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12화 (12/154)

12. 삼국동맹

* * *

내 머리에 든 지식이 거짓이 아니라면 약광이 자리잡은 간토땅의 작은 고구려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고구려 왕족출신인 약광이라는 자가 유민들과 함께 그곳에 정착하였고, 황무지를 개간하였습니다. 또 일본에 필요한 것들을 많이 전해주었죠.”

“호오라!”

대봉예가 구미가 당긴다는 듯 턱수염을 쓸었다.

“조정좌평 최승우를 그곳에 보내뒀습니다. 왜 보냈겠습니까? 자, 이 정도만 이야기 해드렸으면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대봉예는 나름 잔꾀를 굴리는 인물이다.

이 정도만 알려줘도 충분할 것이다. 나중에 최승우가 고마씨의 수장을 데려오면 그때 발해와 일본의 군사동맹에 대해 진척될 것이다.

대봉예는 눈물을 흘리며 내 두 손을 잡았다.

“이 은혜. 잊지 않을 것이오.”

* * *

부여금강과 대봉예가 헤이안쿄에서 천황을 알현할 무렵. 조정좌평 최승우는 금강의 명을 받아 무사시군의 고마씨를 찾았다.

“댁은 뉘신가?”

“대백제국 조정좌평 최승우라 하오. 백제국의 금강왕자께서 보내셨으니, 고려 씨의 수장을 보고자 하오.”

“백제는 패망한 나라가 아니오?”

“신라가 마침내 국운이 다하여 다시 백제가 재건되었으니, 망한 것이 아니라 이어졌다 볼 수 있을 것이오.”

당당하게 내뱉은 최승우의 말에 고마씨의 수장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그저 후손일 뿐이라지만,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유지해오던 고마씨의 수장이다. 대가 이어지도록 뼈에 각인된 신라에 대한 원한이 없다면 거짓일 것이다.

“내가 수장이오. 무슨 일로 백제에서 먼 길을 다하여 이 사람을 찾아오셨소?”

“발해를 알고 있소이까?”

“왜 모르겠소.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북쪽의 대국이 아니오? 내 고구려 유민으로서 늘 발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이미 무사시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다시 고구려의 땅으로 갈 수는 없으나, 늘 마음은 그쪽에 향하고 있었다.

“아국 백제는 형제의 의리를 다하여 발해와 동맹을 맺었소이다. 허나 지금 그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가 위급하오.”

“무슨 말씀이신가?”

“간악한 거란 놈들이 고구려와 발해가 내린 은혜를 잊고, 군사를 일으켜 발해를 침범하였소이다. 이미 요동이 거란 도적들에게 넘어간 상황으로, 발해에서는 구원군을 청하고자 사신으로 왕족이 왔소.”

최승우의 설명을 듣던 고마씨의 수장은 얼굴이 무겁게 일그러졌다.

“그런 일이 있었소?”

“일본은 요지부동일 것 같으니, 그대들이 도와주었으면 하오. 일이 잘 성사된다면 발해와 발해의 동맹국인 우리 백제는 그대들의 공을 잊지 않고 충분히 보상을 내릴 것이오.”

“우리가 어찌하였으면 좋겠소?”

수장은 곧바로 고마씨 일족의 고구려 유민들을 소집하였다.

하기야, 어쩌면 이번 일은 고마씨에게 칼날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는 일. 수장 혼자 결정을 내릴 수는 없겠지.

“수백년이 지났으나, 우리는 여전히 고구려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당장 상경해서 천황을 설득해야 합니다!”

“우리처럼 망국의 한을 품고 유민들이 일본으로 오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요동을 잃었으면 상경이 지척 아닙니까! 우리끼리라도 발해를 구원해야 합니다!”

최승우는 가슴이 웅장하고 웅대해졌다. 가슴이 복받쳐올랐다.

자신은 백제의 신하지만, 후고구려라 할 수 있는 발해의 형제국인 백제의 신하다. 동맹국이자 형제국의 신하로서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거짓일 것이다.

다행이다. 수백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결국 고구려의 핏줄이었다.

최승우는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놀랐다.

대체 금강왕자는 어디까지 읽고 있었다는 말인가. 백번 양보해서 무사시에 고구려의 핏줄이 살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도울 것이라 어찌 예측했다는 말인가.

최승우는 한탄했다.

만일 부여금강이라는 사내가 장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 *

대봉예에게 미끼를 주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조정좌평이 굴비 엮듯이 데리고 온 약광의 후손이란 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고구려 유민들을 이렇게 볼 수 있어서 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백제국 왕자님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주십시오.”

최승우가 잘도 구워삶았다. 아니면 역시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있어서 이렇게 직접 나서준 걸 수도 있고. 하여튼 굳이 설득할 시간은 필요치 않아서 다행이다.

“곧 발해의 사신으로 온 대봉예 왕자가 다시 천황과 동맹을 논의하게 될 터인데. 길은 열어둘 터이니, 이 삼족오깃발들을 들고 황거 앞에서 시위를 해주십시오.”

“시위?”

“음, 어떤 식이냐 하면.”

결국 이들의 노력이 발해를 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발해와 일본의 동맹에 관한 협상은 대봉예쪽으로 기울었다.

“폐하. 이럴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

“고려가 일본에 어떤 은혜를 입혔는데, 고려의 후손인 저희를 이토록 외면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대봉예는 점점 뻔뻔해지고 있었다.

“은혜라니? 무슨 은혜를 말하는가? 고구려인의 망명을 일컫는가?”

“어디 망명 뿐이겠습니까. 일본은 고구려의 왕족 약광과 고구려유민들 덕에 철기술은 물론이거니와 기병에 대한 전술도 익혔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고로 사람이란 은혜를 알고 신의로 갚아야 하는 법. 일본이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야, 대단한데.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말을 지껄이나?”

“그렇다면 이 외신이 직접 약광의 후손들을 만나도 되겠습니까?”

천황을 비롯한 일본 신하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시 그게 지뢰인가.

일본 측에서 간토로 이주까지 시켰으니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놈들도 고구려인 덕을 봤다는 것은 알고 있을 터.

천황이 가만히 있자, 대봉예는 이때랍시고 일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대봉예 왕자가 쌓인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도 그 덕에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어이 저 논쟁에서 대봉예가 주도권을 잡자 일왕은 마른 침만 삼킬 뿐 반박하지 못했다.

일본이 고구려와 백제유민의 도움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천황도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다.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진 천황은 한숨을 쉬었다.

“크흠. 그렇다면 그 약광과 고마씨의 일족이 짐을 찾아와 그대들 고려(발해)를 도와달라 청하면 생각해보겠네.”

어쭈? 잔머리를 굴리는데?

“천황이 제법 머리를 쓰고 있습니다.”

“아마 저래놓고 사람들을 무사시로 보내 고마씨에 압력을 넣겠지요. 조정좌평.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미리 말은 해뒀는데, 그들이 제대로 타이밍을 맞출지 알 수가 없다.

“예. 왕자님. 이미 소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밖에 무슨 무슨 소리냐?”

“무사시에서 고마씨들이 찾아와 난동을!!”

난동이 아니라 시위다. 바보같은 쪽바리들.

“막아라! 뭣하는 것이냐?”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발해를 지원하라면서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끄으응.”

터질 것이 터졌으니, 천황도 더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저 봐라. 얼굴 확 일그러지는 거. 자기도 망했음을 직감하고 있다.

슬쩍 대봉예 쪽을 보니, 슬슬 나서달라고 눈치를 주고 있다.

“고구려유민들까지 나섰으니 이거야 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강왕자.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이 즈음해서 저희 백제가 한 가지 안을 내겠습니다. 삼국동맹이 어떻습니까?

백제와 일본, 발해의 동맹입니다.”

적당한 협상안이 아닌가.

발해와 일본 양국의 자존심을 지켜주면서 동맹을 맺는 것. 백제가 그 중심축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봐라. 일본은 백제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우리에게 상국행세는 하지 않고 있다.

“삼국동맹이라?”

“솔직히 일본 입장에서도 거란이 북방을 먹고 남하하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국 백제도 왕건이 세운 고려와 신라를 무너트린 후에 한동안 안정해야 하니 대국을 삼킨 거란을 막을 힘이 없습니다.”

거란이 중원이 아닌 한반도와 열도를 노렸다면 어땠을까?

제 아무리 왕건이라 해도 강성하는 거란의 대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음.”

“그들이 발해를 삼키고 그 기세로 물밀 듯이 우리 백제까지 밀고 내려온다면 장차 일본 역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모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니 삼국동맹이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그리하지."

그렇게 삼국동맹이 체결되었다.

애초에 고마씨족들이 와서 난리를 쳐댔으니, 조금 전 자기 입으로 한 말도 있고, 천황은 이를 악물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백제국, 진국, 일본국의 동맹이 마침내 맺어져 동북아는 고려와 신라가 삼국에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거란이 찬물을 끼얹고 있으나, 나쁘지 않을 것이다.

“두 사신이 전부 전권을 위임받고 왔으니, 동맹을 맺어도 문제는 없을 것이 네. 그러나, 백제의 사신으로 온 부여금강은 들을 것이다.”

“예. 폐하.”

“왕자의 부친이 마침내 백제를 재건하였으나,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이전처럼 회복하고자 한다면 혼인 만큼 확실한 것도 없을 것이다.”

천황은 그렇게 말하더니,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혼인동맹? 어지간히도 부여씨의 핏줄을 받고 싶은건가.

아니면 이전처럼 친선관계를 위해 백제의 왕자가 일본에 남아주기를 바라는 건가?

“아국의 태자전하와.”

이미 혼인은 한 것 같은데, 일단 내가 결혼할 수는 없어 태자로 딜을 넣자, 천황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태자까지 갈 필요가 있는가? 자네가 있지 않은가.”

내가? 일본 여자와 결혼을?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일어도 제대로 몰라 지금 역관을 빌려 대화를 하는 건데. 혼인하게 되면 분명히 일어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하지 않는가.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결국 하기는 할 테지만.

“음. 그건. 조금 고심을.”

“동맹은 이렇게 밀어붙였으면서, 어찌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해주지 않는 것인가?”

그래서 신라땅 준다고 했잖아!

화내고 싶지만, 분노를 애써 삼켰다.

혹시 아는가. 천황의 슬하에 적당한 나이의 딸이 없으면 혼인 이야기는 흐지 부지 될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여식들이 참 많은데.”

아주 욕이 한사발로 나올 뻔했다.

전생여도 인연이 없던 결혼이다. 결혼도 연애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신인지 뭔지에 끌려왔는데, 설마 이 시대에서 결혼하게 된다니.

“폐하. 백제와 일본의 국혼입니다. 금강왕자께서 전권을 위임받고 오셨다하나이 일은 아국의 폐하와도 논의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동맹을 추진하면서 국혼도 함께 진행해보지.”

일본은 굳이 국혼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대봉예도 분위기를 읽고 발해와 일본의 국혼을 제안하였으나 천황은 거절했다.

따지고 보면 백제보다는 발해와의 국혼이 일본 입장에서도 더 실리를 취할 수 있을 텐데. 발해는 고려의 후신이라는 타이틀이 있지. 백제는 아직 양국에 낀 불안한 상황이니까.

오히려 혼인동맹을 맺으면 백제가 더 부담스럽다.

결국 대놓고 거절하지는 못하였으니, 본국에서 혼인동맹에 관해 논의해보겠다는 것으로 무마시켰다.

“어떻게 동맹은 맺었습니다.”

“참으로 굴욕적인 동맹이오. 우리 발해가 먼저 국혼을 제안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태도라니.”

“거란만 처리하고 나면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발해의 왜국과의 교역을 맡으신 공께서는 조금 인내의 세월을 가지셔야 합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대봉예의 얼굴을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다.

이번에도 고구려 유민들 덕에 운 좋게 얻은 동맹의 기회다. 심지어 우리가 없었으면 일본에 조공을 해서라도 도움을 얻어내야 했을 것이다.

“삼국동맹이 체결된 것은 좋은 일이나, 저 왜놈들이 도움이 되겠소이까? 왕자의 말씀대로 놈들이 고구려인과 백제인이 주는 것만 받아 큰 놈들이라면 없는 것만 못한 것이 아니오? 무기도 그렇고.”

그렇겠지. 몸집만 봐도 삼한과 북방민족에 비해 왜소한 체구에 무기도 반도나 중원것에 비하면 질적으로 매우 떨어진다.

“방패역할이라도 해주지 않겠습니까? 머릿수도 있을 테니 무시 못합니다.”

더군다나 제 아무리 이 무렵의 일본군이라고 해도 동해안 끄트머리에 조금 남은 신라 정도는 잡을 것이다. 우리 백제는 속편히 군사력을 기를 여력이 된다.

어쩌면 입만 잘 놀린다면 왕건을 발해를 구하는데 써먹을 수도 있고.

우리가 북진하지 않는다고 약조라도 해주면 발해를 돕지 않을까? 왕건 그놈은 제 나라 국호를 고려라고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발해를 도와줘야만 하는 명분이 있다.

원 역사에서는 결국 아랫동네가 있으니 함부로 발해를 도울 수 없었지만, 여유가 되면 발해를 도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뭐 그건 나중일이고.

“귀국길에 들를 곳이 있습니다.”

“그런 곳이 있습니까?”

당연하다.

고구려 유민들도 불렀으니 백제유민들도 불러야지.

작가의말

발해 초기의 국호인 진국, 이후 정착된 국호인 발해. 일본에서 고려로 불렸던 것을 인용하여 작중에서 다양하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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