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45화 (45/154)

45. 불청객

* * *

예성강 포구

-약속은 아니었으나, 이번에 백제의 장수도 아닌 고려의 장군인 유금필 장군 덕에 큰 승리를 이뤘소. 그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약소하나 고려로 보내주기로 했으니, 이제 안심하시오.

고려의 장수 유금필은 마침내 금강왕자로부터 풀려나 고려로 향하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의 조국인가.

그런데 막상 고려로 돌아오고 있는 탓일까. 여유로워진 유금필은 문득 금강왕자가 왜 자신을 풀어줬는지 궁금했다.

“이상하다는 말이지. 왜 갑자기 고분고분 풀어줬을까.”

자만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장수로서 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저 금강왕자가 그냥 풀어주다니. 속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유독 자신이 공을 세우고 백제 군부에서 인정받게 만들었으면서 머리를 굴려도 전쟁에만 이골난 머리는 금강왕자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기는 한데. 역시 우리 페하를 배신할 수는 없지.’

왕건을 만나기 전에 금강왕자를 먼저 만났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이미 자신은 왕건을 먼저 만났다.

그러니 인연이 아닌 것이다.

지금 고려 사정이 많이 안 좋다고 들었으니 얼른 가서 왕건을 도와야 할 것이다.

금강 그 자는 확실히 패왕이다. 고려에게 있어 최악의 적수가 되겠지. 그래도 고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금강왕자가 몰래 내어준 고려의 배를 타고 와 겨우 예성강 포구에 다다르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유금필,”

“오 복지겸 장군이 아니십니까.”

복지겸, 박술희를 비롯해 고려의 장수들이 많이 보였다.이거 참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몰라도 병사들을 끌고 왔다.

“백제에 의탁해 살 길을 도모한 자가 어떻게 그리도 당당히 고려에 돌아오셨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누가 들으면 배신자인 줄 알 것이다. 자신은 백제에 투항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고려의 장수들은 자신을 이상하게 본다.

혹시 충성심을 의심받는 걸까.

“백제의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백제의 장수로서 발해로 가 백제가 요동을 가질 수 있도록 전쟁을 도왔다 들었거늘.”

“그.그게 대체 무슨.”

분명 금강왕자가 백제에서의 일을 전부 빠짐없이 왕건에게 따로 알렸다고 그랬다. 당연히 미리 이야기가 되어있으니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자신은 이렇게 병사들에게 포위되어야 하는 것인가.

“뭣들 하느냐! 배신자 유금필을 포박하라!”

“예!”

“대체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배신자라니!”

왕궁까지 끌려간 유금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심문이었다.

심문을 맡은 인물은 무려 왕건의 측근인 왕규였다.

이것은 왕건 역시 아는 일이라는 뜻이다.

왕건이 지금 박술희에 대한 심문을 왕규에게 맡긴 것이다.

“대역죄인 유금필은 나주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있다가 백제의 장군이 되어 백제군을 훈련시켰다. 인정하는가?”

“아.아닙니다. 페하께서 국서를 보내시어 백제를 도와 발해를 구하라고 하셨기에.”

분명 자신은 그래서 백제를 도왔던 것이다.

“폐하께서는 그런 국서를 보낸 적이 없으시네! 국서라면 옥새가 찍혀있는지 확인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무슨. 아닙니다! 분명 금강왕자가!”

“적국 왕자의 말을 믿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왜 그 왕자의 말을 믿어버렸을까.

왕건에 대한 충성심은 쭉 가지고 있었으면서, 금강왕자의 범상치 않는 기이한 힘에 이끌려 그를 믿고 만 것이다.

설마 사내대장부가 그리도 치졸한 일을 할 수가.

“그.그것은. 분명 폐하의 국서를.”

이제는 통하지도 않을 변명을 해버렸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백제의 병사를 훈련시키고 전쟁을 도와 백제의 땅을 넓혔으니, 이는 고려에 해악을 끼친 일이 아닌가?”

이제 생각해보니 백제의 땅을 넓히는데 공을 세운 격이기는 하다.

인정한다. 얼떨결에 장수의 피가 끓어 백제를 도운 것을.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결국 왕선의 국서만 믿은 탓이다. 설마하니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닙니다. 부디 해명할 기회를.”

“해명은 무슨! 결과가 이미 말하고 있지 않소이까! 설령 폐하께서 장군을 용서한다하시더라도, 신하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유금필은 그제야 부여금강이 그때 지은 미소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국서라고 내밀었던 것은 결국 위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심문에서 자신이 멀쩡히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최근 고려는 호족들의 이탈과 더불어 유금필의 일로 조정이 혼란스러웠다.

유금필이 억울하든 원하지 않든. 조정의 신료들은 유금필을 희생시켜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유금필은 고개를 떨궜다.

생각보다도 고려의 상황은 심각해져 있었다.

“하.하하하하.”

유금필은 다시는 자신이 전장에 나설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렇게 명예롭지 못하게 버려지느니 차라리 금강왕자의 말을 의심하고 목에 칼이 들어온다해도 백제를 도우지 말았어야 했다.

* * *

요동성

요동성에 와서 제법 열심히 일을 했다.

특히 나를 따라온 최승우는 슬슬 나이도 많아 힘들 텐데 잘도 나를 따라와서 요동을 거의 독립적인 정권으로 만들다시피 했다.

“지금 즘, 유금필은 어떻게 되었을까.”

왕건이 용서를 했을까.

그도 아니면 버려졌을까.

솔직히 후자였으면 좋겠다. 그래도 함께 한 정이 있으니 용서받아서 다시 전장에서 마주할 용기는 없다.

그렇다고 다른 전선에 서기에는 신검이 유금필을 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야성에 남은 애술이 답인가.”

지금 백제 군부는 3분의 1이 요동을 옮겨졌다.

당연히 조선왕인 나를 위해 요나라를 방어할 군사력을 키우고, 요동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 거란족 귀족들이 요동성에 들렀던 것 같은데.

최승우가 알고 있지 않을까.

“상좌평.”

“예. 전하.”

요동 하나 먹고 전하소리를 들으니 이거 참 기분이 묘하다.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아니, 내가 왜 전하요? 어차피 형식적인데.”

“형식적인 것도 하나하나 그 격식에 맞춰야 하는 법입니다. 그나저나 어인 일로 소신을 부르셨습니까.”

"

"거란족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야율도욕이 찾아왔습니다."

"아니 내게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오?"

"이런 송구합니다. 실은 하도 오만하게 굴기에 조금 가둬놨습니다."

최승우는 멋쩍게 웃었다.

그렇다면 인정이지. 아마 황녀문제겠지?

분명 황녀 야율질고는 남편이 있다고 했고, 그렇다고 황후 술율평이 미쳤다고 나한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야율질고의 딸인가?

"확실히 황녀를 데리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불러오세요."

"예. 전하."

그리고 그 설마는 진실이었다.

처음엔 상좌평이 농을 친 줄 알앗는데 정말로 태자 야율도욕(야율배)이 황녀를 데리고 직접 요동성까지 찾아온 것이다.

이건 좀 상좌평이 실수했다.

야율도욕이 나를 보는 얼굴이 원수를 보는 얼굴이 아니다. 피곤한 모습이다.

“얼굴을 보니 참 고생 많았나보군.”

후계자 다툼도 있을 테니. 그런데 이놈 원수를 보는 얼굴이 아니다.

“소실로와 야율질고의 딸 소온을 황녀로 삼아 보낸다고? 허. 어이가 없군. 그래서 황후께서는 그냥 덜렁 소온만 보내셨던가?”

“아니야. 곧 어머니께서도 오실 것이네.”

곧이라고 하면, 어쨌든 요 내부에서 수습할 것이 많은가보군.

아마 이번 전쟁탓에 들고 일어날 귀족들을 눌러야 하니 한차례 피바람도 있을 것이고. 아무튼 딸의 딸을 양녀로 들여 나한테 보낸 정신나간 여자다.

그만큼 이것저것 신경쓸 틈이 없다는 거겠지.

“그래도 후계자 후보인 자네가 먼저 온 것을 보니, 굳이 나를 속이려 하는 것 같지는 않군.”

“하, 보기도 싫은 얼굴을 또 보게 된 내 입장도 생각해주게.”

그래 서로 보기 싫겠지. 일단은 자기 아비의 원수니까.

“아버지의 원수라고 생각지 않나?”

“이미 어머니께서 묻기로 하셨으니, 내가 자네한테 뭐라 하겠나. 적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어머니께서 어쨌든 조선왕으로 삼았네. 야율요골(야율덕광)이라면 모를까. 나는 더는 자네와 다투기 싫네.”

“얼마나 싸웠다고.”

한 번 싸운 거 가지고 나한테 저리 쫄면 어찌하나.

“아무리 숫자가 비슷해도 그렇지 정신나간 인간처럼 아예 단신으로 적진에 쳐들어오는 자네를 보고 솔직히 겁먹지 않을 사람이 있겠나. 자네는 모르겠지만 자네 휘하 기병들은 그때 뒤에 뒤쳐져 있었지.”

즉, 아예 복수심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크게 혼났다 그 말이로군.

애초에 야율도욕은 현실감각이 있는 인사다.

원 역사에서도 황태후에 의해서 야율아보기의 뒤를 이어 도욕이 아닌 요골이 황위에 오르게 되니 도욕은 발해땅에 세워진 동란국의 왕위를 유지하다가 930년에 후당에 귀의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석경당의 정변에 휘둘려 죽는다고 했나.

그래도 이렇게 역사가 바뀐 이상, 동란국도 없고, 도욕이 후당에 귀의할 만큼의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요전쟁도 없겠지.

“확실히 나나 내 어머니께서 군사를 지원요청하면 도울 것인가?”

“2만은 있으니 적당히 지원할 수 있을 것이네.”

“적당히라니. 그 무슨.”

“말은 바로 해야지.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 해. 안 그런가?”

애초에 원 역사에서는 네가 상경성을 함락했었다.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하, 솔직히 말하겠소. 지금 본국 사정이 말이 아니오.”

본국? 백제? 요? 발해? 너무 많아서 곤란하다.

뭐 거란놈이니 거란의 문제겠지만. 후계자 문제일까.

“후계자 문제 때문인가?”

“아주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군.”

“하기야, 지 애비 죽인 놈한테 왜 그리 대화를 잘 거나 했더니, 설마 후계자로 지지해달라는 건가?”

역시 권력에는 영원한 원수가 없는 법이다.

“선황제에 대한 일은 말하지 않기로 하지. 이미 전쟁은 끝냈고, 그대는 형식적이든 뭐든 간에 아국으로부터 왕에 봉해진 몸이오. 심지어 만만치 않은 무기에 강군까지 보유하고 있지. 내가 뭣하러 조선왕에게 화를 내겠나. 내 처지도 그럴 처지가 아니고.”

부여부에서 꼼짝없이 생포되었던 처지에서 요군의 발목만 잡았다.

야율아보기가 상경으로 가지 않은 까닭은 결국 태자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태자를 신경쓰지 않고 곧바로 상경을 들이쳤다면 발해는 멸망했을지도 모르지.

솔직히 나도 그때까지만 해도 발해를 멸망하게 둔 다음에 발해땅을 두고 요와 결전을 치를 생각도 했었다.

이놈은 본인도 알고 있다. 자신이 이번 전쟁에서 패한 원인 중 하나라고. 그래서 요나라에서도 제법 까이고 있겠지.

“계속해. 네 어미는 야율덕광을 후계로 생각하고 있겠지?”

“잘 알고 있군. 내 어머니는 내가 황제의 상은 아니라고 하셨지.”

거란족 자체가 그럴 놈들은 아니다. 고작해야 오랑캐지.

당장 대인선만 해도 국내가 수습되면 힘빠진 요나라를 쳐 거란의 사내란 사내는 전부 죽인다고도 했다.

실제로 발해 땅에 잔존한 거란족들은 대인선과 발해인 손에 학살당했다.

“거란의 황제라도 되고 싶다 그리 말하는 건가?”

“나는 태자요. 태자가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차남이 황위에 오른다면 어떻게 될 거 같은가?”

“확실히 입지가 좁아지겠군.”

“죽을 수도 있지. 그대도 왕족이고, 넷째왕자라니 알고 있지 않나.”

이미 태자에 있는 황자가 아니라 차남을 황위에 올린다면 당연히 태자인 야율도욕 입장에서는 크게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 역사에서도 후당에 귀의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렇지. 그러니 적어도 자네를 뒷받침하는 세력이 되어달라?”

“그렇네. 당장 이곳에 조선왕을 따르는 거란의 백성들만 수만이 넘지 않은가.”

“이건 뭐 대놓고 후계자 다툼을 하겠다는 뜻이로군.”

나를 거기 끼어들게 해서 힘을 얻어보겠다는 심산인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야율덕광이 황제가 된다면 조선왕도 위험하지 않은가?

애초에 어머니가 덕광을 태자로 삼으려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내게 복수하려고?”

“그 말이네.”

“다시 요하를 넘으려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야율덕광이라면 중원을 노릴 것이다.

오히려 중원을 넘보다가 죽어서 돌아오기 때문에 술율평에게 한 소리 들었지.

그럼 역시 다시 요하를 넘을 생각 중일 수도 있다.

발해에서 그 치욕을 받았으니, 당시에 술율평을 따르던 무리들도 있겠지.

그럼 힘을 실어줄까?

작가의말

요나라의 국호는 요태종때 요나라로 정하였으나 작중에서는 편하게 요나라로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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