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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22화 (22/154)

22. 여제전쟁6

* * *

대야성 관아

아니나 다를까. 견훤은 신검의 면상을 보더니 금방이라도 벼루를 내던질 것 같은 분기탱천한 표정으로 두 손을 꽉 쥐었다.

“또 졌느냐? 이번에는 아예 아우들을 내줬다고?”

"폐하, 신검왕자님은 그저 두 분 왕자님을 구하기 위해서."

"조용히 있게! 어쨌든 또 단독으로 나가다 아우들도 구하지 못하고 병사들을 내준 것이 아니냐. 이말이네!"

“폐하! 양검과 용검왕자님께서 독단으로 군을 이끌고 왕건을 잡겠다 출정하셨던 것입니다. 신검 왕자님께는 아우인 두 왕자님을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이찬 능환이 대뜸 신검의 편을 들었다.

견훤은 신검을 쉴드치는 능환이 마음에 안 드는지 그를 삿대질했다.

“형이란 놈이 얼마나 못났으면, 제 아우들을 관리하지 못하겠는가? 병관좌평은 그 입 좀 다무시게! 다 늙어서 그리도 신검이를 아껴주고 싶은가? 신검이 어린 애야? 이제는 전장을 지휘해야 하는 녀석인데, 언제까지 그리 싸고 돌셈인가? 결국 하나도 둘도 전부 병관좌평의 잘 못이 크네!”

“그.그것은.”

“책사라고 붙여준 자네가 왕자들 관리를 그리 못해서 어쩐다는 말인가? 심지어 신검이 출정할 때, 막사에서 잠이나 잤다지?”

견훤의 질책에 능환은 말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저놈은 확실히 할 말이 없어야 한다.

말릴 수 있는 위치임에도 왕자들이 나가는 것을 결국 막지 못했으니까.

“송구합니다.”

“송구하다고 왕건이가 왕자들을 내어줄 것 같은가. 군대를 물릴 것 같은가?

그리고 신검아. 너는 왜 한 번 잘한다 싶으면 다음을 망치느냐? 내 얼마나 너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아느냐 모르느냐?”

이야, 잔소리의 끝판왕을 보여주고 있다.

혼나는 건 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잔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송구합니다.”

한참 떠벌떠벌 신검이를 까던 견훤은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나마 금강이가 제때 와주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소자도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하오나 양검형님과 용검형님을 구하지 못했으니,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다. 아니야. 수고가 많았다.”

나긋나긋한 그 목소리는 조금 전 신검을 대할 때와는 천지차이다.

한동안 계속된 신검과 능환에 대한 일방적인 언어폭력이 끝나자, 능환은 견훤의 눈치를 보며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폐하 양검과 용검 왕자님의 일도 해결을 지으셔야 할 것입니다.”

“아니, 양검과 용검이를 잃은 것은 자네 공이 아주 큰데. 무슨 짐에게 해결하라는 것인가? 우선 왕건이의 반응을 기다려보는 것이 좋을 것이네. 금강아, 너는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속사포처럼 능환을 까대는 그 모습은 과연 견훤 답다고 볼 수 있다.

“백제의 장수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을 논하고자, 부왕께 칭찬을 받고자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 나주의 일은 끝나고 이야기하자꾸나.”

“예.”

일단 부여군 막사로 들어와 갑옷을 벗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등짝은 멀쩡하고 갑옷에 박힌 화살들이 떨어졌다.

“어휴. 슬슬 몸을 믿고 나대는 나 자신이 무서워지네.”

이러다 정말 죽지도 않는 거 아니야?

어쨌든 그럭저럭 적당한 때에 신검을 구했다.

설마 역사가 이리 비틀릴 줄은 꿈에도 생각은 못했다. 양검이와 용검이가 이리도 허망하게 걸리다니.

“문제는 능환이다.”

그놈은 신검의 측근이며 동시에 이번 일로 두 왕자를 어떻게든 찾을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지금 그놈이 양검과 용검을 되찾을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유금필.”

유금필을 써먹으려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 유금필이란 자의 위치는 백제군 병부에서도 고려측에서 가장 위험한 장수로 손꼽히고 있다.

그런 놈을 내가 잡았다.

그 노망난 늙은이 탓에 유금필을 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 늙은이가 신검이를 부추기기 전에 신검을 찾아가서 내가 먼저 설득해야 한다.

적당히 몸을 추스리고 신검이가 있는 막사로 찾아갔다.

그때 생각대로 막사 안에서 그 늙은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검왕자님. 고려왕은 장수들에 대한 의리가 매우 깊은 자입니다. 금강왕자께서 유금필을 잡았으니, 유금필과 두 왕자의 인질교환을 추진하셔야 할 것입니다.”

생각대로 능환은 신검이를 부추겨 내가 잡은 유금필로 딜을 걸어볼 참인 듯 싶다.

“음. 그래도 두 왕자요. 저들이 쉽게 내주겠습니까.”

“시도는 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만 물러가시지요.”

신검도 마냥 제 맘대로 결정하지는 못하지. 능환은 밀어붙일 생각이지만, 견훤이 딱 버티고 서 있고, 신검은 지금 괜히 견훤의 역린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

한참 떠들던 능환은 신검이 당장에 수락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막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와 눈이 절묘하게 맞았다.

“금강왕자님. 나주의 승전을 경하드립니다.”

“아니오.”

능환과는 별로 친하지 않으니 나는 능환을 흘려넘기면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신검은 얼굴이 죽상이다.

일단 살아난 건 둘째치고 양검과 용검이 문제가 걸려있으니. 능환의 말도 있고,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형님.”

“금강이가 아니냐. 무슨 일이냐? 더 쉬지 않고.”

쉬었다가는 유금필이 고려에 다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니 안 된다. 유금필을 백제의 장수로 써먹지 못한다면 최소한 고려로는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살려서 돌려보냈다가는 앞으로 고려와의 전쟁이 다시 힘들어질 수도 있음이다.

“전황이 바삐 돌아가는데 어찌 왕자라 쉴 수 있겠습니까.”

“음. 그래. 할 말이 있는 것 같구나.”

“아마 고려의 왕건은 유금필과 대야성으로 인질교환 조건을 내걸 것입니다.”

“유금필 하나만 걸지 않고?”

왕건이 어떤 인물인데, 유금필 하나로 만족하겠는가.

“예, 유금필은 고려왕의 측근 중에서도 측근이지만, 왕자를 둘이나 잡았습니다. 최대한 빼먹고 싶을 것입니다.”

고려의 왕건은 일단 그렇게 떠볼 것이다.

어디 협상이 한 번에 징척이 되겠는가. 대야성을 노리고 왔고, 왕자의 군대에도 타격을 주었으며 왕자 둘도 잡았으니 아마 노릴 만하다 여길 수 있다는 뜻이다.

“아버님이 대야를 내놓겠느냐?”

“아니죠. 그렇게 버틴다면 결국 유금필 하나로 교환하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형님. 우리는 유금필을 내줘서는 안 됩니다.”

유금필 몸값이 얼만데, 절대로 안 되지.

패장이라 해도 유금필은 무시 못할 인물이다.

아마 중원에서 태어났다면 중원통일에 이바지 하지 않았을까.

“그럼 양검이와 용검이를 죽이자는 말이냐?”

“우리가 버텨도 저들은 양검, 용검 형님을 처단할 수 없습니다. 형님. 솔직해 지셔야 합니다. 아닌 말로 두 형님 탓에 신검형님이 얼마나 피해를 보셨습니까? 아닌 말로 두 형님은 무능합니다. 직급을 떠나 그 둘보다 유금필의 가치가 더 높지 않습니까?”

“그래도 네 형들이다. 누가 들을까 걱정이로구나!”

그래도 마냥 화만 내지는 못한다.

어쨌든 그 둘 탓에 지금 신검이 처지도 말이 아니니 말이다.

“말했듯이 저들은 양검과 용검형님을 처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왕자를 버릴 듯이 행동하면 저들도 두 왕자가 포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오히려 백제의 왕권다툼을 노리고자 풀어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확실히 들어보니 네 말이 일리가 있구나.”

“오히려 유금필을 이용해서 고려로부터 얻어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땅이라던가, 발해를 지원한다던가 말이다.

“반대로 우리가 요구하자?”

“예.”

“음,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알겠다. 남은 일은 이 형님이 해볼 테니, 너는 이만 돌아가 쉬거라. 그 몸으로 어디를 다닌다는 게냐.”

“알겠습니다.”

이번 일로 신검은 나를 더욱 의지하기 시작했다.

나쁠 건 전혀 없지.

이 기회에 두 형제들과 사이를 벌려놓는 것이 좋다.

남자가 나에게 의지하는 것은 상당히 기분이 더럽지만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다. 신검과 형제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면 그것이 곧 기회다.

“왕자님! 상좌평 어른께서 대야성에 당도하셨습니다. 지금 폐하를 알현하고 오신다 하셨습니다.”

“빨리도 왔군.”

뒤늦게 나를 찾아온 최승우는 내가 누워있는 것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왕자님. 이 어인 변고입니까. 어쩌다 금강야차께서 이리 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아, 걱정마세요. 상처 하나 없으니.”

그래도 조금은 쉴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나는 괜찮은데. 진짜 화살맞고 멀쩡히 걸어다니면 신검이 기겁을 할 것이 아닌가. 그건 생각해야 한다.

“오면서 대야성의 상황을 알아보았습니다.”

“예. 답답할 노릇입니다.”

양검과 용검이 저들의 인질이 되어있고, 서전이라 할 수 있는 전투를 패배해 버렸다.

“어찌 세상사가 왕자님의 뜻대로만 되겠습니까. 일단 한 번 지켜보시지요.”

“어차피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양검과 용검 형님이 너무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커흐흠. 벽에도 귀가 있습니다.”

벽에 귀가 있어도 양검과 용검의 무능함은 후백제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일.

두 왕자가 군대를 말아먹은 탓에, 나주의 군대를 끌어오지 않았다면 대야성에서 꼼짝없이 수성전만 치르게 생겼을 것이다.

애초에 그 둘은 인질로서 가치가 없다.

위기는 곧 기회라 했던가. 반대로 역공을 할 수도 있겠지.

“오히려 인질로 잡힌 지금이 써먹을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왕자님. 설마 형제들의 목숨으로 거래를. 왕자라면 대백제국을 위해 목숨 하나 걸 줄 알아야죠 아니겠습니까?”

“음, 확실히 형제의 도리를 생각한다면.”

최승우도 어지간히 꽉 막힌 인사다.

형제이기 전에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일단 나는 금강이니 후백제를 생각해야 하지 않나.

“상좌평. 일단 지켜보시지요.”

“예. 왕자님.”

* * *

대야성 밖 고려군 진영

고려군은 총비상이 걸렸다.

금강의 생각과 달리 그가 쏜 화살에 고려의 대왕 왕건이 화살을 맞은 것이다.

다행히 거리가 꽤 된 데다가 제대로 심부를 빗겨나간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한 나라의 군주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은 충분히 큰일이었다.

“폐하의 옥체에 대체 이 무슨 황망한 일이!”

“괜찮네. 괜찮아. 소란 떨 거 없어. 설마 거기서 금강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폐하! 소장들에게 명을 내려주십시오! 당장 가서 금강의 목을 따올리겠습니다!”

정작 왕건 본인은 이미 충분히 치료를 했고,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지만, 충성심 넘치는 그의 장수들은 금방이라도 백제군 본진으로 달려들 것 같은 태세였다.

“유금필장군도 지금 포로가 되어있으니. 이거 참 난감하게 되었어.”

왕건은 유금필도 금강에게 잡혔으니, 지금 당장은 시기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설마 유금필 장군이 금강왕자의 적수가 되지 못할 줄이야.”

“어찌 그렇기만 하겠습니까. 이미 일본도 백제 편에 선 것입니다.”

금강이 그토록 대단한 위인이었던 건가.

아니면 상대를 너무 얕잡아보고 있었나. 처음에는 그렇게도 생각했으나, 서라 벌에서 올라온 소식으로 서라벌을 털고 유유히 퇴각하는 백제의 함대의 반은 왜선이 있었다고 한다.

즉, 일본도 이제 고려의 적이라는 사실.

하지만, 서라벌을 털고 돌아가는 것을 보아 일본도 고려와 전면전을 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전황은 괜찮다.

발해 역시 거란 때문에 대군을 남하하지는 못할 테고.

다만, 왕건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제 형을 구하겠다고 수많은 적군을 향해 돌진하는 그 금강의 모습을. 적만 아니었으면 정말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을 만큼 금강은 왕건의 마음에 들었다.

왕건은 허탈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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