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너는 또 삐졌니
* * *
상경
야율아보기의 시신은 대인선에게 특급배송이 되었다.
그는 야율아보기의 시신을 보자마자 입이 귀에 걸렸다.
“이것이 요나라 황제 야율아보기의 시신이라.”
“예. 가독부께서 원한을 푸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손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아쉬울 따름이네.”
대인선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잡아준 것으로 고마워할 일이지.
“그렇지가 않습니다. 놈들의 결사항전을 막고 쉽게 잡아먹기 위해 이번 전략을 사용하였으나, 거란에 대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발해군이 거란군을 학살하면서 벌어진 일이라 어쩌면 발해군에 의해 죽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음.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네만. 과연 생겨 먹은 것이 욕심이 많게 생겼도다.”
조금 전까지 웃던 대인선을 보니, 마냥 기뻐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잡힌 것이 어이가 없을까.
“조만간 시신은 돌려달라고 협상안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 원수놈을 돌려줘야 한다니.”
야율아보기는 대인선에게 있어 최악의 적수였다.
그나마 지금은 나라가 망하지 않았으니 이 모양이지. 원 역사에서 대인선은 그 이름조차 야율아보기가 탔던 말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대신 배상금을 받아내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놈들이 제게 형식적으로 요동을 영지로 내린다고 하였으니, 이 외신이 요동에 있으면 완충지대 역할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네는 백제의 왕자가 아닌가?”
“중원에서도 고구려나 발해의 가독부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왕으로 책봉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여기면 간단한 이치입니다.”
이참에 견훤이 요동에서 왕으로 임명되었으니 더는 내 자식이 아니라며 내쫓는 것이 베스트기는 하다.
적당히 놀다가 백제 삼국통일을 도우면 그만이다.
“결국 거란놈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라도 왕자가 요동을 맡아야 한다는 뜻이로군.”
“자기들 체면을 지키게 해달라 그것이지요. 영지라 하나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니, 가독부께서도 제게 관직을 내리시면 될 듯합니다.”
거란에서도 왕의 지위를 내리니, 요동 한정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백제왕이 뭐라 하지 않겠는가?”
“야율아보기는 이 외신이 잡았으나, 제 형님에게는 요동정벌의 공을 따로 줘서 이참에 태자로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슬슬 태자로 만들어줘야지. 이번 전쟁으로 또 백제 조정이 한차례 난리가 날 테니까. 장자보다 쓸데없이 공이 높은 넷째왕자는 좋지가 못하다.
능환이 입에 거품무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로 제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나보군.”
“하하하. 가독부께서는 뭘 모르십니다. 왕이 되면 궁에 틀어박혀서 정치나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외신은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정치는 최승우에게 맡긴다고 해도 결국 나보다 먼저 갈 인간이고, 내가 왕이 된다면 역사를 바꾸기 어렵다.
“확실히 요동에 있으면 백제 본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형제들 간의 권력다 툼에서도 멀어질 수 있겠군.”
“그러니 본국에서 거절하기 힘들도록 부담을 주십시오.”
“요나라처럼 높은 자리를 내려달란 건가.”
이미 대인선도 들어 알고 있다. 술율평이 나한테 내릴 지위를 미리 일러준 것을. 그리고 그 관직명에 대해서.
“예.”
“솔직해서 좋군.”
대인선은 전후처리를 위해 상경의 신하들과 중론을 모았다.
일부는 내가 요동을 갖는 것에 심히 우려스럽다고 말을 했다.
결국 백제가 요동진출을 하게 된 격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발해가 지금 말갈 문제도 있고, 큰 피해를 입어 요동을 다스릴 힘이 없다는 것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나는 쐐기를 박았다.
“지원군 6만 5천 중 일본군 2만이 죽었고, 8천의 백제군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 규모라면 당장 고려를 집어삼키고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인데, 발해를 위해 피를 흘렸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는 인정들 하셔야지요.”
“““······.”””
발해와의 협상은 빠르게 마무리 되었다.
서경의 일도 있고, 말갈의 일도 남아있다. 따라서 대인선을 따르는 신하들도 그냥 형식적으로 내게 반발하였을 뿐. 결국 납득하고 국내 수습에 나섰다.
협상을 마무리한 대인선은 신하들과 함께 나를 황성 밖으로 데려왔다.
그곳에는 수많은 백성들. 아니, 포로인가. 아무튼 꽁꽁 포박되어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옷차림을 보니 거란족들인 것 같다. 요나라 병사들도 꽤 되고. 전쟁이 끝나고 민심수습을 위해서 바로 다 잡아들인 것 같다.
어쩐지 전쟁도 끝났는데 병사들이 엄청 돌아다닌다했다.
“잡은 거란족이 이리도 많다는 말입니까?”
가만히 보니까 엄청 잡았다.
어느새 이들을 이렇게나 잡은 건지.
“전쟁에서 낙오한 거란족들에 우리 발해의 밑에서 살아가던 거란족들도 있지.
이들은 모두 야율아보기의 신하야.”
“예.”
그렇겠지. 야율아보기 무서운 인물이다.
발해 안에서 살고 있던 거란족까지 회유하다니.
이렇게 보니 발해를 이루던 민족 중 거란족도 상당히 많다.
대인선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거란족들을 잠시 차갑게 쳐다보더니 곧 내게 물었다.
“내가 이들을 어찌하면 좋겠나?”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건가.
솔직히 나라면 죽일 것이다. 배신자들을 어떻게 믿고 관용을 베풀까.
일단 나한테 의견을 물었으니 솔직한 심정으로 답을 할까.
솔직히 내가 다 요동으로 끌고 가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랬다가는 저 발해인들의 증오가 조금이나마 나에게 향할 것 같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전의 저라면 저들에게 관용을 베풀라 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저들이 최소 중원의 한족이나 고려놈들이었다면 저는 그렇게 가독부께 청했을 것입니다.”
“그럼?”
“생각보다 발해인들의 거란족에 대한 증오심이 너무 큽니다. 또 거란족은 수 없이 고구려와 발해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저라면 이들을 살리겠지만, 가독부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청할 일이 있습니다.”
“말하라.”
“요나라군사들은 자기들 가한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발해에 머물던 거란족들은 폐하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간 주제에 요나라와 내통을 하였으니, 그 죄질이 큽니다. 본래 요나라 군도 저희 연합군이 잡던 자들이었으니 이 외신에게 주시고, 지금 혼란을 틈타서 말갈이 또 이탈할지 모르니 본보기로 그들을 내통한 거란족들을 잔혹하게 벌하시옵소서.”
반반치킨하라는 뜻이다.
내 말에 대인선은 한동안 턱의 수염을 쓸으며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거란족들을 훑어보았다.
“처결을 내리겠다.”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야율아보기 휘하 패잔병들은 금강왕자가 다스릴 요동으로 보내겠다. 그러나 발해의 은혜를 받아 풍요롭게 살던 거란족들의 배신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을 처형하여 우리 백성들의 울분을 풀 것이다.”
발해. 대진. 고려로 불리는 국가의 군주가 내린 지엄한 황명.
그것은 잔혹하고도 자비로웠다.
수많은 거란병사들이 살아남고, 수많은 거란인들이 황성 밖에 피를 뿌렸다.
이 날, 발해땅에 살던 모든 거란족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상경에서 처형당했다. 그 중에서는 죄없는 거란족도 있었으나, 발해인들의 증오를 잠재우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다.
황성 밖에서 벌어진 그 대참사에 대지는 피로 적셔졌으며, 내게 맡겨진 요나라 병사들은 다들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내게 매달렸다.
“백제의 왕자님. 저희들은 왕자님을 따르겠습니다!”
“부디 저희들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얼떨결에 2만에 가까운 요군이 내 수하로 들어왔다.
아마 이들은 그래도 내가 곧 요동의 땅을 받을 몸이니 충성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 본국에 군대를 개선시키고 나면 요동을 지킬 군대가 턱없이 부족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거란족들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너희들은 나와 함께 요동으로 갈 것이다.”
내 말에 요나라군사들은 환호했다.
그들은 요동을 지킬 내 말로서 유용하게 쓰일 거다.
황제 야율아보기도 죽었으니, 충성할 대상도 이제는 없을 테니까 내가 써먹기 지금 딱이겠지.
야율도욕(야율배)나 야율요골(야율덕광) 둘은 아직 황제도 아니고 후계자 후보일 테니 이놈들이 갈 곳은 나 밖에 없다.
상경에서 일을 마치고 요동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게 내려진 지위가 무엇일까?
-요동도독 요국군왕 부여금강.
-요주도독 조선군왕 부여금강
요국군왕은 대인선이 약속한 지위, 조선군왕은 술률평이 약속한 지위다.
참 관직도 이렇게 서로 까려고 한다.
특히 대인선은 술률평이 내린 ‘조선군왕’을 보고 씩씩거리며 요나라를 까기 위해 요국군왕으로 했다.
그래도 대인선은 사정이 나은 편이지.
술율평은 지 남편을 죽이고 요나라 주력군을 궤멸시킨 원수에게 딸까지 시집보내는 치욕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요동도 백제의 군사를 보내 우선 손을 봤다.
요동의 요나라군은 술율평이 명을 내린 건지. 백제군에게 요동의 성들을 넘겼다. 이것으로 요와의 국경은 요하가 되었으며, 발해와의 국경은 부여부가 되었다.
"와"
요동성에 올라 저 드넓은 요동벌판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감회가 새롭다.
정말 요동을 그리도 그리워하던 공민왕이나 우왕이 이 장면을 어떻게 생각할까.
“근초고대왕께서도 얻지 못한 요동을 왕자님께서 얻어내셨습니다.”
상애는 내 얼굴에 침이 튈 정도로 열심히 칭찬했다.
요동에 백성들도 꽤 있었다.
어쨌든 요나라 입장에서는 명분상, 신하에게 영지를 내린 격이다. 백성들을 굳이 이주시킬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어느새 벡제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고 있다.
일본군들도 그냥 따라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멍청이들. 그래도 분위기를 고양시키기에는 충분하다.
“보아라! 자랑스러운 백제의 군사들이여! 옛 조선의 땅이 마침내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너희들이 피흘려 얻은 선조들의 땅이다! 나는 이 땅을 시작으로 백제의 깃발 아래에 너희들과 함께 조선과 부여의 강역을 회복할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병사들도 제법 이 분위기에 심취했다.
백제와 고구려는 한 뿌리의 나라. 당연히 백제도 요동에 관심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이 병사들은 단순히 땅이 넓어졌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나는 지금 가슴이 웅장해졌다. 반도의 남쪽 마한땅에만 자리 잡고 티격태격하던 그 작은 후백제가 맞나?
이 모든 것이 전부 내 덕이다.
조금 자만 정도는 해도 되겠지.
“왕자님. 신검왕자님이 당도하셨습니다.”
요하에 나가 있던 신검이 돌아왔댄다.
이번에 신검은 정말 뒤에서 뒷짐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저 새끼는 답이 없다.’
그러니 원역사에서 한방 싸움으로 어이없이 밀렸지. 견훤을 쫓아냈으면 민심이라도 잘 수습해야 하는데, 고려군에 견훤이 함께 한 것만으로도 후백제군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러니까 내가 결국 재상이 되어야 한다.
권력욕과는 다르다. 후백제가 내가 편히 살 수 있는 헤븐백제가 될 수 있도록 기반을 전부 마련해야 한다.
그 추가 요동이 될 것이다.
이 요동을 시작으로 발해와 요나라의 분열을 이용해서 점차 세력을 넓히고 남하하여 고려를 무너트려야 한다.
그 전에 신검부터 적당히 손을 써놔야겠지.
“형님 오셨습니까?”
“오면서 관흔장군으로부터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 지위를 받겠다고?”
신검도 이미 다 아는 눈치다.
보지 못한 사이 많이 초췌해졌다.
요동을 점령하지 못했으니, 저럴 만도 하다.
“어차피 형식적인 지위일 뿐입니다. 이참에 제가 아버님께 청해서 요동을 영지로 받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해관계에 따라 견훤은 내 지위를 인정하고 요동의 도독으로 삼을 수 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형님. 아직도 형님과 저를 쳐다보는 눈이 좋지 못합니다. 형님도 이제 태자가 되실 때가 되었습니다.”
더 나이먹기 전에 태자가 되고 왕이 되어야지.
“그래서 너는 요동에 남고 내가 남아서 태자가 되라 이 말이냐?”
“예.”
“하지만 말이다. 솔직히 나는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다. 내가 아니라 오히려 네가 더 태자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겠느냐.”
이거 또 삐졌나보네.
아니면 내가 거란을 전부 잡아먹으니까. 걱정이 되는 건가. 공을 크게 세웠으니 말이다.
“후, 형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진짜. 형님은 이 나라의 장자입니다. 정통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요동공략도 해내지 못했다.”
그래. 빈집털이도 못한 너는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심지어 피해가 적은 것을 보니 적당히 때리다가 힘들어서 뺀 것 같다.
이놈은 절대 왕으로서 그릇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