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40화 (40/154)

40. 역사에 남지 않을 밀약

* * *

거란의 대군이 마침내 일본과 발해의 군대가 배치된 길로 대오를 맞추어 나타났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다.

“지금이다. 지금!”

“구포와 주화를 쏴라!”

쾅! 쾅쾅! 퍼엉!

“이건 대체 무슨 소리야?”

“뭐,뭐야, 대체 이게 어찌 된 끄아아악!”

“사. 사람살려!”

콰앙! 퍼엉! 꽝!

“화살을 쏴라! 바윗덩어리를 굴려라!”

우지끈! 콰직!

“빌어먹을! 부여금강! 사내란 자가 어찌 한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인가! 자.

잠깐, 저건 대체 어느 나라의 깃발이냐?”

저 앞에서 무어라 떠드는 놈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활을 들고 놈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갔다.

자칭 황제라고 하는 야율아보기의 곁에는 황후 술율평이 나와 똑같이 활을 잡고 있었다.

과연 술율평답다. 나는 개인적으로 저 여자가 없었으면 정말로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이기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디 까지나 가정의 하나지만.

“네 놈이 야율아보기렸다!”

나는 일본어로 놈에게 소리쳤다.

내 휘하에 있는 일본군도 야율아보기의 이름을 일본어로 부르면서 요나라 군사들을 공격했다.

“백제놈이 아니었던 건가? 그러면 대체!”

“발해에는 동맹국이 백제 말고도 일본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럼 일본놈들이라고? 젠장. 어쩐지 뒤가 찜찜하더라니! 당황하지 마라! 앞을 뚫어라!”

잽싸게 대오를 수습한 요나라 군대가 기병을 앞세워 앞을 뚫으려 하였으나, 그들을 막는 군대가 있었다.

“철천지 원수 거란놈들을 죽여라!”

“우리들의 부모형제를 죽인 거란놈들을 도륙하라!”

오로지 거란족에 대한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군대가 그들의 앞에 섰다.

“젠장 발해놈들까지! 백제놈들은 뭐하는 것인가!”

“기억 안 나십니까. 이미 금강이 군대를 요하까지 물리고 우리가 철군을 하는지 감시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젠장. 뭣들 하느냐! 뚫어라! 발해놈들을 모조리 죽이란 말이다!”

한바탕 혈전이 벌어졌다.

지금껏 패배만 각인된 자들의 불타는 복수심이 원한이 되어 요나라군에게 천벌을 내렸다.

발해군들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서로 고기 방패가 되어 거란군을 막는 한이 있더라도 길을 막았다.

발해군이 막는 덕에 일본군의 화살들이 요나라군을 맞추기 수월했다. 당연히 구포와 주화의 공격도 그들에게는 치명타였다.

슬슬 야율아보기를 저격할까.

쉬이익!

활의 시위를 당겼다.

“저런 미친 놈. 저 거리에서 나를 맞추겠다고? 컥!?”

“폐하! 폐하!”

오, 반만 죽여두려고 했는데, 정확히 목을 꿰 죽여버렸다.

이 정도로 죽어버리면 너무 싱겁다. 20만이 넘는 병사를 끌고 와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내가 물어뜯지만 않았어도 요나라는 지금 즈음 발해를 집어삼켰을 것이다.

전쟁 자체는 상당히 짧았으니까.

아니, 이 세계에서도 야율아보기가 대인선 제대로 잡겠다고 시간을 들이지만 않았어도 발해는 멸망했을 것이다.

술율평은 죽은 야율아보기를 안은 채 울고 있었다.

보아하니, 일본군도 제법 피해를 보고 있다.

전투로 단련된 거란군이다. 기습이라도 일본군이 다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대로 싸우면 군사가 양쪽 다 몰살될 수 있다.

“거란의 가한 야율아보기가 쓰러졌다! 항복하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

일단 적들에게 형식적 항복을 권유했다.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복수하라! 일본놈들에게 피의 복수를!”

그런데 오히려 놈들을 도발한 것인지, 개거품을 물고 덤벼들었다.

저, 미친놈들. 그렇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다 죽여줘야지.

이 정도면 나도 이판사판이다.

“뭣들하냐. 죽여달란다. 발해놈들아! 너희들의 복수심은 고작 그 정도냐? 저놈들을 찢어발겨라! 너희들의 뒤에는 우리 일본과 백제가 있다!”

야율아보기가 죽었으나, 거란놈들은 독종이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싸웠다.

아주 피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사방에서 계속 싸우면서 시체만 늘어났다. 그래도 거기까지다.

미친 듯이 덤벼대는 발해군과 압도적인 무기는 이기지 못한다.

한참 격전이 치러지면서 요군이 무너지자, 술율평이 죽은 야율아보기를 눕히고 일어났다.

“그만하라!”

사실상, 지금 요군에서 황제가 죽고 2인자라 할 수 있는 술율평이 명령을 내리다.

“황후폐하!”

“이 즈음 하면 되었다! 페하께서 승천하셨다! 이곳은 적진이고 우리가 싸워봤자 무엇을 얻겠느냐!”

“어머님! 복수를 해야 합니다!”

역관의 말을 들어보니 복수를 하겠단다.

어린 새끼들이.

내가 야율덕광에게 활을 겨냥하자, 술율평이 야율덕광의 손을 쳐 칼을 떨어트렸다.

“요나라가 무너질 수도 있다! 어리석은 소리하지 말거라!”

“큭!”

“항복할 테니, 더는 무의미한 살생을 금해주시게. 우리는 이미 백제와 약조를 했네. 그러니 이제 그······.”

진작에 그랬어야지.

“항복을 하려 했으면 하랄 때 했어야지. 뭐하냐. 살려둘 필요 없다. 발해인들이 한을 풀게 해줘라.”

술율평이 항복을 하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죽은 황제를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놈들을 잡아야만 했다.

그리고 황후의 명령에 무기를 내려놓던 요군을 향해 당연히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한참 후에 요의 황족, 귀족들과 그래도 끝까지 항복을 청했던 자들만 살려뒀다.

그래도 수만에 이르렀으니 많이 살려둔 것이다.

* * *

요나라의 포로들을 전부 백제군에게 보낸다는 명분 아래에 술율평만 잠시 떨어트려 나와 독대하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해야 속이 후련하신가?”

그녀는 당장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부여금강. 당신이 이번 일을 꾸민 것을 잘 알고 있네.”

오? 내 정체를 단번에 알아채다니. 과연 술율평.

하기야 전투가 터질 때부터 나를 빤히 바라보더라니. 뭔가 느낀 것이 있었겠지.

알고 있으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

나는 가면을 내리고 그녀를 쳐다보면서 마음껏 웃었다.

“하하하핫! 역시 요나라 최대 건국공신 답소이다. 하지만, 낚인 것은 결국 그대가 아니시오?”

“국가 간의 신의가 중요하거늘. 어찌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걸 거란족이 말하다니, 설득이 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은혜도 모르는 오랑캐들 따위에게 신의를 지켜줄 필요가 있는가? 천손의 나라를 침범한 죄는 당연히 죽어도 할 말이 없지. 심지어 예맥을 거스르고 감히 결사항전이라느니 협박이나 한 주제에.”

남의 땅에 들어와서 그런 협박질이나 하는데, 살려줄 이유가 있나. 더군다나 살려두면 역시 뒤가 찜찜해. 그리고 주력군을 궤멸시켜놔야 발해와 백제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요나라의 멸망인가?”

“그 요나라를 원하오.”

“뭐라고? 조금 전까지 신의 어쩌니 하였으면서!”

“당연히 예맥을 따르고, 예맥의 천하질서를 따르겠다면 다스려줄 수야 있지.

그래서 내가 야율덕광과 태자를 살려둔 것이니까.”

물론 대놓고 내가 요나라의 황제가 되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술율평은 원 역사대로 섭정을 하게 될 것이고. 야율도욕이나 야율덕광 중 한 명이 황위에 오르겠지.

“하.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거라 생각하나?”

“이거 왜 이러십니까. 당신은 지아비를 내게 바쳤고, 나는 그 기대에 부응했지. 공범이라는 뜻이오.”

“어떻게 그런 무례한 말을!”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 그럼 이제 요나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아마 거란의 거지같은 풍습상, 순장을 치를 테고, 황후와 후궁들도 따라 들어가겠지? 당신은 들어갈 수 있는가? 죽은 남편의 곁에서 그 생을 마감할 것인가? 솔직해지지 그러십니까?

당신은 이렇게 멈출 여인이 아니지. 요나라에서 권력을 쥐고 싶지 않은가? 결국 당신은 자기 남편을 잡아먹으면서까지 요나라로 돌아오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하. 그걸 말이라고.”

“당신은 누군가가 ‘황후께서는 선황제의 능에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자기 팔을 자르면서까지 나는 요나라를 위해 할 일이 있다고 할 여인이야. 아닌가?”

“그래.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 것이 무섭기는 무섭다.

“당신이 권력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그래. 네 놈은 그 말을 원하겠지. 허! 자식뻘한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니.”

점점 말투가 경박스럽게 변한다.

“뭐 어쨌든 협상은 그대로 갈 것입니다. 국혼은 치러주지.”

“욕심이 가득한 인간말종이로구나.”

그걸 누구 입으로 말하나.

“피차일반 아닙니까? 태후”

“내 남편을 죽인 자를 사위로 맞이해야 한다니. 황녀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자와 결혼을 해야 한다니.”

개소리지. 나한테 보낼 황녀가 마땅히 없는 주제에.

그래도 권력에 욕심이 나는 그녀라고 해도 양심은 찔리나보다. 그래도 이미 늦었다. 술율평은 원 역사와 달리 권력을 가지기 위해 발해땅에서 백제왕자와 공모하여 남편을 죽인 여자가 되었다.

이 정도면 측천무후급이 아닌가. 훗날의 사가들은 그렇게 평할 것이다.

“정 그러시면 장자인 신검과 국혼을 하던가.”

“그 요동공략에 실패했다는 반푼이 말이냐?”

“원수한테 딸 주기 싫으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뭐 신검은 내가 태자로 밀어붙일 테니 백제의 왕이 될 수도 있는데.”

그 과정에서 견훤이 허락해야 가능한 거지만.

“하. 그런 말이라면 듣지 않도록 하지. 원수라도 능력있는 놈을 사위로 골라야지 그런 놈을 고를 수는 없지.”

“그럼 태후. 우리 협상이 밖에 알려지면 곤란하니 입을 잘 맞춥시다.”

술율평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서로 입을 맞춰 이번 전투는 발해의 동맹국 일본군이 도와 요나라를 패퇴한 것이 되고 백제와는 무관한 것으로.

일본과 백제는 항로가 같아 함께 사이좋게 상륙했을 뿐이고 서로 독립된 군대였다고.

일본군은 백제가 협상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자기들 공을 위해서 요나라군을 패퇴한 것 뿐.

그렇게 백제왕자의 차림으로 갈아입고 일본군에 잡힌 요나라 포로들을 구해주는 것으로 대충 계획을 짰다.

“그럼 선황제의 시신은.”

“양심적으로 머리는 잘라서 가독부에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그건.”

“그래야 발해가 만족하고 보복도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주력군을 잃은 요나라군은 발해의 자그마한 보복에도 나라가 흔들리는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

“하. 어쩌다 이런 망나니한테 걸려서.”

“그러게 괜한 욕심을 부리신 겁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이번 발해원정도 사실 뒤에서 태후가 밀어붙인 거 아닙니까?”

술율평이 움찔거렸다.

척하면 척이지. 표정이 다 말하고 있다.

“그래도 시신은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좋습니다. 대신에. 협상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것으로 합시다.”

대인선도 한껏 시체능욕을 하고 나면 시신을 돌려주는데 합의 할 것이다.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망나니 같으니. 다만 국혼 문제는 백제왕과도 협의를 해야 할 것이네.”

“그리하지요. 하지만 이 시간 부로 요동은 제 영지로 삼겠습니다.”

“후우우.”

술율평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많이 살리지 않았습니까?”

“말이나 못하면.”

술율평과의 협상은 끝이 났다.

남은 요나라군은 3만이다.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많이 살린 격이 아닌가.

지금 살아남은 요나라군은 속사정을 모른다해도 결국 황후 밑에서 모두가 한 통속이다. 원 역사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야율아보기 멍청이가 황족들을 비롯한 수많은 신하들을 함께 끌고 온 탓에 이번 패배는 요나라의 완전한 패배였다.

그 수치를 감추려면 결국 다 함께 공범이 될 수밖에 없다.

술율평과 그 자식들, 황족들도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요나라로 갈 때까지는 별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무사히 철군하는 요군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요나라는 국상을 치르고, 완산주로 사람을 보내겠지.

그럼 이제 발해와도 협상을 해야 한다.

대인선이 살아남은 이상 서경의 분조와 협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수레에 실린 야율아보기의 시신을 슬그머니 내려다봤다.

“설마 이런 식으로 죽을 줄은 몰랐습니다. 과연 신궁이십니다.”

“상애장군은 갈수록 아부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이 시신을 가지고 상경으로 가야한다.

작가의말

이름

야율도욕(거란식)=야율배(중국식)

야율요골(거란식)=야율덕광(중국식)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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