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여제전쟁
* * *
“왕자님.”
“무슨 일입니까. 상좌평.”
무엇을 개발할까.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최승우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이참에 나주에 성을 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
“그렇습니다. 혹시 모를 고려의 공격에 대비도 해야 삽니다.”
이미 성은 있는데, 아마 고려군의 힘을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성도 좀 많이 쌓는 것이 좋겠지.
나주는 이제부터 일본, 중원, 더 나아가 멀리 동남아와도 교역할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다. 그러자면 방어체계도 단단히 만들어야 한다.
아마 고려라면 지금쯤 나주공략을 준비할 수도 있다.
“거중기가 어떨까.”
거중기를 꺼내면 그래도 그 여자가 얼씨구나 좋다고 뭔가 주지 않을까?
전에 백제가 백제다워진다에 관련하여 업적을 클리어했다. 여신이 좋아한다고 했지. 그럼 뭔가 있을 것이다.
발해, 일본과의 동맹은 업적이 아닌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상좌평.”
거중기가 도르래의 원리였지.
조금 머리만 굴리면 어떻게 될 것도 같다.
“탐라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완산주에서 사신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탐라에 사신을 보내는 것은 완산주 조정의 역할이었다. 나주는 결국 일개 지역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사신을 보내다가는 상원부인이 나를 죽이려고 또 작정을 할 것이다.
그동안은 일단 거중기를 만들어 성을 만드는데 써볼까.
하긴 생각해보면 지금 백제는 고려의 공세를 막을 성들도 중요하다.
신라와의 전선에 주력군을 두면 결국 북쪽 고려와의 국경이 막히게 되니까.
그렇다고 거중기를 그대로 완산주에 바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나주를 중심으로 발전시킨 후에 완산주에 바치든 말든 해야겠지.
이참에 석조 건물도 만들어봐?
“이래 보여도 나도 나름대로 건축에는 일가견이 있단 말이지.”
도르래의 원리만 파악하면 거중기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몇 번의 시행착오만 거치면 완성할 수 있겠지.
“상좌평. 석공과 목공들을 비롯한 장인들을 불러주십시오.”
“음, 성을 쌓는데 필요합니까?”
“예. 그리고 목공과 대장장이들도 필요합니다.”
어쨌든 나주는 왕건의 부인인 오씨의 고향이다. 아마 왕건은 어떻게든 나주를 얻으려고 애를 쓸 거다.
성을 짓는 것은 나름 명분이 있다.
“음, 의외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은데.”
석공들은 성만들 때 쓰려고 불렀고. 목공들은 거중기 좀 만들어보려고 그런다.
최승우는 상좌평의 권한을 이용해서 마한땅의 장인이란 장인은 모조리 끌어모았다.
“부르셨습니까. 왕자님.”
“이걸 만들 수 있겠나? 도르래라는 건데.”
도르래로 거중기 비슷한 것의 설계도를 만들어보기는 했다.
장인들은 거중기의 설계를 보더니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못 만들 것도 없습니다.”
“기간은 충분히 주겠네.”
그래서 만들기는 만들었다. 거중기가 조선후기에 만들어진다고 해봤자 결국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니 어렵지 않을 거다.
“제대로 될까?”
“일단 실험해보고 문제점들을 고치면 될 것입니다.”
대장장이들을 불러서 만들기는 했는데. 힘이 부족하다.
내가 아는 거중기랑은 조금 다르다.
일단은 성벽에 들어갈 석재를 들게 해보았다.
쾅!
돌을 들다가 갑자기 거중기가 내구도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음, 조금 어이없게 부서졌다. 도르래의 힘이 조금 부족해보이는 것 같은데.
“아직 힘이 부족한 거 같은데.”
“도르래를 조금 추가하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또 하체가 튼튼하지 못합니다.”
“해보지.”
도르래를 몇 개 더 추가했더니 그제야 잘 된다.
그럭저럭 거중기 모양새인데? 아니, 정약용이 만든 것보다 조금 멋져 보이지 않나?
이걸로 국경에 성들을 좀 쌓아두면 괜찮을 거 같다.
“이걸로 수군들을 훈련시킬 군영을 만들도록 하지. 성을 쌓게.”
“예. 왕자님.”
그 사이 나는 사자목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탐라 촌것들에게 내 작품을 보여줄 때가 되었지.
* * *
탐라에 사신을 보냈더니, 우리가 꽤 걱정했던 모양이다.
탐라는 의외로 쉽게 후백제에 복속되기를 원했다.
원래 한반도에 무력으로 대항한 적이 있는 지역이던가? 기억나는 거라고는 목호의 난 정도인데. 그 마저도 탐라가 독립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지금의 탐라는 한반도의 정세를 주시하며 유리한 쪽에 들러붙는 작자들이다.
약소국으로서 주제파악을 하는 무리들이다.
다만, 그 탓에 남은 문제가 있다.
“이 사자목상을 어따 쓰지?”
문제는 이거다.
나는 사자 목상을 절찬리 장인정신으로 한땀한땀 만들어나갔다.
그런데 탐라놈들이 그렇게 쉽게 항복하면 어떻게 하나?
이때 감귤이 탐라에 있었나? 한라봉이라던가. 그놈들한테 공물 좀 받지 않으면 열이 뻗칠 거 같다.
“아예, 아군의 전함에 저 목상을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나름 위엄이 있어 보일 것입니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오. 왕자님께서 공들여 만드신 것을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탐라놈들이 완산주로 조공사절을 보낸 것이 사실이긴 합니까?”
“예.”
정말로 이 사자목상은 쓸모가 없어졌군.
“우선 지금 당장 전선의 앞에 붙여 대 백제국 수군의 위용을 보이겠습니다.”
“그리하게.”
“아니, 정말 그렇게 하겠다고?”
“왕자님. 말씀이 좀.”
지금 내 말투 따질 때냐.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요? 쪽팔려죽겠구만.”
“아예 깃발도 이 사자라는 것의 것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냐?”
“예?”
“아닙니다. 백제의 수군기는 매로 갑시다. 나투 어떻습니까.”
고구려가 삼족오라면 백제는 매가 상징이 아니던가.
후백제의 수도는 완산주이지만, 지금 내가 나주도독으로 있는 이상은 이 나주를 중심으로 백제의 부를 채워야 한다.
결국 답은 교역이다.
“대식국과의 교역이 가능하겠습니까?”
최승우에게 묻자, 최승우는 턱수염을 손으로 훑으며 대답했다.
“음, 지금 중원이 혼란기이므로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려가 벽란도에 국제항을 뒀다고 하면 나는 백제에서 외국과 교역으로 백제의 부를 채울 생각이다.
하는 김에 여러 작물의 종도 얻으면 좋고.
그리고 이참에 무기개발도 진척시켜야 한다. 화약을 아직 쓸 수 없다면 활을 더 업그레이드 시켜야 겠지.
이미 중원과의 교역에 물소의 뿔을 구하도록 시켰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할아버지가 각궁장인이어서 각궁만드는 법은 알고 있다.
그 옛날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할아버지에게 따진 일이 있었는데, 설마 하니 이럴 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어깨너머로 배우긴 했지만, 그래도 이 시대에도 각궁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까.”
발해에서 가져온 활도 있었다.
본래 고구려도 각궁은 보유하고 있었다. 고구려 때는 소의 갈비뼈를 이용했다고 하니, 물소의 뿔이라는 소재만 있으면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고려시대에도 존재는 했으니까.
최우가 송에서 물소의 뿔을 구하려 하였으나, 송나라가 고려의 활에 물소의 뿔이 들어가는 것을 알고, 수출을 제한한 탓에 송나라 상인이 뿔이 아닌 물소를 최우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미 그때는 흑각궁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후삼국시대도 전국시대나 다름이 없으나, 각궁은 존재했을 것이다.
“물소의 뿔로 각궁을 말입니까?”
“불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말미를 좀 주셔야 합니다.”
흑각궁에 편전. 그야말로 완전한 조합.
거란족에게도 아마 제대로 먹힐 수 있을 거다.
* * *
시간이 지날수록, 후백제와 고려와의 전쟁은 국지전 양상을 띄고 있었다.
여전히 백제 주력군은 대야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각지에서 친백제계 호족과 친고려계 호족들의 치열한 국지전이 계속된 것이다.
양국이 소극적인 이유는 후백제는 발해의 지원을 위해서, 그리고 고려는 오다 련의 일 때문이다.
그럴 때 내가 만든 거중기는 후백제의 성을 수성에 더욱 적합하게 만들었다.
아직 고려는 나주에 반격을 가하지 않았다.
내가 본격적으로 수군을 기르고 있다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역시 대야성과 말갈군이 걸리는 건가?”
심지어 국지전에서도 고려군은 적당한 성과를 보지 못했다.
물론 고려의 네임드장수가 나오지 않았고, 이렇다할 전면전은 없었으니, 딱히 고려가 수세라고 볼 수도 없다.
고려는 아마 전면전을 준비할 수도 있겠지. 최근 신라도 조용한 것을 보니, 아마 고려와 연대할 셈일 테고.
쐐에엑!-타앙!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에 정확히 박혔다.
내 궁술도 더욱 그 실력이 늘었다.
원래 금강이란 인물 자체가 무예가 뛰어나 익숙해지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도 지금 내가 사용하는 것은 흑각궁. 성능이 뛰어나다.
“어떻습니까. 상귀, 상애장군.”
“확실히 아교가 풀릴 수 있는 단점을 제외하면 흑각궁은 최고의 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 사불가론 중 하나가 계절 탓에 활의 아교가 풀려 활을 사용하기 힘들어진다는 거였다.
“전투도 우리에게 유리할 때를 맞추면 되지 않겠소이까? 더군다나 우리에게는 무기가 흑각궁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음, 그렇기는 하지요.”
“게다가 왕자님께서 만드신 거중기를 비롯한 것들이 성을 쉽게 쌓아 올리니, 지금 고려군이 밀고 내려와도 언제든 방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 역사와 달리 지금의 백제는 공세보다는 방어전을 중심으로 국방을 튼튼히 했다.
뿐만 아니라 병력도 크게 늘렸다.
“만일 고려와 해전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려의 왕건이 정신을 놓치 않고서야 굳이 나주를 다시 노리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다.
지금 오다련은 단순히 고려의 전면전을 막는 역할이 아니다.
고려가 나주를 공격하는 것을 막는 용도지.
“유금필, 박술희 같은 장수들은 대야성에 있다고 하셨지요?”
“예. 대야성의 우리군과 대치중입니다.”
슬슬 한바탕 터질 때가 되기는 했다.
직접 박술희와 유금필의 면상을 보고 싶기는 한데. 내 능력만 믿고 달려가서 박술희와 유금필을 잡아야 하나?
이제 막 나름 무예를 익힌 몸이라 그 둘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자만하지는 않는다. 그냥 이 몸만 믿고 그대로 부딪칠 뿐.
아니야, 그렇게 하면 또 내가 태자에 가까워지지 않는가?
아버지란 작자가 슬슬 태자를 결정할 시기에 태자도 정하지 않았다. 원 역사대로 그대로 금강인 나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인가?
“왕자님 대야성에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진격 중이라고 합니다.”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1만 8천에 육박한다 합니다.”
1만 8천이라, 아마 말갈군은 대비해뒀겠지. 말갈군에 대비를 하느라 시간을 꽤 끈 것이다.
이제는 백제가 아니라 고려가 공세로 나오는 건가.
“대왕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출정을 명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나주를 굳건히 지키라 하셨습니다.”
과연 견훤이다. 고려놈들은 상대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인가.
“흠. 대야성을 치면서 나주에 쳐들어올 양동작전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것입니다. 실제로 가능한 변수이기도 합니다.”
1만 8천이면 꽤 대군이다. 그런데 신라군까지 합쳐서 그 정도라면, 고려가 양동작전을 구사할 수도 있다.
문득 손가락을 굴리며 생각을 해보니, 변수는 고려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고려는 다타라의 존재를 모를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합니다.”
“다타라에서 키운 백제계 왜 수군들을 불러오십시오. 할 일이 있습니다.”
수군은 나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탐라와 다타라에서도 키워뒀다. 고려가 수군을 보내오면 나주만이 아니라 다 타라와 탐라의 수군도 함께 맞서게 된다.
“무엇을 노리고 계십니까?”
“신라가 군대를 냈다면 아마 서라벌은 비어있을 터.”
“예. 그럴 것입니다. 백제 주력군이 모여있는 이상, 신라도 국운이 걸려있으니 군대를 낼 것입니다.”
원 역사와 달리 지금의 백제는 북진을 서두르지 않고 반대로 고려와 신라의 공세를 받게 되었다.
본래라면 고려와 신라의 연대를 끊어내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백제지만, 아마 이런 수세적인 모습이 신라가 고려에 군대를 내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서라벌을 털어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