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요동의 3왕
* * *
대전에서 형제간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어느 줄에 장단을 맞춰야할지 고민하던 신하들이 내 말에 다들 뻥터졌다.
대전에 있는 관리 중에 용검이 저지른 트롤짓을 모르는 이는 없다. 심지어 이 관리들은 호족출신으로 요직에 앉은 자들이다.
그 호족출신들은 백제를 위해 사병들을 내놓았고, 그 사병들 중에서는 용검의 밑에 소속된 자들도 많았다.
즉, 용검이 말아먹은 것이 많았던 것.
뭐라고 말하고 싶어도 용검의 뒤에는 그의 아버지인 견훤왕이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으니, 감히 그 일로 따지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왕자 출신인 내가 치열하게 맞받아치니 그동안 쌓인 불만이 비웃음으로 터졌다.
“보거라. 그 착한 금강이가 얼마나 화가 치밀었으면 저리 말하겠느냐? 능환자네는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파직으로 끝내줄 것이고, 용검이 너는 유배를 보낼 것이다. 그곳에서 네가 정신을 차렸다 싶으면, 불러올릴 것이야.”
사실상 사형선고였다.
“폐하! 폐하! 용서하여주시옵소서!”
“폐하!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선처를!”
“그걸 왜 나한테 그러는가? 금강이가 용서하면 내 생각을 해보지.”
오, 이걸 이렇게 나한테 준다고?
“송구하지만, 저는 조금도 이 두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금강아! 그러지 말고 이 형의 처지를 생각해주려무나!”
형의 처지는 무슨 형의 처지.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금강왕자님.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백제를 위해서였습니다! 발해에서 일어날 전쟁보다 당장 삼국통일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까.”
나라도 시간이 넉넉했으면 삼국통일부터 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 꼴이 되고, 지금까지 자기들이 벌인 실책을 알면서도 권력을 가지고 싶습니까?”
“권력이 아니라 백제를 위해서.”
지랄하고 있네.
“백제를 위해서 신무기 개발을 망쳤고, 백제를 위해 대야성 전투를 망쳤으며, 백제를 위해 포로가 되셨습니까?”
하나하나 열거하자 능환과 용검의 얼굴이 진짜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그러게 깝치지 말아야지. 너희들은 슬슬 퇴장할 때다.
그냥 자비를 베풀어주는 방법도 있는데, 별로더라고.
“부디 기회를 주시지요.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하였습니다.”
“아우야. 부디 청하마. 용서해다오.”
이참에 끝을 봐야지.
어쨌든 이 둘의 처우는 내게 달려있다. 다른 신료들도 내 처우를 기다리는 것 같고. 그렇다면 만족할 정도로 저 둘을 비아냥거리고 내쫓아야지.
어차피 이 둘은 오늘 당한 일로 얼굴 부끄러워서라도 다시는 왕궁에도 발을 못 디딜 것이다.
“두 분. 그리도 백제를 위하고 싶습니까?”
“예. 왕자님.”
“그래. 내가 정말 분골쇄신하여 이 백제를 위할 것이다.”
어이구. 니들이 분골쇄신하면 나라가 망해요.
“그렇다면 병관좌평이 하실 일은 좌평자리를 내려놓는 일이고, 용검형님은 유배를 가셔야합니다.”
““······.””
둘 다 꿀먹은 벙어리라도 된 건가. 맞는 말인데 이 멍청이들은 그저 내가 말장난하는 거라 여기는 것 같다.
그 외에 조금의 타협도 없다. 해줄 생각도 없다.
결국 능환과 용검은 기를 쓰고 용서해달라고 청하다가 병사들에 의해 대전 밖으로 끌려나갔다.
정말 답답한 인간들이다.
왜 자업자득인 것을 알지 못할까.
* * *
태자일이 결정된 날. 상원부인이 따로 나를 불렀다.
상원부인도 나를 이제 신임할 것이다. 신검을 태자에 올렸으니까. 그럼 이제 내 말을 들어줄 차례지.
“네가 이번에 우리 신검이를 태자로 올리는데, 큰 힘을 보탰다고 들었다.”
“예.”
“그런데 용검이는 꼭 그리 해야 했느냐? 능환도 그렇고.”
“큰어머니. 용검형님 탓에 망친 전투가 몇 번인 줄 아십니까? 그렇다고 어떻게든 스스로 정치에서 손 뗄 인물도 아니고, 신검형님은 쓸데없이 형제애도 깊으니 버리지 못할 겁니다.”
그 때문에 말아먹은 전쟁이 한 둘이 아니니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내가 아닌 신검을 위해서도 용검은 쳐내야 한다.
“끄응.”
“능환. 그 사람은 노망이 들어 권력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검형님께 방해만 될 뿐입니다. 혹여라도 신검형님이 그 둘을 불러오고자 한다면 큰어머니가 막으셔야 합니다. 신검형님과 백제를 위해서입니다.”
“알겠다.”
“저는 요동으로 곧 떠나야 하니 큰어머니께서 신검형님을 잘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반드시.”
“걱정말거라.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지 않다.”
그래. 이 여자도 견훤이 나만 편애하는 것처럼 친자식 중에서도 유독 장자인 신검을 아꼈다. 아마 신검을 위해서라고 하니 용검을 굳이 불러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능환이 뒤에서 무슨 수를 쓸 거 같은데, 이 경우에는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왕자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폐하께서? 금강이 너는 얼른 가보거라."
"예. 큰어머니."
지금 부른다면 아마 요동의 일일 것이다.
* * *
“결국 또 완산주를 떠나게 되었구나.”
“송구합니다. 폐하.”
언제까지 부모의 품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일본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는 요동에 머무르면서 군사를 키울 생각이다.
북방 유목민족들의 갑주를 참고하여 두정갑도 만들자.
“그래. 뭐 네 뜻이 그렇다는데 어찌 하겠느냐. 자고로 사내란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다. 저 대륙이 오죽 넓느냐? 그 교두보인 요동에서 너는 백제를 위해 큰 힘을 키울 것이다. 아니냐?”
“예.”
“그래서 이 아비도 네게 왕의 지위를 내릴까한다.”
뭔가 느낌이 오기는 했는데, 이렇게 바로 준다는 말인가?
“왕을요?”
“황제가 왕을 임명 못해서야 쓰겠느냐? 심지어 저 거란놈들과 발해 역시 너에게 왕으로 봉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게 분했는지. 씩씩거리는 모습이 견훤답지 않은 모습도 있었다.
“예. 폐하.”
“나 역시 너에게 부여군왕에 봉할 것이다. 왕으로서 위엄을 갖춰야 할 것이다.”
요에서는 조선왕, 발해에서는 요왕. 백제에서는 부여왕. 나 무려 3국의 왕이다. 명예직이기는 해도 무려 3국의 왕이란 말이다.
고려의 왕건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떨까.
끄트머리기는 하지만 압록강유역도 가지고 있다. 아니, 설령 발해가 전부 가지고 있다고 해도 군사통행권 정도는 주겠지.
즉, 본국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키운 강군으로 남진을 할 수 있다 이 뜻이다.
“예. 폐하.”
어차피 떨어져 있을 테니, 내 편한 대로 해도 되겠지.
요동은 이제 발해와 요나라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나는 그곳에서 잘 키운 말들을 통해 기병을 키울 생각이다.
특히, 그곳에 있는 백성들을 통합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거란, 한족, 발해인. 모두 있다.
듣자하니 한족기술자도 있다고 하고 거란과 발해인을 주축으로 기병을 키워내면 고려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또, 저번 요동전쟁에 나섰던 장수들도 붙여줄 것이다. 상애와 관흔이 어떻나? 또 효봉과 덕술도 너와 함께 가겠다 했다.”
“만족스럽습니다. 폐하.”
“상귀도 가겠다 했는데, 수군을 맡아야 하지 않느냐.”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상귀장군은 수군을 맡은 몸으로서 나주에 남아야 합니다.”
상귀가 요동에 따라오면 또 요동에서 수군을 만들고 하느라 힘이 다 빠진다.
당연히 고려가 재해권을 되찾으려 할 테고, 그는 백제 본국에 남아 수군을 잘 키워 고려와 맞서는 것이 이득이다.
조금 전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또 간다고? 이제 며느리와 친해진 참인데. 요동에 정착하면 다음에는 또 언제 본다는 말이냐.”
“송구합니다.”
“이참에 나도 함께 가면 안 되겠느냐?”
견훤이 보내주려나?
“폐하께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음, 따라가시구려.”
내 물음에 견훤은 그게 별거냐는 식으로 허락했다.
“진심이십니까?”
“아, 아비와 자식은 몰라도 어미와 떨어지면 안 되지. 그것도 요동과 여기 완산주의 거리가 얼마인데. 자, 가시구려. 짐에게는 왕후도 있으나, 그대에게 자식은 하나 뿐이지 않소.”
견훤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원부인이 금강을 미워하는 것은 단순히 신검의 일 때문만이 아니다.
내 어머니가 견훤의 총애를 받기 때문에 내면에 깔린 열등감과 질투가 고스란히 그 자식인 내게 이은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를 나와 함께 보내고 나서 견훤은 훗날 일어날 파국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상원부인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것이다.
“아버님.”
“앞으로 너와 신검의 시대를 준비하려 하는 거다.”
“왜 모르겠습니까. 정말 제 어머니와 떨어지셔도 되겠습니까?”
정말 우리없이 될까.
원 역사와 바뀌었다. 견훤이 죽는 원인으로 보이는 등창에 관련해서도 별 이야기도 없고.
“그만큼 네가 요동에서 크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그게 아비로서 바라는 거라면 뭔들 못하리.
후백제의 황태자 책봉식은 자국 내에서만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리고 나는 견훤에게 부여왕으로 임명 되었다.
-요동도독 요국군왕 부여금강.
-요주도독 조선군왕 부여금강
-요주도독 부여군왕 부여금강
정말 팔자에도 없는 군왕직으로 내 인생이 폈다.
하긴 후일 몽골이 한참 팽창할 때 동요라는 나라도 있었으니. 그 정도 땅덩어리를 가진 내게 군왕의 자리는 나름 맞는 건가.
발해도 지금 꽤 힘든 것 같고.
[요주 야율아보기를 척살하였습니다! 신들이 전율을 느낍니다!]
[요동의 3왕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가족관계 개선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요동을 평정한 당신의 명성이 삼한에 널리 퍼집니다! 고려의 패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요동을 평정한 당신의 명성이 대륙에도 알려졌습니다! 부를 축적할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꽤 여러 가지가 떨어지는구나.
두 나라 사이의 완충지대이면서 동시에 양국 다 요동을 어쩌지 못한다. 발해는 일단 동맹국이기도 하고, 굳이 공격했다가 내가 요와 붙어먹을 수도 있고, 요나라는 지금 발해는 커녕 요동을 다시 빼앗기에도 힘들 것이다.
요동은 먹기도 힘들고, 그만큼 본디 지키기도 힘든 땅이다. 하지만 요와 발해의 사정이 많이 안 좋기에 한동안은 그 요동을 중심으로 꽤 배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미래의 지식을 풀어봐?”
화약국도 아예 요동으로 옮겨둘 생각이다. 그리고 고려가 침공할 때를 대비해 화약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낫겠지.
삼국통일이 바로 다음 목표라고 해도 요동을 키울 시간은 필요하다.
아직 휴전기간도 남았고, 그동안 고려에 화약기술이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백제도 피해를 입었으나, 대국끼리의 싸움에서 백제가 최종승자가 된 것이다.
백제에 붙은 호족들은 줄을 어디에 대야 하는지 확실해졌다.
“그럼 문제는 유금필인데.”
이제 풀어줄까말까 고민이 든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놈 정말 고려에 돌려주기에는 아깝고.
어차피 지금 돌아간다해도 고려내에서는 유금필의 입지는 좁아져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외국의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도와주던 자를 왕건이나 다른 자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왕건은 아니라고 해도 고려의 장졸들은 믿기 힘들 것이다.
“또 무슨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요동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아내가 내게 물었다.
옆에서 죽상을 하고 잇으니 걱정이라도 된 모양이다.
“유금필을 어찌할지. 그게 문제요.”
“가질 수 없다면 놓아버리시지요.”
“음.”
가질 수 없으면 놓아버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얻을 수 없습니다.”
“역시 그런가.”
“가질 수 없다면 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군.”
설령 왕건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해도 예전같지만 못할 것이다.
정말로 고려조정이 부처처럼 자비롭다면 모르겠는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유금필은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
“일본이나 백제와 달리 저 북쪽은 추울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귀찮은 일은 시녀들이 다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럼 우리는 요동의 어느 성으로 가는 것입니까?”
“요동성이 될 것입니다.”
요동성. 그곳이 앞으로 내가 이끌어갈 북방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