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고려의 의도
* * *
고려
왕건은 병부에서 올라온 장계를 보고 화가 치밀었다.
“동해안에 신라구들이 나타나고, 왜구들은 끊임없이 신라를 약탈하며 호족들이 군대를 내놓지 않고 있다?”
왕건은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막 말갈이 정리된 시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건 마치 신라가 분열되는 시기같지 않은가.
어떻게 세운 고려인데, 이렇게 흔들릴 수 있나.
“폐하. 고정하셔야 합니다!”
“당장 수군들을 편성하여 동쪽의 해적들을 처리하게! 그리고 서라벌에 군대를 주둔시켜! 언제든지 왜구를 잡을 수 있도록 말이야!”
신라에 어느 정도 주권을 허락하고 있었으나, 이대로는 안 된다. 신라군은 형편이 없으니 이참에 서라벌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 폐하.”
“폐하. 백제에 있는 세작으로부터 올라온 보고입니다.”
“무슨 일이냐.”
“유금필 장군이 백제 기병대를 훈련시키고 있다합니다.”
왕규의 말에 왕건은 머리에 돌덩이라도 떨어진 것만 같았다.
유금필이 어째서 백제의 기병들을 훈련시키고 있나?
“그건 도 무슨 일이야! 유금필이 왜!?”
“고려의 장수가 백제군을 지휘한다.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네는 무엇을 의심하는 건가?”
왕규는 유금필이 고려에 투항했을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왕건도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으니 한숨을 쉬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백제가 유금필장군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인질을 교환할 어떤 조건도 달지 않았지요.”
그러고 보니 유금필 이야기를 너무 자연스럽게 넘기기야 했다.
“설마 유금필 장군이 백제로 투항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금필이가 그럴 리가 없어!”
유금필은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부터 지금까지 쭉 옆을 지켜주던 장수였다.
나주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래도 협상으로 어떻게 될 거라 생각했다.
설마 그런데 배신이라니.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일로 사신을 보내기에도 뭐한 상황입니다. 당장 나랏일이 급한데 유금필장군까지 신경쓰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끄으응.”
“거란의 대군이 요동에 집결되는 중이라 하니 우리 역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천하가 어렵게 돌아가는 구려.”
거란과도 언젠가는 충돌해야하나. 정말 나랏일이 급하게 돌아간다.
“언젠가 고려의 깃발 아래에 삼한이 통일될 것입니다.”
솔직히 너무 요원한 꿈이기는 하다.
처음에는 백제만 어떻게 하면 될 것이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들이 엮여있다.
일본과 발해, 그리고 도무지 못 써먹을 신라.
천년왕국의 신라의 상태가 심히 우려스럽다.
차라리 신라를 놓아버리는 것은 어떤가 그런 생각도 했는데, 백제가 꿀꺽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그렇게 되면 발해, 백제, 일본을 상대해야 한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아군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고려가 살 것이다.
중원의 국가들은 지금 저들끼리 싸우느라 바쁘다. 삼한에 개입하기도 어렵고, 중원왕조들은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이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가 좋은가.
그때 딱 한 곳이 떠올랐다.
“차라리 거란과 국교를 맺는 것은 어떠한가?”
일찍이 폐주도 거란에 사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거란과의 관계가 못마땅하긴 하지만, 그래도 동맹을 해두면, 이탈한 말갈군이 약탈하는 거라고 온갖 핑계를 대는 발해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란과의 국교라. 그리하면 발해와는 완전히 척을 지시는 격이 될 것입니다.”
“물증만 없지 발해가 백제와 짜고 우리를 노린다는 것은 명명백백하네.”
“음. 그렇기는 하지만. 거란과의 동맹은.”
태평도 지금 고려의 처지를 생각하면 거란과 맺는 것이 맞다고 여기지만, 괜히 여우를 내쫓으려다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란과의 동맹은 조금 숙고해봐야 할 일입니다.”
아직은 아니다. 정말 최악의 경우라면 모를까.
아니, 애초에 거란과 동맹을 맺는다고 해도, 그 동맹이 제대로 유지될 것인가?
“그렇습니다. 우리 고려는 구고려를 계승하였기에 국호를 고려라 한 것입니다. 발해도 과거의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닙니까? 그런 국가와 적대관계인 거란과 친분을 다진다는 것은 조금.”
“그래서 발해가 우리를 공격한다는 말인가?”
분명 같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입장에 있으니 발해가 고려를 좋게 여길수만도 없을 것이다.
그럼 국익을 생각해 거란도 나쁘지 않을 법한데.
“그건 그렇기는 합니다. 굳이 우리가 거란과 국교를 맺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말갈을 이용하여 걸핏하면 우리 땅을 침공하는 발해가 아닙니까?”
“음. 일단 생각해볼 일이다.”
신하들의 생각도 갈라졌다.
거란과의 동맹, 또 동맹을 맺지 않는 것.
다만 역시 왕건은 찝찝했다.
‘거란과의 동맹이라. 으음.’
아무리 사면초가에 몰린다고 한들 거란을 택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가. 상대가 먼저 일본과 발해를 끌어들였다고는 하나, 거란은 믿지 못할 족속이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일도 아닌 것이, 유금필은 고려 군부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당연히 현재 고려군에 대한 기밀도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모두의 의심대로 유금필이 정말로 고려를 배신한 거라면?
그때는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다.
“우선 사신을 보내봄이 어떻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신을 보낸 뒤, 거란의 태도를 보고 정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 하라.”
왕건은 거란에 보낼 사절단을 꾸렸다.
* * *
고려에 보낸 세작이 정보를 보냈다.
그건 정말 원역사의 세게에서 온 내 입장에서는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와, 역사가 진짜. 제대로 비틀어졌네.”
설마 거란이 보낸 낙타까지 굶겨 죽였던 왕건이 거란에 사신을 보낼 줄이야.
아니, 뭐 기록상 존재하지 않을 뿐이지, 그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 놀라실 일이십니까?”
“설마 왕건이 거란에 사신을 보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도 대규모 사절단이란다.
이미 거란이 압록강의 반은 먹었으니, 통교가 될 것이다.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딱 절묘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거란의 상황을 보고 동맹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왕건이라도 그런 생각은 할 것이다.
지금 발해와 일본 백제 삼국에 막혔고, 사면초가 형국에 재해권마저 잃었다.
당연히 중원의 도움을 받기도 글렀고, 설령 연결이 된다고 해도 분열되서 그 어떤 나라가 고려를 도울까. 심지어 고려는 지원군 조건으로 얻을 것도 없다.
신라를 써먹기에는 일본한테 털리면서 반대로 골골거리니 계속 지원해야 하는 입장이고 언젠가는 합병해야 한다.
그럼 답은 거란 밖에 없다. 함께 협공해서 발해를 잡는 조건으로 백제를 잡는것.
“흐으음. 과연 그렇겠습니까?”
“왕건이 고려를 그대로 바치지는 않을 테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요. 솔직히 거란이 군대를 우리 백제에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은 할 수 없지만.”
왕건이 바보가 아닌 이상 발해를 잡는데 먼저 군대를 내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결국 백제를 우선 치고 삼국통일을 하여 발해를 칠 수 있다는 건데.
왕건이 과연 육로의 길을 대줄까?
뭐 어쨌든 거란과 동맹할 명분은 차고 넘친다.
일단 발해는 고구려 계승국이라 백제가 끌어들이는 것은 명분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고려가 봤을 때는 백제가 단순히 외국의 힘을 빌어 삼국통일을 하려한다고 정신승리하고 그렇다면 자기들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거란이 1~2만의 군대만 보낸다해도 우리에게는 큰 난관이 될 것입니다.”
“하하핫.”
1~2만이라, 우리가 요동으로 가면 상대할 거란의 본대가 20만이다. 그 정도는 상대해야지 뭐.
문제는 고려군이라지만, 솔직히 그 정도 병력이면 화약을 투입해서 잡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거란도 바보는 아니라는 거다.
야율아 보기가 고민은 해보겠지. 그런데 발해를 잡기 위한 사전작업을 하고 이미 발해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고려같은 나라와 손잡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고려의 형세를 알고 한반도를 먹어치울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뭐 아무튼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화약이 있으면 그 정도는 막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 요청하면 그 정도 병력은 지원받을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발해도 조금은 숨통이 열릴 것입니다. 반대로 고려가 먼저 발해를 친다해도 우리 백제군이 북진하면 되니 그만이고.”
어떤 계책이든 우리가 유리하다는 것.
“음, 결국 우리가 유리한 판세라는 것이로군요.”
“뭐 발해가 멸망하고 거란이 고려와 동맹을 해둔다는 최악의 조건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우리가 유리합니다.”
고려의 침공을 대비하여 백제의 성들은 지금 주요성들마다 증축해두었다. 그러니 수비 하나 만큼은 자신있다.
고려에 비해 군사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머리가 부족할 뿐이지 군사력 하나는 어느 때나 고려에 밀리지 않는 후백제가 아닌가.
“왕자님. 용검 왕자님을 한 번 지켜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남정네를 뭐하러 지켜봅니까?”
여인네들이었어도 아내에게 맞아죽을 까봐 못한다.
의외로 손이 맵더라. 수하들이랑 친목도모할 겸 술마시고 온 날 개가 되었더니 엄청 두드려 팼지.
그때 생각만 해도 최악이다.
“그것이 아니오라, 최근에 병관좌평과 제법 밀담을 주고받는 모양입니다.”
남자들 둘이서 밀담이라, 그것도 한명은 할아버지가 아닌가.
그 둘이 밀담이라면 나 때문이겠지.
“저 때문에요?”
“예.”
“좋지 않은 것이겠군요.”
기분이 찜찜하다. 용검의 처지를 생각하고, 신검이 지금 나에 대한 호감도를 생각하면 원 역사처럼 금강을 죽이지 못한다.
그래도 신검을 제외하면 다른 놈들은 어떨까.
“예. 그러니 사람을 붙여두는 것이 어떠실런지요.”
“아마, 반란까지는 아니더라도, 신검형님 곁에서 저를 떼어내려고 하겠지요.
대체 능환 그 사람은 왜 그런답니까?”
일단 떨어트리고 나서 서서히 나는 개새끼라고 신검을 세뇌할 생각이겠지.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개고생한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신검. 그 작자는 상당히 귀가 얇아서 그 말에도 넘죽 넘어갈 것 같으니까.
“원래 그런 분이십니다. 장자가 왕위를 세습해야한다. 그런데, 최근 왕자님게서 입지가 굳건해지셨으니, 용검왕자님과 함께 정치적으로 왕자님을 견제하려는 것이지요.”
“참 나,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데, 한심한 작자들이 아닙니까. 뭐 제가 보기에 능환 그 사람은 상좌평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능환은 가끔 최승우를 쳐다봤다.
그럴 만하다. 최승우는 신라삼최였고, 내 곁에서 함께 공을 세우고 견훤의 총 애를 듬뿍받고 있지 않은가.
“허허허, 이 사람이 뭐라고 열등감을 가지겠습니까.”
“그럼 저는 뭐라고 그 둘이 그러겠습니까? 뭐 결국 병관좌평은 노망이 든 것이고, 용검형님은 그냥 맛이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그 둘은 멍청이들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럼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십니까?”
“지금 우리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괜히 그 둘을 감시하다가 되려 명분만 주고 말 것입니다. 어차피 상원부인도 나를 인정한 마당에 그 둘이 제게 어쩌겠습니까?”
설령 또 살수를 보낸다해도 만족할 수 있다. 오히려 죽이러 오면 나야 좋지.
그리만 하면 명분잡고 용검이를 유배보낼 수도 있다.
능환이는 확실히 파직시킬 수 있고.
어쨌든 그 둘은 전쟁 전에 잡아두기는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