가 황녀님을 황녀님처럼 모셔줬으면 좋겠습니까?”

어린 애 다루는 법을 너무 잘안다.

“맞습니다! 나를 잘 대하지 않으면 황태후께 이를 거에요!”

“큭큭큭.”

“지금 웃음이 나와요?”

이거 귀여우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아, 여자로서가 아니다. 귀여운 여동생.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때 때마침 부인이 차를 들고 왔다.

“아, 부인 오셨습니까. 이분이 요나라에서 온 황녀님입니다.”

이렇게 맹랑한 꼬맹이를 나 혼자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당장 최승우도 손자를 보는 느낌으로 쳐다보고 있다.

“어라, 진짜 고운 미색을 타고 나셨네요. 부러워서 어쩝니까?”

“흥. 나를 더 잘 모셔야 할 겁니다!”

“그럼 우리 황녀님은 소녀가 모시도록 하지요.”

“그리하라!”

결국 부인이 한수 접고 황녀를 데리고 갔다.

요동에 있는 동안은 적당히 잘 지내게 해줘야지.

이렇게 기고만장해 보여도 먼 타국 땅에 온 격이다. 버려진 거나 다름이 없다.

희생양이라는 거지. 지금 거란놈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 대충 형식만 지켜주겠다는 것.

“그나마 주력군을 다 조져놔서 다행이지.”

아마 주력군을 어느 정도 살려놨으면 분명히 요동을 넘봤을 거다.

“헌데 요의 대군을 정말 어떻게 깨트린 것입니까?”

“다 하늘이 돕고 거란족이 멍청한 탓이지요.”

내가 보여준 금강의 몸이 전성기 거란의 군주조차 위험하다 인식하고 상황파 악을 못한 것이다.

“그 거란의 황녀는 어찌할 셈이십니까?”

“우리 백제식으로 가르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래. 자신은 백제인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열심히 백제의 문화와 글.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최승우 정도면 적당하겠지.

황녀가 오고 며칠 후. 술율평 일행도 도착했다.

“전하! 요나라의 황태후 일행이 지금 성문 밖에서 전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뭐 이리 일이 한꺼번에 터지는 건지 모르겠다.

야율배가 먼저 온 사실을 알게 되면 상당히 화가 나지 않을까.

나한테 따지러 올지도 모를 일이다.

“내 남편까지 보내더니, 이제는 요나라를 분열시키려고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와서 한다는 것이 결국 따지는 거다.

역시 술율평 속을 알고 있군.

“그럼 야율배를 지지하지 그러십니까.”

“뭐라?”

“애초에 나를 어떻게 해보려는 야율덕광의 손을 들어주는 주제에 그럼 내가 가만히 있기를 바라셨소?”

내가 눈 뜬 장님인 줄 아나보지?

순간 술율평의 눈살이 떨렸다. 내가 여기까지 예상도 못할 줄 알았나.

거란이 다시 국내를 수습하고 나면 발해를 공격할 만큼의 군사력은 다시 확보할 수도 있다.

“야율배는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그래. 뭐 그 자식 나한테 잡힌 탓에 주가 떨어졌으니 조금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럼 전투에 환장한 야율덕광은?”

“하. 지금 조선왕이 나를 가르치려드는가?”

그놈한테 개박살 난 주제에 으르렁거리기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설령 야율덕광이 나를 건드릴 생각은 없다고 해도 중원은 건드리지 않겠소? 아니, 그게 가능성이 가장 크지. 내가 강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도 알 테니까. 심지어 후방에는 발해도 있고.

그런데 중원은 지금 한참 혼란스러우니 노릴 만도 할 터.”

술율평이 현실적으로 야율덕광을 설득한다고 해도 요나라의 힘을 키워 야율덕광은 중원으로 가려고 할 것이다. 분명 그럴 거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야율덕광이 중원을 평정할 수 있다 생각하시오?”

술율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이 여자의 속내가 뭔지 알겠다.

요동이라도 되찾을 생각이 아니었을까.

이거 발해보다 요의 사정을 살필 필요가 있겠다. 요나라의 황제가 누가 되냐에 따라 발해의 균열도 멈춰야 한다.

“어차피 조선왕에게는 소온을 붙여주지 않았나? 조선왕도 우리와 한 가족이 된 것인데 우리가 왜 조선왕을 노린다는 말인가?”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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