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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78화 (278/298)

278화. 카간의 선물

“그동안 고생이 참으로 많았소, 태사. 사실 정무를 끝내고 짐까지 가르치는 일은 조금 무리라 생각했는데, 그토록 잘 해낼 줄이야.”

“아닙니다, 카간.”

“할아버님께서 당신을 어찌 그리도 탐내셨는지 알 것 같았소. 마음 같아서는 황제의 스승이 된 당신을 정말로 태사 직에 임명하고 영원히 내 재상으로 쓰고 싶지만, 고려를 따르는 이를 억지로 눌러 앉혀서는 안 될 일이지.”

강희제는 아담 샬에게 건네받은 비단주머니에서 내 서찰을 발견하자마자 홍타이지 시절의 청실록을 몽땅 뒤졌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도 죽은 도르곤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와 관련된 정보를 탐문하기까지 한 후, 내게 연락책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꽤나 용의주도한 황제였다.

하긴 이번에 오보이의 난을 진압했을 때도 그랬다. 세부계획에 구멍이 숭숭 나 있었음에도 강희제와 나는 마치 두뇌가 직접 연결된 것처럼 움직였다. 그 결과 효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고.

젊은 황제는 이미 천고일제라는 칭호가 어울릴 정도로 뛰어난 군주였다. 내 남은 수명이 걱정되니 그 밑에서 일하겠다는 말은 절대 꺼낼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간께서 학문을 익히시는 속도는 마치 가물은 땅이 몇 년 만에 내린 비를 흡수하는 듯했지요.”

“가르치는 사람이 뛰어나니 그러했던 것이 아니겠소. 그 이야기를 하니 당신을 점점 더 고려로 돌려보내기 싫어지는구려.”

“하하, 한번 입에 담은 말을 번복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닌 법입니다, 카간.”

“알고 있소. 나 역시 당신을 고려로 돌려보내려는 뜻을 뒤엎을 생각은 없다오. 돌아가서 다음 사신 편에 새로운 학자를 보내주기로 한 약속만 잊지 마시오.”

만중을 청나라로 파견보내기도 한 건은 꽤나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그가 유럽에서 도입한 학문들은 내가 강희제에게 가르치는 데도 한계가 있었던 터. 만중은 나 대신 공부 괴물에게 바칠 제물로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새로운 것을 배울 생각에 미소 짓고 있는 강희제에게 나도 미소로 답했다. 황제의 침소인 건청궁이 잠시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그건 그렇고……. 이제 포상을 주어야 할 시간이군. 짐을 위기에서 구하고 황권을 반석 위에 올려준 이에게 어떤 포상을 주어야 마땅하겠소?”

“보통은 작위나 벼슬, 식읍이나 녹봉으로 포상합니다만, 카간께서 그런 것을 포상하려고 이런 말씀을 꺼내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정확하오. 태사 역시 그런 것을 받을 생각은 없을 테지. 이전까지의 황조에서는 단서철권(丹書鐵券)이라는 표식도 내렸다는데, 그것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고.”

“예. 그렇습니다. 지은 죄를 면해주는 공신패가 제게 필요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단서철권과 같은 특권은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폐해이기도 합니다. 재밌는 농담이셨습니다, 카간.”

“결국 태사 개인의 포상이 아닌, 고려를 위한 포상을 받아가겠다……. 태사는 참으로 탐나는 신하로구려. 고려의 임금이 부럽소. 언젠가 내게도 태사 같은 걸출한 심복이 나타나야 할 터인데.”

소년 황제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지어도 내 충성의 방향이 바뀔 리는 전혀 없었지만.

“그래. 그러면 태사가 세운 공을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겠소? 고려에 내려줄 특권 중에 마땅한 것이 생각나지 않는구려.”

“이미 선대 카간 시절에 연장했던 특권을 카간의 치세 도중 보장해주신다는 약속으로 족합니다. 그리고 굳이 추가로 요청할 것이 있다면…….”

천천히 요구사항을 강희제에게 털어놓았다.

그것을 들은 강희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내게 반문까지 해온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말도 안 되는 요청이었던 듯했다.

“군사를 일으켜 목숨을 걸고 짐을 구한 보답이 고작 그것이오? 이것은 황제의 권위가 달린 문제기도 하오. 막대한 공을 세운 이에게 제대로 된 포상을 내리지 않는다면 후대인들이 나를 비웃을 것이오.”

“제가 배우기로 위정자에게 있어 백성들의 목숨만큼 중히 여겨야 할 것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드리는 요청인데, 어찌하여 제대로 된 포상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태사, 고작해야 기근이 들었을 때 만주와 화북에서 고려로 식량 지원을 해 달라는 것이 전부라니. 정말 그것으로……?”

내 요구는 그 똑 부러진 황제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소박한 요청이었다. 곧이어 닥쳐올 경신대기근 때 백성들을 먹여 살릴 곡식을 지원해달라는 말이었으니까.

원 역사의 강희제는 대놓고 신권이 왕권보다 강해 나라가 어지러운 탓이라고 쏘아붙이며 쌀 지원을 거부했다. 조선 역시 청나라의 정치적 보복을 염려해 더 이상의 요청을 포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그동안 쌓아온 신뢰 덕분에 양국의 관계는 원 역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온건했다. 게다가 이번에 강희제에게 빚까지 단단히 빌려주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요청이 먹히고도 남을 것이다.

“고작이 아닙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제가 천문을 조금 읽을 줄 아는데, 조만간 아국에 엄청난 규모의 재해가 닥쳐올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내려면 다이칭 구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려에서는 구휼을 위해 곡식을 저장했다 빌려주는 제도가 있다고 하지 않았소? 환곡이라 했던가? 그것으로도 부족할 정도면 대체 어느 규모의 대재앙이 닥친다는 이야기요?”

“그 재해는 한 해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굶어죽어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는 농부가 씨앗을 삶아 먹고, 이웃집끼리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이미 조선에 벌어지기 시작한 기상 이변의 징조를 강희제에게 설명하는 동안, 황제는 아무 말도 없이 내 말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몇 년 후의 절망적인 미래를 예언하며 도움을 요청했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하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소. 태사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염려하는 것도, 내게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이해했소. 그렇다면 고작 그 정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감사합니다, 카간. 정말 제 예측대로 재앙이 닥쳐오게 된다면, 아국의 백성들은 카간께서 베풀어준 은혜를 반드시 기억할 것입니다.”

“중원이 반으로 갈린 지금, 고려는 다이칭 구룬에 있어 아주 중요한 나라가 되었소. 조금 냉정한 이야기지만 그런 기회에 은혜를 베풀어놓는 것도 짐에게 나쁠 것은 없는 법이지.”

“한조의 이야기라 기분이 상하실지도 모르지만, 임진년에 일어난 왜란으로 배를 곯던 백성들에게 쌀 일백만 석을 보내준 한조의 황제는 아직도 고려천자라 불리며 추앙받고 있습니다. 양국 사이에 아직 남아있는 원한을 지우는 데는 이만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경신대기근은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동안 관리해온 무역망을 이용해 강남과 대만, 일본에서 식량을 들여오고, 어업을 장려하고 기술을 개선해 어획량을 늘리고, 보존식을 더 비축하고, 감자와 고구마와 땅콩의 힘을 빌리고, 여기에 강희제가 식량 지원만 약속해준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생각에 잠겨있던 강희제가 따라놓은 인삼차를 한 모금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이 대기근으로 약해진 틈을 타 또다시 굴복시킨다는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을 상황인 것이 다행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오, 태사. 그렇게 되면 짐의 입장에서도 큰 것을 얻어가는 셈이지. 하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태사가 세운 공에 비하면 지나치게 적은 보답이 내려지는 격이 아니오.”

“그것으로 족합니다. 제 개인이 영화를 누려봐야 더 이상 무엇을 누리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언가가 모자라오. 아, 짐에게 좋은 생각이 하나 들었소. 들어보겠소?”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소년 황제가 무릎을 탁 쳤다. 그럴 듯한 선물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할아버님 시절부터 다이칭 구룬과 고려 사이에 해묵은 문제가 하나 있지. 아직까지도 심심하면 불거지기 일쑤인 것인데, 그것을 포상의 형태로 해결할 묘안이 떠올랐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희제의 손가락이 방금 손댔던 찻잔을 향했다.

인삼차?

아, 그제서야 나는 황제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도르곤과 심양에서 처음 마주쳤던 시절부터 인삼은 양국 사이의 골칫덩이였다.

***

다음날 이른 아침. 나는 자금성에서 빠져나와 어딘가로 향해야 했다. 강희제와 밤새 나눈 논의의 결론이 그 장소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리 오너라!”

지난 번 거리를 스쳐 지나갈 때는 시선 또한 스치기만 했어야 했던 장소. 그곳에 내가 발걸음을 옮겨놓는 날이 올 줄이야.

“누구……. 어머.”

“카간의 명을 받고 왔소. 안내해주시오.”

분명 처음 오는 장소였음에도, 대문을 열어준 시녀는 내 얼굴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심양에서 북경까지 따라온 사람인가. 아니면 주인과 친분이 깊은 사람인가.

저택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집주인을 마주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급하게 준비를 마친 모양인지, 나를 맞는 집주인은 숨을 가볍게 몰아쉬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로……?”

“실례하겠습니다. 황녀 자가.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감히 자가의 처소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당신…… 이런 곳에 제 발로 찾아올 사람 아니잖아? 카간의 명이라니?”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눈꺼풀 사이가 모래라도 끼어들어간 듯 꺼끌거리는 것 같았다.

“카간께서 제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황녀 자가.”

어젯밤, 경신대기근을 대비한 식량지원 요청에서 시작한 논의는 점점 눈덩이처럼 굴러가더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고 말았다.

난을 진압한 포상으로 식량 지원을 약속하는 것은 너무나 약소한 보답이라며 강희제가 고집을 피운 결과, 조선과 청의 양팔 저울 위에는 영토와, 여러 차례의 대규모 군사지원과, 국혼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물론 강희제와 논의한 내용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아마 내가 이번 일을 조선으로 들고 돌아가면, 한양과 북경 사이로 사신이 수 차례는 더 오가야 완전히 결론이 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젯밤 논의의 결과가 나를 이렇게 황녀의 처소인 공주부까지 인도했으니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라니……?”

“카간께서는 제 공훈에 대한 포상으로 두만강 너머 지역의 출입권과 거주권을 조선에 내리겠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에게 내리는 포상이라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것.”

인삼을 캐러 국경을 넘어 다니는 약초꾼들이 양국 사이의 문제였던 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그리고 현대로 치면 간도라 불리는 구역의 야인여진들이 청보다는 조선과 무역으로 생필품을 조달해간 것도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자유무역이 열린 이후, 심양은 멀고 영고탑에서 구할 수 없는 물품은 함경도에서 구해갈 수 있었으니까.

강희제는 그것을 합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필요하면 국경도 조정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렇다. 지금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한 국경이 아직 확립되기 전이었다. 백두산에 양국의 경계를 표시한 정계비가 서는 것은 다음 세기에야 일어날 일.

만주족과 아이신기오로 씨족이 성역으로 여기는 구역은 압록강 너머의 건주여진, 해서여진의 영역이다. 두만강 너머 야인여진의 간도 땅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일까.

“무슨 이야기야, 그게? 당신이 오보이를 쳐낸 것은 알아. 조카님과 당신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간 거야?”

“자세한 것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가께서도 어제 오간 외교의 대상에 포함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에 대한 포상으로 내리기에는 영토는 너무 크고 중대한 문제였다. 때문에 강희제는 다른 카드를 보상으로 받겠다는 제안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조선군의 대규모 파병 지원이었다.

팔기는 이번 일로 많은 수가 상한데다, 앞으로도 대부분을 남명과의 전선에 투입해야 한다. 헌데 그 와중에 서쪽에서는 준가르가,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다시 말썽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하다간 순식간에 여러 방향에 전선이 열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때 토목의 변을 일으켜 명의 황제를 생포할 정도로 강성했던 준가르는 다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들은 대륙을 통일한 원역사의 청나라도 애를 먹던 상대, 현재 반으로 토막난 대륙을 지배하는 청나라를 수습해야하는 강희제에게는 그 위협이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내가 스테파노프의 원정대를 격파하고 북만주 일대의 러시아 세력을 쫓아낸 것도 꽤 오래 전 이야기였다. 황제의 말에 의하면 이번에는 네르친스크 근처, 흑룡강 북안의 알바진에 새로운 요새를 세운 러시아 세력이 다시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했다.

결국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권한 일부를 대가로 현재 동아시아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조선군을 빌려 쓰겠다는 이야기였다. 포상을 내리되 그것으로 다른 이득을 취하겠다는 어린 황제의 모습은 이미 원 역사의 능수능란한 명군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약속을 확실하게 못 박기 위해 저울 위에 올린 것이…….

“……그리고, 카간께서는 이번 일로 두 나라를 단단히 묶어놓을 수단을 원하고 계십니다, 황녀 자가.”

“단단히 묶어놓다니? 무엇을?”

“이런 일에는 사람과 사람을 한데 묶는 것이 제일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젯밤, 당신의 조카께서 국혼을 제의하시더군요.”

국혼이라는 단어를 들은 황녀의 눈동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야 내가 그녀를 아침 일찍 찾아온 이유를 깨달은 듯했다.

“먼저 카간께서는 제 딸을 황귀비(皇貴妃)로 받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로…….”

“……그 반대로 묶일 대상이 바로…….”

흔들리는 황녀의 눈동자에 눈을 맞추려 애를 썼다. 그래야만 했다.

“예. 저와 황녀 자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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