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38화 (38/154)

38. 술율평의 선택

* * *

빌드업을 했으니 이제 좀 뻔뻔하게 가자.

요동땅을 먹어야지.

“그보다 전후의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생각보다 요동에서 많은 백제군이 죽었습니다. 사실상, 이 전쟁에서 야전의 승리는 우리 백제가 담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이 죽기는 했다. 요동을 우리가 완전히 점거하지 못했으니까.

사실상 공략실패가 아닌가.

아마 수천이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음 계속해보게.”

“그렇다고 지금 형편상 전후에 발해는 우리에게 마땅히 줄 보상이 없습니다.

신라와 저 왕건의 고려를 멸망시킬 때, 발해의 군사적 지원도 어렵겠죠.”

대인선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니까.

이번 전쟁이 끝나면 발해는 예전 같은 국력을 되찾기 힘들 것이다. 무왕이나 선왕급 군주가 나온다 해도 나라를 수습하는데 모든 역량을 다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군사적으로 우리를 지원할 수 있을까.

결국 땅 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에게 줄 것은 고작해야 땅덩어리다.

심지어 자기들 힘이 아니라 백제의 힘으로 회복한 땅을 주는 거니 명분도 그럴 듯하게 갖추고 있다.

“혹시 땅이라도 원하는 건가.”

“예.”

“후우, 뭐 그래 그만큼 공을 세워준다면 못 줄 것도 없겠지. 요동이라도 바라는 것인가?”

이미 대인선은 군주로서 상당히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당장 나라의 명맥만 이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요동을 주어도 괜찮다 여길 것이다. 백제군이 6만이나 되니, 전후에 그 군대가 이 땅에서 다시 발해를 상대로 전쟁을 걸면 대인선은 막지 못할 것이다.

“네. 이곳 요동 반도에서. 정확히 말하면 이 전쟁 전까지 거란이 점유했던 요동을 바라고 있습니다.”

“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데.”

“어차피 발해가 지금 요동을 관리할 여력은 안 되지 않습니까?”

남은 군사도 지금 나라를 지키기 힘들면서 요동을 지킨다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거야.”

“대신 청야전술로 박살 난 발해의 인프라를 위해 식량은 지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인프라?”

“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이 정도는 나쁜 조건은 아닐 것 같은데.”

이미 국운이 기운 나라의 명맥을 잇게 해주는 대신 땅을 조금 얻는 것이 뭐가 그리 잘 못된 것이란 말인가.

달라는 대로 내놓을 것이지.

말갈의 이탈도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닌가.

“일단 전쟁부터 끝내지. 그래야 요동을 주던 말던 할 것이 아닌가.”

“예.”

대인선은 한숨을 쉬며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길로 다시 떠나는 겐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도록 부여부까지 달려가 결전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림새를 보아하니 알 것 같네. 그럼 잘 부탁하지. 우리 대진국을 부디 형제로서 도와주시게.”

“예. 폐하.”

미래에 백제의 땅이 될 곳을 내가 버려둘 리가 있겠는가.

전후에는 말갈의 문제도 남아있다.

발해가 약화된 것은 결국 말갈의 이탈도 있으니까. 그 말갈도 나중에 손을 봐둬야 백제가 통일 후, 만주까지 먹는데 수월할 것이다.

새로운 러브콜을 받은 것은 부여부로 돌아갈 무렵이었다.

중간에 서경에서 올라오는 한 발해의 병사를 만난 것이다.

“너는 서경에서 올라오는 병사인가?”

“예. 왕자님. 아국의 태자전하께서 서신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군.

아무래도 이번 전쟁은 하늘이 우리 백제를 돕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가는 길에 태자의 서신을 가진 전령과 만날 수 있었겠는가.

부여부에서 나는 전령으로부터 대광현의 의중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권력을 확실히 탐하려는 것 같고? 정확히 네 주인이 원하는 바를 말하라.”

“태자께서는 거란과의 전쟁 후에 지지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만 해준다면 대동강 이남의 삼국을 통일하는 것을 돕겠다고 천명하셨으니, 왕자님께서는 부디 태자전하의 대업을 도와주십시오.”

흠, 대광현이 제법 권력을 탐하는 구나.

“내가 서신을 하나 적어줄 테니 더 좋은 조건을 가져오라 이르게.”

“예? 예!”

잘하면 이거 대인선과 대광현 사이에서 꽤 좋은 것을 얻을지도 모른다.

전령이 내 서신을 받고 나가자 상애가 찝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차라리 거란의 병력을 보존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닙니까?”

“무슨 말입니까?”

“야율아보기를 눈앞에서 농락하지 않았습니까. 또 그 자리에 있는 거란 지휘부 모두가 보았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요.”

어, 그렇지. 이제 그놈들도 나의 무서움을 똑똑히 알 것이다.

아니, 잠깐.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오, 그러고 보니 상애 장군은 그런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봅니다?”

보통은 놀라지 않나?

눈 앞에서 사람이 칼에 맞앗는데, 죽지도 않고 오히려 두 손으로 잡아서 부숴버렸다. 당장 거란놈들도 놀라워했는데 이 양반은 아니다.

“그야, 마한패왕이시니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항우도 수천의 병력으로 유방의 대군의 포위를 뚫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로 끝입니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왕자님께서 칼을 맞고, 화살을 맞으셔도 살아남는 것은 패왕으로서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나와 함께 다니더니 미친 것이 분명하다.

“그나저나 거란의 군대를 보존한다라. 확실히 이대로 가면 지들도 전쟁이 불리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음, 놈들을 보아하니 그저 항복할 것 같지는 않고. 아마 퇴로를 열어주지 않는다면 결사항전을 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퇴로를 열어주면 확실히 야율아보기는 한동안 요하를 넘어 발해를 공격하지 않고, 중원으로 눈을 돌리겠지.

그것만으로도 일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지만, 만일 거란이 중원정벌에 성공하기라도 한다면 위험하다.

내가 그렇게 둘 생각은 없지만.

“이거 잘하면 거란과도 협상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라. 놈들은 지금 내가 이끄는 백제군을 두려워할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죽지않는 이상한 놈인데. 내가 이끄는 병사가 6만이 넘는다.

그 6만이 동진이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애초에 나와 전면전을 하기도 두려울 것이다.

야전에서 밀린다고 해도 내가 미친 듯이 달려가 거란 지휘부의 목을 딸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요가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겠지.

요동을 달라고 해볼까.

“왕자님! 유금필 장군과 관흔 장군이 장령부와 막힐부를 해방시켰다 합니다!

그 두 부에서 거란과의 전쟁에 군사를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속속 괜찮은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나쁘지 않군.”

점점 우리 쪽으로 승세가 기울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가두리 양식이 되어버린 야율아보기의 군대 뿐.

* * *

금강이 상경을 어서 점령하라는 일방적인 협박을 한 이후, 야율아보기를 비롯한 요군은 쉽게 상경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대체 금강의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폐하! 막힐부와 장령부가 백제군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부여금강. 이 빌어먹을 놈. 빨리 상경이나 점령하라는 건가!”

상경을 점령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거란군을 갉아먹겠다는 수작이다.

혹시 이대로 저 금강이 서진이라도 해서 거란 본토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상경을 점령해도 문제입니다. 금강의 말이 사실이라면 서경의 태자도 군을 이끌고 북상할 것이라는 의미인데.”

“결국 금강과 발해의 태자에게만 좋은 일이 아닌가?”

이도저도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백제군과 결전을 치르시지요. 그놈들을 무찌르면 발해도 더는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황자 야율덕광이 격분하여 차라리 백제군과 결전을 치를 것을 각오하였으나,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죽지도 않는 그 금강을 상대로 결전을 치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자신들 눈으로 본 것이 진실인가.

혹여 그 금강이라는 자가 어떤 악귀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니, 그렇다해도 그것도 문제가 아니겠나. 아무튼 그런 자의 군대와 결전을 치르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야율아보기의 곁에서 계책으로 거란의 전성기를 일으켰던 술율평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 그 금강이라는 자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기는 했다. 보면 알 수 있다. 적진에 와서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나. 마치 정말로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 모습은 정말로 그 자가 보통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발해를 계속 건드렸다가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금강에게 명분을 더 주기 전에 철군하는 것이 실리를 취하는 길이다.

술율평은 제 주인을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철군을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황후. 무슨 소리오?”

“어차피 이번 전쟁으로 발해는 다시 요동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될 것입니다. 결사항전해서 백제군과 발해에 더 큰 피해를 입히기 전에 태자와 안전한 철군을 요구하십시오. 그러면 될 것입니다.”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말하는 격이다.

“이 전쟁을 여기서 끝내자는 말씀이시오?”

“상경은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지금 보아하니 부자간이 권력다툼을 하는 것 같으니 내버려 두는 것이 우리로써는 더는 동쪽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발해를 점령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대인선과 대광현이 왕권을 두고 다 투게 되면 굳이 더 힘을 쓸 필요가 없다.

이미 충분히 타격을 주었고, 발해의 힘이 약화됨에 따라 말갈 역시 들고 일어날 테니까. 그렇다면 나중에 백제가 철군하고 훗날 집어삼켜도 될 일이다.

“하아. 결국 이리 되는가.”

“설령 그 자가 신묘한 수로 죽지 않았다고 해도 6만이 넘는 병력은 결코 무시할 만한 병력이 아닙니다. 분산된 발해군이 합류한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야율아보기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완전히 발해를 손에 넣고 싶었다.

어쨌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라 하나, 야전에서 백제와의 전투에 밀려버렸으니, 거란족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얼마나 많겠는가.

“문제는 왕자가 요동을 바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때야말로 정말로 결전을 치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얻은 요동인데 그것을 넘길 수 있다는 말인가.

절대 불가하다. 요동은 거란의 땅이다.

“요동을 두고 태자와 거래를 하자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그때는 그냥 요동을 넘겨주는 것도 하나의 묘수가 될 것입니다.”

술율평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야율아보기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왜 요동까지 줘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황후가 이렇게 까지 말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격분할 일이 아니다.

머리를 차갑게 식혀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금강은 이상한 수를 쓴 것이 분명하다. 혹시 아는가 산신령의 도움이라도 받았을지.

그래도 역시 6만이란 백제군을 무시할 수 없다.

“요동을 주라니. 그놈들이 다시 발해에 넘길 것이 아니오?”

발해에게 다시 돌려주면 그간 피를 흘린 거란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금강이라는 자는 분명히 요동을 노리고 있습니다. 요동으로 타협을 볼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 우리의 목적은 중원입니다. 저 동쪽의 발해도 큰 나라지만 중원에 비하겠습니까?”

어차피 이제 발해는 국토도 청야전술로 망가졌고, 정예군도 무너져 내렸다.

저 상경에 있는 군대가 버티면 얼마나 버티겠는가.

그러니까 지금은 빠지는 것이 최선이다. 원하는 것을 금강에게 넘겨주어 발해와 내분을 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그럼 그 자칭 천자라고 말하는 놈에게 사람을 보내야 하는 것인가.”

거란족을 통합한 이례, 지금까지 승승장구해왔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뒤를 얻어맞을 줄이야. 그것도 하필이면 발해도 아니고 저 남쪽의 작은 나라 백제에게 당해버렸으니 웃기는 일이다.

일본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던 야율아보기는 백제를 다시 보게 되었다.

분명 원수가 될 나라지만, 대체 그 작은 땅과 인구에서 그만한 병력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것인가?

“그 폐하. 백제가 사실 머릿수는 꽤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듣자하니 저 삼한의 남쪽은 기름진 평야일대가 있고, 삼한 중에 가장 풍요롭다고 하니 사람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려도 그 정도는 되는 것이 아닌가?”

이거 어쩌면 고려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 되려 후회가 되는 짓이 아니었을까.

고려와 군사적 동맹을 맺었다면 고려가 서경을 압박해주었을 것인데.

이제 후회하면 무엇할까. 고려의 문제는 나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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