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나주도독 금강2
* * *
견훤은 신라로 진격하려는 것인가?
“그럼 굳이 대야성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내 예상이 맞다면 각만 보려는 걸 수도 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른다. 견훤의 생각은 발해를 믿고 당장 신라를 짓밟으려 할 수도 있다.
“언제든 서라벌까지 진군할 길을 열어두려는 것입니다. 왕자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대야성이 어떤 성입니까. 그 옛날 구고려가 요동을 호령하던 시절부터 삼국이 뒤엉켜 싸운 지역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고려가 지금 발이 묶인 상황에서 후백제와 전면전쟁을 할 수 없듯이, 후백제도 마찬가지. 다만 대야성을 꽉 쥐고 있으면 전략적으로도 후백제가 훨씬 유리했다.
심지어 고려의 경우에는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호족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후삼국통일 전쟁에서 결국 높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호족들이다.
그런데 말이다. 대야성에서 고려가 어떤 꼴을 당했으면 이토록 소극적이란 말인가? 최소한 대야성 앞까지는 군대를 보낼 줄 알았는데.
“그런데 대체 대야성에서 고려군은 얼마나 피해를 입은 것입니까?”
“음, 3천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 정도로 지금껏 소극적이란 말입니까?”
아니지. 이 시대에 3천이라면 결코 무시할 물량은 아니다.
왕건이 이끄는 고려 주력군 3천이 무너졌다면 호족들이 동요할 만하지.
어쩌면 지금 즘은 호족들 군기를 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현재 거란에 타격을 입힐 정도의 수군을 확보하려면 나주의 백성들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신의 생각입니다.”
지난번 전투에서 피해가 없던 것도 아니니. 그럴 것이다.
어차피 거란을 치는 것은 거란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기 위함일지만.
“음. 다타라에서 확보해봅시다.”
“다타라에서 말입니까?”
“예.”
“다타라의 수장이 아국에 호의적이기는 하오나 그래도 일개 영주일 뿐입니다.
병력을 내면 얼마나 내겠습니까?”
원래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하였다.
수백명만 있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참에 탐라도 세력권으로 얻어봅시다.”
“탐라를 말입니까?”
“예. 탐라도 본디 우리 백제의 속국이 아니었습니까? 헌데 신라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니, 이참에 다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입니다.”
북쪽을 당장에 먹기에는 상대가 왕건이라 힘들다.
그렇다면 먹기 쉬운 곳을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병력보충도 하고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차피 나주 지역은 제 땅이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대왕께서 왕자님을 나주 도독으로 임명하였고, 수군의 권한까지 넘겼으니 당연합니다.”
견훤이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주 도독이라는 자리를 둬서 나주를 통째로 관리하게 하겠는가?
정확히 말하면 고려에게 뜯긴 땅 전부를 관리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부왕에게 은혜를 갚고, 효도한다는 마음으로 이번 일을 진행할 수 있다.
“대왕께 탐라를 바칩시다.”
“예. 탐라를 속국으로 삼아야 합니다.”
상애와 상귀는 금방이라도 탐라에 쳐들어갈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음, 그래도 탐라를 점령하려면 군사를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탐라는 본디 군사가 아닌 외교로 살아남던 국가입니다. 백제와 신라에 종속되어 평화를 도모하였고, 일본에도 사신을 보내 신라에게서 살 길을 찾던 국가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확실히 우리 군대를 보내면 금방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탐라를 취해야 후일 나주에 올 고려의 함대를 상대로 선전할 수도 있을 거다.
애초에 그 전에 고려 수군을 박살낼 생각이지만.
“문제는 호족들이 아니겠습니까.”
“예?”
“호족들이 군을 내놓는다고는 하나, 그들이 진심으로 백제에 충성하겠습니까.
실익을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최승우가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얇게 떴다.
“그렇겠지요.”
“승리를 거머쥘 것이라면 확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상좌평 최승우는 이미 진작에 꿰고 있었다.
지금 백제가 고려와 신라를 상대하면서 발해와 연합작전을 펼치려면 결국 방법은 하나 뿐이다.
호족들을 완전히 백제에게 복속시켜 배신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탐라를 정벌할 병력을 얼마나 내야 합니까?”
“지금 모든 배를 동원합시다.”
“병력이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수십척을 상정하고 말한 건데.
배가 수백척은 되는 건가? 3천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가.
아니다. 수백척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겠지. 탐라를 항복시키는 방법이야 많다.
예를 들면, 신라장군 이사부의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굳이 훈련한 놈들로 채울 필요도 없고, 사자목상을 만드는 것은 어떻습니까?”
“신라장군 이사부의 방법을 쓰려 하는 것입니까?”
역시 상좌평 최승우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
신라 장군 이사부에 관해 잘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굳이 더 말을 할 필요가 없겠지.
이사부는 사자목상을 이용해 우산국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어 알아서 항복하게 만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다 훗날 알게 된다면.”
“돌려보냈다고 하면 되겠지. 그리고 본래 백제에 속한 놈들인데 감히 우리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 전에 호족들 문제도 해결하셔야 합니다.”
호족들. 그렇지. 그놈들이 지금 내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자기들 재산 전부를 내놓으라하면 안 내놓을 거다.
지금 백제가 가진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삼국통일사업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러자면 호족들의 군사가 단일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호족들을 나주의 전호족들을 나주도독부로 불러들였다.
“저희를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음, 할 말이 있어 불렀지.”
“하문하시지요.”
음, 하문하라니 대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사병들을 전부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응당 낼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형식적인 거 말고.
내가 살짝 진지한 표정으로 그들을 훑어보자, 그제야 이놈들도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각자 서로 눈치를 보았다.
“지금 가진 가병들을 전부 내어놓으라 이 말입니다.”
“그.그건.”
“이 가벼운 인사들 같으니. 걱정마십시오. 나를 돕는다면, 충분히 그 보답을 받게 할 테니까.”
“왕자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이 시대 호족들의 힘은 사병들입니다. 그 사병들을 몽땅 가져가신다니.”
알고 있다. 이미 사병들을 내놓은 집안들도 많고. 더 내놓기도 아까울 터.
그래도 그것들 전부 끄집어내면 1만은 될 거다.
이게 다 전국시대 호족들이니 가능한 일이다.
슬슬 감성팔이로 가야 하나?
나는 탁상을 쾅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대업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들 마한의 후손들이 아니신가?”
“예.”
“마한의 후손들이라면 마한의 수장국인 백제의 통일을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 우리가 남이가!
“이미 신들은 백제의 신하입니다. 어찌 국난에 돕지 않는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알지. 내 왜 모르겠습니까? 사병들은 곧 재산. 전쟁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걸게 되는 격인데. 전쟁에서 패배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잃기만 하니까. 그게 걱정인게지요.”
한마디로 보험은 두고 싶다. 그거지. 백제 주식에 전부 꼬라박지 않고 조금이나마 연명할 수 있게, 호의호식은 할 수 있게 남겨두고 싶다는 의미다.
전생에 내 아버지란 작자가 주식하다 말아먹은 적이 있다. 그러다 집안 한 번 풍비박산 난 적이 있었지.
내가 왜 모를까. 이해한다. 있는 놈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건 어느 정도 지키고 싶을 거다.
절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이 호족들은 자기들 능력으로 지금껏 커온 것이고 나주일대를 지켜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백제가 재건되고 고려랑 투닥거리면서 나주땅을 서로 뺏고 뺏기고, 호족들은 살아남기 위해 줄을 섰고, 지금은 군량만이 아니라 병사들까지 내놓으라니 오죽 어이가 없을까.
“크흠. 꼭 그렇다기보다.”
“내 왜 모르겠습니까. 본디 그런 법입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것도 일단 나부터 살고 삶의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법.”
“와.왕자님.”
모두들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그래. 나 같은 왕자도 없을 거다. 완산주 조정은 삼국통일에 혈안이 되었으나, 적어도 나는 이놈들 사정도 헤아리고 있으니까.
그래도 말이다. 이럴 때는 협력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겠는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끌 수군은 결코 전면전에 나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수군은 어디까지나 육군을 보조하는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설령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내 이 자리에 있는 호족들에게 분명히 그만큼의 포상도 내릴 것입니다.”
말 한마디면 천냥빚도 갚는다했다.
그래서 나는 감성팔이의 궁극적행보를 꺼내려 한다.
“만일 백제의 왕자인 나 부여금강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나는 스스로 내 심부를 찔러 죽을 것입니다.”
나는 품에서 단도 한 자루를 꺼냈다.
“와.왕자님. 고정하셔야합니다!”
“내 나라 백성의 신임도 받지 못하는 왕자가 어찌 왕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죽고 말 것입니다.”
최승우가 옆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제발 멈추라 간청하였으나, 나는 단도를 꺼내 있는 힘껏 가슴으로 내려찍으려 했다.
금강이라 가능한 일종의 쇼다.
그리고 그 순간, 호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시.신들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 왕자님!”
“예! 그 검을 내려놓으시옵소서!”
“신들이 잘못했나이다! 왕자님께 저희 호족들의 모든 것을 내놓겠습니다!”
의외로 쉽게 뻗었다.
호족들은 내 자살쇼에 군사들이며 가산이며 내놓겠다고 했다.
나주의 호족들은 이미 백제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시 고려에 배신한다고 해도 왕건이 받아줄지 알 숟도 없는 마당에, 백제 조정과 척을 질 수도 없는 상황. 더군다나 왕자가 자살까지 하려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왕자를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신 수군 지휘관에 호족사병들도 배치할 것이니, 걱정들 마십시오.”
“그렇다면야, 저희들은 왕자님께 사병들을 맡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백제의 영광이자 폐하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모두들 오늘은 술을 듭시다!”
다루기 쉬운 놈들이다.
* * *
이 시기 한선은 조선시대 판옥선에 비하면 그 규모가 작다.
다타라에서 왜선들을 공수해와서 한선과 비교해보고, 중국의 선박도 끌고 왔다.
“결국 한민족이. 아니, 동북아시아의 배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교역이 위주였고, 해전이 적었기 때문.”
나주는 유일하게 지금 중원과 통하는 교역로라고 볼 수 있다.
다타라를 통해 일본과의 교역도 가능하게 되었고, 당장에 수군도 키워 고려가 다시 나주를 노릴 수 없도록 했다.
앞으로 해전만 없다면 화포가 개발되기 전까지 굳이 판옥선 같은 것을 만들 이유가 없지.
그 썩을 여자가 화약기술이라도 주면 당장에 판옥선도 만들어볼 텐데 말이다.
나중에 만나면 머리채라도 잡아채고 화약기술 달라고 해보자.
아니, 휴가 3일 위해 노력해줄 테니 달라고 해볼까?
“가장 큰 문제는 농업생산량이지.”
옛부터 전라도 땅이 그리도 기름져서 백제의 인구가 고구려보다 많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농업기술이 더 발달하면 그만큼 인구도 늘 것이다.
게임처럼 바로 뚝딱뚝딱 되는 것이 아니니 이 효과를 보려면 한세대가 지나야 하지만. 적어도 당장에 군량은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이양법든 당장에 써먹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본격적으로 이앙법이 쓰인 것은 조선시대니까.
일단 이것도 생각은 해두자. 백제란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그것이 답이다.
결국 요리가 다채로운 것도 좋겠지. 맛있는 걸 먹어야 기운도 나고 잘 싸우니까. 일단 이앙법은 들이되 이건 장기플랜으로 보자.
“그리고 감자는. 들이기 어려운가.”
개인적으로 감자나 고구마도 있으면 좋을 텐데. 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 시기 감자는 저 서역에나 있을 테고, 감자가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조선 시대다. 그것도 조선후기지.
막상 생각해보니 나 정말 무능력하다.
그냥 이 몸 가지고 전장에서 무쌍찍는 방법 밖에 없나?
“잠깐 막상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다른 대리자들은 어떤 능력을 지녔는가?
다른 대리자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서 스타트를 끊었을 텐데. 어떤 기준으로 어떤 점수를 낸다는 말인가?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지원 정도는 받아도 되는 일이 아닌가?”
어느 시대이든 정복전쟁으로 땅을 넓히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 점수는 딱히 중요하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내 시대에 가장 좋은 점수버는 방법은 기술개발이 아닌가.
명색이 신들인데 자기들 대리자가 좀 기세를 타면 그만큼 보너스를 주는 일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