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나주도독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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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부인과의 협상이 있고 나서 나는 대전에서 견훤에게 나주로 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내게 공도 있고, 지금 내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견훤이다. 더군다나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니 마냥 내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을 터.
“정녕 이 애비를 두고 가려는 것이냐?”
견훤이 나이에 맞지 않게 무척 서운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안 된다. 나는 나의 길이 있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폐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대백제국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국혼은 어찌할 것이냐?”
아, 그 이야기는 빼줬으면 좋았는데.
“아직은 시기가 이른 줄로 압니다.”
“그건 안 된다! 일본이 어떠한 나라더냐? 전 백제왕실과 피로 이어진 국가가 아니더냐. 저들의 왕도 마찬가지다.”
즉, 그 말인 즉. 일왕과 한 가문이 되어 옅게 남은 백제의 피를 받자 그 말인가.
틀린 말은 아닌데 과연?
뭐 확실히 21세기 현대의 반일감정을 떠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국익에 도움은 될 것이다. 그것도 일왕이 먼저 주선한 것이다.
전 백제 시절처럼 부여씨 왕족이 일본에 파견 갈 만큼 지금 삼한이 태평한 상황도 아니고.
받기는 해야겠지.
그래도 일단은 나보다 우선해야 할 인물이 있다.
“신검형님이 있지 않습니까?”
“그놈은 나주 호족 딸과 혼인시킬 생각이다.”
“음.”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주의 호족과 이어진다면 마한을 완전히 통일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나중에 나주 호족들의 딸들을 신검이에게 붙여서 하렘을 차려주자. 아주 복상사가 날 정도로 말이다.
“어찌하겠느냐?”
“그리하겠습니다. 다만 사태가 급박하므로 당장에 백제의 위협이 사라지면 그때 혼인을 치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누군가는 수군을 이끌어야 하고 요동에 깔짝거려야 한다.
양검과 용검은 자기 형에게 붙어있겠다고 하는 놈들이고 신검도 역시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삼국통일을 우선해야 한다.
“내 아들 부여금강을 나주도독으로 임명하여 나주에서 수군을 키우도록 할 것이다. 상귀와 상애 장군이 나주도독을 보좌하도록 하라.”
견훤은 문무신료들 앞에서 나를 나주도독으로 임명했다.
이것으로 상원부인이나 용검, 양검은 나를 조금이나마 덜 경계하게 될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상애는 지난 나주일로 나에게 호감을 가진 장수인데, 상귀를? 상귀는 명백히 신검 쪽 장수다.
그런 자가 내 옆에 붙는다면 글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것만 같다.
아니면 의외의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지. 신검이 편이라도 내가 호의적으로 굴면 그래도 공과 사를 따져 나를 따르긴 할 것이다.
* * *
나주
“허허, 완산주에 정착할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상좌평은 있으셔도 됩니다.”
최승우는 이번에 좌평들의 수장인 상좌평을 맡았다.
그 덕에 능환은 나이에 맞지도 않게 최승우에게 경쟁심을 불태웠다.
그럼 뭐하나. 최승우. 이 양반은 뭐가 좋다고. 계속 나를 보좌하겠단다. 예쁜 여인네도 아니고 노친네가 따라다니는 거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
일국의 재상이 따라다니는 거다. 기분이 이렇게 엿같을 수가 없다.
“신이 비록 상좌평이라고는 하나, 이는 금강왕자를 돕기 위함입니다.”
아니, 댁이 오면 안 되는데.
“지금 우리 수군이 얼마나 됩니까?”
“이제 막 3천으로 늘렸습니다.”
3천이라. 3천. 나쁜 수는 아닌데.
“배는 이런 게 어떨까?”
“호오 배밑이 뾰족한 함선이 아닙니까?”
“평저선보다는 안전성이 덜하지만, 기동성에서는 평저선보다는 유리하지.”
훗날 화포를 단다면 몰라도 발해를 돕기 위해 나주에서 요동으로 가려면 첨저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고려의 왕자로 스타트했으면 예성강을 이용해서 어려울 것도 없었을 텐데. 백제라서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다.
공돌이들은 위대하다.
뱃목수들은 내가 내민 설계도를 가지고 열심히 만들어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냥 아래가 V자로 된 배만드는 거니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전에 왜구를 잡으면서 나포한 왜선까지 동원했더니,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오나 저건 전함이라고 하기에는.”
“괜찮습니다. 당장에는 수송선의 역할만 하면 될 것입니다. 물론 전투선도 따로 만들 것이구요. 말도 구해야겠습니다.”
“말이라 하시면.”
“상륙할 부대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동에 상륙한다.
아아 요동! 그리운 그 이름 요동!
“왕자님. 요동에 가는 것은 백제의 중앙군이 아닙니까? 대왕께서 이끄시는 군대가 기병이 주력입니다.”
“양면전선만이 아니라 발해의 요동도 지켜야 합니다. 우리 백제는 지금 가진 국가적역량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노력해라 그거다.
나야 그 방면에서는 알지 못하니까. 군사를 키우는 것도, 어떻게든 예산을 확보하고 군비를 만드는 것도 상좌평의 몫이다.
“음. 신도 노력해보겠습니다.”
“왕자님 우리 장수들도 열심히 돕겠습니다.”
최승우와 장수들은 모두 내 말을 용케도 따랐다.
고려는 지금 함부로 군을 움직일 때가 아니다.
원 역사와 달리 대야성에 죽기살기로 덤벼드는 바람에 고려는 크게 당황했고, 대야성이 순식간에 넘어갔다.
물론 나 같은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어쩌겠냐 하냐마는.
고려의 왕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 *
고려
이 무렵. 고려의 태조 왕건은 북쪽에 나타난 말갈군 탓에 골치가 아팠다.
“대진국이 무슨 연유로 우리의 북방을 소란스럽게 한다는 말인가?”
말갈은 대진국(발해)에 예속된 족속들이다. 그런 놈들이 무슨 원수가 졌다고 갑자기 남하하는 것인가.
과연 발해 조정의 명을 받들고 약탈을 하는 것인가.
“전혀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기이한 일입니다. 대진국은 지금 거란과 싸우느라 바쁠 터인데.”
당장 거란에게 요동까지 잃고 중원과의 교역로도 막혔다고 들었다. 오늘내일하는 처지인데 그런 나라가 어째서 적을 새로 만든다는 말인가.
“대진국에서 이탈한 말갈의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예, 폐하.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오나 어쩌면 얼마 전에 대진국에 백제가 사신을 보낸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주를 빼앗기고 대야성이 공격받아 잠시 고려는 주춤했다.
그 사이 백제는 잽싸게 발해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백제가 대진국을 선동했다?”
“그럴 듯합니다. 갑자기 백제가 대야성을 죽기살기로 집어삼켰습니다. 아군의 피해도 백제의 대반격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까.”
마치 믿는 구석이 있어서 대야성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것 같았다.
물론 백제가 총력전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허나, 단순한 전투라고 하기에는 고려군이 일방적으로 당할 정도였다.
뒤도 생각지 않고 그렇게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가 갑자기 팍 식은 것을 보면 이상하다.
지휘관이 견훤이었으니, 고려가 대반격을 할 것이라고 예상은 할 터인데.
어쩌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그 때문에 호족들도 다시 눈울 굴리고 있을게야.”
“견훤왕이 대단하기는 합니다. 과연 삼한의 패권을 두고 폐하와 다투는 자 답습니다.”
“견훤왕은 전쟁에 대해서 만큼은 짐보다 뛰어날 것이네. 하필 견훤왕이 대야 성에서 그리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대진국으로 갔던 백제의 사신을 알고 있는가?”
무려 고려의 바다를 건너 거란족이 점령한 압록강 유역도 지나가야 한다.
백제의 공세에 주춤한 탓에 바다까지 신경쓰지 못한 탓에 백제의 사신이 발해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백제의 금강왕자라 합니다.”
“금강왕자는 견훤왕이 가장 아끼는 자식입니다.”
금강왕자라. 견훤왕이 아끼는 자식을 발해까지 보내고 어지간히도 발해와의 외교에 진심인 듯싶다.
“음. 대진국과 백제가 동맹을 맺고 대진국이 말갈을 풀었다라.”
“대진국의 가독부인 대인선이란 자가 자기땅에 불이 치솟는데 남의 땅에 깃발을 꽂는 행위를 하겠습니까?”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대야성의 백제군은 어찌해야 하나?”
“괜히 백제를 자극하여 명분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백제가 서라벌까지 진격할 생각이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 자극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장 북쪽의 말갈군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 지금은 말갈군도 문제다.
비록 수천단위라고는 해도 기병들로 이루어진 말갈군이라면 상대하기 어렵다.
호족들의 군세야 단일화되어있지 않는데 어쩌라는 말인가.
“나주는? 나주를 다시 점령해야 하지 않나? 명색이 이 고려의 왕인 짐의 장인이 백제에 인질로 잡혀있어.”
오다련 자체는 인질로서 큰 가치는 없다.
문제는 그 장인이 백제에게 붙잡혀 있으니, 고려왕으로써 백제를 응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일이 참 복잡하게 돌아가는군.”
당장 백제가 저리 무리수를 두는 것을 보면 단순히 대진국만이 아니라 장인인 오다련의 일도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여길 터.
그저 지금 할 수 일이라고는 대진국에 항의 사신을 보내고, 대진국과 백제의 관계를 끊는 것. 그것 말고 지금의 고려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 * *
나주도독으로 부임한지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망하면 망하는 대로 발해로 가서 멸망막아주자.
그 여신 면상 일그러지는 꼴이 어찌나 보기 좋던가!
그런데 내가 생각보다 백제의 역량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다.
과연 말기에 군사 10만을 동원한 나라답다.
“시발, 호족들 군사들 왜 이리 많아.”
못해도 수천은 하겠는데?
나주의 호족들이 언제든 고려와 결탁해서 완산주까지 진격해올 수 있지 않은가? 확실히 한반도 남부의 강력한 세를 구축하고 있었다더니 그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그래. 나라의 중추인 최승우가 받아들일 때부터 불안하다 했다.
나는 상귀와 상애 몰래 최승우를 불러들였다.
"어떻습니까?"
“2천 정도는 더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수군 자체를 아예 상륙군까지 겸하게 할까.”
요동에서 깔짝거리려면 적어도 고려와 맞서싸우던 정예군들을 두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방향을 달리해야겠다.
“거란의 뒤를 치는 상륙군입니까?”
“예.”
요주를 공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발해가 어쩌다 야율아 보기의 역린을 건드렸었나.
바로 요주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거란이 먼저 발해의 땅을 집어삼키고 백성들을 붙잡아 끌고 갔다. 야율아 보기는 명분을 쌓은 것 뿐이다.
한 번 저질러?
“준비가 되는 즉시, 폐하께 상주하여 요주를 쳐버려야겠습니다.”
“예?”
“음, 그리고 요주로 갈 때는 왜선들로 해야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왜선도 빠르더라. 아마 첨저선이 아닐까.
더군다나 왜선을 이용하면 백제군이 아니라 왜군인 척 위장할 수도 있다. 거 란놈들이야 설마하니 백제가 거란을 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겠지.
백제인 것을 안다고 해도 저들이 어쩌나?
발해의 가독부 대인선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요동탈환만을 노리고 있을 텐데, 야율아 보기가 감히 바다로 나올 생각을 하겠는가?
“다타라에서 왜선을 얻어보겠습니다.”
“그리하세요. 그리고 상애장군은 상륙군을 기병 중심으로 키워야 할 것입니다.”
“예. 왕자님.”
“대야성의 상황은 알고 계십니까?”
“예. 지금 대야에 아국의 주력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건 들어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다른 거지.
“설마 부왕께서 신라를 당장 공략할 셈입니까?”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견훤과 신검이 대업을 이루겠다고 지금 당장 신라를 집어삼키려 들면 어떻게 될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대진국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신라를 치는 순간 고려와 전면전이 될 것입니다. 저들이 북방의 영토를 조금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전면전을 치를 수 있습니다.”
신라가 먹히는 순간 고려는 발해와 후백제, 남북으로 갇히는 형국이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발해와의 동맹은 결국 지형적 이점이 있다.
왕건의 고려는 결코 고씨가 세운 천손의 고구려가 될 수 없다. 중원과 한반도, 두 개의 전선을 유지했던 고구려같이 강성한 나라가 결코 되지 못한다.
수천단위라고 해도 북쪽에서 대인선의 명으로 남진하는 말갈.
대야성에서 북진이든, 동진이든 기회를 노리는 백제.
왕건의 고려는 감당하지 못하겠지.
어째 역사가 재미있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