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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73화 (273/298)
  • 273화. 천진에서 팔리교까지

    천진성이 함락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부터 천진은 평화에 젖어있던 후방의 항구였다. 도심을 지키는 성벽도 높지 않았고, 성내를 관통하는 운하와 강을 방비할 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영상 대감?”

    “무엇을 말이오?”

    “이 천진 성에 의지해 방어진을 펴실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도를 궁리하고 계신지 대감께서 품고 계신 복안이 궁금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완이 말을 걸어온 것은 내가 성벽 위에 홀로 올라 북경이 위치한 북쪽을 노려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포탄을 비껴맞은 성내에서 화재가 채 진압되지 않은 곳이 있는지, 천진성 내부에서 아직도 검은 연기 몇 줄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수군을 이끄는 이완의 역할은 여기 천진까지니 궁금증을 가질 만도 했다. 이완의 옆에는 도원수 이여발(李汝發)이 서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지. 아니 그렇소, 통제사?”

    “그 말씀은…… 대감께서 직접 육군을 이끌고 북경성으로 향하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래야지. 이곳의 방어는 수군에서 맡아주도록 하시오. 대부분의 적 병력은 나를 목표로 삼을 테니, 방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오.”

    옆에 서 있던 이여발이 가볍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데려온 조선군은 아무리 정예라지만 고작해야 일만 오천의 병력, 몇 배는 되는 적이 기다리고 있을 범의 아가리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겠다는데 숨이 막힐 만도 하지.

    하지만 나는 도박수를 두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지금 천진성의 망루에 올라 계속해서 북방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불리한 상황을 아군 쪽을 유리하게 돌려놓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것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감?”

    “저기 흙먼지를 날리며 접근하는 무리가 보이지 않소? 저들이 착용한 갑옷의 색이 누런색이거든 성문을 통과시켜 내게 보내라고 하시오.”

    “예?”

    이여발이 어리둥절해 되물었지만, 지금은 그의 의문을 풀어줄 때가 아니었다. 만약 카간의 뜻과 어긋나 일이 계획된 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당장 조선군은 점령한 천진을 버리고 조선으로 돌아가 방어전을 준비해야 했다.

    다시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접근하는 청나라 병사의 갑옷 색깔은 먼 거리와 흙먼지 탓에 금세 식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나는 그들의 소속 기(旗)를 곧 알 수 있었다.

    기대하던 그대로였다. 다행히 계획이 어긋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고려국 정승을 뵈옵니다! 저는 정황기 소속 장긴으로, 카간의 밀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청나라 군사 하나가 보초병의 인도를 받아 무장이 해제된 채 망루로 올라왔다. 그는 온통 누런색으로 물들인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 갑주가 의미하는 것은 카간의 직속, 정황기 소속의 군사라는 뜻.

    강희제가 보낸 밀사가 분명했다.

    “기다리고 있었소. 카간께서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하셨는가?”

    “예. 현재 북경성은 인근에 흩어져 있던 자쿤 구사(팔기)를 한창 소집 중입니다. 그리고 제가 북경성을 떠나기 직전, 대략적인 작전도 결정이 되었습니다. 정승께서는 이 근방의 지도를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이오. 여봐라, 지필묵을 준비하라!”

    금방 준비된 필기구를 집어든 카간의 밀사는, 순식간에 지도 위에 두 줄기의 굵은 선을 그려냈다. 하나는 북경의 남문에서 나와 천진의 서쪽을 공략하는 경로, 하나는 북경의 북쪽에서 집결한 후 출발해 천진의 북문으로 접근하는 경로였다.

    “아군은 두 방향으로 나누어 천진을 치러 진격할 것입니다. 카간의 직속 구사는 소집이 완료되는 대로 서쪽 길을 돌아, 북경성 북쪽에 주둔 중이던 나머지 구사들은 동쪽 방향으로 남하해 천진성을 공격할 예정입니다.”

    “병력이 한꺼번에 뭉쳐 진군하지 않는 것은 천만다행이로군. 하긴, 그 정도 대규모의 병력이 동시에 움직이기는 어려울 테지만.”

    “카간께 밀명을 받은 구사들은 고려군과의 전투를 미루거나 피할 것입니다. 허나 태사의 영향 아래 있는 나머지 구사들은…….”

    “놈들은 우리를 영토를 침범한 적으로 상정하고 베어넘기려 들겠군.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하하.”

    밀사의 손가락이 북경성의 동문에서 뻗어 나온 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 선은 천진과 북경을 연결하는 작은 운하와 나란히 그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 손끝을 따라 지도를 응시하고 있던 나는 익숙한 지명 하나를 발견했다.

    북경 동쪽의 팔리교(八里橋).

    조선에서 북경을 오가는 사신이라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였지만, 내겐 다른 의미로 익숙한 장소였다.

    “팔리교…….”

    “제 이야기에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아니오. 계속하시오.”

    설마 양국의 병력이 저 팔리교에서 맞붙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역사란 놈은 상당히 얄궂은 놈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요청하신 물품을 북경성 남문 근처 은밀한 장소에 묻어놓았습니다. 위치는 이곳이고, 인근 강변에 홀로 선 거대한 나무에서 남문 방향을 바라보고 스무 보를 걸은 자리를 파시면 될 겁니다.”

    “고맙소. 정황기의 누런 갑주 일백 벌, 맞소?”

    “예. 맞습니다. 카간께서도 그 계획이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무대 준비는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이제 황녀를 먼저 따라간 길산과 김귀돌이 도르곤의 후계자를 잘 설득했기만을 바랄 뿐.

    ***

    카간의 밀사가 조선군이 머무는 천진을 비밀스럽게 다녀가고 며칠 후.

    북경성의 북쪽 어딘가에는 긴급한 명령을 받고 남하중인 부대가 있었다. 팔기 가운데 가장 먼저 병력소집과 완편을 마치고 집결지로 향하고 있던 양백기였다.

    “젠장, 무슨 철기도 아니고 보병 일만 오천을 상대하는데 이토록 많은 병력을 소집해? 이봐, 부관.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날의 행군을 마치고 숙영에 들어간 정백기의 지휘관 막사에서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위로부터 어지간히 재촉을 당한 모양이었다.

    “보정대신께서 내린 명령이라 들었습니다.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어쩔 수 있겠습니까?”

    “이 자식아, 우리 아버지가 그놈의 상관이셨던 숙친왕이신데, 왜 내가 고작해야 구왈기야 가문 놈의 명령을 들어야 한단 말이냐?”

    “하지만 그분이 카간을 손 안에 넣고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다이칭 구룬에 없지 않습니까? 그분의 명령이 사실상 카간의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요.”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느냐? 놈의 아우가 천진 방비에 실패한 일을 내가 뒤를 닦아주게 생겼으니 하는 말이 아니냐.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북경의 유곽에서 몸을 풀고 있었을 터인데.”

    현 양백기의 기주(旗主), 아이신기오로 푸쇼(富綬)는 불만이 가득해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가 지휘하는 양백기는 빠른 소집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지금 최전방으로 떠밀린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빠른 소집이 가능했던 이유도 별 것이 아니었다. 다른 팔기에 비해 양백기의 병력이 눈에 띄게 적었으니까. 전 예친왕 도르곤의 수하에 있던 양백기의 팔다리를 잘라낸 후 숙친왕 호오거의 아래로 배속시킨 탓이었다.

    “아버지도 너무하시지! 아무리 놈의 세력이 강성하다지만 명목상 오래 전부터 상관과 부하의 관계가 아니었나! 놈이 쥐어준 권력을 휘두르고 계시다 해도 놈의 손에 쥐락펴락 당하기는 카간과 다를 바가 없으니…….”

    “쉿,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들으려면 들으라고 해라! 이깟 자리, 구사 어전도 아니고 대리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렇다고 구사의 전사들이 온전히 내 영향력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사실상 전위 겸 고기방패로 최전방으로 내몰리는 것은 그렇다 치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지금 자리에 오른 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 듯했다.

    “누가 보면 역적이 된 예친왕이 죽은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줄만 알겠다! 아직도 양백기 놈들은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마지못해 따르는 티가 철철 흐르고 있는데, 나보고 어찌하란 말이냐!”

    “그야 밖에서 찍어 누를수록 똘똘 뭉치는 것은 사람의 습성이니까 그렇지요. 제가 누누이 충고를 드렸지 않습니까. 양백기 전사들과 하나가 될 생각을 하시라고요.”

    “내가 왜? 어차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쪽을 물려받으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도르보가 알아서 전사들을 통솔해 주고 있는데,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푸쇼의 거센 푸념을 받아주던 부관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군막 주위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관이 날카롭게 세웠던 경계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윽고 밖에서 입장을 요청하는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고,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 하나가 군막으로 들어섰으니까. 그가 방금 느껴졌던 인기척의 정체인 듯했다.

    “밖에서 오가는 대화라도 엿들은 것이냐, 도르보? 네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에 나타나다니.”

    “구사 어전 대리…… 아니, 구사 어전께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그놈의 대리. 내가 붙이지 말라 그리 일렀지 않느냐? 또 상관에게 불손을 저지른 대가로 맨몸으로 밖에서 밤을 새울 생각이냐?”

    푸쇼의 퉁명스러운 말투를 듣고도 도르보의 표정은 평소처럼 한 점 변함이 없었다. 푸쇼는 그동안 그런 도르보를 보며 그래도 주제는 알고 있다며 비웃기 일쑤였다.

    “그래. 그 용무라는 건 무엇이냐? 이 시간에 갑옷을 갖춰 입고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이고? 어디 주둔지 주변을 순찰이라도 돌고 온 것이냐?”

    “순찰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잃어버린 물건이 하나 있긴 합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 도르보? 네 잃어버린 물건을 왜 내게 와서 찾는단 말이냐? 농담은 그쯤 하고 어서 이 늦은 시간에 나를 찾아온 이유나 제대로 대도록 해라.”

    방금까지 불만에 가득 찬 대화를 나눴던 주제에, 푸쇼의 말투에는 어느새 오만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이신기오로 씨족 안에서 그들의 관계는 사촌지간이었지만, 푸쇼는 늘 이런 식으로 계급 차이와 권력을 이용해 도르보를 찍어누르곤 했다.

    무표정이던 도르보의 얼굴에 갑자기 단호한 결의가 새겨진 것은 그때였다. 하지만 아직도 다른 곳에 온통 신경이 가 있는 푸쇼는 앞에 선 사람의 변화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잃어버린 물건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 맞다. 푸쇼.”

    “……도르보, 네놈.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이냐? 여기는 군대고, 네놈은 잘안 장긴이다. 갑자기 네 주제를 까먹은 게야? 꽤나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려 충격이라도 받은 건 아닐 테고.”

    “그래, 맞아. 푸쇼.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지.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물건 말이다.”

    도르보의 입에서 외마디 외침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푸쇼의 군막 주위에서 인기척이 파도치듯 늘어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푸쇼의 물음에 대답하듯, 군막 입구로 한 무리의 병사가 쏟아져 들어왔다. 병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손에 무기를 든 채, 완전히 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 전원의 무기는 군막 중심에 느슨하게 앉아있는 푸쇼를 향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푸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인원이 양백기 병사들 사이에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상하게 생긴 화승총을 들고 있는 병사 둘이 도르보의 뒤에서 푸쇼를 겨누고 있었다.

    “내가 잃어버린 물건은 본래 양부님의 것, 그리고 내가 물려받았어야 하는 것.”

    “도르보!”

    “그건 네 것이 아니다, 푸쇼. 양백기의 기주 자리는 적법한 예친왕의 후계자, 아이신기오로 도르보의 것이야.”

    ***

    “조심해서 묻어야 한다! 주변 지표면의 흙을 모아 위장하는 것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북경성에서 동쪽으로 삼십 리가량 떨어진 팔리교(八里橋).

    이 다리는 북경의 여름 궁전인 이화원(頤和園)으로 연결되어 있는 운하, 통혜하(通惠河)에 놓인 다리다. 먼저 빠르게 북진을 선택한 조선군은 팔리교 남동쪽의 작은 성, 통주성(通州城)을 먼저 점령한 후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통혜하는 동에서 서로 흐르는 크지 않은 물줄기였지만 방어선으로 삼기에는 쓸 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팔리교 전방, 넓은 평원이 끝나는 부분에는 몇 갈래 길만 남기고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이러한 지형 또한 적 기병의 위력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어 보였다.

    그 와중에 나는 전방으로 한 걸음 나아가 한참 신무기를 진지 전방에 매설하는 것을 독려하는 중이었다. 내 계산으로는 현재 방진을 펼친 자리가 아슬아슬한 북상 한계선, 적이 나타나기 전까지 한시바삐 진지를 갖추고 전투태세를 완비하려면 한시가 급했다.

    “대감, 저기 흙먼지가……!”

    흙먼지의 정체는 전방에 나가 있던 정찰병이었다. 그렇게 나를 찾아 뛰어 들어온 정찰병은, 숨도 돌리지 못하고 자신이 전방에서 관측한 결과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전방에 붉은 기를 든 대규모의 적이 나타났다?”

    “예, 그렇습니다. 대감! 적의 행렬은 북으로부터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귀를 울려대는 정찰병의 보고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기 시작했다.

    드디어, 무대를 가리고 있던 장막이 머지않아 오를 예정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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