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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68화 (268/298)
  • 268화. 자금성에서 온 귀빈

    눈을 몇 번이고 깜박여봤지만 내 앞에 일어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홍타이지의 둘째 황녀, 아이신기오로 마카타였다.

    “어째서 당신이?”

    “전부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 이 먼 땅까지 날 보낸 사람은 귀여운 조카님이거든.”

    “조카……? 아.”

    “그래. 다이칭 구룬의 카간이 날 여기까지 보냈어. 카간 주위에 겹겹이 쳐져 있는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니까.”

    늦은 밤과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미소를 만면에 가득 담은 채, 마카타가 대답했다. 동시에 그녀는 손에 든 두루마리를 내게 내밀었다.

    강희제가 나를? 그제서야 오래된 기억 하나가 혼돈을 헤치고 떠올랐다. 현 카간이 아직 젖먹이였던 시절, 아담 샬을 통해 내가 뿌려놓았던 밑밥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받아. 카간의 뜻이야.”

    “이 먼 고장까지 어찌 여인의 몸으로…….”

    “그리 멀지도 않던걸? 북경에서 심양까지의 여정을 한 번 더 반복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카간의 명령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내게 있었거든. 알잖아?”

    “황녀 자가…….”

    복잡한 머리와는 달리 몸은 알아서 알맞은 움직임을 취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어린 강희제가 보낸 두루마리를 열자마자, 그 안에 적힌 정갈한 필체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역시.”

    “카간께서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셨나봐.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조선말까지 공부하신 것을 보면 말야. 내게 여행에 필요한 조선말 회화를 배우라 명하셨던 것도 어린 조카님이셨거든.”

    “자금성에서 다이칭 구룬의 카간이 고려국 정승 안 아르가투에게 글을 부친다…….”

    “우리 조카님, 대단하지? 당신이나 숙부만큼 머리가 좋은 사람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어. 아마 조카님은 두 사람을 뛰어넘었을지도.”

    원역사의 강희제가 말 그대로 천재였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언어만 해도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에 능통했고, 라틴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내가 받아든 두루마리에는 카간의 명령이 세 가지 언어로 작성되어 있었다.

    만주어, 한문, 그리고 한글.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개성이라는 곳을 지날 때였나, 다이칭 구룬에서 온 사신이 그곳을 통과해 한양으로 향했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발걸음을 재촉했는지 몰라.”

    “…….”

    “북경에 방문하면서 나를 한번 찾아오지도 않았던 이 냉혈한을 위해서 말야.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나 참.”

    “……송구합니다, 황녀 자가.”

    “하지만 당신, 그 와중에도 할 일은 제대로 한 모양이야? 조카님이 당신을 이번 일에 써먹을 생각을 떠올린 걸 보니 말야. 하긴, 당신은 아버님 곁에 있을 때도 지략 하나는 천하제일이던 사람이었지. 놀랍지도 않아.”

    과거 아담 샬에게 맡겼던 논어 주석서와 비단 주머니가 제대로 목표물의 흥미를 잡아끌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았던 강희제가 나를 기억하고 있을 리 없지.

    원 역사에서 아담 샬은 200년간 쓸 수 있는 달력을 올렸다는 이유로 오보이에게 사형을 선고받는다. 죄목은 청나라가 고작 200년밖에 유지될 수 없음을 암시했다는 것.

    나는 그 위기에서 아담 샬을 구하기 위해서 비단주머니를 건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함께 넣은 메시지를 통해 미래의 천고일제와의 인연을 만들려는 계산이었는데.

    「……현재 짐과 다이칭 구룬은 흔들리는 모래성 위에 올라타 있는 것과 같도다. 고려국 정승이자 선선대 카간의 바투루(용사) 안 아르가투는 짐의 요청에 응답하길 바란다…….」

    언제든 당신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을 적은 편지가 이런 결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역시 지금 청 조정은 보정대신 두 명의 손아귀에 장악된 상태일 것이다.

    즉, 황제가 번국의 권신에게 구조요청을 보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태라는 말.

    “카간은 당신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했어. 그래서 놈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는 내게 그 고귀한 뜻을 의탁했지. 하긴, 조카님도 우리 옛 이야기를 듣고는 이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라며 무릎을 치시더라고, 후후.”

    마카타의 말 그대로였다. 아무리 의심 많은 오보이일지라도 어찌 그녀를 의심했겠는가.

    나와 마카타의 인연은 도르곤을 비롯한 홍타이지의 측근 극히 일부만을 제외하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편지에 적혀있는 대로라면 마카타가 자초지종을 털어놓기 전까지는 강희제 또한 전혀 알지 못했던 일.

    여인의 몸이라 오보이의 의심을 사지 않는다. 심양에 이유 없이 자주 방문한다. 조선 사람들과 사소한 교류가 많다.

    이것이 강희제가 조선으로 보낼 비밀 전령으로 그녀를 선정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뛰어났다.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거둘 정도로.

    전령의 정체 덕분에 나는 지금 내 손에 들린 카간의 편지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신에게도 아마 카간이 필요하겠지. 맞아?”

    “그렇습니다. 자가께서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커다란 명분을 선물해주셨군요.”

    “그럼, 그럼. 당신에게 도움이 되려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조카님이 그랬거든. 당신이 커다란 위기에 처했을지도 모른다고.”

    “…….”

    “그치만, 내가 당신을 그렇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안 그래?”

    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카타에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녀가 가녀린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조선 상인의 의복이었다. 그 옷은 북경에서 한양까지 이르는 여정 도중 마카타가 감내했어야 할 고생을 상징하는 것.

    분명 황녀쯤 되는 사람이 한양까지 홀몸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까지 오는 길은 청나라 황녀가 아닌, 카간의 밀사로서 와야 했던 길.

    아마 가끔은 남장 또한 불사해야 했을 것이고, 정체를 감추기 위해 갈아입어야 했던 의복만 해도 여러 벌이었겠지.

    조선까지 오는 동안 내가 아담 샬에게 미리 건넸던 통행증을 썼다고는 하지만, 오보이의 눈을 피하고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그 정도 세심한 준비는 필수였을 것이다.

    “이것 봐, 또 말을 잃어버렸네. 당신은 떠나가던 그날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

    “내가 이야기했잖아. 당신은 앞으로 승승장구만 해야 한다고. 나는 내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여기 왔을 뿐이야. 그러니 그런 표정은 더는 짓지 말아줘.”

    “…….”

    “나를 두고 고려로 돌아갈 만큼 좋은 여자와 살고 있으면, 조금은 의연해지라고.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물러 터진 바투루(용사)님.”

    따지고 보면 한밤중에 갑자기 낯선 여자가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 냉정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며, 마카타는 갑자기 하연을 치켜세웠다.

    아내도 내심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마카타가 ‘열녀김씨전’에 나온 청나라 황녀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 하연은 나와 마카타를 방해하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서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만주어로 오가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할 텐데도, 아내의 낯빛에는 의심의 기운 하나가 비치지 않았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이런 사람이 고려에 기다리고 있었으니, 고려 사람이 아닌 나는 이길 방법이 없었을 수밖에.”

    “…….”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꿈만 같네. 이번 생에는 당신과 이렇게 함께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훌륭한 조카님이 고모 소원을 다 들어주는구나.”

    “……송구합니다, 자가.”

    “늘 죄송하다는 말뿐이구나, 당신? 사내면 사내답게 지나간 인연에 연연하지 말란 말이야. 다른 사내들처럼 아무 일도 아닌 양 잊고 살아가면 되는 것을, 어째서…….”

    마카타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무언가 목이 꽉 막히는 듯해,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애써 웃음 짓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눈동자마저 쉽사리 스칠 수 없었다.

    “됐어. 이제 여기 온 목적도 달성했으니 더는 있을 이유가 없네.”

    “자가께서는 제 집에 방문하신 손님입니다. 얼마든지 머물다 가셔도…….”

    “나를 자꾸 눈치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마. 그 전에, 카간이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고. 그 요청에 어떻게 응답할지부터 고민해 보는 게 어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옛 인연에 대해 고민할 시간에, 나는 더 커다란 과제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따라,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좌우될 테니까.

    묵직해졌던 마음이 이제 다른 종류의 무거움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마카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더니,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좋아. 그거야. 그게 내가 아는 안 장긴이지.”

    “……이번 일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황녀 자가.”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라…… 당신에게 그 정도로 기억될 수 있다니, 여기 오길 잘 한 것 같네. 그럼 날이 밝는 대로 가 볼게. 오랜만에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 안 장긴.”

    “고마워…… 마카타.”

    내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들은 황녀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당신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이야기, 이제야 떠올린 나를 부디 용서해 주길.

    그렇게 개운해진 얼굴을 한 마카타는 이윽고 사랑방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의연한 모습에 괜시리 내가 쌓았던 업보가 부끄러워져,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자리에 도로 주저앉으려던 찰나였다.

    방 밖에서 갑작스러운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대문간에서 처음 들려온 소음은, 천천히 사랑채 방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드르륵. 닫혀 있던 사랑채의 문이 열렸다.

    그 문 밖에는 한 사내와, 얼룩무늬 갑옷을 받쳐 입고 그를 호위하는 정예병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허허, 이 깊은 밤에 영상에게 먼저 온 손님이 있지 않은가?”

    손님의 정체를 먼저 알아챈 하연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정체를 가늠하던 황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어디서 본 여인 같더니. 우리 한수를 빼앗아 갈 뻔했던 귀하신 분이로군요. 늦게라도 인연을 다시 잇자고 찾아오신 것은 아닐 테고……. 일단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황녀 자가?”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세자 저하. 아니 지금은 국왕 전하시겠군요.”

    늦은 밤, 통행금지가 내려진 한양 거리를 뚫고 내 집까지 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

    “이 시간에 방문한 빈객이 나 혼자가 아닐 줄이야. 한수 너는 대체 그동안 청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닌 것이냐.”

    “미래를 염려해 약간 손을 써 놨을 뿐입니다. 이런 결과가 돌아오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는 못했지만요.”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내 사랑채에 들어앉아 있었다.

    오늘 사신에게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받고 하루 종일 핏대를 올려댔던 임금과, 그의 손에 주저앉혀진 마카타 황녀였다.

    “마침 잘 되었군. 나는 분명 네가 쓸 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을 돌려놓고자 이렇게 들이닥친 것이었는데.”

    “쓸 데 없는 생각이라 하시면…….”

    “어디 제갈량의 출사표 비슷한 글월을 던지고 이 나라 백성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그것이 걱정되어 찾아온 것이다. 다행히 기대하지도 않았던 손님이 그것만은 막아준 모양이다만.”

    마카타를 향해 감사를 표하는 임금의 입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유창한 만주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임금의 추측이 아주 틀렸던 것은 아닌지라, 나는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느니라. 내게 너라는 존재는 이 조선 땅의 모든 백성과 비겨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존재이기에.”

    “전하…….”

    “마침 청국의 어린 황제가 명분도 마련해 주었겠다. 이야기가 빨라질지도 모르겠구나. 내 화포도감에서 네 생각을 바꿔놓을 물건을 가져왔도다.”

    “화포도감에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화포도감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동안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는 청과의 마찰을 대비해 충무포를 비롯한 대포들을 개량하고 있었을 텐데?

    설마 임금이 정말로 한양 거리를 통과해 내 집까지 대포를 끌고 왔단 소리는 아닐 것이고.

    “받거라, 한수야. 네 결정에 도움이 될 물건이다.”

    임금의 손짓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금군대장이 천으로 감긴 길쭉한 꾸러미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형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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