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국혼
* * *
“역시 뭐 무기 설계나 이런 거 까지는 없겠지.”
그냥 화약에 대한 기초지식과 더불어 염초생산방법, 화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배합 등등이 적혀있었다.
무기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냥 토막상식 수준이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꽤 큰 소득이다.
나쁘지 않다. 재료들도 못 구할 것도 없지.
이 제목도 모를 화약고서에는 현재 후백제가 가진 땅에서 유황 산지의 지역까지 표시되어있었다.
조선 후기에나 전국에서 유황을 생산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한국사에 혁명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왕자님 탐라국왕이 해안에 몇 명의 이방인들이 표류했다며 그들을 나주로 보냈습니다.”
“음? 누굽니까?”
“생김새는 대식국이나 피부가 새하얀 자들인데. 요상한 식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요?”
그 요상한 식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들은?”
심봤다. 감자랑 고구마다. 감자나 고구마의 역사를 생각하면 지금 시기 백제에 들어온 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고구마는 본래 폴리네시아인들이 오래 전부터 재배하고 있었으니, 저 외국인은 폴리네시아인일 터.
아마 감자와 고구마를 가져왔다면 재배하는 일도 알 테니, 사람을 시켜 재배하는 방법을 알아보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말이 통하겠습니까?”
“외국인이라 하나 이 땅에 오래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말이 쉬운데.
“일단 최대한 이들과 말이 오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또 그때까지는 지금 나 주에서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다 해주고요.”
“예. 왕자님.”
함선도 포문을 달아야 하나?
신라인들을 농지로 보냈으니, 장정들을 더 끌어모을 수도 있다.
“상귀장군은 잘하고 있습니까?”
“예. 다타라에 보내 왜구로 위장하여 신라를 약탈하고 있다합니다.”
“신라의 처지가 참으로 말이 아니게 되었군요.”
왜구한테 약탈당하다니. 정말 신라초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정말 신라의 시대는 끝이 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한이 분열되었을 때부터 이미 신라의 천명은 끝난 것입니다.”
사실 화약만 제대로 개발해낸다면 다른 것도 해보고 싶다.
지금 중원은 혼란스럽다.
삼한은 늘 중원이 혼란에 빠졌을 때 강했다. 즉, 이 시기를 잘 이용하면 중원까지 진출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몇 년 안에는 무리겠지만, 화약으로 무기만 개발한다면 삼국통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왕자님. 대왕께서 보낸 교서입니다.”
“음.”
견훤이 보냈다던 교서에는 내 혼인 문제가 적혀있다.
올 것이 왔구나.
“아무래도 폐하께서 더 적극적인 것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상대는 요시코 내친왕이라 합니다.”
“요시코 내친왕?”
내친왕이라, 새삼 내 위치가 실감되었다.
왕잗인 덕에 외국의 공주랑 연을 맺게 되는구나.
“네. 지금 일왕의 일곱 번째 공주라고 하니. 격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흐음.”
하기야 넷째왕자와 일곱 번째 공주니.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제가 일본에 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일본 역시 백제에 왕자님이 계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왕은 나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모처럼 삼국동맹을 맺게 한 장본인이 아닌가.
원래 이전부터 신라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일본이고, 한반도 남부에 진출할 기회로 여기고 있을 테니 나를 그냥 내버려 둘 것이다.
“언젠가 그놈의 국호인 일본도 되찾는게 좋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 본래 일본이란 국호도 백제출신 일본의 권력자들이 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게 생각하시지요.”
그래. 까짓 거 혼인이야 해주마.
“요동의 상황은 조금 알고 계십니까?”
“예. 거란의 야율아 보기가 요동으로 군대를 보내고 있다합니다.”
요동을 굳건히 하여 발해의 요동탈환 시도를 막고 발해를 집어삼키겠다는 의도였다.
“음. 역시 요동을 굳건히 하겠다는 의미로군요.”
“곧 낌새가 보이면 발해를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요나라는 연운 16주는 얻을 수 있어도 중원을 삼키지는 못했다.
결국 북방의 강자가 되었을 뿐. 진정한 천자국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 금나라처럼 화북을 먹은 것도 아니고.
“일본은 지금 군사를 준비중입니까?”
“네. 삼국동맹 이후로 병사들을 조련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선박이 준비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든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
“아무래도 동해를 건너는 항로는 안 될 터.”
나만 해도 건너는 동안 죽을 맛이었는데, 아예 작정하고 신라 해안을 타고 올라가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역시 서쪽에서 후려쳐야 거란도 당황하겠지.
거란의 침공 전까지 화약무기를 하나라도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대인선의 머리가 비지 않고서야 지금 즈음, 상경용천부로 직행하는 길을 그냥 둘 리는 없겠지.
수도를 천도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아마 성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봉예공과 태자 대광현을 서경압록부에 보냈다 합니다.”
“분조로군.”
대인선이 제법 생각을 했다.
“예. 상경용천부가 함락되어 진국황실이 야율아 보기의 손에 떨어질 수 있으니, 후일을 대비한 것이 아닙니까. 때마침 압록부는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기도 좋아 지원하기도 용이할 것입니다.”
그냥 서경압록부로 아예 천도를 할 것이지.
아니면 지금 발해 조정에서 천도파와 비천도파가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겠지. 당장 조정이 혼란스러운데 가독부가 천도 이야기를 했으면 권력다툼으로 저들끼리 싸웠을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조율해서 내린 결과가 분조일 수도 있다.
“슬슬 다가오고 있군.”
거란의 뒤를 쑤실 기병은 확보가 가능하다. 거란을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고려가 협상을 깨고 남진할 경우를 생각해서 강력한 무기로 나라를 지킬 필요가 있다.
생각보다 6년의 시간은 짧을 수도 있겠다.
이미 몇 년이 지났으니까.
* * *
상경용천부 황성
금강의 생각대로 발해에서는 거란이 요동에 대군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소식에 천도가 논의되었다.
이미 대봉예를 서경유수에 임명하고 태자 대광현도 최근 계속되는 거란의 약탈과 말갈의 이탈 탓에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명분으로 보내뒀다.
분조의 기능을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정작 상경에서는 이렇게 신료들끼리 파벌이 갈라졌다.
“폐하, 아니 될 일입니다! 상경용천부가 어떤 땅입니까! 천도라니요!”
“거란이 대군을 동쪽으로 보냈습니다. 이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서경압록부로 천도하여 나라를 보전하고, 부여부에서 반격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서경으로 천도하면 말갈족들의 이탈을 어찌 막을 셈입니까?”
“그럼 최소한 부여부에서 상경까지의 길에 요새라도 만들어야지요!”
발해의 가독부 대인선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질리지도 않는다.
당장 선조들의 땅 요동을 잃었는데도, 저리 싸우고나 있다니.
발해의 전신인 고려가 어떻게 망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지난 날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어찌 ㅁㆍㅇ했나?”
“폐하! 당은 주변국을 통솔한 진정한 천자의 나라였습니다. 고구려는 당을 상대로 몇 번이나 승리하였습니다. 헌데 그깟 거란 도적들이 문제겠습니까?”
“그런 도적들에게 지금 요동이 반이나 털렸네!”
머리가 지끈거린다.
“우리에게는 동맹국 백제가 있습니다!”
“백제를 믿을 수 있습니까?”
“맞습니다. 당장 대야성에서도 왕씨의 고려를 상대로 밀린 백제입니다. 그런 나라가 돕는다고 하여.”
들으면 들을수록 대인선은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백제 이야기까지 나올 줄이야.
그 전투에서는 백제도 나름 사정이 있던 걸로 안다. 무능한 두 왕자가 전투를 망쳤고, 부여금강이 지원한 덕에 고려와 협상이 가능했다지.
더군다나 휴전을 5년이나 잡았다,
신라땅에서 일어난 삼국을 다시 재통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우선 이 나라부터 지원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나.
“다들 그만하라. 그래서 내 대봉예와 광현이를 서경압록부로 보낸 것이 아닌가. 병부에서는 말갈부들을 너무 압박하지말게. 당장 말갈을 이간질 시키려는 거란 세작들만 몇 명이 잡히지 않았나.”
“예. 폐하.”
대봉예와 대광현을 서경에 보냈으나, 조정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이럴 때 거 란에 맞설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대군을 일으켜 먼저 치는 것이 어떠한가.’
거란도 지금껏 수세에 있는 발해가 먼저 공격할 것이라 생각지는 않을 텐데.
한 번 시도해볼 수도 있다.
* * *
누군가 그러더라. 결혼은 할 짓이 아니라고. 그야말로 무덤. 족쇄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말을 입에 달고 사시던 분이 밖에서 당당하게 바람피고 와 어머니한테 줘팸당한 아버지였다.
이제 내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아, 그렇다고 바람핀다는 말은 아니다.
왕자니 첩은 둘 수 있어도, 아버지처럼 아랫도리를 마구 휘두르고 다닐 수는 없다.
그래도 상대가 명색이 일본의 내친왕이 아닌가.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혼인식은 완산주에서 열렸다. 그런데 그 상대의 얼굴은 어디선가 본 거 같았다.
“저기 혹시 우리 언제 본 적이 있습니까?”
“크하하핫 왕자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남정네가 그런 식으로 여인의 마음을 가지려 하십니까?”
어느 시대라니 10세기인데요.
서라벌 약탈 이후, 갑자기 나에게 줄서기 시작한 상귀의 저급한 말에 무시하고는 눈앞에서 싱긋 웃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금강보다는 어린 것 같은데.
그런데 얼굴이 그 여신 같다. 아니 여신같이 예쁘다의 여신이 아니라 내가 아는 그 여신.
아니겠지. 설마 휴가 3일 얻겠다고 나를 결혼으로 묶어 옥죌 생각은 아니리라 굳게 믿는다.
“소녀는 오늘 낭군님을 처음 뵙습니다.”
괜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어. 이건 솔직히 기대를 안 했는데.
왜 이리 순박해 보이지?
아니, 솔직히 외모를 기대하지 않았다. 외모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럭저럭 생겨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시대는 화장도 없으니까.
그런데 저건 뭐 이 결혼 잘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어, 음. 내가 부족한 것이 많지만 서로 좋고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왕 혼인을 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소녀야말로 부족함이 많은 몸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결국 국혼은 그대로 치렀다..
천황이 직접 오지는 못하는 일이고. 일본의 후지와라씨 같은 가문들이 사람을 보내 국혼을 성대하게 축하해주었다.
혼인식에 앞서 견훤이 소서노에게 재를 올렸다.
“구백제 시절 마지막 임금이셨던 의자황제의 후손인 부여금강과 무령황제의 피를 이은 일본 천황가의 핏줄인 요시코가 백제땅에서 혼인을 맺으니, 백제황실과 일본황실이 다시 하나가 되는 날이 아닌가. 국조모 소서노신이시여, 부디 바라옵건대 오늘의 국혼으로 양국이 영원토록 우의를 다질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옵소서.”
이 시대는 어떻게 혼인을 치르는지 잘 모르겠는데, 견훤이 소서노를 신으로 떠받들고 일본과 대등하게 맞추기 위해 ‘백제황실’이라 했다.
양국이 영원토록 우의를 다진다. 솔직히 21세기 한국에서 살던 내 감성으로는 조금 현실적으로 닿지 않는 말이다.
확실히 백제가 삼국통일을 하고 만일에 21세기까지 입헌군주국으로 살아남는다면 일본과 어떤 관계였을까?
솔직히 궁금하기는 한데. 나는 지금도 백제와 일본이 굳이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일본은 발해에게 조차 자신들이 상국이라며 거들먹거리고 있는데, 나중에 백제를 상대로 어떻게 되겠는가.
신라 땅을 좀 떼준다고 한 것도 어떻게든 못 가지게 만들 셈이다. 결국 그리하면 양국은 또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지.
이 여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본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백제에 병합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