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야율아보기
* * *
상좌평 최승우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 저번 일로 사실상, 군부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왕자님이 아니십니까?”
“음. 그렇지요.”
“병관좌평의 역할을 그대로 왕자님이 하시는 격입니다.”
최근에 나는 군부의 장수들과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
일단 친해져야 한다. 특히 병부에는 신검파벌의 장수들이 많았는데, 이미 신검으로부터 신뢰를 얻은 나는 그들과도 제법 친해졌다.
특히 그중에서 관흔이란 장수와 친해졌다.
관흔은 훗날 대야성을 점령하는 인물이었다. 이건 나도 대충 기억이 난다. 예전에 학교 국사시간 때 후백제의 인물에 대해 조사하던 중 알게 된 인물이다.
왕건이 왕충을 보내 양산을 공격하려 하자 관흔이 군사를 우회하여 대야성을 점령하고 죽령지방까지 장악했다.
무려 대야성을 재탈환하고 죽령까지 장악한 기염을 토한 것이다.
“어쩌겠습니까. 병관좌평이 노망났는데, 제가 해야지요.”
“허허허. 이거 참. 그럼 저는 물러나보겠습니다.”
물러나봤자 어디로 가는지야 뻔하지.
“거 들키지 않게 하십시오.”
“이런이런. 이제는 이 늙은이가 왕자님 손바닥에서 놀아나겠습니다. 허허허.”
최승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화약국에서 나갔다.
“그만한 인물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인지도는 적지만 분명히 말해 후백제에서 단연 뛰어난 장수라고 할 만해.”
결국 유금필말고도 보험이라는 것이다.
관흔만이 아니라 명길, 효봉, 덕술 등 다양한 장수들과도 친분을 가졌다.
상애와 상귀까지 합하면 나와 친한 군부의 장수들만 다섯이 넘는다.
그래도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관흔. 나는 그를 화약국으로 불러들였다.
“관흔 장군.”
“예, 좌평어른?”
콰앙!
관흔에게 현재 개발 중인 무기들을 보여주었다.
주화와 구포. 물론 화약은 최대한 아껴야 하니 조금 뿐이었다.
“이런 무기를 기병들에게 사용하면 어떻겠소?”
“허, 이건 정말 굉장한 무기입니다. 언제 이런 것을 개발하셨습니까?”
화약무기들의 존재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아직 많지가 않다.
국가기밀이기도 하고 능환이나 용검에게 보였다가는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래도 관흔이라면 믿을 만하다.
알아보니 이 자는 장수들 중에서도 제법 병사들을 훈련 잘시키는 인물로 소문이 났다. 더군다나 따로 파벌 같은 것을 두지 않고 권력에서 좀 떨어지려는 인물이다.
“일단 거란 기병들에게 써볼까하는데.”
“음 대오를 흔들 것이고, 기동력이 떨어져 앞을 막은 장창병을 뚫을 수 없을 것입니다.”
확실히 소리만 들어도 그러니까.
“흠. 예를 들면 수십만의 대군이라면?”
“틈이 생기겠지요. 이런 무기는 거란이라면 처음 접해보는 것일 터. 그 놈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사방에서 포위공격하면 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
“음, 그렇군.”
역시 생각한 대로다.
거란놈들이 껌벅 죽도록 전쟁 전까지 만들 수 있는 최대한 만들어내야 한다.
“확실한 것은 이런 무기가 있으면 고려는 무너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예. 지금 고려는 이 무기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그놈들이 작정하고 군사기밀을 빼내가려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일부러 대규모 병력을 이끌어내어 그 싸움에서 이 무기들을 사용한다면 순식간에 고려군을 무력화시키고 삼국통일의 주도권을 받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랑 생각하는 것이 똑같다.
아니, 이 남자는 지금 흥분하고 있다. 마치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본 어린 아이처럼 두 손을 부르르 떨고 있다.
“곧 거란과의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대진국과 거란의 전쟁 말입니까?”
“예. 그 전투에서 사용해볼까 합니다. 관흔 장군이 선봉에 서주시지요. 가능하시겠습니까? 유금필에게만 맡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유금필은 결국 백제의 장수로 만들거나 최악 토사구팽할 생각이지만, 그래도 고려의 장수가 발해를 구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관흔이 발해를 구하게 만들어야지.
“그렇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사실 군부에서 유금필을 풀어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왕자님께서 고려의 장수인 유금필을 너무 편애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유금필을?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지. 어쩌면 용검과 능환 그 두 놈일 수도 있다.
아마 나와 군부를 떨어트리려는 수작이겠지. 그래서 친분을 가지기 힘든 놈들도 있던 모양이다.
“이것 참 말도 안 되는 오해로군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이처럼 나라걱정을 하시는 분께 그 무슨.”
내가 유금필을 편애하다니.
“뭐, 일단 그 이야기는 뒤로하고, 관흔장군에게 이 무기들의 사용법을 알려드린다면,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예 왕자님. 백제에 승리의 영광을 바칠 것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너무 낙관하고 있었다.
* * *
924년 3월 요주
요주에는 대인선 휘하 발해군이 집결했다.
거란에 침입만 받다가 마침내 대반격을 가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정작 대인선과 함께 출정한 대문진은 지금 상황을 그리 낙관적으로 볼수는 없었다.
“폐하. 말갈을 비롯한 발해의 모든 군사들이 공격준비를 마쳤습니다.”
“때가 되었는가.”
“폐하, 백제와 함께 하지 않아도 되시겠습니까?”
백제가 수군을 움직여주는 것이 가장 좋을 텐데. 굳이 이렇게 싸운다면 거란과의 전면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전쟁을 백제가 오기 전까지 막을 수 있냐는 것이다.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하나 필요 이상으로 의지하면 저들에게 넘어갈 것이 많을 것이야. 놈들이 먼저 공격하기 전에 우선 요주를 쳐서 백성들을 되찾아야 한다.”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고는 해도, 과연 백제가 고려를 공격해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거란의 침입을 막아줄까?
아니다. 대인선은 부여금강이란 자가 보통이 아닌 것을 안다.
거란을 물리치면 필시 땅이라도 바라지 않을까.
‘그렇게는 안 되지. 괜히 코가 꿰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증거로 마치 은혜라도 씌우려는 듯 부여금강이 밀서를 보내왔다.
노상을 조심하라고. 어쩌면 발해와 내통 중일 수도 있다고. 동맹국의 왕자가 보낸 밀서라 마냥 무시할 수도 없어 노상에게 감시하고 있는데, 괜히 백제에게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작년에 거란이 요양의 옛성을 수리하고 발해의 백성들을 붙잡아갔으니, 보복차원 겸 발해인들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요주로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란의 행보가 최근 위험했다.
발해를 본격적으로 침략이라도 하겠다는 듯, 거란 황족들과 함께 대군이 요동쪽으로 모이고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요동을 잃어 빗장빠진 대문인 상태에서 먼저 침공을 받으면 방어선이 빠르게 무너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게 대인선은 요주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공격하라! 너희들의 부모형제를 죽이고 끌고 간 간악한 거란 놈들을 모조리 죽여 발해를 천하에 우뚝 세워야 할 것이다!”
요주의 전투는 치열했다.
“발해놈들이 쳐들어왔다! 모두 죽여라!”
“남의 땅을 점령한 주제에! 거란놈들을 모조리 죽여!”
“요주를 잃어서는 안 된다!”
“발해가 내린 은혜도 모르는 거란놈들을 죽여라!”
피를 쏟고 씻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쉼없이 계속된 공방전 끝에 요주가 무너지고 요주자사 장수실이 포박되었다.
“이 일은 우리 황제께서 잊지 않을 것이오.”
“남의 땅을 침탈한 도적놈이 말이 많구나. 목을 베라.”
요주자사 장수실이 목이 베였다. 그러나 요주를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했다.
요주는 거란 본토와 그리 멀지 않다.
당장 요하 쪽에 거란의 수도가 있고, 대군이 있다. 점령한 요주에서 거란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를 수는 없는 일.
“아무래도 이곳을 점령했다가는 사방에서 거란군이 공격해올 터.”
“예. 폐하. 보복을 한 것으로 지금은 충분할 것입니다.”
대문진은 한시름 놓았다.
만에 하나라도 가독부가 작정하고 거란과 사생결단을 내린다고 했으면 많이 곤란했을 것이다.
“다음에는 반드시 되찾으러 올 것이네.”
요주에 있는 발해의 백성들을 되찾고 거란족들을 붙잡아 개선했다.
“““대발해 만세! 가독부 만만세!”””
상경용천부의 백성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발해와 가독부에 대한 만세를 외쳐 댔다.
“아버님.”
“그래. 광현아, 어떠하냐.”
“금강왕자의 말이 옳았습니다. 노상에게 은밀히 사람을 붙여 알아보니 거란족들과 서신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랬다는 말이지. 대인선은 눈살을 떨었다.
금강왕자가 어찌 알았는지는 중요치 않다. 해상교역에 발달한 국가니 어쩌다 거란쪽에 사람을 넣어 알게 된 것이겠지.
그보다 그 찢어죽일 놈이 중요하다.
“천하의 찢어먹어도 시원찮을 놈. 그놈과 서신을 주고 받은 거란놈들은?”
“이미 다 잡았습니다.”
“노친네가 노망이 났다했더니 기어이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구나. 당장 놈을 붙잡아 추국하거라.”
“예. 아버님.”
대인선은 태자를 시켜 노상과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집단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 덕에 남은 거란의 잔당도 뿌리를 뽑을 수 있었다.
이 소식은 거란의 야율아보기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허! 그래도 한 나라의 군주라는 건가? 반격을 가하다니. 심지어 우리와 내통중인 재상까지 잡았다는 말인가.”
야율아보기는 대인선의 파격적인 행보에 분노도 분노지만, 제법 칭찬해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분열하고 있는 나라의 힘을 어떻게든 끌어모아 반격을 가한 것이다. 이러다가 발해가 작정하고 말갈을 재통합하여 서진이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역시 저 동쪽이었군. 동쪽이 문제야”
발해가 어떤 나라던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그 고구려가 어떤 나라인가.
거란을 수백년간 간접지배해온 국가였다. 심지어 발해는 거란족들을 방패로 삼아 당군을 무찌르기도 하였다.
절대 가만히 둘 국가가 아니다. 슬슬 나라를 뒤집어엎을 때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는 어찌해야 하는가.”
고려가 분명 동맹을 맺자고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 그 고려가 도움이 되는가?
고작 저 남쪽의 작은 백제도 어쩌지 못하는 국가가 감히 요를 돕겠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돕는다면 군사를 얼마나 내놓겠는가? 3만은 댈 수 있나?
요 본토에 대기 중인 군대만 해도 20만이다. 고작 신라땅에서 일어난 작은 나라가 군대를 얼마나 낼까.
“오히려 발해땅을 달라고만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정말 최악의 경우라면 고려의 왕건이란 자에게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백제를 상대하기도 벅찬 놈들이 군대를 북상시킨다고 해도 오히려 발해 지방을 지키는 말갈군에게 격파당할 것이 뻔하다.
문제는 백제다.
고려의 사신이 하는 말도 그렇고 발해에 보낸 세작이 보내오는 소식도 그렇고 백제가 발해와 동맹을 맺었다고 한다.
“백제가 우리를 어떻게 치겠는가? 상식적으로 고려가 북쪽을 떡하니 막고 있고, 고려를 상대해야할 텐데. 놈들이 감히 우리 요를? 그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지네 집을 지키지 않고 다른 나라 지키겠다고 군대를 내겠는가?”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자 야율배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태자는 말해보라.”
“발해가 말갈군을 움직였다고 들었습니다. 백제는 고려를 뒤에서 흔들 발해가 필요하니, 듣기 좋은 말로 대인선을 구워삶았을 것입니다. 백제 입장에서 볼때, 백제가 아래에서, 발해가 위에서 압박을 가하면 고려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다.
백제가 아래에서 발해가 위에서 고려를 압박한다면 백제가 삼국을 통일하겠지. 그렇게 되어 백제가 발해를 돕게 된다면 거란은 발해를 상대하기 힘들어진다.
그런데 그건 발해가 거란의 공세를 버텨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대인선 입장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려도 신라, 백제 삼국통일에 집중해야 하니 지원요청을 할 수 없는데, 그때 백제가 떡하니 동맹을 제안하니 좋다고 받아들인 것이지요.”
"음. 그 말이 맞다."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저들이 어쩌겠습니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백제가 어찌해볼 수는 없다.
“일단 발해의 사정을 살펴보라. 모든 준비를 마치면 내 친히 대군을 끌고 가발해를 박살내고 대인선. 그 자를 무릎꿇릴 것이다.”
“예. 폐하.”
“감히 반격이라니. 흥. 두고 보자.”
야율아 보기라는 인물은 거란이 한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자였다.
그렇게 몇 달 후, 야율아보기는 20만이 넘는 대군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