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대인선
* * *
백제가 백제다워지려면 옛 백제로 돌릴 필요가 있다.
발해는 고씨가 아닌 대씨가 다스린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백제인데 견금강보다야 부여금강이 효과가 클 것이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내가 엿을 먹는 기분이라니.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진정 우리 백제가 남부여의 명맥을 잇고자 한다면 솽실의 성씨를 부여씨가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찬 능환은 여전히 어리벙한 표정에 파진찬 최승우는 견훤의 말에 힘을 보태었다.
일찍이 백제가 백제다워져야 한다는 말을 꺼낸 신검은 아무말도 안 했으나, 양검과 용검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장자인 신검은 그렇다치더라도. 양검과 용검은 오래전부터 금강이라면 치를 떨어온 인사들이다.
그나마 신검은 앞으로 진짜 말아먹는 일이 없고, 내가 필요이상으로 공을 세우지 않는다면 무사히 차기 백제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양검과 용검은 다르다. 신검과 다르게 불만을 억제해줄 보상이 기다리지 않는다.
신검은 같은 배에서 태어났고 존경하는 형이니 어쩔 수 없지만, 그들에게 나는 치워버리고 싶은 짐덩어리일 터.
아니, 애초에 견훤이 내 말을 너무 순순히 받아들인다.
위에 이미 고려가 있으니 그렇다쳐도 내 말 한마디에 이렇게 쉽게 뒤집어버리다니. 정말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인 건가.
아니다.
견훤은 본래 머리를 쓰는 지략보다는 그저 칼만 휘두르는 무식이에 더 가깝다.
내가 한 말들이 그럴 듯하게 느껴졌던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파진찬 최승우는 내가 말을 타면서 보인 그 정신나간 짓을 마치 무쌍을 찍은 영웅으로 동일시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장군 상애는 그 날 이후 나를 떠받들고 있다.
본래 나를 그리 탐탁지 않아하던 장수 중 한 명이 상애였는데, 그 조차도 나를 인정해버린 것이다.
견훤은 이번에 벌어진 나주원정에서 나를 뭔가 크게 평가했을 터.
“이제부터 신검이 너는 부여신검이고, 양검이, 용검이도 부여양검, 부여용검.
금강이도 부여금강이 될 것이야.”
“예. 폐하.”
사실 폐하도 어라하로 고치는 것이 맞지 않나 말하고 싶지만, 이 이상 간다면 양검과 용검이 입에 거품을 물지도 모른다.
[축하드립니다! ‘백제가 백제다워져야한다!’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여신이 기뻐합니다!]
뭐지. 이런 것도 업적이 있나?
* * *
금강의 어머니는 날로 걱정이 많아졌다.
“이번에는 일본으로 가는 것이냐?”
“예.”
이 반도에서 내가 할 일은 많지 않다.
내가 비록 금강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전쟁에 대해서는 내 그리 머리가 밝은 편이 아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빵 믿고 고려군 진영에 달려가서 왕건이든 유금필이든 목을 베어서 적진에 혼란을 주는 것뿐이다.
아직 견훤이 호령하고 있는 백제는 고려 왕건에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 나주, 대야성일로 고려는 잠시 위축되었을 테고, 이후 공산 전투까지는 괜찮겠지.
왕자로서 할 일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고려로 가기에는 영 상황이 좋지 못하니 일본과 발해를 갔다오고 후일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체 어쩌자고. 그냥 완산주에 남아 대왕의 대업을 돕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대왕의 대업을 돕고, 어머니와 제가 살고자함입니다. 전에도.”
“내가 모르겠느냐? 양검이와 용검의 불만은 어찌하려고? 차라리 대왕의 옆에 있거라.”
그걸 염두하고 하는 짓이다. 오히려 그 둘에게 열등감만 자극하여 나를 더 적대하게 만들 뿐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네가 나주에서 초패왕 항우처럼 불렸다고 들었다.”
“그냥 나주의 촌것들이 지껄이는 말일 뿐입니다. 그 말을 믿으신다는 말씀입니까?”
나주가 강력한 호족세력이 존재했다고는 하나. 초패왕 항우가 이름을 날린 중 원만 하겠는가.
고작해야 촌놈들이 나를 떠받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닌가.
“내 배로 낳은 자식이 그만한 인물이면 내 얼마나 좋을꼬. 금강아. 너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미 너는 패왕으로 불리고 있는 처지인데, 네가 눈을 돌린다고 될 일이 아니란다.”
“설마 왕후께서 무슨?”
“그래. 상원부인이 너를 경계하고 있다. 생각해보려무나. 천하는 지금 한치앞도 볼 수 없다. 나주에 있어도 안전할 수 있겠느냐? 거기는 네 기반이 되지 못한다.”
역사 속 금강이가 죽는 것은 한참 후다.
벌써부터 견제타임 들어간다고?
“어차피 소자는 문관의 길을 갈 것입니다. 여차하면 백제를 비울 일이 많을 터인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사신길에 살수라도 보내면 어쩌겠느냐?”
“그건.”
“그러니 하는 말이다.”
암살자 보내면 정말 꿀인데?
뭐가 되었든 나는 죽어줄 생각은 없다. 금강의 몸이라 물리적으로 죽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
가능하면 자연스럽게 후백제에서 탈주할 생각이었다. 상원부인이 암살이라도 하겠다고 사람들을 보내면 그것 역시 나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더 적극적으로 일본행 사신에 자원했다.
* * *
신검, 양검, 용검 형제를 낳은 상원부인은 아들들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금강이 너무 나댄다는 소문을 들은 탓이다.
안 그래도 금강탓에 대왕의 총애가 전부 그 후궁에 쏠려있는데, 이대로 라면 태자의 자리까지 금강에 넘기지는 않을까.
“금강이 녀석이 일본으로 가겠다고 했지? 분명히.”
“예. 어머니.”
“그럼 쳐내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보다 너무 커버렸다.
그런 주제에 신검을 방심시키기 위해 검을 놓겠나느니 그런 소리를 해가면서 아주 큰 그림을 그려둔 거다.
“이미 놈을 치기 위해 살수들을 마련해뒀습니다. 어머니.”
“허. 너희들도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구나.”
“형님의 앞길을 방해하는 놈이 아닙니까? 당연히 쳐내야지요.”
상원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제 자식들이지만, 참 어지간히도 금강에게 열등감을 지녔다. 그 덕에 신검이 가는 길에 어려움없이 금강이를 쳐낼 수 있어 좋기야 하다만.
“역시 파진찬. 그 사람이 걸린다는 말이야.”
어느새 왕의 명령으로 금강의 측근이 된 파진찬 최승우. 하필이면 그 자가 금강에게 있으니, 완산주에서 정치적으로 금강을 쳐내는 것은 힘든 처지다.
그렇다면 금강과 파진찬 최승우가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잡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절이야 또 보내면 그만이 아닌가?
“염려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가 일본쪽 해적들을 포섭해 뒀습니다. 금강이와 파진 찬이 바다로 나가면 일본에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견훤의 정실인 상원부인. 그녀는 아들들과 함께 금강을 도모하기로 했다.
* * *
일본 사신단의 대표는 역시나 내가 되었다.
부여금강. 더군다나 후백제의 깃발까지 옛백제의 것으로 바꿨다.
정말 파격적인 행보였다. 고려에서도 슬슬 알 만한 사건일 텐데.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대야성이 우리에게 넘어온 것이 충격적일지도 모른다.
신검은 전쟁에서 무공을 세우고 나는 외교관으로서 일본, 발해와 친분을 쌓는다면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 아닌가.
“왕자님. 차라리 발해로 먼저 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고려는 우리의 양동작전으로 순식간에 나주를 잃고 아국은 재해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가만히 있지 않을 터. 후일 고려가 나주를 다시 되찾겠다고 수군을 보내기 전에, 발해의 대인선을 먼저 알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일리가 있다.
“음. 허나 우리는 일본으로 가는 사절단이 아닙니까?”
“신이 다 책임을 질 것입니다. 군사적으로 볼 때도 먼저 발해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하기야 군사력면에서도 발해가 앞서고, 발해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발을 두는 것이 좋다.
신라야 백제 혼자서도 언제든 멸망시킬 수 있고.
내가 조금 생각을 달리한 듯 싶다. 가깝고, 백제에서 떠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을 먼저 고집해버렸다.
“그럼. 갑시다. 발해로.”
“요동은 거란과의 전쟁이 끊이질 않으니, 압록강을 통해서 상경으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 웃으십니까?”
“아마 지금 즈음, 왕비께서 깨나 속이 탈 것입니다.”
“예?”
“아닙니다.”
곧바로 항로를 바꿨다.
서해를 한참 돌아 요동반도 쪽으로 우회하여 압록강으로 가는 길이다.
고려와 거란을 경우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다만 압록강에서 조금 곤란하게 되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백제국에서 왔소이다!”
“백제국? 저 남쪽에 백제가 재건되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대는 누구시오?”
“백제국 넷째 왕자 부여금강이라 하오!”
“최근 거란놈들의 준동으로 이 근방은 위험하니, 우리들이 호위해주겠소이다!”
발해의 수군들로 보이는 병사들이 선단을 끌고 나타나 우리를 호위했다.
호위를 보내는 건 이치에 맞지만 설마하니 육로가 아닌 이렇게 수로로 쥐새끼처럼 움직여야 하다니.
“발해의 사정이 지금 많이 열악한가보군요.”
“그렇습니다. 발해는 이미 부여부에 대군을 주둔시켜 거란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부여부라면 사실상 발해의 주력전선이다.
거란군이 부여부에 발목이 묶여있다 겨우 수도직공을 노려 발해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적어도 발해가 부여부에서 상경용천부에 이를 때까지 방어선만 제대로 구축했어도 쉽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하필 부여부에서? 차라리 요하에.”
“왕자님. 이미 발해는 요동의 영역을 잃었습니다. 신라에도 대 거란전선을 맺자고 했던 것이 발해입니다.”
한마디로 사정이 좋지 않다. 그런 이야기인가.
“음 꽤 많은 피해를 입었구려.”
“이보시오. 발해가 지금 많이 어렵습니까?”
“말도 마시오. 거란도 은혜를 잊고 감히 우리의 영역을 침탈하는데, 흑수부놈들이 천정(天庭)을 배신하고 약탈짓을 벌이고 있소이다.”
젠장, 망해가는 나라에 줄을 대는 정신나간 짓을 해버린 건가?
차라리 거란으로 가서 국교를 맺는 것이 이득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발해의 멸망을 막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정말로 백제를 탈주해야 하는지 아닌지는 발해의 사정을 살피고 해도 늦지 않는다.
압록강을 거슬러올라가 서경을 지나 상경용천부까지 어렵사리 도착했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곳이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과연 해동성국 발해의 수도답게 웅장하고 거대하다. 국제도시로서의 기능은 국력이 쇠하고 있는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가독분인 대인선도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 같지는 않았다.
“폐하. 백제에서 사신단이 당도하였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대인선을 알현하는 자리는 말갈의 복장과 고구려의 복식을 한 문무신료들이 있었다.
“고개를 들라.”
“백제국 사신 부여금강이 대발해국 가독부를 뵙습니다."
한참 거란에 수세에 밀리고 있는 발해다. 나는 나름 추켜세워주기로 하고 발해를 대발해라 칭해줬다.
“부여금강이라. 부여씨가 아직 신라땅에 살아 남아있던가?”
“마한이 다시 우리 백제의 품에 있고, 지난 날 의자왕이 뿌린 씨가 마한에 잔존하였으니, 어찌 부여씨가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적당히 거짓과 진실을 섞으면서 백제의 정통성에 대해 대인선에게 연설했다.
“그래. 백제가 어찌 우리에게 사신을 보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국의 폐하께서는 발해와 다시 여제동맹을 추진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여제동맹? 그렇다면 남쪽의 왕건이 세운 고려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신라의 호족인 왕씨가 세운 고려가 어찌 진정한 고려라 할 수 있겠습니까?
구고려의 유민인 대씨가 세운 발해야 말로 진정한 고려가 아니겠습니까?”
일단 나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나름 백제를 위해 나는 고려가 아닌 발해를 선택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틀리지 않다.
왕건은 혈통으로 따졌을 때, 패서호족이라도 결국 고구려출신인 신라 호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