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쟁이 임박하다.
* * *
“아, 진짜 망했는데, 이거.”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죽을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
그 돌대가리 같은 신이 내 몸을 금강으로 만들어뒀다고 해도 원거리 공격이 통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화살비가 쏟아지는 전장에서 내 몸이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해볼수록 변수가 너무 많다.
“아니지. 화살맞고 죽을 수 있다면 나쁜 것도 아니잖아?”
어쩌면 투석기에 맞고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미 한 번 죽은 탓에 자살시도도 해본 지금은 그런 화살비가 쏟아져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다.
한 번 시도는 해보지 뭐.
화살비 맞고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으니까.
내가 신검 옆에서 사라지면 군주로서 부족함이 많은 신검은 실제 역사대로 나라를 말아먹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 전장에서 배신도 할 수 있는데. 그리 손바닥 뒤집듯 나라를 배신해버리면 왕건이 이 새끼는 지 꼴릴 대로 주인을 바꾸는 놈이다. 할 테고.”
이건 최악의 결말이다.
무엇보다도 최근 고려와의 관계가 험악해지고 있다.
아니, 원래 험악해지고 있었다. 920년 대부터 후백제가 신라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고려는 신라에 구원군을 보내면서 전쟁의 조짐이 보였다.
결국 터질 전쟁이다.
삼한의 패권을 건 전쟁. 신라는 이미 껍데기 뿐인 나라니 그렇다쳐도. 고려와의 싸움이 분명히 임박했다.
“일단 보험은 들어둬야지.”
지금 시기는 현대시간으로 따질 때 920년. 제 3차 대야성 전투가 벌어지는 시기다.
이 전투에서는 신검이 아니라 본래 양검이 가게 될 것이다.
설마 거기로 가지는 않을 테지.
3차 대야성 전투는 결국 후백제가 승리하기는 한다.
어쨌든 구색은 맞춰야 하나?
왕건 입장에서도 좀 능력있는 놈이 자기들에게 귀부하는 것이 좋겠지.
그렇다면 이럴 때는 좀 신박한 전쟁을 노려야 한다.
대야성 전투야 굳이 내가 돕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래. 일본을 친다. 는 개소리고. 역시 나주겠지.”
나주가 먹힌 이후, 후백제는 상당히 뒤가 찝찝해진다.
실제로 위치를 보라. 언제든 뒤통수를 때릴 절호의 위치다.
동쪽으로는 껍데기 뿐인 신라. 북으로는 고려, 또 아래로는 나주를 점령한 고려. 후백제는 사방이 위험하다.
“차라리 대야성을 친다고 말하면서 거꾸로 나주를 친다면?”
고려에게 신라는 중요한 비즈니스 파트너다. 고려 입장에서는 신라를 반드시 살려둬야만 하니, 백제가 대군을 대야성에 보낸다면 고려도 대야성을 중심으로 전략을 펼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주를 되찾을 기회가 생긴다.
일단 나주와 백제는 지척이기도 하니까.
나주의 호족들이 고려로 갈아탄 것은 결국 결국 후백제와의 갈등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섭하는 것으로는 어려움이 있을 테고. 나주 공략전을 일찌감치하는 것이 이득이다.
“그 다음에는 일본과의 교역도 제대로 해야지.”
21세기 일본은 한국과 영토, 역사적인 분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조금 다르다.
미래의 일본이 일제의 처참했던 잔재를 애써 숨기려고 하는 옹졸한 국가라면 지금의 일본은 한반도와 적대적이지도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미묘한 관계다.
그나마 백제가 일본과 친했으니, 어쩌면 지금의 백제가 다시 옛 부여씨 백제의 후신을 자처하면서 일본과의 외교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아군을 두게 될 수도 있는 거다.
백제의 국호 중 하나였던 일본을 흠모해서 자기들이 쓰는 놈들이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발해는 어떤가?”
많이 늦기는 했어도. 지금이라도 발해와 외교를 터서 요나라를 막아내면?
“6년 정도 남았으니. 대비를 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잠시 생각해보았는데, 발해의 경우에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중간에 고려가 껴있다. 발해를 돕는다고 가정하면 백제 본토가 위험해진다.
망하기 전만 해도 신검이 군사 10만을 동원한 나라지만, 주력군이 빠지면 후 백제는 고려에 추풍낙엽처럼 무너질 것이다.
요만 어떻게 견제할 수 있다면 반대로 발해가 위에서 고려를 압박하고 일본이 신라를 견제하면 우리 백제는 숨통이 트인다.
“즉, 삼면이 막혀있는 이 상황에서 반대로 저들을 압박할 수가 있다.”
까놓고 말하자. 고려의 국력은 요나라를 넘지 못한다. 특히나 통일 전인 지금의 고려가 요를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원 역사대로라면 어쨌든 요가 여요전쟁시기 까지 우리를 칠 일은 없을 테지만. 발해가 무너진다면 요동길이 막힌다.
물론 발해는 지금 거란에 충분히 압박을 받는 중이다.
거란은 발해에 며칠 만에 망한 것 같지만, 거란의 발해멸망 사전작업만 20년이 걸렸다.
“에라 모르겠다.”
3년 남았을 때 준비해도 괜찮겠지. 일단 지금 내가 할 일은 견훤이 전쟁을 준비할 때 외교를 어떻게 해보는 거다.
* * *
시간은 하릴없이 흘렀다.
완산주를 탈주할 방법을 몰색해보는데, 적당한 명분도 나갈 구멍도 없다.
왕자라 어지간히 옆에 사람들이 많이 붙어있어야지.
“왕자님.”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곧 신라를 치실 것 같습니다.”
“그래?”
때가 이르렀으니 뭐 당연하겠지.
고려와 신라의 연합으로 고립되었으니, 슬슬 탈출구를 찾을 때다.
그렇다면 지금 나도 그 시기를 노려야 하는 것일까?
“예. 대야성 공략을 위해 병력을 편제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야성이라. 일이 결국 그렇게 되었나?”
“예?”
“아니다. 그럼 나는 폐하를 뵈어야겠다.”
아니지. 그 전에 신검이를 먼저 만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검은 나를 완전히 믿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건 내가 미리 말을 하는 편이 좋겠지.
신검을 찾아가자,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형님. 부왕께서 지금 대야성을 칠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래. 내가 갈 생각이다. 너와 함께 말이지.”
나는 제발 빼라.
“대야성도 중요하지만, 나주는 어떻습니까?”
“나주라? 듣고 보니, 네 말도 일리는 있기는 하다마는. 좋다. 그래. 어디 한번 아버님께 가보자꾸나.”
지랑 함께 아버님 뵌다고 하니까 반응은 참 좋다.
* * *
“뭐라. 나주로 가고 싶다?”
“예. 아버님. 금강이와 함께 나주를 쳐서 백제의 땅으로 만들 것입니다.”
“흠. 나주라 나주. 어째서냐. 신라와 고려의 유대가 튼튼해지고 있는 이때, 대야성을 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니더냐?”
그건 이미 백제의 승리로 굳어졌고. 교역을 위해서라도 나주를 찾아서 재해권을 온전히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양동작전입니다. 폐하.”
“양동작전?”
“대야성을 치는 한편 나주를 치는 것입니다.”
“허허, 금강왕자께서는 아직 천하를 읽지 못하시나 봅니다. 왕자님. 지금 우리 백제가 대야성을 치면 고려가 내려올 터인데. 나주로 보낼 군대가 남기야 하겠습니까?”
기세 좋게 말하고 있는데, 능환이가 찬물은 끼얹었다.
그래도 한 번 즘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닌 말로 수비를 굳건히 하고 대야성을 한달음에 치면서 남쪽의 병력으로 나 주를 치면 가능하다.
백제는 그만한 국력은 된다.
“그렇겠지요. 신라를 지키고 싶어 미친 왕건이 군대를 보내지 않겠습니까.”
“알고 있음에도 무리를 해보자는 말이냐?”
“예. 폐하. 나주를 얻으면 고려에 빼앗긴 재해권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바닷길이 열리게 될 것이구요.”
어느 시대이든 결국 바다는 중요하다.
바닷길이 열리면 해상 교역로가 확보되고 중원과의 교류는 물론이오 발해까지 진출할 수 있다.
나주를 먹혀 지금처럼 교역로가 꽉 막힐 때가 아니라 군사적으로 활동하기도 쉬워진다.
거란이 점령할 요동으로 들어가 두들길 수도 있다.
물론 고려가 걸리기는 하지만, 일단 일은 터지고 봐야 한다.
망하면 망하는 대로 고려가 통일하면 그만이고 나는 존버하면 된다.
즉, 왕자로서 할 짓은 해주겠지만 백제가 망하든 말든 나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 내 사정이다.
“너의 뜻을 말해보거라.”
“현재 아국은 껍데기 뿐이라지만 있으면 거슬리는 신라가 옆에서 고려를 믿고 호가호위를 하고 있으며 고려는 남북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군을 만들면 될 것입니다.”
“일본을 말하느냐?”
일본은 당연히 넣어야 하고.
“일본만이 아닙니다. 북쪽의 진정한 고려를 동맹으로 삼고 싶습니다.”
“아니, 금강아. 그게 대체 무슨 정신놓은 소리냐. 고려는 우리의 적이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이 앞과 뒤가 맞지 않다.”
신검이 뭔 바보를 쳐다보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형님. 이 아우는 진정한 고려라 하였습니다."
“지금 금강왕자께서는 고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발해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역시 파진찬. 신라 삼최라고 불리는 인물답다.
“예. 파진찬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발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발해라. 발해? 흐음.”
“조금만 머리를 굴면 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왕건이 제 아무리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천명해도 결국 신라 호족 나부랭이에서 시작하였으며, 패서 호족들이 구고려의 후손이라 하여도 저 드넓은 요동을 점유한 발해의 고려인들만 하겠습니까? 왕건의 고려는 대다수가 신라인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발해는 다릅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고려입니다. 고씨 고려의 후신과 부여씨 백제의 후신인 우리가 다시 여제동맹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내 말에 대전은 아주 고요해졌다.
일부 신료들은 수군거리며 내 말에 동의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우리를 도울 여건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거란과 요동에서 피튀기며 싸우는 것으로 압니다.”
그걸 내가 모를까. 발해와의 동맹은 그저 발해의 이름을 빌리기 위함이다.
어쨌든 예전만 못해도 발해는 대국이다.
분열된 신라 따위가 감히 비빌 수 없을 만큼 큰 나라다.
아마 고려조차도 발해에게는 못 미칠 것이 분명하다.
“예. 우리는 그들의 이름만 빌릴 것입니다.”
“신라가 고려의 이름을 빌리는 것처럼 발해의 이름을 빌리자?”
“제 아무리 거란이 대단하다 하여도 발해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사실 6년 후에 멸망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면 믿을 사람도 없고, 믿는다해도 멸망할 나라와 왜 동맹하냐며 따질 것이다.
“그런데 발해가 우리와 동맹을 하려 하겠느냐? 너의 뜻이 참으로 가상하다마는, 지금 발해의 가독부 대인선도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닌 줄로 안다.”
“그래서 발해가 바라는 것을 줄 것입니다. 바로 거란을 물리치는데 협조하겠다는 것이지요.”
이 무렵이면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이미 발해 멸망을 위한 밑작업을 충분히 짜두고 있을 것이다.
“네가 그럴 듯하게 말은 하고 있는데, 그래도 아래 고려가 있지 않느냐?”
“고려와 발해는 서로 적이 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도 사이가 좋을 수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시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표방하였고, 외부에서는 고려로 불리기도 했는데, 왕건이 또 고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당시 기록이 적으나, 과연 고려와 발해의 사이가 좋았을지는 의문이다.
발해가 거란과 피튀기며 싸우고 있다고 해도 국경을 접한 고려를 발해가 그냥 둘 리 없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지원요청을 한 것은 나라가 다급하니 어쩔 수 없다 해도,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반도의 나라를 발해가 인정을 할까?
“음.”
“더군다나 일찍이 발해는 중원과 해족, 신라를 이용하여 대 거란전선을 만드려고 했는데, 새로운 삼한의 분열과 고려가 발해의 지원요청을 거부한 일로 아마 가독부는 상당히 심기가 언짢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주를 되찾으면 단순히 아국의 재해권을 찾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땅은 곡창지대이기도 하며 당연히 우리 역시 고려의 앞바다에서 마음껏 저들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성강 전투를 치른다던가.
솔직히 말해서 신검이 왕건급만 되었어도 왕건 대에 삼국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망하기 직전의 백제가 10만 가까이 동원했는데, 지도자가 왕건급이라면 말다했지.
“그 또한 일리가 있구나. 금강아. 네가 처소에 틀어박혀 몸을 움직이지 않아 군살만 생기는 줄 알았거늘. 천하를 읽고 있었구나.”
“과찬이십니다.”
“그럼 아버님. 대야성과 나주를 동시에 치는 것입니까?”
“그래. 신검아. 그리하자꾸나. 우리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이때 불현듯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나주로 내려가서 무쌍찍다가 잠적타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