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19화 (19/154)

19. 여제전쟁3

* * *

챙! 카앙! 챙! 끄아악!

사방에서 아군이 후백제군에게 밀리자, 고려 장수놈들의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뭐야, 무슨 군대가 이렇게 많다는 말인가?”

“장군! 퇴각하셔야 합니다!”

“크윽. 이럴 수가. 나 유금필이 그 어린 왕자에게 이처럼 농락당하다니! 패장이 어찌 폐하의 용안을 볼 수 있다는 말이냐!”

“지금이라면 퇴로가 열려있습니다!”

고려군 측에서는 퇴각하네 마네 말이 오가는 것 같다.

끼이익-쿠웅!

병사들을 시켜 성문을 닫았다.

누가 멋대로 도망치게 내버려둘 줄 알고? 고려의 맹장이라고 하기에 좀 대단한 줄 알았더니 졸장이 아닌가?

“어딜 가시는가. 고려의 졸장 유금필.”

“부여금강!”

“신라 잔적과 연합해 우리 부여족의 마한을 침범하려는 간악한 놈들! 뭣들 하느냐! 모조리 베라!”

내 휘하의 백제군들이 일제히 고려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끄아악! 살려줘!”

“크허억!”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퍼진다.

매복과 기습공격에서 이미 한차례 전의를 상실한 고려군이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백제군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금강왕자! 이대로 라면 서로의 병사들의 피해만 늘 뿐! 무릇 장수란 제 부하들을 아낄 줄 알아야 하는 법이오! 우리 둘이 합을 겨뤄 전투를 끝내는 것이 어떠한가!”

저 새끼가 이제는 개수작질로 도발하고 있네.

“왕자님, 도발입니다. 아군이 유리한데 굳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음, 그렇지. 저건 도발이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왕자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내가 만일 금강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닉값 능력이 없었으면 나도 헛소리 말라고 화살이나 퍼부어 죽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무척 단단하다.

검? 화살? 창? 안 통한다. 나는 사실상 무적이다.

“저놈 손에 죽은 병사가 벌써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 번 싸워보지요.”

나는 클등으로 목을 두드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왕자님!”

“후. 상좌평은 걱정도 팔자입니다. 나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마음쓰지 마십시오.”

히죽 웃었다. 이것은 자신감. 유금필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는 자신감이었다.

아군의 사기를 더 높일 방법이 있다.

여기서 내가 저놈을 잡는다면 백제군들은 사기가 크게 오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놈은 백제를 귀찮게 만드는 고려의 장수들 중 한 명이니까.

“유금필이란 장수를 내 이렇게 보게 되다니. 참으로 놀랍군.”

“이 몸도 백제국의 왕자를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오.”

“뭐 그건 그렇다해도 내가 이긴다면 고려군은 모조리 몰살시켜도 상관없는가?”

“그런 말은 나를 이기고 하시오!”

놈이 말을 움직여 내게 달려들었다.

깡! 채엥! 캉!

음 역시 조금 밀리고 있다.

원래 전장에서 구르던 놈이고, 나는 군사적 재능이 출중하다고 해도 유금필에 비하면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수준이다.

그럼 믿을 건 결국 이 단단한 육체 뿐. 적당히 쳐내면서 지친 유금필을 완전히 힘빠지게 만들어야 한다.

“왕자님!”

“후하하핫! 훗날 고려의 위협이 될 만큼 검을 참으로 잘 다루고 있으나, 결국 그 뿐이오! 자! 내 검으로······.”

깡!

유금필의 검이 내 몸에 닿아서 단단한 소리를 냈다.

그렇다. 유금필의 검은 내 몸을 베지 못했다.

자기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몸을 확인하는 몰골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

“검으로 뭐요. 새꺄. 아주 양학할 줄 알고 좋아라 공격해댔지? 내 이름이 바로 금강이야. 이 고려의 모자란 놈아!”

이번에는 내가 검을 휘둘렀다.

설마 자기 공격이 허무하게 막힐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지. 한동안 멍한 모습으로 있던 유금필은 어깻죽지가 검에 크게 베였다.

사람을 처음 베는 감각은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는데, 화살로 맞추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내가 베는 건 아니니까.

“큭!”

검에 베인 유금필은 그래도 말 위에서 낙마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장수라도 검상을 입고 낙마까지 한 상황에서 나에게 덤비지는 못할 터. 내가 그 목에 검을 들이대자 유금필은 분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느새 다가온 아군에 나는 명령을 내렸다.

“유금필을 포박하라.”

“예!”

“너희들의 장수가 쓰러졌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

고려군은 무패의 장수 유금필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진작에 사기가 떨어져있었다.

하나 둘, 병장기를 내려놓고 백제군에게 항복을 했다.

이 정도라면 후일 대야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포로와 유금필을 가지고 왕건과 협상의 여지가 있다.

“왕자님. 고려군 1천2백을 사살하고 포로는 3천이 넘습니다. 대승입니다!”

“““대백제국 만세! 마한패왕 만만세!”””

“““대백제국 만세! 마한패왕 만만세!”””

아주 난리가 났다. 이 몸가지고 유금필한테 지면 나가죽어야지.

나는 서라벌이 있는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은 어떻게 됐는데, 서라벌 상황이 궁금하군.”

여기서 승리해봤자 대야성에서 밀리고 서라벌에서 피해를 입으면 삼국통일 전쟁을 재조정해야 한다.

일단 두고 봐야겠지.

* * *

신라 남해안

신라 남해안은 백제의 함선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지휘관은 상귀. 백제 나주도독이자 수군제독인 금강으로부터 지휘권을 얻은 백제의 장수였다.

백제의 수군들은 이제 막 상륙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장군. 고작 다타라와 탐라 촌것들로 서라벌을 털 수 있겠습니까?”

상륙을 준비하는 다타라, 탐라, 백제의 수군들을 지켜보던 한 장수가 문득 상귀에게 물었다.

“음, 한 번 해보는 것이지. 대야성에 폐하와 신검왕자님을 위해 후방을 교란 시키는 것이 금강왕자님의 주목적이라 하셨으니 말이야.”

“하오나 왕자님은 서라벌을 정말 털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저 많은 배들을.”

“큭큭. 네가 아직도 왕자님을 모르는구나. 제 아무리 신라라 해도 본래 방어하는 측이 더 유리한 법이다. 쉽게 뚫기 어렵겠지. 우리는 여기서 놈들에게 혼란을 주어 대야성에 더 지원군이 가지 못하도록 막으면 그만이야.”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자의 뜻은 그럴 것이다.

설마 진짜로 털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백제와 달리 신라는 남은 군사들을 끌어모아 백제의 수군을 대비하고 있었다.

“백제의 수군이 서라벌로 올 것이라는 보고다!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마라!”

“예!”

“적은 고작 수천! 충분히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어?”

“수.수백척이 넘지 않는가! 그것도 큰 군선이 저렇게 많다니!”

듣기로는 끽해야 수십척에서 많게는 작은 군선 백역척 정도라고 들었다.

그런데 저게 뭔가. 고려는 대체 뭘 어떻게 확인한 것인가. 어떻게 저리 많은 군선이 있다는 말인가?

자세히 보니 왜선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다면 설마 왜와 연합인가?

“전부 묶여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이곳을 넘을 것 같습니다!”

“히.히이익! 도망쳐!”

“다 죽을 거야. 못 싸워!”

백제의 수군을 맞이한 신라군들은 모두들 혼비백산하였다.

그리고 그 광경은 상귀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장군. 저놈들 도망가는 것 같은데요?”

“음? 아! 이런 어리석은!”

이제야 금강왕자의 뜻을 알게 되었다.

금강왕자는 이 상황을 전부 예견한 것이다. 수백척의 함대는 실제로 금은보화를 담기 위함이다.

심지어 오합지졸 신라군들이 함대의 숫자에 놀라 허겁지겁 도망칠 것이라는 것도 예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비어있는 배까지 전부 끌고 가래서 대체 무슨 정신나간 소리인가 싶었는데, 역시 단신으로 나주의 호족군을 무너뜨린 인물답다.

“예?”

“이제야 왕자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끌고 온 배만 크고 작은 배가 2백척이 넘는데. 놈들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대군으로 보였겠지.”

이만한 함대면 백제 수군들이 전부 승선해도 넘치는 배다.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신라의 군대는 얼마나 질이 떨어진 건가.

“아니, 그걸 믿는다는 말입니까?”

“오합지졸 신라군이 아닌가. 큭큭큭. 이거 정말 금강왕자님 말씀대로 가능하겠어. 당장 서라벌을 털러가자! 크하하하핫!”

“예. 장군!”

병사들은 끽해야 다타라에서 올라온 응원군과 탐라출신에 일부 백제수군들이 더해진 연합수군들일 뿐이지만. 서라벌이 비었다면 해볼 만하다.

문제는 금은보화를 털어갈 때다.

천년왕국신라의 왕도다. 털어갈 것이 많을 텐데. 지금 병사들로 다 털 수는 있을까?

* * *

대야성-고려군 진영

대야성에서는 한참 백제군과 고려, 신라연합군이 서로에게 시퍼런 창칼을 들이대고 대치하고 있었다.

무려 삼국의 군주가 모인 자리다.

신라가 고려와 연합인 것만 제외하면 삼한의 패권이 걸린 전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주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이렇게 시일을 끄는 것은 좋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먼저 치기에는 위험하지 않습니까.”

“설마 견훤왕이 저렇게 신중하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끄응.”

그 견훤왕이다. 어떻게든 고려를 이기고 싶어 먼저 군대를 낼 인물이 저렇게 성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견훤과는 행보가 달랐다.

장내의 장수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까지의 백제와는 사뭇 다르다. 대야성을 일거에 점령하는 기염을 토한 주제에 북진도, 그렇다고 동진도 하지 않으니까.

북쪽에서는 말갈군이 가끔씩 찔러대니,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발해에 항의사신을 보냈더니, 가독부 대인선은 그건 발해 세력권에서 이탈한 말갈군의 행위라고 일축했다.

심지어 거란과의 대치로 그들을 단속할 수 없다고 하니 고려로서는 남쪽의 우환이라도 없애야만 했다.

그래서 왕건은 직접 군대를 끌고 왔다.

그런데 정작 미끼를 물어야 할 견훤은 가만히 있다.

“계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참 침음을 흘리던 그때, 장군 박술희가 운을 띄웠다.

“무슨 말인가? 박술희는 어디 한 번 말해보게.”

“견훤왕과 달리 장자인 신검왕자는 공명심이 앞서는 인물입니다.”

“박장군의 말이 그럴 듯합니다. 일부러 우리가 조금이라도 문을 열어둔다면, 견훤왕은 몰라도 신검은 움직이려 하지 않겠습니까?”

왕건은 턱수염을 훑으면서 미간을 좁혔다. 분명 그럴 듯하다.

신검, 양검, 용검은 공을 세우는데 혈안이 되어 늘 고려에 늑대처럼 달려들었다.

그 탓에 후백제의 군대는 몇 번이고 크게 애먹은 적이 있던 것을 왕건도 알고 있었다.

일부러 기회를 주는 것이다.

견훤은 걸리지 않더라도 신검을 비롯한 견훤의 왕자들은 걸려들 수도 있음이다. 그렇다면 이번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

“음, 한 번 해보지. 누가 해보겠나?”

“소장이 해보겠습니다.”

“그래. 박술희 장군이 한 번 해보게.”

왕명을 받은 박술희의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걸렸다.

* * *

대야성 관아

대야성 관아에는 장내에 신검을 비롯한 백제의 장수들이 견훤에게 불만을 토하고 있었다.

“폐하, 폐하의 친정군입니다. 어찌 고려놈들과 싸우지 않는 것입니까?”

“신검왕자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이대로 서로 대치만 한다면 병사들의 몸에 군살이 생길까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이미 몇 몇 병사들은 하나 둘 기강이 해이해졌다. 그런 마당에 전투가 이대로 없다면 어느 쪽이고 쉽게 무너지리라.

“군사들이야 훈련시키면 그만이 아닌가. 병관좌평 능환.”

“예. 폐하.”

“굳이 우리가 고려군을 자극할 필요가 없네. 아, 저들보다 우리의 군세가 압도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부딪치다가는 피해만 커질 수 있음이야.”

견훤도 모르지 않았다. 이대로 마냥 부딪치면 서로 피해만 입을 뿐이다.

“그렇다해도 삼국의 군주가 대야성에 있습니다. 이는 무척 뜻깊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대야성에는 백제왕 견훤과 고려의 왕인 왕건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년왕국 신라의 왕도 고려와 같은 진영에서 머물고 있었다.

“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전투다운 전투는 해봐야 한다 생각합니다.”

“왕건이가 지금 신라군과 함께 짐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어. 대뜸 범의 아가리에 범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왕건 역시 삼한을 평정할 영웅 중의 영웅이다. 그런 자를 상대로 구태여 백제군이 먼저 움직일 까닭이 없다.

“음. 그건 또 그렇습니다만.”

“침착하게 기다려 보시게. 결국 급한 것은 왕건이지 우리 백제가 아니야. 모두들 잘 듣게. 짐의 명이 떨어지기 전에는 함부로 군을 움직여서는 안 될 것이야.”

“““예. 폐하.”””

견훤은 장수들에게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태자의지위에 목마른 신검과 양검, 용검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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