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외교는 탈주하기 위한 수단
* * *
대야성
대야성은 견훤과 그 아들 신검의 공세로 함락된지 오래였다.
금강이 나주로 가겠다는 말에 원역사와는 달리 더 많은 군세를 동원했다. 만일 금강이 나주를 먹지 못하고 패하기라도 하면 대야성이라도 확실히 밀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려는 속셈이었다.
신라를 지원하러 온 고려군은 생각보다 많은 견훤과 신검의 군세를 이기지 못했다.
“폐하, 나주전선에서 급보가 올라왔습니다.”
“오, 금강이말인가.”
“예, 금강왕자께오서 나주의 금성을 함락하고 호족들을 무릎 꿇렸습니다.”
금강이? 참으로 빠르다.
“고작 수백의 군대를 내어줬는데, 그것을 해냈다고?”
“예. 왕자께서 민심을 다스린 덕이 아니겠습니까?”
능환은 일부러 콕 집어이야기 했다.
“그런데. 크흠.”
“무슨 일이길래 그리 얼굴이 죽상인가?”
“나주 호족의 유력가중 한 명인 오다련을 잡았다 합니다.”
“오다련이라 하면, 설마?”
들은 바가 있다. 왕건의 부인인 오씨의 아비가 오다련이라고.
능환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금강이 생각지도 못한 공을 세운 탓이겠지.
견훤은 신라군에 소속되었을 때부터 눈치만으로 마한 천하를 쥔 사내였다. 능환의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예. 왕건의 장인입니다.”
“거물을 잡았군. 거물을 잡았어. 검을 내려놓고 서책을 잡는다고 하길래 걱정이 앞섰는데, 아주 잘 해주었어.”
실망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섭섭했다. 지금껏 자신이 얼마나 귀여워 해줬는 데, 검을 내려놓고 책을 잡는다는 말인가.
물론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금강의 뜻이 무관이 아닌 문관에 있음을 견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섭섭했다.
그런데 이렇게 제대로 활약을 해주다니.
“폐하. 우리도 이 즈음에서 계획을 새롭게 하셔야합니다.”
“무슨 말인가?”
“나주를 되찾았다고는 하나, 금강왕자께서는 그곳에서 하실 일이 무척 많을 것입니다. 나주만이 아니라 고려의 수군거점이 있는 마한의 전지역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능환은 이참에 금강이 나중에 짱박히기를 원했다.
나주에서 대공을 세운 금강. 이는 보통일이 아니다. 고작 수백의 호족병사로 나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금성을 무너트렸다. 견훤의 밑에서 선봉장으로 대야성을 점령한 신검의 장자세습에 방해될 것이다.
“그런데. 능환이. 자네는 얼굴이 왜 그런가? 금강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저, 그것이. 금강왕자께서 수십의 호위만 이끌고 진격하다 호족사병들 수백을 깨트리면서 승리를 하였다합니다. 그 탓에 그 지역 호족들은 금강왕자를 ‘패왕금강’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는 터라.”
견훤은 헛숨을 삼켰다.
패왕 금강이라니. 왕이 존재하는 나라에 패왕이라니.
장내는 시끄러워졌다.
견훤도 자기 아들이 명성을 올리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금강을 총애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이러한 이명은 금강이에게 정치적 타격을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견훤조차도 패왕칭호를 받지 못하였는데, 그 아들이 받아버렸다. 아비가 아닌 아들이 그런 칭호를 받은 것도 웃긴 상황인게 그 마저도 장자가 아닌 넷째가 받은 것이다.
‘양검이나 용검이 표정도 보니 영 못마땅한 눈치군.’
후계자 내정까지는 아니더라도 금강이에게 제법 마음이 있던 견훤은 이런 결과가 나오자 오히려 반겼다.
매번 전투에서 수세에 몰리던 백제였다. 그런 참에 금강이 고려를 상대로 얻어낸 패왕이라는 이명은 가뭄의 단비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금강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던가?”
“금성을 점령하였으니, 인근 지역을 모조리 복속하겠다는 보고입니다.”
그럼 나중에 그 지역에 수군기지를 둬서 또 다시 나주를 취할 고려에 맞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은 나주에 둬야 하는 건가.
아마, 금강이도 일부러 나주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보니, 눈치는 있는 것이다.
굳이 불러들일 필요는 없겠지. 저 알아서 완산주로 돌아올 것이 아닌가.
그리고 견훤의 예상대로 남은 형제들은 금강이 패왕이 된 것을 반기지 않았다.
“형님. 그놈이 형님을 대야성으로 보내고 자신은 홀로 수백의 병졸로 나주를 평정하여 대공을 세울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패왕이라니요. 그것이 가당키나 합니까?”
왕자들이라면 그 누구나 존경하는 견훤조차 얻지 못한 이명을 금강이 받아버렸다.
일개 호족나부랭이들이 그리 추켜세우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옛백제시절부터 강력한 세를 구축했던 나주의 호족들이다.
“그러지들 말거라. 금강이는 내 아우다. 너희들의 아우기도 하단 말이다.”
“나주를 탈환했습니다. 그것도 수백의 호족병사로 말입니다.”
“그야 본래 나주는 신라, 고려와의 전장과 달리 고려입장에서도 주력전선은 아니지 않느냐. 상대가 호족들이라면 금강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검은 내심 불안했다.
정말로 금강이 아무런 생각없이 본인 혼자 나주로 가려 했던 것일까.
오래전부터 출중한 무예실력과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던 금강이다. 분명 그만한 경험은 달성하리라 여기기는 했다.
그런데 설마 패왕이라니.
의심의 싹을 쉽게 거둘 수 없다.
* * *
천계에서는 대리자들로 서로 경쟁하고 있던 신들이 한 모니터를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웃고 있었다.
-어어어어억!
마침 금강이 말이 미쳐날뛰면서 적진에 들이박는 모습이 포착된다.
웃긴 건 하필 금강이 가진 능력 때문에 오히려 무쌍찍는 것으로 보여 주변에서는 금강을 무신, 패왕으로 떠받들기 시작했다는 점.
사실을 아는 신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네 대리자는 한국에서 코미디언이었냐? 웃겨 뒤지겠네. 푸하핫!”
“진짜루. 졸라 웃긴다. 우리 대리자들은 진지빨아서 오히려 재미없는데.”
유럽의 신은 나플레옹. 동남아 쪽 신은 베트남 리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최근기세가 좋았다.
수많은 평행세계와 수많은 대리자가 활약하는 가운데, 금강이란 대리자를 맡은 여신만이 미간을 모았다.
“너희들 나 놀리지?”
애초에 한반도에서는 전성기시절을 선택해도 중원탓에 대리자가 활약하기 어렵다. 그 마저도 분열된 후백제로 스타트되어 혈압이 오르는데, 다른 신들의 말에 아주 속이 탔다.
“야야, 생각해봐. 이런 대리자면 너 패배해도 보는 재미가 있을걸?”
그래. 뭐 그건 그렇지.
여신은 화가 치밀었다. 다른 신들의 대리자는 역사를 뒤바꾸면서 한참 잘 나가는 중인데. 자기 대리자는 대체 뭔 짓을 하는지. 꼴사나운 짓만 골라하고 있다.
그렇다고 뭐라 하기도 어려운 것이. 또 주변에서는 잘 나가는 것으로 비추어지니 그게 문제다.
대체 어떤 바보같은 놈이 말 잘 못 타다가 적군을 몰살시킨다는 말인가.
뭐 그래도 아직은. 아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시야 한구석에서 술병을 입에 물고 있는 신이 눈에 들어왔다.
“씨이발. 내 대리자새끼는 조선 선조인데 겁 졸라 많아서 요동까지 튀더라.
조선망했어.”
그래도 저놈 대리자보다는 나을 듯싶다.
* * *
일이 의외로 잘 풀리고 있다.
나주의 금성이 밀리고 호족들이 항복하니, 다른 지역을 먹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까.
여기까지 왔으면 자존심이 있으니 쉽게 빠질 수 없다. 물론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 빠질 생각은 하겠지만. 적어도 나주에서는 탈주하기 글렀다.
어디를 가도 패왕이라 부르고 있다. 그 덕에 완산주로 가지 않을 명분이 생기기는 했으나, 결국 백제 나주에 발이 묶인 셈이다.
“왕자님. 무엇을 그리 고심하십니까?”
“파진찬.”
“대야성 때문이십니까?”
아니, 튀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마음을 가지런히 하시면 편합니다. 결국 고려가 물러나지 않앗습니까.”
“아니, 나는 그런 것이.”
“어찌 금강왕자님의 효심을 이몸이 모르겠습니까. 허나 지금은 자중하실 때입니다. 한동안은 나주에서 기틀을 마련하셔야지요.”
무슨 기틀?
아무래도 파진찬이 돌아버린 것 같다. 나를 왕위다툼에 밀어넣을 생각인가.
“음, 파진찬. 만일 내가 백제를 떠나고 싶다고 하면 어찌할 것입니까?”
“설마 고려로 망명이라도.”
“미쳤습니까. 오다련을 잡았으니 왕건이 제 머리에 철퇴질을 할 것입니다.”
당장에 고려로 가는 건 무리다.
“그렇다면.”
“저 바다 넘어 일본이라던가 말입니다.”
내 말에 파진찬은 안 그래도 그윽하게 늘어진 주름살에 더 힘이 붙었다.
“역시 금강왕자님이십니다.”
“예?”
이 인간이 또 무슨 착각을?
“이찬 능환이 신검왕자의 편에서 견제하고 있으니, 나주에서 일본과 관계를 맺어 후원자를 만들 셈이 아니십니까?”
“예?”
“금강왕자께서는 아니라 하셔도 결국 패왕으로까지 불리는 이상, 왕위에 관심이 없다하나 결국 권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은 본디 백제의 형제국이오. 혈맹으로 이어졌던 나라니 그들을 뒷배로 두면 외교문제가 있으니 신검왕자와 이찬이 감히 왕자님을 건들지 못할 것입니다.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전혀 아니었다. 정말 단순히 일본으로 가면 어떻냐는 의미로 물어봤던 거다.
어떻게 머리를 굴리면 저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건가.
내 속내가 들키는 것보다는 나은가?
일본이 엮이면 결국 일본으로 도피하는 것도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면 발해로 가는 건 어떨까.
중원으로 가는 건 미친 선택이고, 발해는 그래도 야율아보기만 조지면 어떻게 살 수는 있을 것 같다.
일단 앞으로는 입을 조심해야겠다.
나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흠.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나는 그저 신검형님께 누가 될까 하여 이 땅을 벗어날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물론 신검왕자께서 다음 대권을 잇고자 하신다면, 금강왕자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하오나, 지금 백제는 금강왕자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꿀꺽
침이 쉴세없이 목으로 넘어갔다.
내 보기에 파진찬. 이 양반은 나를 죽일 인간이다.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필시 신검의 편에서 나를 떠보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나?
“그렇겠지요. 나주를 순식간에 제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내 입장을 생각하셔야합니다. 양검과 용검형님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습니다.”
“음. 그렇습니다. 분명 형제간의 불화가 생길 것입니다.”
“알면서도 그러십니까?”
형제간의 불화를 부추기다니. 이 무슨.
“그러니 더 힘을 키우셔야 합니다. 강력한 세를 구축한다면, 신검, 양검, 용검 왕자분들께서 금강왕자님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백제국 대왕폐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견훤이?
“그렇습니까?”
“예. 설령 왕자님께서 왕위에 뜻이 없으신다한들. 아비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역시 자식된 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음. 그렇다면.”
역시 나주를 기반으로 외교를 하는 것이 좋을까.
“그럼 나는 이곳이 안정되는 즉시 일본으로 가겠습니다.”
“일본이라 하시면.”
“신라와 고려를 치는데 견제를 할 세력을 둬야 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님께 일본과의 외교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아서 완산주의 견제도 피하고, 내 본분을 다할 참입니다.”
견훤의 면상으로 볼 때, 금강을 그리도 귀엽게 여기더라.
그렇다면 일본과의 외교에 대한 전권도 주겠지.
“좋은 방책입니다.”
그래. 좋은 방책처럼 보이겠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정말로 나는 신검과 맞서 싸우게 된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지금가면 호랑이굴이겠지만, 나는 완산주로 가야한다.
능환이 신검을. 그리고 최숭우가 나로 장기를 벌일 셈이었다면 꿈도 큰 거다.
그렇게 낚여줄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전에 완산주로 가야겠습니다.”
“왕자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눈칫밥 좀 먹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애초에 내가 뭐가 찔려서 여기 처박혀 있어야 해? 신검이든 능환이든 나를 엿같이 보면 한바탕 난리치고 쫓겨나면 그만이다.
나는 아쉬운게 없어.
“한 번은 가야 합니다. 마땅히 가서 아버님께 공에 대한 상을 받고, 또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외교노선도 정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