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백제의 넷째왕자
사람들은 다양한 꿈을 꾼다.
행복한 꿈, 즐거운 꿈, 악몽,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런 꿈 말고, 장래 희망이라는 관점에서도 또 꿈이란 단어를 해석할 수 있다.
내 어린 시절은 워낙 박복한 인생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굵고 길게 가고 싶다는 그런 꿈을 꿨었다.
서론은 이쯤 하도록 하고.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
아무래도 나는 꿈을 꿔도 아주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듯싶다.
“그래서 내가 댁 취미에 걸려든 천하에 둘도 없는 불쌍한 놈이라고?”
“무엄한 것. 신에게 선택받은 것이 영광인 줄도 모르고. 에잉, 쯧쯧쯧······.”
자칭 신이라는 놈. 믿기 싫은데, 빛을 몸에 빙빙 두른 여인이 내 앞에서 혀를 차고 있다.
“아니, 씨발. 잘살고 있는 놈을 대뜸 죽여서 이곳에 끌고 와놓고 뭔. 실수도 아니야. 신들끼리의 내기에 내가 왜 낚여야 하는 건데.”
신이 이 여편네 한 명이 아니다.
신들은 여럿인데, 그놈들이 지금 심심하니 내기 하나를 했다더라.
신들끼리 인간을 대리자로 선택해서 과거의 시간대에 존재하는 평행세계들로 보내고, 그중 누가 제일 활약하는지 평가를 내려 최종승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승자에게는?”
“인간 시간대로 휴가 3일. 미리 말해두는데, 신도 할 짓 많아서 3일 휴가면 엄청난 거야.”
나는 고작 신의 72시간의 휴가 때문에 죽은 건가.
“뭐 아무튼 그냥 보내지는 않아. 능력은 줄 거야. 이름값은 하게 해주지.”
“닉값?”
무슨 뜻이야 그게.
“뭐, 과거 시간대의 어떤 인물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살아갈 수는 있을 거야.
나름 보상도 준비했으니 알아서 잘 살아가 봐!”
“아니 싯팔.”
신이고 나발이고 죽은 김에 욕사발이나 시원하게 먹이려고 했는데, 그 순간 온 세상이 빛에 물들었다.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들지만 납득해야겠지.”
꿈인가 현실인가. 여전히 그 구분을 하기 힘들지만, 나는 지금 옛날 옷을 입고 있다.
조선 시대 것은 아니다. 갓도 없고, 뭔가 느낌이 고려 시대나 그 이전 시대의 복장들 같은데. 하여튼 그렇다.
뭔가 아주 불길한 것에 낚인 듯싶다.
“설마······ 아닐 거야. 아니었으면 좋겠어.”
이거 정말 꿈이어야 한다.
휴대폰도, PC도 없는 빌어먹을 과거로 온 것은 아니라고 외치고 싶다. 하다못해 판타지 세상도 아니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금강 왕자님. 기침하셨습니까?”
응? 뭐라고?
“다시 말해보아라.”
“그, 금강 왕자님.”
금강? 금강이라고? 내 기억이 맞다면 한반도 역사에서 금강이라는 이름의 왕자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넷째 아들이자 왕권 다툼에서 참살당하는 그 인물인데?
“이런 젠장!”
아무래도 나는 상당히 위험한 시대의 위험한 놈에게 빙의한 것 같다.
* * *
내 상황은 갈수록 좋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꿈은 이제 더는 꿈이 아니다.
빌어먹을 여편네 신이 나를 대뜸 이 몸에 구겨 넣은 거다. 3일 휴가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왜, 왜 하필 금강인가.
“좋다. 이 꼴 저 꼴 보기 전에 그냥 죽자. 죽는 게 남는 장사다.”
한번 죽고 나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자살 욕구가 솟구쳤다.
열심히 살아 보려니 그 망할 신을 위해 일해주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깐, 그런데 이름값이라는 게 설마?
······.
설마하니 ‘닉값’이라는 게 이런 건 줄 몰랐다.
“돌담에 있는 힘껏 머릴 박았는데, 오히려 담이 부서진다니······?”
설마설마했는데, 이 세상에서의 내 이름 금강(金剛)을 그대로 닉값으로 써먹는다고?
금강석은 다이아몬드가 아닌가.
그럼 지금 내 몸의 강도가 다이아몬드 수준이라는 건가? 그도 아니면, 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단단하다는 건가.
아마 후자 쪽이라 생각한다. 금강, 말 그대로 다이아였다면 지금쯤 내 몸은 투명하고 영롱했겠지.
솔직히 어딘가 불길해 대충 예상은 했다. 그러니 쉽게 담에다 머리를 박을 수 있었던 거고. 몸이 이러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물에 빠져서 익사할까?
아니다. 그쪽도 뭔가 위험하다. 만일에 물에 들어갔는데, 익사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가라앉아서 숨이 막힌 채로 살아있어야 하는 거잖아.
“어쩔 수 없나.”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다면, 그냥 살려고 발버둥 치는 쪽이 낫겠지.
죽을 생각으로 살자.
그 여신 뜻대로 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답이 없었다. 일단 원하는 대로 해주지. 다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삶은 원 역사와 다를 것이다.
금강 왕자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고려의 왕건에게 의탁할 것이다.
먹고 살려면 그 길뿐이다. 사이코 같은 신검 밑에 있을 수는 없지.
“아무리 몸이 단단해도 신검과 그 세력들에게 밉보이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렇다면, 역시 내 스스로 조심히 살아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이 세상이 정말 부조리하다.
“금강아. 어찌 서책만 펴고 있는 것이냐?”
넷째를 그리 아낀다는 백제왕 견훤이 찾아왔다.
“폐하, 어쩐 일로 이곳까지 왕림하셨습니까?”
견훤이다. 견훤이야. 와, 실제로 보니 어마어마한 거구인데?
얼굴도 어마어마하다. 무섭다.
“하하. 내 귀여운 자식을 보겠다는데, 왕림이고 뭐고 할 것이 있겠느냐? 금강아.”
“예, 폐하.”
“너는 내 자식이다. 이 대백제국 대왕인 이 견훤의 자식이란 말이다. 금강아, 나는 왕이기 전에 무장이다. 헌데 너는 짐의 자식이면서 어찌 서책만 보고 있느냐?”
저걸 있는 그대로 번역하면 내 자식이라는 놈이 서책만 읽지 말고 장수로서 뭔가 해보라는 뜻이겠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이 몸의 기억에 따르면 금강은 견훤이나 신검이나 장수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 때문인지 견훤이 유독 막내를 편애했다.
“폐하. 폐하와 신검 형님께서 삼한일통을 이루게 되시면 결국 누군가는 내정을 돌봐야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말 위에서 검을 휘두르며 저 고려주 왕건을 격파하는 일은 신검 형님의 일이고, 소자는 문관이 되어 폐하와 신검 형님을 보좌할 것입니다.”
“네 뜻은 참으로 가상하다마는.”
그런데 되짚어볼수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견훤이 정말로 나를 편애하는 건가?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길을 권하는 걸까.
딱 말 늘어지게 하는 것이 견훤은 나를 왕위 다툼으로 끌어들일 양반이었다.
그건 위험하다. 나는 검을 쥐어서는 안 됐다. 이미 내가 되기 이전 금강은 군사적인 재능을 보였을 터. 이미 신검이 나를 견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일단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야 했다.
신검이 타락하여 제 이복동생 금강을 참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결국 견훤이 금강만을 편애한 탓이 클 테니.
하필 또 여기에는 신검의 모친인 상원부인이 있다. 일이 어찌 될지 몰랐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택할 수 있는 변수는 내 어머니인 고비밖에 없었고.
나는 슬쩍 견훤의 옆에 서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신검과 내가 이복형제인 것은 분명한 모양이었다.
나는 걱정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녀는 잠시간 내 눈짓에 의아해하다가,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제야 견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 저, 폐, 폐하.”
“왜 그러시오?”
“금강이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폐하와 신검 태자가 이끌어갈 백제는 결국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룩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암! 대왕께서는 고려의 왕건을 이길 것이고 신검도 대왕의 뒤를 이어 천하를 평안하게 할 것입니다.”
어머니의 말에 상원부인까지 한술 더 떴다.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일이 내 생각대로 흘렀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전생에는 어머니가 없었으니, 나는 지금부터 열심히 이 어머니를 따르기로 했다.
“그럼. 뭐 신검이는 그렇다 치고, 우리 백제가 당연히 천하를 가져야지. 내 고려의 왕건이를 기필코 잡고야 말 것이야.”
견훤의 말 속에 왕건에 대한 열등감이 은근히 잠재되어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뒤에서 폐하와 신검이를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렇기는 하구려. 그러나 금강아. 너도 짐의 자식이다. 네가 품은 포부가 장차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너조차도 말이다. 그러니 최소한네 형들보다는 뒤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 말씀을 내가 따르면 내 인생이 위험합니다. 그러다가 신검의 손에 죽으라고? 그러기 전에 나는 탈주 루트를 선택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음, 그래도 자식이 책을 읽겠다는데, 방해할 수는 없지. 금강아. 무릇 사내란 자신이 한 말에 언제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네가 그 길을 선택하겠다면 이 아비에게 네가 이 대백제국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먼저 증명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대왕 폐하.”
“가십시다. 부인.”
갖은 변명을 둘러대고 나서야 백제왕 견훤과 그 부인들이 멀찌감치 떠나갔다.
“휴, 드디어 갔네.”
잠깐이었지만 그 분위기에 그 위압감.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나를 노려보던 상원부인의 눈초리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힘든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 왕위에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분위기를 풍겨야 했다. 그래야만 신검 그 또라이 새끼한테 찍히지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