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여제전쟁4
* * *
신검의 막사에는 공에 목마른 자들이 역적모의라도 하듯 오순도순 모여있었다.
“하여간 아버님도 답답하십니다. 오합지졸 신라따위와 고려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왕자님. 고작 고려가 아닙니다. 왕건이 문제겠지요.”
“하지만, 병관좌평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그 대단한 유금필이란 장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큰 일날 소리를 잘도 한다. 고려의 군영에는 여전히 무시 못할 장수들이 많다. 고려가 백제보다 군사력이 밀려도 강한 이유가 그런 이유였다.
“왕자님. 지금 고려군에는 유금필을 제외하고도 맹장들이 많습니다. 폐하의 말씀도 일리가 있으니, 후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능환은 애써 왕자들을 위로했다.
“형님! 박술희놈이 군대를 끌고 사냥을 하러 나왔답니다.”
“무슨 그게 정신나간 소리인가? 박술희가? 왜?”
“원래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어리석은 놈이 아닙니까?”
확실히 박술희란 자는 그런 인물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것이 양검과 용검 형제였다.
공명심만 앞서지 않는다면, 그래도 중간은 하는 신검과는 달리 이 둘은 박술희보다 심한 족속이었다.
“형님. 군사를 내어주십시오! 가서 박술희놈을 잡아오겠습니다!”
“용검왕자님. 고려도 지금 많이 다급할 것입니다. 이는 적들의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함정이고 자시고, 생각해보십시오. 놈들도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사냥이라도 하러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었다. 신검은 당장 백제군 진영에서도 사냥이나 하게 해달라고 조르던 병졸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오히려 박술희가 방심하고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병관좌평. 아우들이 이러는데. 한 번 확인이라도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왕자님. 그러나.”
“그러나고 자시고 확인만 해보자는 겁니다. 확인만.”
“음. 확인만이라면 그리 하시지요.”
능환은 박술희를 잡겠다고 군사들을 끌고 나가는 양검과 용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괜스레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적중했다.
“뭐야? 양검이 용검이. 이 두놈이 박술희한테 잡혔다고!”
“예. 폐.폐하.”
“신검이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자빠졌느냐! 형이 되어서 아우들의 폭주도 막지 못한다는 말이냐!”
“소.송구합니다.”
신검은 고개를 숙였다.
“병관좌평을 뭘 하였는가? 신검이 옆에 있었으면, 어떻게든 그 철없는 두 놈을 뜯어말렸어야지!”
“죽여주십시오.”
능환은 자기 잘 못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목숨을 걸고라도 그 날 막았어야 했는데, 이미 일이 틀어졌다. 아니, 능환 자신도 군살이 박히고 있는 백제군들을 보다 못해 두 왕자의 객기에 어울려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이렇게 되어버렸다.
두 왕자는 보기좋게 박술희의 함정에 낚여 지금 즘 고려군 진영에서 왕건 앞에 무릎을 꿇고 잇을 것이다.
“자네가 죽는다고 양검이와 용검이를 돌려주겠는가? 자네도 너무 늙었어. 왕자라 하나 젊은 놈들이 해달라는 대로 아주 죄 밀리고 있구만. 커흠.”
“폐하. 사태가 급박합니다. 저들이 두 왕자를 생포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껏 대야성에서 백제군들을 지휘하던 애술이 다급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전투가 없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는데, 왕자들까지 잡혀가다니, 대야성 총책임자로서 이는 묵과할 수 없었다.
“두 왕자를 데리고 협박을 하려는 것이겠지. 왕자가 죽는 꼴을 보기 싫거든 대야성을 내놓고 철군하라고 말이지.”
“아버님 소자에게 군대를 주십시오. 반드시 아우들을 되찾겠습니다!”
견훤은 앞에서 군사를 청하며 고개를 숙인 신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금 신검이 간다고 한들 왕건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형제들을 구할 수 있을까? 아니다. 자기 자식이라도 인정할 건 하는 견훤이었다. 신검, 양검, 용검은 왕건과 박술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에휴. 그래. 병관좌평.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으음. 두 왕자님의 목숨이 성 하나보다 값지지 않겠습니까. 만일 왕건이 성을 내놓으라 하면 그 대신 왕자 둘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한다.
견훤은 손에 지금 벼루라도 있었으면 능환의 머리에 던지고 싶었다.
누구 때문에 이 사단이 일어났는데, 말을 저 따위로 하는가. 대야성을 내놓으라니. 대야성이 어떤 성인 줄 알고 저런 막말을 지껄이는가?
손에 벼루가 없으니 겨우 속으로 참을 인자 세 번을 되새겨 마음을 가라앉힌 견훤은 능환을 손가락질했다.
“대야성이 어떤 성인 줄 알고 그리 말하는겐가?”
“폐하. 어찌 대백제국 대왕의 자식들과 일개 성 하나를 같은 무게에 둘 수 있겠습니까?”
진짜 저걸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는 건가. 대야성이 그냥 성인가? 그간 백제군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 얻어낸 성인가?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일단 고려측에서 사람을 보내겠지.”
“폐하, 나주도독께서 장계를 올렸습니다!”
“금강이가? 얼른 가져오게!”
견훤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설마 아닐 것이다. 나주에 고려가 뭔 짓을 하리라 예견은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금강이에게 나주를 굳게 지키라고 하였다.
설마 벌써 전투가 일어난 것인가?
그래서 견훤은 떨리는 손으로 장계를 펼쳐 읽었다.
그런데 그 내용에 견훤은 어느새 주책맞게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설마 나주에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나주에 유금필의 고려군이 기습을 해왔다는군.”
순간 장내가 살얼음판 같이 차가워졌다.
금강왕자가 나주에서 패배했다면, 나주가 다시 고려에 넘어갔고 금강 역시 크게 패했을 것이다.
상대가 유금필이 아닌가. 이제 막 나주도독에 부임하여 수군을 키워내는데 전 념한 금강왕자가 유금필을 이길 수 있을까.
실제로 나주가 기습받았다는 것은 이미 해전에서 백제수군이 패한 증거가 아닐까.
“설마 나주가 다시 점령당한 것입니까?”
“아니야. 그 반대네. 금강이가 계책을 내어 유금필과 그 휘하 장졸들을 금성에서 격퇴했다더군. 승전보야.”
“뜻밖의 낭보입니다.”
이것으로 나주는 괜찮아졌다. 오히려 일을 잘 해낸 격이다.
“폐하. 신라군이 철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신라군이 무슨 이유로 철군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 양검과 용검도 잡은데다가 두 왕자가 동원한 병사들도 전멸시킨 고려와 신라연합군이다. 굳이 신라가 군사를 뺄 이유가 조금도 없다.
“세작의 말로는 서라벌이 백제 함대에 기습을 당했다는 풍문이 흐르고 있습니다.”
“서라벌이?”
“신라군이 철수까지 한 것을 보면 무슨 변고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서라벌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고서야 신라군이 물러날까. 분명 금강이 보낸 용맹스러운 백제의 수군들이 신라 남부를 싹쓸었기 때문일 것이다.
“푸하하하핫! 백제의 함대라면 금강이가 관리하고 있지 않은가? 보나마나 상귀장군이 지휘했겠군. 천년왕국 신라의 수도가 털린 일이 아닌가? 이거이거양검이와 용검이를 잡았다고 잔뜩 흥겨웠을 왕건이의 얼굴을 보고 싶구만!”
넷째아들의 승전보에 장내가 떠나라가라 웃던 견훤은 금강이가 너무도 자랑스러웠으나, 장자인 신검은 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강이 왕위에 욕심낸다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으나, 양검과 용검이 일을 망친 탓에 부왕의 신임이 땅에 곤두박질쳤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양검과 용검을 되찾는 것.
‘그렇다면 나도 공을 세우기는 해야겠지.’
신검은 아우인 양검과 용검을 구하기 위해, 공을 세우기 위해서 휘하의 군대를 움직이기로 했다.
* * *
“뭣이여 저게.”
백제수군들을 훈련시키는 나주진 앞바다에 수백척의 함대가 금은보화를 담았다.
서라벌을 털라고 한 것은 그냥 희망사항이었다.
아니, 처음에는 진심이었지. 그런데 직접 유금필의 고려군과 전투를 치르고 알았다.
당장 비슷한 군세로 고려군과 싸운 것이 이만한 피해를 입었는데, 고작 다타라와 탐라, 백제 수군 일부만 끌고 간 상귀가 과연 서라벌 근처까지 갈 수 있을까. 아니, 솔직히 말해 상륙이 성공할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전쟁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귀라는 놈은 일을 저질렀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금은보화를 죄다 실어날랐다.
“크하하하핫! 아주 잡졸들이더군요. 신라놈들은 우리 백제의 나투기만 봐도 오줌을 지리면서 도망쳤습니다!”
본인 말로는 저렇게 지껄이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상귀가 끌고 간 다국적 수군 숫자가 1천이다.
이게 많기는 해도 천년왕국 신라의 수도란 말이다. 아무리 몰락해가는 신라라해도 수도까지의 방비가 그렇게 비어있을 리 없다.
운좋게 서라벌을 턴다고 치자. 그런데 서라벌을 다 털어서 나르려면 사람도 꽤 써야 한다. 신라인들을 협박하여 써먹는다해도 이게 쉽게 가능한 일인가?
대체 신라는 지금 얼마나 개판인 거야?
아니면 상귀 저놈이 생각보다 명장이었나?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후백제의 기록이 고려에 의해 많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이게 다 왕자님 덕이 아니겠습니까.”
미친놈인가? 내가 뭘 했다고?
아, 지금 이 새끼. 나 떠보는 거지. 자기 공을 내가 빼앗는지 아닌지 보고 신검이에게 꼬지를 생각일 것이다.
내가 낚여줄 것 같냐?
“아닙니다. 다 상귀장군이 뛰어난 덕이지. 어찌 내 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명령을 내린 건 이 몸이지만, 군사들을 부려 천년왕국 신라의 서라벌을 털어버린 것은 오로지 상귀장군의 공이 아닙니까? 내 폐하께 상주하여 장군의 공을 백제 온 천하에 알릴 것입니다.”
“크흑 왕자님. 감사합니다.”
사내새끼가 눈물 질질 짜지 마라.
그래도 한결 가벼운 마음에 나는 가슴을 내려놓았다.
“자, 이제 남쪽은 정리가 되었군요.”
“하지만 서라벌을 아주 다 털지는 못하였습니다.”
“아니, 뭐 그걸 정말 무식하게 다 털 수는 없죠. 수고하셨습니다.”
그걸 다 털려고 하다니. 이 상귀는 대도의 기질이 있다.
“왕자님께서도 유금필을 잡으셨다 들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예. 슬슬 만나볼 생각입니다. 오늘은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넉넉히 내릴 터이니 상귀장군도 오늘은 즐기시지요.”
“예. 왕자님!”
저 인간이 저로 즐거워하는 것이 수상한데.
일단 유금필의 면상을 한 번은 보기로 했다.
고려의 유명한 장수다. 한 번 즘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
일단 임시로 유금필 전용 감옥을 찾아갔다.
“이거 참, 유금필 장군.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금강왕자.”
“나름대로 그래도 잘 대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 쳐다보면 이 사람이 참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괴물을 쳐다보는 것처럼 보고 있으니. 참 서운하다.
“대체 왕자는 누구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소만.”
“하하하. 그럼 내가 뭘로 보이는가? 잘 못 본 것은 아닌가?”
“내가 장수로서 살아온 지 오랜 세월이오. 내가 그걸 모르겠소? 당장 왕자도 그리 말하는 것을 보면 알고 있는 것이 아니오?”
아, 들켰네.
“하하하. 들켰군.”
“무슨 말씀이신지.”
“난 이 땅의 신이 삼한을 통일하라 내린 선택받은 자라네.”
넓은 의미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다만 3일 휴가 때문이하는 것이 어이없을 뿐이지.
“천지신명께서?”
“그렇네. 하여 그 신께서는 그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는 단단한 몸을 내리셨지.”
“어째서 저희 주인이 아닌 백제의 왕자가.”
왕건이 하늘에 허락이라도 받은 것 같던가.
“왕건은 선택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크윽. 대체 왕자는 어디까지 갈 생각이오?”
훗날 결국 편한 인생을 살기 위해 이짓거리를 하고는 있다만. 그래. 명색이 왕자로서의 포부는 보여야겠지.
“나 부여금강은 옛 백제의 영광을 회복하고, 나아가 부여의 강역을 회복할 것 이네.”
“백제는 발해와 동맹이 아니오?”
그래. 백제와 발해는 동맹이다. 부여의 땅을 회복하고자 하면 발해와 부딪칠수밖에 없다.
동맹자체는 언젠가 발해의 땅을 먹기 위한 판이라는 거지. 혈맹이라고만 볼수는 없다.
그런데 유금필이 괜히 내가 말한 것을 발해에 떠벌리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발해가 거란을 무찌르고 부여의 강역을 회복하는 것이 곧 백제가 회복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대는 어찌할 것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게요?”
“나를 따라 대업을 함께 할 것인가. 아니면 고려의 왕건을 따를 것인가?”
한마디로 나는 지금 유금필을 얻고 싶었다.
훗날 북방에서 거란을 두드리고 중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유금필같은 명장은 확실히 필요하다.
아, 내가 한다는 말이 아니고, 백제에 있으면 견훤이나 신검이나 둘 중 하나는 쓰겠지.
자, 그래서 유금필의 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