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협상결과
* * *
왕건의 막사에서 나오는데 최승우가 내게 말했다.
“왕자님. 휴전이라뇨. 아니 될 일입니다.”
“아, 그럼 상좌평은 계속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지금은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
나 혼자 달려나가 왕건과 지휘부 모조리 몰살시키면 삼국통일이 가까워지겠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고. 극단적이다.
“그것이 아니오라 우리가 밀리는 전쟁도 아닌데, 어찌 저들에게 주도권을 넘기려 하십니까? 폐하께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은 신라부터 부숴야지요.”
신라를 잡고 동남쪽을 온전히 병합해야 고려와도 제대로 맞붙을 수 있을 것이다.
“방법이 있습니까?”
“당장 우린 삼국통일을 할 여력이 안 되는데 발해를 도와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군대를 아껴야 합니다. 다행히 패는 우리가 더 많습니다. 신라의 백성들, 오다련, 유금필. 자, 생각해보세요 상좌평. 백제군만 움직이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닙니까.”
어쨌든 백제군의 피해만 없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그만이다. 신의? 이미 적당히 알리바이도 있고, 삼국통일하면 사라질 국가들한테 뭐하러 신의를 지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 백제 수군을 다타라에서 보낸 왜구로 위장하여 신라를 치면 되는 일입니다. 발해의 경우도 대인선이 잘 변명을 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고려가 아무리 항의해도, 거란탓에 이탈한 말갈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하면 끝이 아닌가.
그렇다고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왕 왕건이 발해로 북진할 수도 없다. 당장 거란에 밀리는 발해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것이 고려니 말은 다한 셈.
결국 후백제는 국력만 키우고 고려랑 신라만 애가 타게 되는 거다.
그 사이 몇 년의 시간 동안 후백제는 내부를 정돈하고 발해를 지원하면 된다.
그래서 함대부터 열심히 만든 거고.
“한마디로 이이제이와 마찬가지로군요.”
“예.”
중원의 국가들이 자주 사용하던 방법을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다.
* * *
금강이 최승우와 함께 물러나자 왕건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너무 손해보는 일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얻은 것이 없다.
굳이 있다면 양검과 용검. 인질의 가치도 없는 것들과 두 왕자의 군대를 잡은 것인데, 그 빈 자리를 금강이 보낸 나주의 군대가 다시 채웠으니 앞으로 전쟁만으로 백제를 제압하기 어렵게 되었다.
“폐하, 부여금강은 그 아비처럼 참으로 오만방자하나, 나름 그럴 듯 합니다.”
“말을 해보게.”
“아닌 말로 양검과 용검이 어디 제대로 되먹은 왕자들입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아국의 승리를 도와주는 인물들일 정도로 하찮은 자들이 아닙니까.”
“음 태평의 말도 맞는 말이지만.”
조금 전에 막 생각하던 것이라 왕건도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오히려 우리가 수세에 몰린 격입니다. 일본이 신라를, 말갈이 우리의 북방을 계속 위협하면 우리 고려는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으음.”
“휴전도 나쁘지 않습니다. 만일 이대로 싸우면 우리 역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백제가 일본에 지원군이라도 요청한다면, 정말 그때는 많이 힘들어질 것입니다.”
“일본이 돕겠는가.”
아무리 동맹이라 해도 일본이 바다 건너 백제를 위해 굳이 군대를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일본은 백제의 혈맹국입니다. 이미 다 죽어가는 신라가 일본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백제가 비겁하지 않습니까. 자기들 실력으로 안 되니 외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본래 백제는 일본에게 있어 부모의 국가나 마찬가지다. 그런 나라가 위급하다는데, 과연 가만히 두고만 보겠는가.
“그럼 일단 받아들이자는 쪽인가?”
“금강의 군대도 왔으니, 적들이 방어를 하는 이상 대야성을 취하기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냥 금강이면 모른다. 그런데 금강이 끌고 온 병사만 수천이다. 이렇게 되면 백제가 수성만해도 고려는 난감해진다.
그렇다면 힘을 아끼는 것이 어떨까.
“그래도 그렇지. 끄응.”
“설령 휴전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도 얻는 것은 있어야 합니다. 인질이라도 서로 교환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결국 신라를 돕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말인가.
왕건은 금강 하나 때문에 바뀐 전황에 참으로 허탈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오자고 대군을 끌고 온 것이 아닌데.
“나쁜 방법은 아니로군. 그럼 인질은 어찌할까.”
“두 왕자들은 내어주도록 하시지요.”
“아니, 그들을 내어주다니요. 아니 될 말씀입니다.”
일부 장수들이 격하게 반대하였으나, 태평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래도 왕자의 군대를 잡기는 했다. 백제도 당장 치고 올라올 형편이 안 되니 저런 조건을 건 것이 아닌가.
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가치가 없으니 차라리 풀어주는 것이 낫다. 이 말이로군.”
“예. 오히려 살려두어 형제간에 반목을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유금필장군에 대해서는 사신을 보내 따로 협상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유금필도 이번에 되찾으면 좋을 테지만, 이번에 유금필도 어떻게든 조건에 넣으려 하면 고려만 바닥을 보이는 꼴이었다.
왕건은 현명한 군주였다.
여기서 기세싸움에 밀려서는 안 된다. 유금필을 훗날 되찾는다 하더라도 지금은 대야성에서 물러나야 할 때다.
“그럼 한 번 타협을 보지. 내 직접 금강을 만나보겠네.”
이왕이면 한 번 더 해보고 싶었는데, 한 번 더 싸워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인가.
* * *
왕건이란 인물은 꽤 거물이었다.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인질을 내어달란다.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내가 선심 좀 써주지.
“협상조건으로 인질이라.”
“짐은 그대가 고려로 와주었으면 하네만.”
나보고 인질이 되라고?
“송구합니다만, 외신은 나주를 맡았으며, 대발해, 일본과의 외교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외신은 안 됩니다.”
“그거 안타깝군.”
안타깝기는 개뿔. 역사에서 보면 서로 보낸 인질이 죽어서 결국 다시 전쟁으로 이어진다.
내가 그걸 그대로 따라갈 까봐? 절대 아니지.
차라리 용검, 양검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
“그럼 인질교환을 조건으로 우리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 주시는 걸로 알고 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하게. 그리고.”
“예.”
“왕자들은 풀어주도록 하지.”
이놈 갑자기 무슨 생각이야? 가치가 없으니 풀어준다는 건가? 나도 그걸 노리기야 했지만, 아. 혹시 형제간의 반목을 원하는 건가.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 내어줄 거라고 예상은 했지. 인질이 가치가 없으면 오히려 식충이일 뿐이니까.
솔직히 말해 양검, 용검따위로 우리를 어떻게 해보려는 왕건을 과소평가하기는 했다.
안 풀어주면 안 풀어주는 대로 내가 자객짓이라도 해서 데려갈 생각이었다.
“두 형님을 말입니까?”
“그래. 데려가시게.”
그렇게 협상은 종결되었다.
나는 양검과 용검을 데려갈 수 있게 되었다.
태평과 고려의 병사들이 내가 떠나는 길에 양검과 용검을 붙여주었다.
“형님들 무사하셨습니까.”
“금강아!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느냐?”
“우리에게 인질의 가치가 없어?”
조금 전에 태평이 실실 웃는 것을 봤는데. 아마 일부러 말한 것 같다.
지들은 나한테 왜구를 보낸 주제에 뭐가 잘 났다고 씩씩거리고 있다.
“그럼. 형님들. 형님들의 잘못으로 인질이 되셨으면서 아국이 힘들게 점령한 대야성을 내줘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뭐라고?”
“애초에 신검형님과 폐하께서도 허락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만큼은 까내려야 왕건도 두 분을 그냥 줄 것이 아닙니까.”
양검과 용검도 그 정도는 이해할 머리는 있겠지. 심지어 신검과 견훤도 동의한 일이다. 이놈들이 나에게 어쩔까.
“그. 그건 그렇다만.”
“그리고 지금 제게 그리 따질 형편은 아니실 텐데요.”
한심한 놈들 나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뿔이 난 대마왕을 상대해야 하지 않나.
“뭐?”
“잊으셨습니까? 두 분이 어쩌다 잡혔는지. 대왕의 진노가 얼마나 대단한지 말입니다. 애초에 대야성과 유금필을 내어주지 않고 두 분을 구하려 했으면 이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나를 탓하기 전에 지들 무능력함을 탓하라는 뜻이다.
당장 신검이만 하더라도 온갖 잔소리. 그나마 신검은 제 동생들을 구하려 했다는 명분이라도 있지. 능환은 왕자들 관리 못하다 그 나이 먹고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끄응.”
“앓는 소리들 그만들 하시고 고려왕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대야성으로 가셔야 합니다.”
“알겠다.”
양검과 용검은 한참을 나를 노려보다가 뒤를 따랐다.
대야성에 도착한 후에는 견훤에게 협상결과에 대해 보고했다.
더불어 곧 견훤에게 작살 날 양검과 용검이도 함게 끌고 왔다.
“휴전이 5년이라? 아니, 그 사이 고려가 대군을 키우면 어찌할 것이냐?”
“고려가 대군을 키운다 한들 우리도 키우면 그만입니다. ‘또’ 우리만 움직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일본과 탐라의 수군을 이용해서 신라를 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함대를 보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신라군입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고려군은 왜구 때문이라도 결국 신라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일본이 아니라 다타라의 수군이다.
다타라에 나주의 수군들을 보내 일본군으로 위장하는 것도 좋겠지.
“음. 그렇기는 하겠구나.”
“우선 대야성을 우리 백제의 영토라 확답을 받았고, 고려가 군대를 물릴 것이니 우리도 곧 철군하면 될 것입니다.”
괜히 대야성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면 곤란하다.
“허, 어째서 저들과 싸우지 않으려 하는 것이냐?”
“혹시 겁을 먹은게냐?”
양검과 용검이 나를 톡 쏘아붙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내가 지 들보다 못났을 거라고 생각하나.
애초에 자기들 군사를 말아먹은 것은 생각지도 않나보다.
“두 분께서 말아 드신 군대가 몇인 줄 아십니까? 지금 전투를 치르자면 승산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인질은 누가 좋겠는가?”
신검은 장자고 나는 백제에 필요한 인물. 그렇다고 견훤의 형제들을 보내기에는 나이 차이도 많다.
“으음. 저들은 고려왕의 생질인 왕신이라는 자를 인질로 보낸다하였습니다.
우리도 왕족을 보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럼 왕자들 중 한 명이 좋지 않겠는가? 어차피 형식적인 것이니 굳이 금강이나 신검이를 보낼 필요는 없겠지.”
이미 나는 백제에서 버리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그러니 견훤도 신검과 나는 보낼 생각이 없겠지.
“폐하?”
“너희들 중 한 명이 가야 하는데. 그래 누구의 군사가 더 많이 죽었느냐?”
“양검 왕자님의 군대가 전멸하다시피 하였습니다.”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 네가 고려로 가거라.”
“폐하?”
“가서 견문을 더 넓히고 오라는 뜻이야. 양검과 용검이 너희 둘이 말아먹은 군사가 얼마인 줄 아느냐? 그나마 실로 따져서 네가 가는 것이야.”
“폐하!”
양검이 저 새끼는 정신을 덜차렸다.
아예 끌고 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거기서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
아무튼 양검이 안 가겠다고 버티고 눕자, 보다 못한 견훤이 병사들을 불렀다.
“저놈 저거 억지로라도 보내게. 저거 아직 정신차리려면 멀었어.”
“““예!”””
양검은 그렇게 끌려가고 용검은 자기는 저렇게 되지 않아서 잘 되었다는 듯 안도의 숨을 쉬었다.
“금강아, 휴전을 생각한 것은 발해 때문이냐?”
“예.”
“고려와 싸우지 않다고 해도 발해를 돕는다면 결국 우리의 국력만 소진하는 꼴이 아닙니까? 뭐 얻는 것이 있습니까?”
양검을 보내버린 나를 경계하는 건지. 능환이 대뜸 태클을 걸었다.
누가 그냥 손해 본대냐?
“땅을 얻으면 어떻습니까?”
“허, 요동땅이라도 받아내실 생각입니까?”
능환이 다 늙은 노친네 주제에 잘도 나를 약올린다.
요동? 얻지 못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