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태자 책봉
* * *
신검은 왕으로서 능력도 없는 인물.
그래서 내가 더 백제의 주인이 되면 안 될 것이다.
지금은 한참 발빠르게 움직여 국제관계를 이용해서 후백제의 판도를 넓힐 시기다. 이 와중에 내가 태자가 되면 정말로 행동에 제약에 따른다.
무능한 이놈이 왕이 되면 내가 옆에서 보필하면 그만이다.
뭣하면 의원내각제의 조상격 체제로 가는 것도 좋다.
아직 통일 전이기도 하고, 후삼국 초기니 전제군주제가 굳어지기 전에 의원내각제 체제를 만들면 그만이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무슨 말이냐?”
“형님께서는 태자가 되세요. 훗날 백제의 군주가 되셔야 합니다. 형님께서는 백제의 찬란한 해가 되시고 이 아우는 재상이 되어 형님을 보필할 것입니다.
정치는 문신들에게 맡기시고, 전쟁은 무신들에게 맡기시지요.”
한마디로 얼굴마담이나 해라 그거다.
이놈도 지금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 없이는 후백제 경영은 불가능하다. 자신은 삼국통일을 할 만큼의 위인은 되지 못한다.
당장 왕건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데. 불가능하겠지.
그나마 내가 후백제보다 넓은 요동의 땅을 얻었으니, 고려를 상대하기 조금 더 편해지겠지만. 결국 신검이 믿을 건 나 밖에 없다.
“아우야.”
“형님은 나라를 찬란하게 빛낼 것이고, 신하들이 형님을 뒷받침할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부왕을 설득하겠습니다.”
신검은 오래 전부터 태자가 되기 위해서 자랐다. 그러니 여기서는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고 얼굴마담으로서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알겠다.”
제발 이번에는 내 말 좀 들어라.
이것이 다 네가 훗날 성군으로 남게 도와준다는 건데 깊은 뜻을 왜 모를까.
“완산주로 가면 전후보고를 하고 형님을 태자로 올릴 것입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알겠다.”
이번에는 태자일을 끝장을 봐야지.
* * *
백제군사 1만과 항복한 거란군을 요동에 남겨두고 서해를 건너 완산주에 도착했다.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다시 요동으로 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다.
“다들 고생했다! 요동에서 대백제의 남아로서 이름을 날렸구나! 이것이 우리 백제의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래. 그렇게 칭찬은 해줘야지.
“폐하, 가독부와 요나라 황후 술율평이 보낸 국서입니다.”
나는 견훤에게 가독부와 술율평이 내게 줬던 국서를 올렸다.
“금강이를 조선군왕, 요국군왕으로 봉하겠다?”
국서를 본 견훤의 미간이 좁혀졌다.
당연히 신료들도 난리가 났다.
특히 내 혈압을 자극하는 존재가 있었다.
“폐하, 문제가 많습니다. 요동을 공략한 것은 신검왕자님이신데 어찌 금강왕자에게 그런 지위를 내린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것은 마땅히 형님께서 가지셔야 할 지위입니다.”
능환과 용검 저 둘은 아직도 안 죽었나.
슬슬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꼴을 보니 반송장이다.
하지만, 나도 오늘은 그냥 물러서지 않는다.
저놈들이 좋아할 먹잇감도 있으니까.
“두 분 모두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놈들이 왜 안 까나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검형님께서는 이 나라의 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동에서 그 형식적인 지위를 받는다면, 신검형님은 완산주에서 태자가 되지 못하십니다.”
“아니, 금강아. 그건 무슨 소리냐? 태자라니.”
견훤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옳지 못한 행동인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참에 태자문제를 결정지어야만 했다.
더 늦어지면, 요동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
“폐하. 신검형님은 요동 전쟁에서 거란군을 끊었습니다. 형님이 아니었다면 이번 전쟁은 아군의 피해만 컸을 것입니다.”
“신검이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신검은 내가 이렇게 밀고 나갈 것은 예상하지 못한 건지. 두 눈만 껌벅거리다가 내가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폐하. 어찌 소자가 태자가 되기 싫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소자와 금강이는 폐하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후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이참에 결정지어야 하는데, 견훤이 또 도망가지는 않겠지.
* * *
견훤은 낮에 대전에서 금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개선하자마자 하는 말이 태자를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신이 아닌 신검을 택했다.
듣자하니, 신검은 비어있는 요동을 공격하였고, 금강은 계책을 써서 야율아보기의 20만을 무찔렀다고 한다.
전국시대에는 군사적 재능을 가진 왕자가 왕이 되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렇다면 단연 금강이다. 금강이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견훤은 최승우를 불렀다. 금강의 가장 가까이서 그를 보필하니까. 금강의 속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좌평. 자네는 어찌 생각하느냐?”
“신검 왕자님이 폐하의 다음을 이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견훤은 순간 능환을 보는 줄 알았다.
금강의 측근이면서 어째서 신검이 태자가 될 것을 바라고 있는가.
“자네는 내 속을 알고 있지 않은가?”
“금강왕자님을 심중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리 말하나? 신검도 솔직히 말해 왕건의 자식들보다야 낫지. 하지만 금강이와 신검이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능력이 더 있는 금강이를 고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말을 자네가 할 수 있나?”
신검은 부족하지 않다. 다만 금강이 너무 뛰어날 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금강이 태자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나. 능력면으로만 본다면 자신이 죽었을 때, 왕건을 상대할 인물은 금강 밖에 없다.
신검은 왕검을 당해내지 못하니까.
그런데 최승우는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는 것 같다.
“그렇기에 더 그러셔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두 분 다 장성하셨고, 둘 중 한 분은 왕위를 이을 태자가 되셔야 합니다. 지금 책봉해도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래. 너무 늦었다. 슬슬 뭔가 결정을 해야 한다.
생각해보니 태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결국 훗날이 불안할 뿐이다.
그렇다면 얼른 결정을 해야겠지.
“그렇지.”
“폐하. 분명히 이 노신의 생각으로도 금강왕자님이 태자가 되신다면 백제를 태평성대로 이끌고 삼국통일도 할 것입니다.”
분명 가능할 것이다. 금강이란 인물은 마한 패왕이라는 이명이 결코 허언이 아닐 정도로 전장을 누볐으니까.
분명히 가능하겠지.
“그래. 그래서 내가.”
“하지만, 금강왕자님께서는 천하를 잘 읽을 줄 압니다. 이 삼한땅에만 머물러야 할 그릇이 아닙니다. 백제의 상징인 나투처럼 자유롭게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 백제를 더욱 크게, 웅대하게 만들 것입니다. 태자의 지위에, 왕의 자리에 오른다면, 새장 안에 갇히는 형국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안 된다. 신검은 딱 적당한 그릇이지만, 금강은 백제라는 작은 그릇이 담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백제를 더욱 크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의 천하는 그렇게 해야만 백제를 크게 만들 수 있다.
“나 같이 친정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폐하께서 매번 친정하는 것도 아니십니다. 그리 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지지 않습니까.”
심지어 적은 나이도 아니다. 언제까지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
“천하의 대세를 보시옵소서. 발해도 이번 전쟁으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였으며 태자 대광현은 자기 아버지이자, 현 가독부인 대인선과 부자간의 권력다툼중입니다. 요나라는 주력군을 잃어 원수인 금강왕자님에게 지위를 내려 회유할 정도며, 중원은 늪에 빠진 망아지처럼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어떻습니까. 천황이 무리한 내기를 하다 결국 군사 4만을 내놓았고, 그 결과 일본도 국력이 말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 4만의 군대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느냐고 사신을 몇 번이나 보냈었다.
그때마다 적당히 흘려넘겼지만, 이미 1만이 넘는 피해를 보았다고 하니, 이건 또 일본과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뭐 일본문제야 신라땅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짓기로 했으니 별탈은 없겠지.’
일찍이 삼국동맹에서 일본은 삼한땅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얻고, 백제와 발해는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물론 잘 난 금강의 말로는 절대 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믿을 수 있지만 결국 일본 문제도 금강이 해결하게 되리라.
“한마디로 금강이 날개를 펼쳐 그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다는 뜻이로군.”
“예. 폐하. 그리고 폐하 황제나 왕을 뛰어넘는 재상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습니다. 신검왕자님이 다음 왕위에 오르고 훗날 백제를 크게 키워낸 금강왕자님이 재상의 자리에서 국정을 돌본다면 백제라는 나라가 천년 만년을 가지 않겠습니까.”
“금강이를 담기에는 백제라는 나라가 너무 작다 그 말인가.”
견훤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건국한 백제가 금강이에게는 너무 작다니. 아들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다 못해 삼국통일을 해뒀으면 뭔가 달랐을까.
이것도 저것도 다 고려탓이다. 근자에는 고려에서 많은 호족들이 이탈했다지만,
“백제라는 그릇을 밖에서 더 크게 해줄 것입니다.”
“그럼 금강이가 도공이로군.”
“뛰어난 도공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신검왕자님을 태자로 세우시고, 후일 금강왕자님이 재상이 될 수 있도록 터를 잘 잡아주시면 될 것입니다.”
신하로서 너무 참견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최승우는 이 기회에 태자문제를 결론짓기로 하였다.
이 이상, 태자를 책봉하는 것이 늦어진다면 신료들의 불만이 커질 것이고, 결국 나라 안팎으로 백제는 불안정하게 보일 것이다.
“허, 이 사람이 이제는 아주 짐의 머리 꼭대기 위로 오르려고 하는 구만.”
“송구합니다.”
“이거야 원. 금강이한테 태자의 자리를 내어주면 오히려 아비로서 못난 짓을 하는 것 같구만 그래. 결국에는 태자의 자리를 신검에게 줘야 둘 다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
금강에게 태자의 자리를 준다면 금강, 신검 두 아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테고, 신검에게 태자의 자리를 주면 둘 다 만족한다.
정말이지 아비노릇을 하기 이렇게 힘들 줄 누가 알았을까.
“예. 폐하. 또한 파벌들끼리의 권력다툼을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기야 뭐. 그 요나라와 발해에서 이미 왕으로 봉한다 하지 않던가. 형식적이라 해도 사실상 요동의 땅을 금강의 것으로 인정해준 것이 아니냔 말이야.”
이미 요와 발해로부터 왕으로 봉해졌다.
심지어 요에서는 황녀까지 시집보낸다지.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금강왕자님에게 태자의 자리는 안 될 것입니다.”
“알겠네. 조만간 내 조정의 뜻을 모아 신검을 태자로 올려야겠어. 하지만 문제가 하나 남아있네.”
신검에게 태자의 자리를 물려주는 건 어렵지 않다. 장자고, 이미 많이 늦은 참이라 딱히 반발할 세력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금강도 받아들인 일이니 금강쪽 인사들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시옵소서.”
“생각해보게. 하늘에 해는 하나일 뿐이네. 요동도 이제 백제땅이 아닌가. 그 백제땅에 조선이나 요왕이라니. 짐이 금강이를 인정해줄 수 있어도 이것은 조정의 신료들이 들고 일어날 일이 아닌가.”
이미 아비가 왕인데, 가 아들이 북방의 대국 발해와 요나라에 의해 왕으로 봉해진다면, 이거야말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인정치 않으면 완전히 아들을 독립시키는 꼴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건 조정에서 논란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문제도 어렵지 않습니다. 본디 옛백제의 어라하는, 황제의 칭호도 사용했습니다. 마한의 황제라고도 불렸으니 폐하께서 마땅히 황제가 되시면 금강왕자님이 요왕이든 조선왕이든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오,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견훤은 만족스러운 듯 턱수염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