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귀국
* * *
백제유민이 있는 곳. 바로 그 곳은!
“다타라씨가 있는 스오국입니다.”
“다타라씨라면?”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들입니다.”
스오국에 뿌리내린 임성태자의 후손들. 이때는 아직 오우치씨가 아닌 다타라 씨다.
그들은 헤이안 시대를 거쳐 무사계급으로서 주위여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지역의 유력 세력가들이라는 뜻.
나주를 탈환하였으니 재해권도 확보되었고, 수군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거리상으로 완산주에 있는 것보다 나주에서 그들과도 나름 관계를 맺어 내 지지기반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호오. 신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들 역시 왜인들에게 문물을 전파하였다고 들었지요.”
“그런 곳이 다 있었소?”
일본에 정사로 왔던 대봉예는 완산주까지 갈 예정이라 나를 따라왔다.
이 양반도 어지간히 바쁜 인생이다. 완산주로 돌아갔다가 다시 발해로 가는 것도 만만치 않을 터. 발해가 백제와의 외교관계를 얼마나 신경쓰는 지 알 수 있다.
심지어 고마씨 중에서 장정들을 선별해서 나와 함께 가기로 했다.
훗날 거란과의 전쟁을 대비한 전력이다. 본래는 발해로 함께 보내려 하였으나, 발해가 아직 어지러운 탓에 내 밑에서 키우게 할 셈인 듯 싶다.
“이곳이 다타라씨족의 마을인가?”
“아, 저희 수장님이십니다만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아직 몇 대가 지나지 않아서 그런가.
“우리는 백제국의 사신이오. 다타라 씨족의 수장을 만나고 싶소이다.”
“백제? 수장님께 전해 올리겠습니다.”
일이 한결 수월하게 풀리고 있다.
“백제라. 확실히 다타라가문의 초대 수장께서는 백제의 임성태자셨소. 설마하니 다시 백제가 재건되어 그 왕족이 이곳을 찾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의자왕 대에 허망하게 무너지기는 했어도 백제인들의 혼이 꺼진 것은 아닙니다.”
견훤이 의자왕의 복수를 명분으로 백제인들의 환심을 사서 백제를 건국했다.
수백년이 흘렀음에도 백제인의 정체성이 남아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했으니 다 같은 민족이다라며 교육을 한 모양이지만, 결국 백제의 정체성은 남았다.
정확히 삼국의 정체성이 하나로 묶인 것은 고려 때나 가능했다.
신라는 외세의 힘을 빌어 통일한 주제에, 심지어 민족의 정체성도 하나로 묶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이 결국 외세를 빌어 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한계였다.
“당연하지요. 무려 700년의 역사가 아니오? 당적과 연합한 신라의 통치아래에 놓인다고 200이라는 세월 동안 백제의 혼이 꺼지겠소? 헌데 왕자께서 이곳을 찾은 이유를 알고자 하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보고 백제로 돌아오라? 그리 말씀하시는게요?”
“이미 이곳에 정착하여 터전을 일구고 있는데, 어찌 백제로 돌아오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너희들이 백제로 오면 다 망하지.
내가 필요한 것은 지지기반이지 고향 그립다고 돌아오는 유민들이 아니다.
오히려 다타라의 백제계들이 나주로 기어오면 먹여살리겠다고 나만 힘이 쭉 빠진다.
“우리가 왕자를? 어찌 도운다는 말이오?”
“이번에 나는 나주를 점령하여 고려의 세력을 몰아냈소이다. 다타라가 나주에서 내가 힘을 기를 교역을 비롯하여 내 지지기반이 되어주시오.”
한마디로 내 세력이 되라 이 말이다.
“왕위를 노리시는게요?”
“이미 부왕께는 나주에 머물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으음.”
“현재 백제는 신라와 고려에 갇혀있는 형세입니다. 이럴수록 같은 백제계가 도와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주 자체에서만 세력을 일군다면 완산주의 견제를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다타라에서 힘을 길러봐라. 분명 완산주의 의심은 받을 수 있어도 설마 일본 내에서 힘을 기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소?”
“지금의 백제왕실과의 혼인으로 다타라 가문이 다시 백제 왕실의 일원으로 복권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 땅의 유민들도 모두 백제인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백제국 왕자 부여금강의 이름으로 약조하겠습니다.”
좋게 좋게 말하고 있으나 결국에는 아예 다타라의 땅과 함께 백제인이 되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다.
“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열도에는 천황께서 계시는데.”
“백제인의 피를 잊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일본의 왕권이 강했던 시기가 얼마나 있던가. 결국 지방영주들의 힘이 더 강하다.
당장 다타라보고 백제땅으로 들어오라는 것도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후원자가 되어달라는 거지.
“게다가 당장 모든 것을 백제로 귀속시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저를 도와달라는 거지요.”
훗날 오우치는 모리에게 무너지지만, 지금 백제 밑으로 들어온다면 그런 역사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왕자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먼 훗날에도 오우치씨는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그런 마당에 지금은 어떨까. 백제가 다시 세워졌으니, 아마 마음이 새로울 것이다.
다타라씨와도 무사히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앞으로 나주의 항구에는 다타라씨의 배도 자주 들락날락거리겠지.
“이제 발해와 일본에서의 일이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수고가 참 많으셨습니다.”
그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발해멸망까지 여전히 5년 넘게 남았다.
삼국동맹은 맺어뒀으니, 변수는 고려가 어떻게 나오는지다.
후백제에도 유능한 장수는 많다고는 하나, 고려의 왕건은 너무 강한 상대다.
문무에 고루 뛰어나고 말그대로 먼치킨 그 자체.
그런 자를 상대로 견훤은 본인이 가진 장수로서의 능력과 지휘력으로 왕건을 상대하여 지금껏 버텨냈다.
고려를 상대로 대패하지만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이다.
“왕자님.”
“말씀하새요. 조정좌평.”
“저들을 기반으로 두려는 것은 좋으나, 신검왕자가 태자의 지위를 노린다면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렇겠지.
“조정좌평. 내 아직 머리에 서리도 내리지 않은 몸이지만, 이것 하나만은 가르쳐 드려야겠습니다.”
히죽거리면서 뇌까리자 최승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씀하시지요.”
“들키지만 않으면 범죄가 아니며, 반란도 아닙니다. 심지어 그저 다타라씨와 좋게 지내보자는 것 뿐인데. 감히 뭐라 하겠습니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최승우는 아무말이 없다.
실망한 기색도, 서운해 하는 기색도 아닌 것을 보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추측이라도 하는 걸까.
“나주로 돌아가면 일단 사수들이나 키워볼 생각입니다.”
“사수들이라시면.”
“백제는 기병이 강한 국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한반도의 삼한은 좁은 땅과 험난한 지형 주제에 기병에 집착하였으니 나도 집착해야겠다.
“그렇지요.”
“삼한민족은 대대로 궁술 역시 뛰어났구요. 이참에 궁기병을 키워볼 생각입니다.”
솔직히 궁기병이 지금 거란족에게 먹힐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지.
그래도 이것저것 해보기는 해야 하지 않은가.
“거란을 대적하시려고 하십니까?”
“글쎄올시다?”
지금 내 머리로 그나마 개발해낼 수 있을 만한 무기를 꺼내야 한다.
나는 손에 쥔 통아를 부드럽게 만졌다.
* * *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운과 함께 눈을 떴다.
이거 뭔가 익숙한 분위기다.
그래. 마치 여신이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아니나 다를까. 빛을 머금은 상큼하고 엿같은 여자가 나타났다.
“또 댁인가? 이번에는 뭐야?”
“야, 너 발해는 내버려 둬. 발해를 살려둬서 어쩔 셈이야?”
“그럼 만주벌판 포기하라고? 만반도를 포기해?”
포기할 수는 없잖아?
“대인선은 거란의 발흥만 아니었으면 발해의 전성기를 이끌었을 군주야. 네가 고려대신 백제로 통일한다고 해도 발해와 어떻게 싸울래?”
“그럼 야율아보기하고 싸우라고?”
지랄을 해라. 결국 대리자인 이상 점수따려면 거란을 이겨야 할 테고 한참 발흥하는 야율 아보기의 군대를 상대로 호족들을 규합해서 만든 군대로 맞서라?
마치 대인선이 야율 아보기보다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게 대단한 위인이면 야율아보기에게 졌을까?
그렇다고 원 역사와 같은 흐름으로 갈 수도 없다.
“네 지식으로 삼국통일 빨리하고 발해부흥군과 함께 거란 쳐낼 각 잡으면 되잖아!”
말은 잘한다. 시발, 능력하나 줬다고 내가 무쌍찍을 거라 생각하나? 나라를 가진 군대와 나라가 없어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개 부흥군은 이야기가 다르다. 부흥군 지원으로 무너질 거란이었으면 왕건도 해냈을 것이다.
물론 이 여신의 속내를 알고 있다.
발해가 멸망하고 혼란스러울 만주를 미래의 지식으로 집어삼키라고 하는 거겠지.
그런데 어쩌냐. 네가 선택한 대리자는 전쟁에 뛰어난 머리도 없을뿐더러, 금강 하나 믿고 부딪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감당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은 주변의 두려움을 사길 마련이다. 내가 무쌍찍고 다니면 결과적으로 혼란스러운 중원도 알게 될 터다.
극단적이긴 한데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뭔가 당신이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댁의 3일 휴가를 위해 희생 해줄 만큼 호구새끼가 아니야.”
상식적으로 내가 가진 거라곤 신들을 위해 뻘짓할 금강이라는 능력하나 뿐이다.
아무리 판타지 능력물을 좋아한다고 해도 말이나 되는가. 직접 겪어봐야 알지.
면상을 보니 잔뜩 일그러진 꼴이 아마 다른 대리자들이 제법 잘 나가는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싫다.
“뭐?”
“다른 대리자들은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며 제법 기세를 올리고 있어 괜히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찾아 온 모양이지? 이거 하나 알아둬.”
나는 이 망할 여신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야, 나 명색이 신이야!”
아니, 어쩌라는 거지 그래서.
“역사를 바꿔도 내가 바꾸고 탈주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탈주한다. 화약기술 같은 거 줘서 돕지 않을 거면 조용히 지켜보고나 있어. 한 번만 더 이딴 일로 내 꿈을 방해하면 내 머리로 박아버릴 줄 알아. 네가 준 능력 알고 있지?”
“······.”
수틀리면 뚝배기 깨버릴 수 있어. 이년아.
여신은 뭔가 굉장히 기분이 나쁜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고는 내 꿈에서 사라졌다.
* * *
엿같은 꿈을 꾸고 하루가 지났다.
“대진국 예부시랑 대봉예. 백제국 대왕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봉예는 일본에 갔을 때보다 훨씬 더 예를 취했다.
“오. 오오. 대.씨라면 발해의 황족이 아닌가?”
“예. 지금의 가독부와는 친척으로 아국의 가독부께서는 이번 백제와의 동맹을 매우 중요하게 흥미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게 다 내 덕이다.
“암. 암. 백제와 고구려의 연이 아닌가. 형제의 연인데 당연히 그러해야지.”
“금강왕자의 제안을 흡족히 받아들이신 가독부께서는 지금 나라가 어지러우나 형제국의 의리로 속말부의 말갈군을 내어 왕씨의 나라를 괴롭힐 것입니다.”
발해가 말하는 왕씨의 나라. 고려를 의미하는 것이다.
발해는 외교에서 천손과 고려를 자처하였고, 우리 백제와 동맹을 맺기도 했으니, 왕건의 고려를 고려로 취급할 수 없다.
“우리 백제는 저 요동으로 길을 잡아 거란족들을 귀찮게 하면 되겠군 그래.
병부에서는 지금 수군이 준비되어있는가?”
“예. 폐하. 나주가 회복된 이후, 수군을 크게 키우고 선박도 건조 중입니다.
곧 함대를 만들어 진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허허허, 말만 들어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속이 든든합니다. 백제에서 확실히 재해권을 장악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되면 생각보다 빨리 예성강 전투를 치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려의 함대를 아작내서 삼한의 바다를 가로채야만 고려는 육군만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고려의 육군은 또 북쪽의 속말부 군대에 발이 묶일 것이다.
발해가 고작 수천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 군대가 말갈군이라면 이야기가 달라 진다. 왕건의 고려에게는 미안하지만, 고려초기 결국 호족들의 군대가 주력이기 때문.
과연 그들이 말갈군을 당해낼 수 있을까?
압도적인 리더쉽을 가진 왕건도 몸이 하나다. 여성들을 상대로는 잠자리에서 무쌍을 찍을지 모르지만 동해번쩍 서해번쩍하는 속말부 병사들과 아래에서 깔짝거리는 후백제군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다.
유금필? 박술희? 그놈들도 뛰어나긴 하지. 그놈들도 몸은 하나다.
후백제가 삼국통일을 못해서 그렇지. 후백제의 장수들도 이름이 있으니 고려의 명장들을 상대로 이겼던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