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이판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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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조로 이참에 왕권을 노리는 대광현과 그 신하들의 행동에 대봉예는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전후에 백제가 땅을 떼어달라고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전에는 백제가 대동강 신라땅을 통일하는 것을 우리 발해가 돕는 대신 평양성까지의 땅을 준다하였습니다. 우리가 반대로 내놓게 될 것입니다.”
“대동강 이남의 땅을 모두 백제 영토로 인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말이 쉽다.
본래 사람은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른 법이다. 심지어 백제다. 이번 전쟁을 주도한 백제가 그걸로 만족하겠는가.
“그 정도로 만족하겠습니까? 지금 백제가 끌고 온 군대가 6만입니다. 전후에 그들과 싸우면 우리가 이긴다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통일을 돕겠다고 설득을 해도 이 전쟁이 끝난 이후 백제의 대동강이남 통일을 우리가 도울 수 있겠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백제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전쟁을 하려 들것이다.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백제가 만족할 만큼 백제를 지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상보다도 거란군의 규모가 큰 탓에, 발해군의 피해도 크다. 그 때문에 고려의 후방을 괴롭히던 말갈군도 전부 거란과의 전쟁에 들어갔다.
그럼 전후에 백제가 무엇을 바랄까?
“공. 그럼 백제는 어디까지 원하겠습니까?”
“백제가 왜 후방인 요동부터 취하려 했겠습니까?”
“그야 거란 본토의 지원을 막고자함이 아니겠습니까?”
대봉예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거란을 막기 위해서라면 막힐부와 장령부의 군대만 무찔러도 된다.
“그랬으면 막힐부와 장령부의 거란군만 잡아도 될 일입니다. 거란군은 지금 총력전을 펼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총력전인데 거란에서 넘어올 병사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그들이 요동땅을 원한다는 말입니까?”
“요동에 있던 소고구려의 땅은 줘야 할 것입니다.”
그 정도는 내놔야 한다.
아니, 아니라면 거란이 초기에 점령한 요동땅은 모조리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전쟁이 끝난 후에 백제군이 얼마나 남겠습니까?”
“그러기를 바래야 합니다만, 최악의 경우는 항상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저들을 이용하는 것 뿐입니다. 공께서는 걱정이 지나치십니다.”
장군 신덕은 고개를 저었다.
“음, 과연 이것이 내 단순한 걱정일지는.”
가만히 지금 서경의 꼴을 보고 있으려니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 지경이다.
나라가 위험하다. 국난이다. 상경이 바람 앞의 등불이란 말이다.
가독부가 이럴 때를 대비해 서경에 분조를 차렸다고는 하나 희망이 보이면 응당 지원군을 내야 했다.
권력을 취하려 해도 일단 전쟁이 끝난 후가 아닌가. 나라가 없으면 권력이 무슨 소용이라는 말인가.
‘차라리 이럴 바에는 금강왕자에게 나라를 갖다 바치는게 낫겠군.’
거란같은 원수에게 발해를 넘길 수는 없지만, 백제는 그래도 그 뿌리가 과거의 백제와 고구려로 이어지니 백제에 나라가 넘어간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적어도 저렇게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나약한 대광현이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이대로 라면 전후에도 나라는 갈라져 버릴 것이다.
회의가 끝나자 대봉예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이제 발해는 끝인가.”
지금 거란보다 더 중요한 건 내부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의 서신을 금강이 보낸 수하에게 넘겼다.
“이것이 서경의 분조에서 내린 최종결정이라고 전하게.”
“예!”
이제 이 나라의 운명은 거의 다 된 듯 싶다. 정말 최악의 경우 나라를 보전하기만 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대봉예의 한숨은 날로 늘어만 갔다.
* * *
대봉예가 보내온 서신을 보고 나는 손과 발이 부르르 떨렸다.
대광현. 이 인간이 물건은 물건이다.
발해를 멸망하게 만들 물건말이다. 이렇게 되면 발해 천하가 온통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이 작자가 드디어 미쳤나. 지 아비가 지금 죽을 수도 있는데, 가만히 있겠다고?”
“우려하던 대로입니까?”
장수들도 허탈한 표정이다.
아무렴. 이대로라면 우리 군대만 다 힘빠지게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대광현이란 자의 속을 알 수가 없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나라가 망하면 왕위고 뭐고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신하들에게 넘어간 거겠지.”
“그러고 보니 거란에게 요동이 넘어간 것도. 다 권력다툼 탓이 아닙니까?”
발해가 멀쩡했으면 거란이 그리도 쉽게 요동을 침식할 수 있었을까. 아니지.
“예. 권력다툼으로 나라가 위기니 거란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거지요. 그런데 정신을 못차리는 꼴이라니.”
“그러니 권력자들이 무서운 겁니다 한줌의 땀이라도 좋으니 왕 행세를 하고 싶다 이런 거죠.”
권력에 집착하면 결국 그렇게 되는 거다.
대광현의 경우에는 아마 신하들에게 더 휘둘리는 것 같지만. 신하들에게 휘둘려 왕위에 오르는 놈이라면 차라리 왕자의 자리를 내놓는 것이 좋다.
“대광현을 설득하는 건 무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도 모르겠다.
“대봉예는 우리가 막힐부와 장령부를 먼저 탈환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그 앞에 있는 거란놈들을 격퇴하여 동맥경화를 뚫어달라는 거겠지.
“허. 그 분은 대광현편이 아닙니까?”
“오히려 질려하는 것 같던데.”
아마 서경까지 따라간 걸 보면 대봉예는 대인선의 명을 받았다던가. 또는 대광현을 보좌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저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로 대광현 파벌이 되려한 것은 아니겠지.
적어도 내가 볼 때, 그 인간은 직접 나설 만한 깡도 없고, 최소한 왕권에 도전하거나 나라가 망하는 걸 바라는 인간은 아니다.
“그런데 당장 상경으로 달려가라는 말이 없는 것이, 혹시 대봉예도, 사실 상경이 함락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까?”
“으으음.”
솔직히 역사가 바뀌었고, 상경이 함락되어도 서경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상경이 함락되어 발해가 멸망했어도, 부흥운동으로 순식간에 많은 영토를 회복했다.
“막힐부와 장령부에 남은 거란군은 얼마나 됩니까?
”총2만입니다."
“아직도 상경을 함락할 병력은 남아있겠군.”
어디서부터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
“미쳤군. 내 그림이 망가졌어. 유금필, 관흔 장군. 두 분은 기병 1만씩 데려가서 막힐부와 장령부의 거란족들을 소탕하십시오.”
“예. 왕자님.”
“대봉예가 굳이 막힐부와 장령부부터 해방하라는 것은 다시 말해 그도 상경이 점령될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 이 부여부에서 패잔병들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예.”
이미 속속 부여부로 패잔병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숫자는 1만. 꽤 모였으나 여전히 거란군에 비하면 열세다.
아마, 그래서 대봉예는 상경이 점령당할 각오를 하고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다.
막힐부와 장령부가 해방되면 그곳에서 또 군대를 끌어모을 수 있다. 서경에서 보내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실패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관흔 장군. 화약도 야율아보기의 본대에만 쓸 것이니 두 분다. 개인의 역량으로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피해를 최소화 하라시면.”
“이번에 노획한 거란군의 갑옷이 많습니다.”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설마 거란군으로 위장하고 그들의 뒤를 치라는 말씀입니까?”
“예.”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인가. 21세기라면 핵이라도 써서 상대를 줘패야 할 판이다. 심지어 거란군의 갑옷이 이렇게나 많은데 안 쓸 수는 없지.
“지금 발해의 국운이 한치 앞도 모르고 우리도 남의 전쟁에 들어와 피해를 줄여야 하는데 이것저것 따져야 합니까?”
““예. 왕자님!””
일단 두 장수에게 군대를 맡겨 보냈다.
그런데 여전히 상경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포병들을 동해를 통해 상경으로 보낼 걸.”
아니다. 잠깐, 아직 방법이 있다.
“왕자님. 무엇을 그리 고민을 하시는 지요?”
“야율도욕을 써먹겠습니다.”
“야율도욕으로 조금이라도 진격을 늦출 생각이시군요.”
정확히 말하면 야율도욕은 명분일 뿐이지만, 이제 상애가 제법 내 눈치를 볼줄 안다.
“이제 상애장군도 제법 나를 잘 아십니다?”
“하하하. 이 몸 왕자님을 곁에서 뫼신지 몇 년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왕자님이 어떻게 하실지 잘 알지요.”
이제 찰떡같은 말을 개떡같이 잘 알아먹는다.
“시정잡배짓 좀 해봅시다. 야율도욕으로 한 번 시간을 끌고 그 사이 막힐부랑 장령부를 얻어야 합니다.”
“대백제국의 위상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위상이라니. 발해를 구하는 일에 위상이고 나발이고 필요한가.
“위상? 우리가 먹어야 할 발해땅이 거란에게 넘어가게 둘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하시지요.”
“우리 위대한 예맥민족에게는 거란과 같은 족속에게 더는 지켜줄 신의 따위는 없습니다. 야율아보기도 야율도욕이 우리에게 잡혀있음을 알 것입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진군속도가 느린 걸지도 모르지.”
나름 선민사상이라는 거다. 실제로 은혜도 모르는 거란족 따위에게 뭐하러 약속을 지킨다는 말인가.
우리가 이렇게 까지 진격했는데, 딜을 안해? 이런 거 말이다.
본래 야율도욕은 태자임에도 불구하고 야율아보기 사후, 황태후세력에 의해 황위에 오르지 못한다. 그 대신에 야율덕광이 황위에 오르지만, 결국 지금은 야율아보기가 살아있다. 태자인 야율도욕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끄는 사이 어떻게든 막힐부와 장령부의 군대만 끌어들이자.
* * *
거란 본진
상경으로 진격하면서 발해군의 저항을 무찌르던 야율아보기는 발을 동동굴렸다.
슬슬 화가 날 무렵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젠장할, 이 백제놈들은 왜 사람을 보내지 않는 건가?”
태자를 잡아갔으면 뭔가 진격을 멈춰라. 전쟁을 그만둬라. 요동을 반환하라.
이런 요구조건이라도 걸고 협상을 하러 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는 것인가?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게 고정할 일인가? 황후! 야율도욕은 태자요. 거란의 다음 황제가 될 태자인데 어찌 진정할 수 있겠소? 당장 상경성이 눈앞인데! 대인선을 눈앞에 두고 지금 대거란의 자식들이 주저하고 있소이다! 이러다가 사방에서 발해군들이 정신차리고 공격해오면 힘이 들 것인데!”
황태자다. 황태자가 백제군의 기습에 당해버렸다. 이건 심각한 일이다.
“그 아이도 대요의 황태자입니다. 야율도욕을 믿으셔야 합니다. 폐하.”
“이러다 발해를 정복하지 못하면 큰일이오.”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다 잡으시옵소서.”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지 않소? 비열한 백제놈들 같으니라고! 감히 누구를!”
거란족을 통일하고 일찍이 중원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강대한 나라를 세운 자신이다. 그런데 고작 분열된 삼한의 족속 중 하나에 이렇게 망신을 당할 수가 있는가.
“백제가 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탓이 컸습니다.”
“반도의 조그마한 나라 따위가 어떻게! 대체 숫자가 얼마나 되길래!”
부여금강이라는 자가 바다까지 건너와 발해를 돕는다면 믿는 것이 있다는 뜻.
아마 대군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족히 6만은 넘는다고 합니다.”
“대체 그 조그만 나라에서 어떻게 그만한 병력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고려사신이 백제에 대해 언급한 것도 있고, 어지간히 남쪽에 있는 작은 나라라 솔직히 뒤를 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발해땅에서 열심히 보급을 끊고 있는 백제군이 전부라 여겼다. 그런데 설마하니 그렇게 많은 군사가 있을 줄이야.
“슬슬 결정하셔야 합니다.”
“그래. 황후. 어떻게 해야 내 아들을 구할 수 있겠소?”
“지금은 발해를 집어삼키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습니다. 야율덕광이 있지 않습니까.”
순간 야율아보기는 제 귀를 의심했다.
설마하니 야율덕광을 황후가 태자로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설마 지금 태자를 버리고 상경으로 가라는 말이오?”
“폐하. 신첩이라고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발해를 멸망시키지 못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위급해집니다.”
하기야 지금 여기서 주저한다면 거란에 귀부한 말갈이 가만히 있겠는가. 겨우 겨우 이간질해서 거란편으로 만든 말갈족들이 있어 발해의 군사력을 쉽게 깎아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진격을 늦추면 눈치빠른 말갈이 어디에 붙을지는 뻔하다.
“끄응.”
“발해가 청야전술로 싹 불태우는 바람에 현지에서 보급을 기대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귀부한 말갈족들 역시 형편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상경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말갈족들이 등을 돌릴 수 있고, 사방에서 발해와 백제군들에게 포위되어 우리는 전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우리 요도 지금 총력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황후의 말이 옳았다.
이것은 총력전이다. 서쪽은 정리되어 이제 동쪽을 정리하려 하는데, 여기서 대업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백제는 저 남방의 따듯한 지역에서 살던 족속들. 그렇다면 이 북방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은 자명한 사실.
그렇다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상경을 점령하고 그 기세로 항복할 발해인들을 모아 백제군과 결전을 치러야 한다.
“좋아, 그럼 전군에 명령을······.”
마침내 야율아보기가 제 자식을 버릴 각오로 전군에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폐하! 폐하!”
“무슨 소란이냐!”
“백제군에서 사자가 당도했습니다.”
“뭐라고!”
하필이면 딱 흔들릴 무렵에 백제에서 사자가 왔다.
황후 술율평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