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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75화 (275/298)
  • 275화. 복수와 보은

    팔리교 앞 벌판이 피로 물들기 직전, 통주성(通州城) 방향으로 일단의 기병 무리가 우회하고 있었다. 북쪽은 통혜하(通惠河)라는 강줄기, 남쪽은 무성한 숲으로 가로막힌 유리한 지형에 자리를 잡은 조선군의 뒤를 치기 위함이었다.

    5천에서 6천 가량의 기병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구왈기야 수오샨(索山), 보정대신 오보이의 막냇동생이었다.

    “정신 나간 고려 놈들.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짓거리만 골라서 할 때부터 알아봤다! 진작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어야 했거늘!”

    선두에 서서 말을 달리는 수오샨의 얼굴에는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을 전부 조선의 탓이라 여기고 있었다.

    놈들이 더 적극적으로 협조만 해왔더라도 그의 형 무리마는 명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큰형 오보이의 힘으로 구사 어전 자리 하나쯤은 구왈기야 가문이 꿀꺽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것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무리마는 패배한 책임을 지고 천진을 방어하는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나마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은 자금성 조정의 대신 상당수를 오보이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사, 이부상서, 공부상서 같은 고관대작들 말이다.

    “게다가, 이제는 분수를 잊고 감히 다이칭 구룬을 침범해? 그리고 우리 구왈기야 씨족에 또다시 엿을 먹여?”

    천진의 방어사령관은 청군에 있어 휴양하는 자리에 불과했다. 허나 천진을 조선군이 공격해 함락시키면서, 그의 형 무리마는 경력에 더 큰 흠집이 나고 말았다.

    덕분에 좋아하는 승마를 마음껏 하고 있음에도 수오샨의 마음속에 맺힌 울화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간악한 고려 놈들을 마음껏 베어 넘겨 전장을 피로 물들여야 속이 좀 풀릴까.

    “헌데, 제대로 된 기병도 몇 없는 주제에 이렇게 공세를 취하다니. 고려의 장수는 병법도 제대로 모르는 것인가?”

    조선군을 구성하고 있는 병종 중 기병은 극소수라고 했다. 천진에서 마지막으로 올라온 보고도 그렇고, 정찰병의 목격담도 그랬다. 하긴, 다수의 말을 배로 실어오긴 어려웠을 터.

    하지만 그것은 놈들의 사정이다.

    보병뿐인 적의 상대는 간단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리 좋은 자리를 잡고 있더라도 평지에서 보병은 돌진하는 기병의 위력과 기동력을 이겨낼 수 없으니까. 뒤나 옆구리를 들이쳐 포위진만 완성하면 제풀에 우왕좌왕하다가 자멸하기 마련이다.

    한조 놈들과의 싸움에서는 쓴맛을 보고 말았지만, 그것은 먼 원정을 치러야했던 데다 숫자 역시 비등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적어도 지금 두 배 이상의 기병이 보병을 향해 돌격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패배할 일말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조되는 열기로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수오샨은 혀를 내밀어 더 바짝 타들어간 입술을 훔쳤다. 마치 신선한 고기를 앞에 둔 짐승이 된 듯했다.

    “그래. 이제 적진까지 얼마나 남았나?”

    “저기 통주성이 보이는 것이 보니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곧 좌측에 우거진 숲이 사라지고 놈들의 후방으로 향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멍청한 놈들, 아무리 규모가 작고 성벽이 낮은 성이라지만 통주성에라도 의존하고 있었다면 살아갈 길이 조금이라도 열렸을 텐데.”

    수오샨의 입가가 구겨졌다.

    그가 조선군을 조롱할 만했다. 조선군의 후방으로 향하는 동안 그들의 앞길을 막는 군사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누가 뭐래도 팔기의 기마대는 천하제일이다. 그들의 기동력을 무시한 적은 절대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모양이지만, 지나치게 지형에 의존하는 머저리들 역시 망하기 마련이다. 전군! 속도를 올려라!”

    의기양양해진 수오샨이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을 때였다.

    그의 시선에 희끗희끗한 무언가가 비치기 시작했다. 별동대의 전방에서 웬 말을 탄 병력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측면에 위치한 무성한 숲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대인 듯했다.

    “뭐야, 저놈들. 연락이 끊어졌다 했더니 이런 곳에 있었던 것인가?”

    “이대로라면 전방의 군세와 충돌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저 멍청한 놈들, 본영에 보고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겐가? 푸쇼라는 놈이 동생에게 숙친왕 작위를 빼앗길까봐 무리수를 둔다던데,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까지!”

    거리가 좁혀지자 군사들의 정체는 더욱 확실해졌다. 흰 바탕에 붉은 줄이 그어진 갑주, 수오샨의 예상이 맞았다. 며칠째 종적이 묘연했던 양백기였다.

    고령에 접어든 호오거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넷째인 푸쇼와 다섯째인 맹후가 대립중인 사실은 팔기 장수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때문에 오보이도 그 둘을 각각 양홍기와 양백기에 배치해 떼어놓았을 정도였다.

    ‘전쟁터에서까지 형제간의 갈등을 멈출 수가 없는 건가? 아니면 따로 병력을 우회시키려 했던 건가?’

    하지만 그런 추측과는 반대로, 지금 앞에 나타난 양백기 기병들은 별동대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진군하는 별동대를 보았을 텐데도 자리에서 비키기는커녕 점점 더 수를 불리기만 할 뿐이었다.

    수오샨은 뒷목에 피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결국 별동대의 진군은 멈추었다. 화를 참지 못한 수오샨이 양백기를 향해 뛰쳐나가자, 그에 화답하듯 양백기 진영에서도 한 장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앞을 가로막고 무얼 하는 게냐! 푸쇼 님은 어디에 계시고!”

    “아, 구왈기야 씨족의 막내시군. 그분은 잠시 군대를 맡을 상황이 아니셔서, 나 아이신기오로 도르보가 그 직무를 대리 중이오.”

    예상 밖의 이름이 앞을 가로막은 양백기 장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이름은 수오샨에게 아무런 무게감을 주지 못했다. 아무리 황족이라지만 역적으로 취급받은 이의 양자가 자금성 실세의 동생 앞에서 날릴 끗발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두 장수 사이의 거리는 천천히 좁혀졌다. 수오샨은 그에게 다가오는 도르보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르보? 무슨 일이 일어난 게냐? 그리고 어째서 머이런 장긴이 아닌 한낱 잘안 장긴이 구사 어전을 대리중이지?”

    “그거야 우리 양백기에 그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오. 헌데, 아이신기오로의 피를 이어받은 내게 그 태도는 무엄하지 않소. 구왈기야 수오샨?”

    “이제 와서 갑자기? 어디 끈 떨어진 황족이 대우를 받겠다는 게냐? 잘안 장긴이면 잘안 장긴답게 굴어라, 도르보.”

    “…….”

    “다시 묻겠다. 푸쇼 님은 어디에…….”

    대화가 오가던 도중, 도르보의 발뒤꿈치가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순식간에 칼날이 한번 번뜩이더니 붉은 안개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푸쇼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나?”

    “이…… 이 자식! 이게 무슨 짓이냐?”

    깜짝 놀란 수오샨의 말이 뒷걸음질을 쳤다. 방금까지 의기양양하던 수오샨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털썩. 고삐에 매달려 공중에서 춤을 추던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몸통에서 분리된 왼팔이었다.

    “……내 친히 푸쇼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지, 건방진 자식 같으니라고.”

    “도, 도르보!”

    “카간을 능멸한 형의 위세를 믿고 감히 황족을 모욕한 죄, 내가 직접 징벌하마.”

    번쩍. 이번에는 안장에 올라있던 몸뚱이가 둘로 갈라져 땅으로 추락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도르보의 표정은 한 점 변함이 없었다.

    곧이어 도르보가 숲 방향으로 고함을 내지르자, 무성한 수풀 사이에서 얼룩무늬 갑옷을 걸친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맨 앞에는 도르보에게 익숙한 장수 하나가 서 있었다.

    “솜씨가 대단하군, 매부. 정확히 때를 맞춰 오지 않았는가.”

    얼룩무늬 병사들의 손에서 빛나는 조총을 보며, 도르보가 중얼거렸다. 양아버지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던 정예 조총수들을 드디어 도르보도 써볼 날이 온 듯했다.

    “나의 형제들이여! 진정한 초원의 전사, 쿠부헤 샹얀 구사여! 위대한 전사, 호쇼이 메르겐 친왕을 따르던 이들이여!”

    순식간에 지휘관을 잃은 적은 아직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적진을 매서운 눈길로 바라보던 도르보가 몸을 돌렸다. 양아버지 도르곤 사후 오랜 세월이 걸려 겨우 되찾은 정백기의 부하들을 향해서였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풀 것이다! 적법한 쿠부헤 샹얀 구사의 어전이 명한다!”

    거칠게 치켜든 칼날에 핏방울들은 쓸려나간 지 오래였다. 적을 향해 겨눈 도르보의 칼끝에 한낮의 태양이 내려앉았다.

    “전군, 돌격!”

    ***

    팔리교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승을 거뒀다. 청군은 숱한 시체를 남기고 팔리교를 건너 북쪽으로 퇴각해야 했다. 지뢰지대를 피해 패잔병을 추격한 조선군은 숱한 전과를 남겼다.

    우회타격을 시도하던 적의 별동대는 도르보가 이끄는 양백기와 조선군 연합군에 의해 전멸했다. 길산에게 붙여준 2천의 조총수는 그 전장에서도 밥값을 톡톡히 해냈다.

    ‘고맙소. 양부님도 저세상에서 기뻐하실 거요.’

    ‘그리 고개를 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친왕 전하께서 생전에 제게 말씀하시길,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득을 쥐여 주고 협력을 나눈 관계라 하셨지요. 전하께서 쥐여 주셨던 이득을 잊지 않고 갚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겸손할 필요는 없소. 내 이번 일이 잘 풀리거든 평생 영의정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정말로 고맙소.’

    ‘알겠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감사를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아직 일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약속대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저나 도원수의 지휘에 충실히 따라주셨으면 합니다.’

    도르보가 마음을 바꿔먹고 전향해준 것이 다행이었다. 그의 전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강희제의 밀서인지, 내 서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도르보가 지휘하는 양백기는 일시적으로 조선군 휘하에 들어왔다.

    조선군에 부족했던 기병 역할은 이제 양백기가 수행해주고 있었다. 첫 싸움에서 팔기를 완벽하게 제압해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니, 이제 두 번째 작전을 진행할 시간이 왔다.

    ‘정말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고작 그만한 병력으로 북경성에 침투하기는…….’

    ‘빠르고 확실하게 승기를 쥐는 방법은 이것뿐이오, 도원수. 더 나은 방도가 있다면 언제든지 채택해야 좋은 장수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당신을 믿기에 대병력을 맡기고 가는 것이기도 하고.’

    ‘대감의 전술을 그대로 따르면 어찌 팔기군이 조선군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허나 영상께서 적진으로 직접 뛰어들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지 않소. 적재적소. 나만큼 북경성에 오래 있어본 사람이 없고, 나만큼 청국의 내부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도 없소. 내가 직접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오.’

    아내와 딸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번 전쟁에서 더 이상 무익한 희생을 내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속전속결로 목표를 정확히 제거하는 것만이 내가 둘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결국 나를 염려하던 도원수도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아있는 조선군은 도원수 이여발이 지휘해 줄 것이다. 아마 사기가 완전히 꺾인 팔기도 더는 조선군에게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겠지.

    “왼편에는 양수하(涼水河)라 불리는 하천, 멀리 오른편으로는 북경성……. 저게 정황기의 병사가 말한 나무인가.”

    조선군 본영을 빠져나와 말을 달린지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이었을까. 그렇게 방금 일을 회상하다보니 어느새 목적지가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전방으로 탁 트인 시야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겉모습을 보니 근처 마을 사람들이 신목으로 섬긴다던 그 나무인 듯했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지도 역시 이 자리가 강희제의 밀사와 약속한 자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대감! 이것인 것 같습니다!”

    강희제가 땅 밑에 숨겨놓았던 선물은 금방 발견되었다. 약속대로 정확한 위치에 묻힌 커다란 상자 안에는 정황기의 누런 갑옷 백 벌이 들어있었다.

    급히 말에서 내려 병사들과 함께 갑옷을 갈아입었다. 총통위의 얼룩무늬 두정갑은 상자에 담겨 땅속으로 사라졌고, 이제 내 몸에는 정황기의 누런색 갑주가 걸쳐져 있었다.

    ‘이렇게 다시 내 몸에 팔기군의 갑주를 다시 걸치게 될 줄이야.’

    복장을 환복하는 사이 북경성의 성벽이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홍타이지 밑에서 이자성군을 격멸할 때만 해도 이 자리에 이렇게 다시 오게 될 것이라고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마저 팔기군의 갑주를 착용하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어설픈 티를 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헌데, 이번에도 갑주를 고정하는 끈이 약간 모자랐다. 하긴, 나만한 키와 덩치에 근육질인 전사는 팔기군에서도 드물긴 했다.

    “옷깃이 스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기를…….”

    어쩔 수 없었다. 황녀에게 돌려주기 위해 들고 왔던 머리끈을 덧대 갑주를 고정할 수밖에.

    마카타의 머리끈 때문일까. 갑옷을 마저 단단히 고정하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 황녀의 씁쓸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강희제에게 보내는 임금의 친서가 완성되는 며칠 동안 우리 집에 머물던 그녀가 어느새 훌쩍 자란 우희를 보며 짓던 표정이었다.

    “가자.”

    쓸 데 없는 생각을 털어버리려면 급히 몸을 움직여야 했다. 어느새 땅을 파낸 흔적이 말끔히 사라진 저 자리처럼, 내 마음도 저렇게 잡념을 쓸어버릴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

    자금성이 위치한 황성은 긴장 속에서도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 갑자기 북경 인근에 나타난 군세가 첫 전투에서 팔기를 패배시킨 탓에 북경성에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들이 북경을 침범하기는커녕 다시 통주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그 긴장도 슬슬 풀어질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황성의 남문인 천안문을 지키는 양황기의 수문장도 거듭된 경계로 피로해진 나머지 성벽 위에서 하품을 늘어지게 터뜨리고 있었다.

    그런 느슨한 분위기가 깨진 것은 웬 졸개 하나가 성벽 위로 달려 올라온 후였다.

    “천진으로 갔던 정황기 일부가 돌아왔다고?”

    “일백 명 규모의 전령대로 보입니다. 황제 폐하께 올릴 급한 보고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래? 몸이나 풀 겸 내려가 볼까. 지금 같은 상황엔 황성으로 진입하려는 병력을 확인해볼 필요도 있긴 하고.”

    다시 한 번 크게 하품을 터뜨린 수문장은 기지개를 몇 번 켜고는 졸개를 따라 성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북경성 인근에서는 별일이 벌어지지도 않는데 경계가 강화된 탓에 졸개도 지루했는지, 오늘따라 놈은 말이 많아 보였다.

    “헌데 수문장님, 자금성으로 향하는 폐하의 직속 군사들입니다. 막을 필요가 있습니까?”

    “구왈기야 태사께서 엄명을 내리셨다. 황성을 비롯한 전 북경성의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만에 하나라도 모를 일을 염려해서 나쁠 것은 없지.”

    사실 잠이나 깨려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행동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겠는가. 수문장이 성벽을 다 내려가자, 반쯤 열린 성문 사이로 팔기군의 누런 갑주를 걸친 전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

    “왜 그러십니까, 수문장님?”

    수문장의 본능이 자그마한 위화감을 감지한 것은 그때였다. 성문 앞에 버티고 선 병사들에게서 무언가 보통 팔기군과는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봐, 정황기의 전령 중에 저렇게 장수 같은 체구를 가진 사람이 있던가?”

    “글쎄요……. 저는 성문을 통과하는 군사들을 잘 눈여겨보지 않는 편이라…….”

    전령대장으로 보이는 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위압감 때문인가. 아니면 보통 팔기의 무장과는 달리 병사들이 등짝에 조총을 메고 있기 때문인가.

    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졸개와는 달리, 수문장은 성문으로 다가가면서도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조금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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