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81화 (281/298)
  • 281화. 귀천(歸天)

    “늘 생각이 든다만, 네 양부님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구나. 그렇지 않느냐.”

    한강 하구, 서해 바다가 멀지 않은 한적한 어느 동네, 나란히 말을 탄 두 사내가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몸에 휘감은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보아하니 꽤 귀하신 몸들인 듯했다.

    “그래도 선대왕 시절에 도로를 제대로 닦은 뒤로 여정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시지요. 힘든 기색이라도 보이셨다가는 전하라 해도 사부에게 혼이 나시지 않겠습니까.”

    “핫핫. 내 그럴까 봐 아버님을 본받아 신체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길산이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내 스승님이 낙향하신 이후로도 습관을 바꾸지 않았거늘.”

    “글쎄요. 전하의 건강관리는 대비마마와 중전마마께서 알아서 하신 것 같습니다만……. 아, 전하. 저기 오두산이 보입니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군요.”

    “아쉽게도 숨이 차오르려면 아직도 한참 남은 것 같도다. 네 기대에 부응해주기에는 어렵겠구나. 물론 이번에도 도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발걸음을 했다고 스승님께 혼이야 날 테지만.”

    길산이라 불린 무관이 입을 삐죽였다. 왕의 건강 같은 일급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그는 꽤나 높은 자리에 올라있는 듯했다. 일단 왕을 대하는 태도부터 보통 신하와는 사뭇 달랐다.

    이윽고 두 사내의 발걸음은 시골과 어울리지 않는 으리으리한 기와집 앞에 멈췄다. 왕을 은밀히 따르던 호위병들은 소리 없이 기와집 주변으로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어머, 전하. 여긴 갑자기 어쩐 일로…….”

    인기척을 느끼고 대문을 연 안주인은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닥에 엎드려 예를 표하려던 그녀를 왕은 재빨리 만류하는데 성공했다.

    대문 안에서는 아이들이 내는 것이 분명한 소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급히 귀하신 몸을 안채로 모신 금발벽안의 안주인은 그제서야 왕과 안부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셨군요. 전하께옵서도 그러하시고, 대비마마와 중전마마 모두 안녕하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아직까지도 마마와 금슬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하란타에서부터 그러시더니, 후훗.”

    “부부인도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것이 그때와 다르지 않은 건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참, 북경에서 온 서찰입니다. 귀비가 또다시 회임을 했다는군요. 황제께서 따님을 정말로 금지옥엽처럼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다행이네요. 우희 그 아이, 시집갈 때만 하더라도 울고불고 하던 녀석이 요새는 조선에 나들이할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니…….”

    자리에 흐르는 분위기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왕은 자신이 원손이던 시절부터 궁에 들락거리며 세자빈이던 어머니를 따라 일하던 안주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혼인을 올리기 전, 여사관(女史官) 박요안이라 불리던 시절의 이야기.

    당시 그녀는 왕의 네덜란드어 선생이기도 했다. 지금 왕 앞에 펼쳐져있는 아학편(兒學編)이라는 책은 본디 이국으로 떠나는 세자에게 네덜란드어를 가르치기 위해 요안이 집필한 책이다. 그녀가 왕과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극존대를 올리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중전은 이리 멀리까지 나올 수 없으니, 부부인더러 한번 궐에 들러 달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헌데, 아직도 이렇게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십니까?”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스스로 내린 결정 탓에 목숨을 잃은 백성들에게 죄의식을 가지고 계신걸요. 오늘 아침에도 아이들을 모아다 소학을 가르치시고는 초막으로 올라가셨어요.”

    국구(國舅, 황제의 장인), 죽산부원군, 태어사로 불리는 스승이 관직을 내던지고 낙향한 지도 꽤나 세월이 흘러 있었다. 선왕이 붕어한 후 현왕이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의 일이었다.

    “스승님의 일과는 늘 변함이 없으시군요. 부부인 역시 마찬가지고요.”

    “저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이토록 많은데, 어찌 쉴 틈이 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할 뿐입니다.”

    왕에게 답하는 요안은 편안해보였다. 스승이 그러하듯 그녀도 방금까지 안채에서 고아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친 모양이었다. 지금 조선에서는 네덜란드어만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으면 가진 것이 없더라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으니까.

    청나라 환향민들이 모여 사는 교하로 낙향한 스승은 그동안 모은 막대한 재산을 이런 곳에 쓰고 있었다.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후손에게 후원금을 보내고, 인근 고을의 고아들을 모아다 어엿한 어른으로 키워내는 것만이 죗값을 조금이라도 치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

    “필요한 것이 있거든 언제든 궐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대비께서도, 중전도 언제든 부부인을 도와드리려 하고 있으니.”

    “아닙니다. 이미 저희 부부를 도와주는 일손도 충분하고, 전하께서 그리 신경 써 주신 것만으로도 소첩은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 숙여 감사를 올리는 요안을 보는 왕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동안의 전쟁은 오직 스승의 잘못만은 아니었을 텐데. 지금까지 조선에 일어났던 전쟁은 누군가는 반드시 수행했어야 했을 전쟁이다. 하지만 그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스승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 대신 조금이라도 책임을 지는 방법을 택했다.

    평생에 걸쳐 짊어졌던 위정자의 책임을, 스승은 낙향한 후에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왕은 그런 스승이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왕도 이제는 정치의 일선에 나선지 꽤나 오래된 몸, 위정자의 책임이라는 것을 뼛속 깊이 통감하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왕이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일까, 방 안에 흐르는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이 느껴졌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왕은 급히 입을 다시 열었다.

    “헌데, 초막이라 하셨습니까? 그곳이라면…….”

    “네. 오늘도 언니를 보러 가셨네요. 지극정성이기도 하시지.”

    “……서운하지는 않으십니까?”

    “저희 서방이야 하루 이틀 이랬어야죠, 후후. 선생님의 첫 번째가 아니어서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저를 그 이상 섭섭하게 만드셨던 적은 없으니 괜찮습니다.”

    요안이 허공에 쓸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웃음에 담긴 의미를, 왕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가진 슬픔에 대해 왕비에게 귀띔을 받은 바가 있었으니까.

    스승의 집안은 유난히 손이 귀해, 돌아간 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딸 한 명이 전부였다. 대비의 말에 의하면 그나마도 남경에서 받아온 신비한 약 덕분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양자로 입적한 길산이 군주(郡主)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많이 보아서 다행이었다. 길산을 정식으로 족보에 올리기 전, 후사를 걱정하는 선왕에게 스승은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글쎄요. 아마도 있어서는 안 될 이에게 역사가 부리는 작은 심술이 아닐지…….’

    뜻 모를 말 한 마디를 남긴 스승은 그 후로 후사에 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스승과 요안이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는 이유는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왕 역시 그 일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스승의 후대가 이렇게 된 일은 왕에게 이득이라 볼 수 있었다.

    만약 스승에게 친자가 있었더라면, 청나라 황제의 처남이자 제일가는 권신의 아들이 된다.

    그런 존재가 왕권에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고, 그 누가 속단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와 다를 바 없는 사이였던 길산이 스승의 뒤를 이은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길산도 작위를 회복한 예친왕 도르곤의 사위긴 하나, 황제가 조선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 비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 주세요, 전하. 저는 선생님을 만난 것을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여기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측실이라지만 연모하는 사내의 품에 평생 안길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여인의 행복으로는 차고 넘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니가 떠나고 나서는 측실이라는 꼬리표도 떼 주셨고요.”

    “…….”

    “애초에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살아가는 즐거움조차 깨닫지 못했을 몸, 저는 정말로 행복했답니다. 물론, 지금도 행복하고요.”

    스승이 아니었다면 이웃나라를 넘어 지구 반대편까지 통하는 대작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요안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

    스승이 머물고 있는 초막은 험한 곳에 있지 않았다. 오두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는 선산으로 쓰기 알맞게 아담했고, 스승이 기거하던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무덤가에 도착한 왕이 초막의 입구에 손을 뻗었을 때, 그곳에서는 기이한 향기와 함께 불경 읽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승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매일같이 치르는 의식이었다.

    “나랏일을 미뤄두고 이런 외진 곳까지 행차하셔서야 되겠습니까, 주상 전하. 상왕께서 보셨다가는 회초리를 드셨을 겝니다.”

    “농담은 여전하시군요. 그 나랏일을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 스승님의 지혜를 빌리고자 온 길입니다. 너무 타박하지 마시지요.”

    스승은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를 맞아들였다. 왕에게서 딸에게 온 편지를 받아드는 스승의 목소리에는 평온만이 가득했다.

    왕은 감히 그 앞에서 어찌 사대부가 불씨의 잡변을 입에 담느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불교를 믿어왔던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고, 애처가로 유명했던 스승이 아내를 위해 잠시 일탈을 택한다 해도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우희는 잘 지내는 모양이군요. 녀석, 카간이 보낸 집채만 한 책 선물을 받고는 시집가겠다 마음을 바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나저나 제가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탓에 전하께 폐를 끼쳤군요. 늙으니 고집만 늘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도리어 스승님의 일과를 방해한 것은 저입니다. 그리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스승이 낙향 아닌 낙향을 택한 것도 아내를 위해서였다. 원체 몸이 약했던 그녀가 점점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자, 스승은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을 찾아 도성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사모는 다시 건강을 되찾지 못했다. 그리고 스승은 먼저 떠나보낸 아내의 명복을 빌겠다는 핑계를 대며 도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스승의 은퇴에 대한 세간의 반발은 그리 크지 않았다. 왕 또한 그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승과 사모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조선 팔도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에 위기가 찾아오면 누구보다 먼저 조정으로 돌아올 사람이 스승이었으니까.

    이윽고 초막 안에 또 다른 향기가 그윽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왕이 선물로 가져온, 사모가 생전에 좋아하던 찻잎에서 우러난 향기였다.

    “그래. 오늘은 또 어떤 일을 논하러 오셨습니까, 전하?”

    “사실, 별것은 아닙니다만…….”

    따끈한 찻물을 한 모금 삼킨 후에야, 왕은 스승에게 이곳까지 온 목적을 털어놓았다.

    조정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시시콜콜한 문제를 왕이 털어놓으면, 스승은 그 문제에 대해 현명한 답변을 내놓았다.

    선왕에게서 왕좌를 물려받은 이후, 왕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집권 초기야 조정에 머물던 스승이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지만, 이제는 왕 스스로 역경을 헤쳐 나가야 하는 시기였다.

    “이번 건은 주상께서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신하들 또한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요. 그대로 밀고 나가세요.”

    “그 건은 조금 양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반대세력의 수장을 야간에 은밀히 궐로 소환해서 솔직한 대화를 나눠보세요.”

    “이 건은 전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언제까지고 제게 의지를 하셔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요.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결정에 따르는 장단점 또한 고민해보시길 바랍니다.”

    왕이 털어놓은 문제에 대해 스승은 최소한의 조언만을 남겼다. 사실 왕도 스승에게 수십 년 동안 정치를 배운 몸, 마음속으로는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저 스승에게서 틀리지 않았다는 위안을 구하고 싶었을 뿐.

    조정은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과거와는 달리, 하나 되어 왕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었다. 선왕과 스승이 오랜 세월 동안 애를 쓴 결과이기도 하고, 그동안 하나로 뭉쳐 국난을 극복해온 경험 덕분이기도 했다.

    이제는 조정 신료 대다수가 스승의 뜻을 따르는 당파로 채워져 있었다. 왕은 세간에서 그들을 ‘성근학파’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스승에게 전하려다 뜻을 접었다.

    이상하게도 스승은 자신의 별호만 나오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 하란타에 국비로 유학을 떠났던 선비들이 무사히 돌아왔다고요. 하란타로 국비유학생을 보낸 것이 벌써 열 차례가 넘었던가…….”

    “예, 스승님. 그리고 청군을 도와 준가르를 치러 갔던 우리 군사들도 돌아왔습니다. 몽골 고원으로 적을 추격해 큰 전과를 거뒀고, 피해도 그리 크지 않다더군요.”

    “다행이군요. 인재를 등용할 때는 늘 옥석을 고르듯 신중해야 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대할 때는 늘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스승님께서 늘 강조하시던 부분이 아닙니까. 이 제자도 그 정도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장성한 제자를 지나치게 타박한 것 같았던지, 아니면 제자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건지. 스승은 왕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늘 엄하던 스승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 왕은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왕은 스승에게 가지고 온 선물을 밀어놓았다. 유학생들이 귀국하며 가지고 온 플란데런 산 모직물과, 조선이 새로 개척한 연해주에서 들여온 담비가죽이었다. 오늘 가지고 온 찻잎 또한 대만의 산지에서 들어온 것, 어찌 보면 전부 스승이 낸 결과물들이었다.

    “이건…….”

    “산에 가까운 곳이라 추위가 일찍 찾아온다 들었습니다. 부디 늘 건강하셔야 합니다, 스승님.”

    “예전 같았으면 이럴 재물로 백성들부터 살피라 직언을 드렸을 것이나…… 아닙니다, 전하께는 이제 더는 가르칠 것이 없어져 버렸군요.”

    “저도 나름대로 성실한 제자가 아니었습니까. 스승님께 배울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하하…… 부정할 수 없는 말이군요. 돌아가신 선왕 전하의 뒤를 이으신 것이 전하셔서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쿨럭. 스승에게서 돌연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왕은 황급히 손에 잡히는 대로 모피를 집어 들어 스승을 감쌌다. 갑자기 스승의 몸뚱이가 눈에 띄게 작아져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허허……. 한 나라의 지존께서 제 수발을 들어주시다니. 그동안 조선을 위해 헌신한 보람이 있습니다그려.”

    심양에서 처음 마주했던 시절 이후, 스승은 신체를 단련하길 게을리하지 않아 그 큰 체구가 늘 단단한 근육으로 가득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무관으로 착각하기 일쑤일 정도로.

    헌데 왜 갑자기, 그 듬직하던 스승의 몸뚱이가 왜 이리도 작아 보이는 것인가. 어째서.

    “스승님……. 갑자기 어디 아프시거나 하신 것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 일 없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언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음 짓는 스승을 보며, 왕의 뇌리에 대화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방금 만난 요안이 지나가듯 한 이야기였다.

    ‘선생님이 요새 이상한 말씀을 입에 담곤 합니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마치 몸에 붙들려 있던 혼이 느슨해진 것 같다나…….’

    왕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렇게 행동이 정지했던 왕의 몸에, 억센 손길 하나가 느껴졌다. 예전과 다를 것 없는 스승의 손길이었다.

    “왜 이리 경거망동하시는 겝니까, 전하.”

    “스승님…….”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지존이십니다. 고작 신하 한 명의 안녕 때문에 그리 동요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를 그렇게 약한 사람으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제 얼굴에 먹칠이라도 하실 생각이 아니시거든. 염려를 거둬 주십시오, 전하.”

    스승의 눈길이 왕을 향해 매섭게 파고들었다. 마치 임금의 속내를 그대로 읽어내리는 듯한, 세자시강원 시절 엄하게 가르치던 스승의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왕은 그제서야 스승에게서 떨어져 원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기억해내십시오. 제가 대학연의(大學衍義)로 세자 시절의 전하께 제왕학을 가르치면서, 수업을 마칠 때마다 무엇을 늘 강조했었습니까.”

    “임금은 아랫사람을 대할 때 편견 없이 공정하게 보아야 한다…….”

    “그리고요.”

    “타국의 정세에 늘 살펴 국익에 이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자신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가 되어야 한다…….”

    “왜 한 가지를 말씀하지 않으시는 겝니까. 제가 늘 첫 번째로 강조하던 것이었을 텐데요.”

    왕도 알고 있었다.

    감히 왕실을 기만한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예까지 들어가며 스승이 마음 속 깊이 쐐기를 박아 준 교훈이었기에.

    “임금은…… 나라의 중심이어야 한다……. 그 심지는 늘 굳세어야 하고…… 신하에게 함부로 휘둘려서는 아니 된다…….”

    “말씀대로 저도 고작 한 명의 신하에 불과합니다. 일개 신하에게 그리 마음을 쓰셔서야 좋은 임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스승님, 스승님의 용태가…….”

    “무언가 잠시 다른 생각이라도 하신 것이 아닙니까? 저는 이토록 무탈하기 이를 데가 없는데.”

    벌떡 몸을 일으킨 스승이 초막 구석에 놓여있던 방망이로 허공을 갈라보였다.

    방망이질이 일으킨 바람과 방금 스승에게서 느껴지던 손아귀힘은 스승의 몸이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이렇게 정정한 사람을 두고 헛된 생각을 하다니, 왕은 갑자기 자신이 방금까지 한 행동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건강 걱정을 하셔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전하신 것 같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 서둘러 도성으로 돌아가십시오. 혹여나 전하께서 돌아가는 도중에 말 위에서 고뿔이라도 들까 염려됩니다.”

    “…….”

    “어서요. 전하께서 이리 버티시고 있으면 이 늙은이도 초막을 떠나 집으로 내려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스승의 강권 탓에, 왕은 스승과 함께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산을 내려오는 동안 스승의 걸음걸이가 가벼운 것을 확인했음에도, 왕의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워지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던 왕은 길산을 뒤에 남기고 한양으로 돌아갔다. 스승의 양자이기도 하고, 몸이 날래기로는 이 나라에서 제일인 길산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왕에게 가장 빠르게 이상을 전할 수 있을 것이기에.

    “어, 어어?”

    “무슨 일이냐?”

    “전하, 잠시 밖으로 나와보시옵소서. 저기 하늘에서……!”

    며칠 후, 창덕궁으로 복귀한 왕은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자정이 가까운 무렵, 하늘에서 빛나던 별 하나가 꼬리를 물고 북서쪽을 향해 낙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내내 말을 달린 길산이 왕을 찾았다.

    밤새 왕의 잠을 설치게 했던 비보와 함께.

    “스승님께서……?”

    “초막에서 내려오시지 않아 올라가보니……. 마치 잠시 잠드신 것처럼 가부좌를 틀고…….”

    눈물로 온통 얼룩진 길산의 손에는, 스승이 마지막으로 남긴 서찰 한 통이 들려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스승은 제자와 조선을 걱정하며 미래를 위한 조언을 남기고 간 모양이었다.

    ***

    광종실록 20권, 광종 9년 11월 25일 정묘

    대광보국숭록대부 죽산부원군 겸 태어사 안한수의 졸기(卒記)

    안한수는 문성공 안향의 후손이다. 홍문관 부제학 성이성을 사사하고 장성하자 문학에 해박하고 무예 또한 뛰어나 선비들 사이에서 존중받았다. 인조대왕 시절 소과 양시에 장원으로 입격한 것을 근거로 제일 먼저 유일*로 추천된 후, 특별히 세자시강원의 직을 수여받아 심양에 있는 세자를 보필했다. 귀국한 후에는 갑과(甲科)에 뽑혀 장원급제했고 후에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죽기 직전 상에게 훗날 일을 예견하는 상소를 남기고는 앉은 자리에서 졸했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성조대왕 시절부터 나라를 지탱하던 거목이 무너졌구나. 어떻게 하면 그같이 강인하고 뛰어난 신하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의 양자 안길산도 병조판서에 올라 나라를 윤택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사관은 논한다.

    그를 두고 청국의 부역자로 칭하거나, 말년에 불씨의 잡변에 빠져 유학을 버린 자라 평가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성조대왕 시절 조정에서 세운 공은 한고조를 도운 소하에 비길 만하고, 그가 전장에서 세운 공은 한신에 비길 만하다는 것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그것을 전부 선대왕의 공으로 돌리고 있으나 남은 기록과 행장을 면밀히 살피면 죽산부원군의 업적은 더 선명히 드러나는 바, 그의 허물을 비판하기 위해 공을 없는 취급하는 무리가 있으니 그것이 애석하도다.

    * 유일(遺逸): 재능 있는 선비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

    승정원일기 38책 광종 9년 11월 29일 정묘

    죽산부원군 안한수의 상례를 논하라는 전교에 대한 예조의 계.

    김만중이 예조를 대표해 아뢰었다.

    상께서는 교하현감이 올린 서계를 받으시고 죽산부원군을 제후의 예로 장사지내는 일에 대해 검토하라 전교하셨습니다. 이에 신이 따로 조사한 결과로는 서계 내용 그대로 교하와 한성 일대에서 백성들이 죽산부원군의 죽음을 슬퍼하며 거리로 나와 울부짖으며 통곡한 것이 사실로 판명되었습니다.

    또한 앉은 채로 졸한 부원군의 시신이 상하지 않고 이상한 향내를 풍겨, 백성들 사이에서 그가 신선이 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죽산부원군이 죽어서도 서해바다로 침입하는 적을 살피겠다며 오두산에 묻어달라 유언을 남긴 뜻을 고려하여, 전교하신대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례를 검토해 그의 상례를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상께서 전교하시길, 이번 상례를 논하는 일에 있어 하나라도 모자란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 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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