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북벌 개시
“뭣이? 이미 고려군과의 교전은 종료된 지 오래라고?”
만주의 방어를 관할하는 중심지, 영고탑의 관청에서 고성이 흘러나왔다. 이 외진 지역은 지금 북경에서 온 군사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고려와 경계를 이루는 강 일대에서 고려군과 교전이 벌어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어째서 정친왕(鄭親王)께서 이렇게 많은 군사를 끌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분명 북경 조정에는 시급한 일인 것처럼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니 내가 휘하의 양람기와 몽고팔기 일부를 이끌고 이 촌구석까지 달려온 것이 아니냐!”
방금 들린 고성은 화려한 남색 갑주를 차려입은 무장이 친 호통이었다.
그는 팔기 양람기의 젊은 기주이자 3대 정친왕, 아이신기오로 데사이(德塞)였다. 데사이를 상대하는 부사령관 머이런 장긴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고라면 교전이 모두 마무리되고 나서 북경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따로 올렸습니다만. 이상하군요. 그걸 받고 오신 것이라면 이렇게 빨리 도착하셨을 리가…….”
“분명 자금성에는 거대한 규모의 고려군이 투먼 울라(두만강)을 건너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헌데 지금 보니 고려군은커녕 파리 한 마리도 안 보이지 않는가!”
“말씀하신대로 대규모의 고려군이 강을 건너왔었습니다. 허나 그것은 오해에서 빚어진 일, 큰 충돌 없이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고려 측에서도 사죄와 보상 또한 확실히 보냈고요.”
“오해? 고작 그 오해 때문에 내가 이 대군을 이끌고 먼 길을 달려왔어야 했단 말이냐?”
데사이가 이렇게 핏대를 올릴 만했다.
남방 전선에서 아버지가 전사하고 어린 나이에 정친왕 작위를 이어받은 후, 그가 처음으로 전공을 올릴 수 있었던 곳에서 허탕을 치게 생겼으니 약이 잔뜩 오를 수밖에.
어쨌건 현재 다이칭 구룬은 지배층이 군대 지휘관을 역임하는 철저한 군사 국가다. 허울뿐인 작위 계승자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면 데사이에게는 확실한 전공이 필요했다. 특히 조부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과 부친 지두(濟度)가 세운 공을 생각하면 더욱 그래야만 했다.
“여기 닝구타(영고탑)에서는 원군을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고려군은 자신들의 땅에 침범했던 야인여진을 쫓다가 실수로 국경을 범했을 뿐이었습니다, 정친왕 전하. 아, 설마…….”
“설마라니?”
“지금 저희 암반 장긴이 북경에 소환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자리를 비우셨다지만 사령관께 사소한 보고 하나라도 빼먹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요. 혹시 그 정보가 자금성까지 흘러들어간 것은 아닐지…….”
“암반 장긴이라면, 보정대신 뒷배만 믿고 으스대던 그 구왈기야 씨족 놈 말이로군. 샤르후다라 했던가.”
몇 번 스쳐간 것에 불과했지만, 데사이의 머릿속에 샤르후다의 능글맞은 얼굴이 바로 떠올랐다. 놈이 오보이의 곁에 착 달라붙어 마치 환관처럼 아부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의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그런 밸도 없는 놈 때문에 이런 쓸 데 없는 걸음을 하다니! 나는 당장 북경으로 돌아가겠다!”
“북경으로요? 지금 돌아가신다면 정친왕 전하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는 격일 텐데요?”
“뭐야?”
“생각해보십시오. 일만 오천이 넘는 병력을 일으켜 변방까지 이르렀는데,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북경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대신들이나 장수들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랬다.
아무리 잘못된 정보를 받은 것이 원인이라고는 하나 이번 일은 전공에 목이 말랐던 데사이가 스스로 자원했던 일. 빈손으로 돌아가기에는 속이 너무 쓰라렸다. 고려 놈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라며 자신의 등을 밀어준 오보이가 원망스러워질 정도였다.
설마, 황족도 아닌 놈이 내 기를 꺾으려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많은 병력을 쥐어준 것도 혹시…….
불길한 추측 하나가 데사이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쩐지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고려 영토를 쳐도 좋다는 명이 떨어졌을 때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국경에서 발생한 마찰 정도로 번국을 손봐준다니, 도를 넘은 명령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머이런 장긴. 지금 강을 건너 고려를 징벌해 전공을 세우란 말은 아닐 테고.”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비웠던 머이런 장긴은 잠시 후 웬 상자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가 들고 있는 상자에서 묘한 약재 향기가 풍겨나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것은?”
“고려에서 사죄의 의미로 보낸 예물입니다. 전하도 이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계시지요?”
“고려인삼이군. 북경에서는 같은 무게의 금과 거래되는 보물이지.”
“고려국은 풍족한 나라입니다. 고작 외진 땅의 지휘관 하나를 입막음하는데 이 정도의 재물을 건넬 정도라면, 한 기(旗)의 사령관인 전하께는 더 많은 재물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흐음…….”
머이런 장긴의 말이 옳았다. 기왕 칼을 뽑아 군사를 일으킨 것, 무엇이라도 얻어가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려에서 바친 예물은 문제를 일으킨 일에 대해 사죄를 받았다는 증거로도 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북경에서 멍청이 취급은 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예물을 뜯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자금성의 고관들에게 기름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데사이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끝났다. 그 모습을 지켜본 머이런 장긴은 예상했다는 듯, 얼굴에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전하. 그럼 고려로 바로 전령을 띄우겠습니다.”
“최대한 많이, 고품질의 예물을 요구하도록. 감히 다이칭 구룬의 영토를 범했으니, 조그마한 사죄로는 용납할 수 없지.”
“알겠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닝구타에 머무시는 시간이 길어지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쩔 수 있나. 확실한 결과만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머이런 장긴은 어서 고려국에 보낼 독촉 문서부터 꾸미도록.”
데사이는 마음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하다간 웃음거리로 전락할 뻔했던 일이, 머이런 장긴의 조언을 받은 덕분에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해진 듯했다. 아니, 잘만 하면 쓸 데 없이 양람기의 군사를 상하는 것보다 이편이 낫게 될지도.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선제 시절 나선을 정벌했던 일 이후, 머이런 장긴이 조선 측과 꽤나 긴밀한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청나라 정예병 중 팔분의 일 가량이 지금 먼 동쪽의 경계에서 한동안 발이 묶이게 생겼다는 사실 또한.
***
펑. 퍼펑.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무리마를 깨운 것은 웬 포성이었다. 멀리서 마치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소음 덕분에 달콤했던 휴일의 낮잠은 끝장이 나고 말았다.
“웬 포성이야? 오늘은 쉬는 날이 아니었나?”
무리마가 머물고 있는 요새가 위치한 이곳은 천진(天津). 발해만으로 통하는 북경의 외항이자 대운하의 종착지다.
화북 일대를 흐르는 커다란 강, 해하(海河)가 바다로 흘러나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천진은 원나라가 북경에 수도를 정했던 시절부터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북경의 해상 방비를 담당하는 요충지로 여겨졌다. 조정의 실세인 오보이의 아우, 무리마가 방어사령관으로 임명받을 만한 곳이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 땅은 웬만해서는 공격을 받을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구 같은 소규모 해적을 제외하면, 북경을 수도로 삼고 있는 나라와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아닌 이상 이곳을 칠 세력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동아시아는 전통적으로 수군 양성에 소홀한 지역이다. 천진의 평화가 깨지는 것은 원래 수백 년 후의 일일 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들릴 이유가 없는 포성이 계속해서 무리마의 귀청을 두들기고 있었다.
“웬 미친놈이 지금 해안포대에서 훈련이라도 하고 있는 겐가?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시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알아오라며 내보낸 후, 구왈기야 무리마(穆里瑪)는 불쾌한 기분을 쫓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오늘은 천진 성내의 한족 유력자와 약속이 있는 날, 그가 건넬 두둑한 뇌물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넣으려면 지금부터 평정을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금방 그쳤어야 할 포성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멀리서 들려오던 폭발음은 계속해서 뚜렷해지고, 그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헉, 헉……. 무리마 님! 급보입니다!”
그 때, 무리마의 침실에 사람 한 명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것은 방금 내보냈던 시종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 아침부터 갑옷을 갖춰 입고 있는 것은 또 무어고?”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천진 앞바다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선단이 지금 아군에게 무차별 포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뭐야?”
생각도 못했던 보고에 나른했던 기운이 싹 날아갔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무리마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을 정도였다.
“그럴 리가 없다! 포격을 해왔다는 것을 보면 왜구들은 아닐 것이고……. 한조 놈들인가? 아니, 놈들이 한창 강성할 때도 감히 이 천진을 범하지는 못했는데?”
“겉모습을 보면 한조 놈들의 배가 아니라 했습니다. 남방에서 보이던 홍모나 포도아 놈들의 배거나, 혹은 고려국에서 새로 도입한 배와 닮아 있다고 했습니다!”
“고려가? 그럴 리가 있느냐? 놈들은 정묘년과 병자년에 뜨거운 맛을 본 이후로 다이칭 구룬의 충실한 번국 역할을 해 왔다. 놈들이 갑자기 이곳을 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깃발도, 표식도 존재하지 않아 적 선단의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배가 너무 커서 그런지 아군의 해안포도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했다.
적의 정체는 오리무중, 적의 전력은 압도적.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갑자기 그런……. 에잇!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 내 애마를 대령하라!”
“옛!”
전령이 말을 준비하러 간 사이, 무리마는 급히 무장을 갖추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포성이 끊임없이 동쪽 하늘에서 울려 퍼져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호위병을 이끌고 해안포대가 위치한 대고(大沽)로 향하는 동안에도 무리마는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 벌어진 탓에, 그의 이성은 천천히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저, 저건……!”
급히 말을 달려 도착한 해안포대, 그곳에서 무리마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소속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배 두 척이었다. 정체불명의 두 거선(巨船)은 옆구리를 아군 방향으로 향한 채로 한 번에 수십 발의 포격을 계속해서 쏟아 부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애초에 이곳은 바다에서 포격을 받을 것을 상정하고 구축한 방어건물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강을 타고 올라오는 소규모 해적을 상대하기 위해 세운 해안포대는, 이미 압도적인 화력 앞에 갈가리 찢겨나가 있었다.
마치 죽은 시체라도 되는 듯, 청의 해안포대는 이미 반격하는 포격조차 보이지 않았다. 박살난 청 수군의 정크선은 얕은 바다에서 불타오르며 하늘 가득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거선 뒤에서 보조포격을 가하던 함대가 무리마의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형태의 전선들이었다.
“적 선단은 고려국 함대인 것 같습니다! 크기는 다르지만 저 배들은 일전에 천진 항구로 무역품을 싣고 드나들던 고려국 배와 똑같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헌데 어째서 고려 놈들이 여기를 공격한단 말이냐, 어째서……!”
이미 해안포대를 구원하기에는 너무 늦어 보였다. 무리마의 입에서 비통한 외침이 흘러나오는 사이, 천진의 해안은 이미 조선의 함대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해안포대가 완전히 제압된 것을 확인했는지, 먼 바다에서 대기 중이던 선단 하나가 추가로 해안에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육지에 완전히 접안을 성공한 적의 중형선 함대는, 뱃속에 싣고 왔던 내용물을 천천히 해안으로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 정체는 얼룩무늬 갑옷을 입은 정예병이었다.
“무리마 님!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이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요새로 돌아간다! 그리고 북경에 긴급 보고를 올려라! 고려 놈들이 다이칭 구룬을 침범했다!”
상황은 파악했다. 요새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달리면서, 무리마는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놈들을 이곳에서 저지해야 한다. 적어도 해하 하구의 요새에서, 안 되면 천진 성을 끼고 버티며 북경에 주둔 중인 팔기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방금 선단의 규모를 어림짐작해 보니 놈들이 싣고 온 병력은 고작해야 오천에서 일만 오천 가량. 바다에서 아무리 압도적이라도 그 정도 병력으로는 육지에서 힘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성문을 닫아걸고 전투태세에 들어간다! 같은 명령을 천진에도 알려라!”
하지만 요새에 도착해 급박한 명령을 내리던 무리마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빼먹고 귀환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찌 보면 얼룩무늬 군사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
적의 수송선에서 내려진 것은 지상 병력이 다가 아니었다. 무리마가 호위병을 이끌고 요새로 돌아가던 사이, 해안에서는 바퀴 달린 대포 수백 문이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지고 있었다.
***
“허술한 요새로군요. 영상 대감.”
“배후에 위치한 천진 성도 마찬가지요. 이쪽으로 대규모 병력이 공격해온 적은 지금까지 역사상 한 번도 없었을 테니까.”
군사들이 포를 장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고관 하나가 중얼거렸다. 얼룩무늬 두정갑을 차려입은 그의 지휘봉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지휘관의 주의가 쏠려 있었다.
“낭비할 시간 따윈 없소. 그럼, 공격을 개시하시오.”
“명령이 떨어졌다! 화포군! 방포하라!”
“방포하라!”
위에서 내려진 명령이 파도처럼 아래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최전방에 위치한 병사들의 손에 들린 가느다란 철봉이 대포에 난 작은 구멍에 내리꽂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