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여제전쟁2
* * *
서라벌을 털자.
무려 천년왕국 신라의 성도를 털어버리는 거다.
평양성, 사비성도 털렸으니, 서라벌도 털려봐야지.
"상애장군에게 수군 지휘권을 넘기겠습니다. 상귀장군은 다타라에서 올라올 용병들로 서라벌을 털어주시지요.”
“예. 왕자님!”
“맡겨만 주시지요. 하오나 왕자님께서는.”
“상좌평의 말이 옳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한 고려가 단순히 대야만 치려고 내려올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 예상이 맞다면 확실히 고려의 수군들은 올 것이다.
아마 네임드가 오겠지. 대야성에만 몰려있지는 않을 터.
내 능력만 믿고 나까지 신라로 가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그렇다면 고려군을 바다에서 잡냐, 육지에서 잡냐. 둘 중 하나다.
바다는 위험하다. 우리 쪽에도 수군 장수가 있다고 하지만 2년간 준비한 고려다. 우리 수군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할지는 알 수 없다.
잘 못하면 그 많은 배들을 요동에 동원하기 전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번 전투에 삼한의 패권이 걸려있습니다. 우리도 잘 생각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상좌평.”
“예. 왕자님.”
“배를 전부 신라 쪽으로 돌려놓으세요. 상귀장군이 털어올 천년왕국 신라의 금은보화를 털어와야지요.”
배를 빼야 고려놈들이 더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다.
내 말에 상좌평 최승우와 장내의 장수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대체 뭔 개소리인가 싶겠지. 나주도독은 수군총사의 지위도 가지고 있는 데, 바다에서 적을 막을 생각을 안하고 아낀다는 것으로 보일 테니.
“고려의 수군을 바다에서 격퇴하지 않을 것입니까? 배를 아끼고자 한다면, 차라리 해안가에서부터 철저하게 적들을 격멸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성내까지 들어오게 합시다.”
성내에서 놈들을 요격하는 것이다.
나주성(금성)은 현재 증축을 하면서 철옹성으로 변했다.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외성으로 들어왔을 때 놈들을 잡아도 되고 공성전을 해도 되기는 한다.
“왕자님. 설마 적들을 금성까지 유인하여 금성을 적들의 무덤으로 만들 요량이십니까?”
“잘 알고 있군요.”
“너무 위험한 전략입니다.”
위험하겠지. 성에 군사들이 없다면 말이다.
“성공만 하면 배 한 척도 잃지 않고 적장의 목도 함께 취할 수 있는 완벽한 전략이 아니겠습니까?”
“정찰선을 띄워 적들의 항로를 확인하겠습니다.”
당장에 고려군이 온다는 확신은 없다.
와도 좋고, 오지 않아도 좋다. 오면 후백제가 확실히 고려의 재해권까지 얻게 될 것이다.
“왕자님! 고려의 함대가 나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역시 생각대로였다.
사실 원칙대로 라면 상륙할 때부터 철저하게 적들을 두들겨 패야 하지만, 우리측의 피해가 커질 수도 있고, 상대가 머리가 있다면 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물러날 수도 있다.
“적장이 누구라 합니까?”
“유금필이라 합니다.”
고려를 경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잡아야 하는 인물이다.
그 맹장을 잡지 못하고 어찌 삼국통일을 논할 수 있을까?
“유금필이라. 한 번 잡아볼까요?”
“가능하겠습니까?”
“나 부여금강입니다. 못할 것도 없습니다.”
금강의 힘으로 부딪치자.
* * *
고려의 수군을 이끌고 있는 유금필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고려의 왕 왕건이 야심차게 준비한 금성 기습작전.
육군은 대야성을 치고, 수군은 나주를 치는 양동작전이었다.
신라는 고려를 믿고 병력을 내어 일부러 백제의 수군이 신라 본토를 노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고, 그 빈틈을 타 나주를 공략하여 금강을 사로잡는 것.
그것이 이번 전투의 궁극적 목표였다.
“발해만 믿고 있는 백제의 뒤통수를 노리기 위해 양동작전이라,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장군!”
유금필의 부장은 나주에 상륙할 생각에 가슴이 벅찬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운이 좋았네. 금강왕자가 함대를 풀어 서라벌로 보내다니,”
반대로, 금강왕자가 정말로 서라벌을 노리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도 든다.
“나주의 금성은 빌 것입니다.”
“음, 하지만 이상하다는 말이야. 금강이란 왕자에게 나주도독의 자리를 주었어. 그럼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거지.”
견훤이란 자가 금강이라는 자식을 끔찍이도 여긴다지만, 아무런 능력도 없는 왕자에게 나주도독의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설마 그렇겠습니까?”
“예. 젊은 혈기에 공을 세워보겠다고 신라로 함대를 보낸 아둔한 놈이 아닙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말이다.
고려의 바다를 넘나들며 대진국까지 다녀온 작자가 그렇게 섣부른 행동을 하는 건가?
젊은 혈기만 믿고 지른 행동인가?
“더군다나 동맹국인 일본도 있어. 이번 전쟁에서 일본이 빠지겠는가?”
“일본은 멀지 않습니까.”
나주가 공격받을 때, 어느세월에 일본에 지원요청을 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완산주의 지원을 받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흠. 그런데 뭔가 수상하다는 말이지.”
“하하하핫. 장군님은 걱정도 많습니다. 너무 신중하시면 오히려 놈들에게 시간만 주는 꼴이 될 것입니다.”
“음, 그런가.”
그래. 신중한 것도 정도가 있다. 장수란 자는 자고로 주저함이 없어야 하는법. 하물며 때가 이르렀는데 놓칠 수는 없었다.
“크하하하핫! 그러면 그렇지. 배가 죄 빠져있고, 심지어 병사들도 없지 않은가!”
“병사가 없다니요. 저길 보십시오. 망루에서 놀라 자빠지는 백제군이 있소이다!”
유금필을 자꾸 불안한 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정찰선이라도 보냈을 터인데. 없는 병사라도 해안가로 보내 상륙할 때부터 우리를 쳐야 옳지 않은가.
정말 괜한 기우인 것인가?
“그럼 금성으로 가보세.”
“예. 장군.”
찝찝한 기분을 애써 가슴 속에 담아두고, 유금필은 병사들과 함께 나주 땅에 상륙하였다.
* * *
“적군들이 상륙하였습니다.”
놈들이 마침내 상륙했단다. 마침내 때가 이르렀다.
“자, 그럼 나갑시다. 부여군은 준비되어있습니까?”
부여군. 내가 조직한 정예 군사조직이다.
요동에 상륙하면 거란을 상대로 빠르게 치고 튀는 용도의 군대다.
그리고 병사들 전부가 흑각궁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말을 탄 궁기병이다.
숫자는 일단 1백 정도. 수군들은 지금 나주성에 집결해두고 있다.
“자, 그럼 갑시다.”
간만에 내 스스로 하는 출정이다.
유금필이 네임드기는 해도 단단하기 짝이 없는 내 몸을 이길 수 있을까? 내가 맞으면서 싸워도 충분할 것이다.
“왕자님. 저길 보시지요! 고려군입니다!”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5천 입니다!”
“확실히 제법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상대도 우리를 봤군요.”
눈앞의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을 가지고 있으니 여유를 부릴 만하기도 한데.
서로 화살의 사정거리다.
아니, 이쪽이 조금 더 길 것이다. 흑각궁이 아닌가. 저놈들은 우리가 그저 대치하는 거라 여길 것이다.
저 앞에 몸이 풍만한 인간이 유금필인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체구다. 내가 무적이 아니라면 오줌이라도 지렸을 그런 인물이다.
지금 당당히 우리들 앞에 서서 노려보는 것도 기선제압하려는 것이겠지. 아니면 병력의 우위를 두고 자신만만하다던가.
어쨌든 기세싸움에 져줄 수는 없다.
나 역시지지 않고 똑바로 노려봤다.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노려본다는 말인가?
“저들이 활의 사정거리에 있습니다. 충분히 먼저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던 대로 합시다.”
먼저 활의 시위를 당긴 것은 우리 백제군이었다.
쉬 쉬이이이익! 쉬익!
통아에서 힘차게 애깃살들이 날아올랐다.
“크하하하핫! 백제군은 화살도 제대로 쏘지 못하는가 보옵니다.”
“애초에 저 거리에서 아군을. 커헉!”
푸부부북!
흑각궁의 효과는 뛰어났다.
순식간에 고려군의 선봉에 있는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내가 맞춘 병사들도 여럿된다. 화살이 올랐는데도 우두커니 있는 거 보면, 아마 화살도 제대로 날리지 못한 거라 여긴 모양이다.
그러니 당하는 거다. 한심한 놈들.
“대오를 유지하라! 반격하라!”
유금필이 애써 병사들을 다독이면서 화살을 날리지만 닿지 않는다.
“자, 뭣들 하냐. 몇 번 더 날려라!”
부여군은 훈련을 한 대로 막힘없이 화살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두 세 번 날리자 유금필도 기병을 내어 돌격해왔다.
“퇴각하라!”
당황한 놈들과 달리 우리 군은 대오를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퇴각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치고 빠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적들의 규모는 5천. 부여군의 궁기병으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지만 놈들을 피곤하게 만들기에는 적당했다.
“저 백제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퇴각하라!”
그렇게 성까지 유인했다.
고려군들은 오는 동안, 우리들의 궁에 몇 번이나 놀아났다. 그리고 부여부대는 치고 빠지기의 달인이 된지 오래였다.
유금필이 금성에 오는 것보다 더 빠르게 나는 금성에 도착해 상좌평 최승우를 불렀다.
“백성들은 들여보냈습니까?”
“예.”
“성내 주요시설에 불을 붙여야겠습니다. 군량고에 불을 붙이시지요.”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다.
마치 우리가 군이 열세라 성을 불지르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그리하겠습니다.”
“병사들은 각자 제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요?”
“예. 명령만 떨어지면 고려군을 모조리 몰살시킬 것입니다.”
“유금필이 걸려들겠습니까?”
아마, 걸려들 거 같은데. 물론 유금필이 걸려들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그 아랫놈들 중에서는 낚이는 놈도 있을 것이다.
“유금필이 총사라고 해도 그 장수들은 다르겠지요. 배들이 다 빠졌으니 우리 수군들이 없을 거라 생각할 것입니다.”
“음, 왕자님의 뜻대로 만 된다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주력군은 빠져있고, 성은 비어있습니다. 무혈입성만큼 통쾌한 승리는 없지 않습니까?”
군량창고를 비롯한 성내 주요시설들일 불타오르면 놈들은 아마 방심하고 성으로 들어올 터. 놈들이 승리감에 도취되어있을 때, 성내에 매복중인 병사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적들을 처단한다면?
일단 매복시킨 군사들을 점검하고 나 역시 고려군이 입성하는 성문 근처에서 대기했다.
슬슬 놈들이 성내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거야 원. 금강이놈을 잡을 수 있었는데, 도망하나는 재빠른 놈이로군.”
앞에서 고려의 장수들이 비어있는 성내를 보고 비웃었다.
반면에 유금필의 표정은 조금 썩어들었다.
생각보다 전투가 싱겁게 끝난 데다가 자기 군대가 지쳐있는 탓이겠지.
“흠.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야. 백제의 수군들이 회군해올 수 있을 테니. 이미 한 번 타격을 받지 않았나.”
“서라벌이 비어있지 않습니까?”
“제 아무리 몰락한 신라라도 백제의 수군들은 막을 수 있을 것이네. 나주의상황이 정리되면 군대를 내어 신라를 또 도우러 가야 할 것이야.”
“예!”
“그리고 도주했을 금강을 추격해야 하네. 병사를 추리게.”
신라를 도우러? 누구 마음대로? 그리고 나를 잡는다고?
고작 고려의 일개 장수 주제에 건방진 것도 정도가 있다.
나는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불화살. 저것은 금성을 점령한 고려군에 대한 반격의 신호다.
“백제의 병사들이여! 고려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저 유금필이를 잡아라!”
불화살이 오름과 동시에 민가와 저잣거리 등에 매복하던 백제군이 쏟아져나와 고려군들을 향해 창칼을 휘둘렀다.
“매복이다! 비열한 백제놈들!”
비열하다니. 하나의 작전이라고 해달라.
“막아라! 방패를 세워라!”
“장군! 이미 대오가 무너졌습니다!”
사방에서 덮치는 백제 수군들 덕에 안 그래도 진이 빠져 있던 고려군은 대오를 유지하지 못했다.
“기분이 찜찜하다 했더니 이런 변수가 있었나!”
“적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막아라!”
얼마 되지 않는다니. 멍청한 소리다.
지금 이 금성에만 5천의 백제 수군과 호족군이 있다. 여기까지 오느라 진 다 빠진 고려군이 과연 맞설 수 있을까?
심지어 화살을 무더기로 맞았는데?
무리지. 여기까지 오면서 온갖 고난에 시달렸을 텐데. 안 그래도 피로한 몸인데 준비만전 백제군을 상대할 수 있다고?
너희들은 그냥 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