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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60화 (260/298)
  • 260화. 추격전

    명나라 수군의 숨통만은 끊지 말아 달라? 뜻밖의 간청에 순간 사고가 멎었다.

    아주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현재 전황은 조선 수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 그러니 우리에게 잡힌 포로가 거래를 제안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전 상관을 팔아넘기고 얻으려는 것이 명나라 수군 그 자체라? 이런 주제 넘는 제안이 날아올 것이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이 시랑이라는 자는 내게 감히 이런 주제 넘는 제안을 건네면서 낯빛에 비굴한 기색 하나 띠지 않았다.

    이런 상황 때문일까. 나는 당황한 낯빛은 쉽게 감출 수 있었지만, 호기심만은 미처 누를 수 없었다.

    “무언가 착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시 첨사. 당신은 지금 포로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는 양국의 함대가 목숨을 걸고 포탄을 주고받는 전장 한가운데고요.”

    “알고 있습니다, 정승님.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말씀드릴 수 없는 일이기에, 감히 패장이 분수를 모르고 주제넘은 것을 알면서도 간청을 드립니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저를 포로로 잡은 분이 정승님이 아니었다면 말씀드릴 수 없었을 일이기도 합니다. 당신과 마주했던 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요.”

    나는 그와 초면이라 생각했는데, 실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시랑의 말에 따르면 처음 숭정제의 초대를 받고 남경에 방문했을 때, 스치듯 마주했던 정성공의 수하 중에 그도 끼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적지 한가운데에서 대명의 대신들을 홀로 상대하시는 모습이 제 기억에 선명히 남았습니다. 끝까지 꺾이지 않으려 꿋꿋이 버티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셨죠.”

    “지금 내게 아부라도 하시는 겝니까? 그런 입에 발린 말이 지금 상황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아실 텐데요?”

    “아부가 아닙니다. 그날 저는 조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안위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그 국성야에게 대등하게 맞서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

    “그리고 지금 제 앞에 선 당신은, 그날 제가 보았던 당신과 달라지지 않았다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 조선과 대명, 양국의 이익을 위해 주제넘은 간청을 드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자신의 손바닥과 주먹을 맞부딪혀 내게 경의를 표한 시랑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발아래 위치한 포갑판에서는 계속해서 화약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그 소음은 나와 시랑의 대화를 방해하지 못했다.

    “양국의 이익을 위해서라? 들어는 드리지요. 말씀해 보십시오, 시 첨사.”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정승께서도 순망치한의 고사는 알고 계시겠지요.”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그 고사를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첨사는 지금 괵(虢)과 우(虞)를 조선과 명국에 비기고 있는 것입니까?”

    순망치한(脣亡齒寒).

    진(晉)나라 헌공이 괵나라를 치러 우나라에 길을 빌려달라 요청했을 때, 신하인 궁지기가 왕에게 반대하는 간언을 올리며 비유한 것에서 유래한 고사다.

    쉽게 말하자면 둘 중 하나가 망하면 다른 하나도 망한다는 뜻. 역사에서도 우나라 왕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길을 열어주자, 그 길로 괵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는 그대로 돌아와 우나라마저 멸망시켰다.

    “그렇습니다. 조선 함대가 이 전장에서 명 함대를 전부 깨고 부수면 당장은 좋을지 모르나, 저희는 회수와 장강을 넘어오는 오랑캐의 군사를 막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명국이 쇠하면, 그 다음 차례는 우리 조선 차례다, 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오랑캐가 말 잘 듣는 번국인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조선은 우리 대명과 오랑캐 사이에서 많은 이익을 거두고 있지 않았습니까? 만약 우리 함대의 숨통을 끊으신다면…….”

    “지금까지 거두던 그 이익 또한 사라질 것이다?”

    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가 건넨 제안이라기에는 꽤나 발칙한 제안이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 아니었고.

    하지만 나는 시랑의 이 말에서 몇 가지 이용할 만한 사실을 바로 잡아낼 수 있었다. 일단 남명 안에서 조선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 이번 전쟁은 정성공의 독단으로 일방적으로 벌어진 전쟁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을 보니 이 자는 생각보다 이용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럴 듯한 발상이군요. 하지만 무언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아국이 명국에서 거두어가는 이익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금 이 무익한 전쟁을 벌인 누군가의 압력 때문이지요.”

    “그, 그것은…….”

    “이번 전쟁이 일어난 이유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일방적으로 체결된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든 이익을 더 남기려 애를 썼지만, 국성야는 그러한 시도마저 곱게 보지 않았었지요.”

    “……그 건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조선 측의 교역선을 핑계를 대고 나포한 건은 변명의 여지가…….”

    “만약 정말로 조선과 명국에 입술과 이빨의 비유가 들어맞으려거든, 두 나라가 진실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여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조선에 빨대를 꽂아 빨아먹은 주제에.

    내 일침에 시랑은 떨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도 정성공의 행태를 지금까지 보아왔으니, 양심이 분명 켕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조금은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무엇보다 지금 이 자리는 대등한 교섭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아니지요.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정승님. 하지만 당신은 조선국의 신하이시지만 대명의 도독동지 직에 오르신 분이기도 합니다. 부디 한 번만이라도…….”

    “당신도 무역에 발을 담갔으니 알겠지만, 신용을 잃은 대상에게는 절대 외상으로 물건을 내어주지 않는 법입니다. 일개 장사치도 그 정도 이치는 알진대,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그런 말랑말랑한 거래는 일어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말씀은…….”

    이번 전쟁이 일어난 것에는 당연히 정성공의 잘못이 제일 크다. 그러나 시랑, 나아가 명나라라고 하여 어찌 책임이 없겠는가.

    시랑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는지, 눈을 질끈 감고는 아무 말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에게 사적인 감정은 없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중대한 건을 처리할 때는 잘 벼려진 칼을 쓰듯 해야 하는 법.

    “실례했습니다. 제가 감히 주제를 잊고 그만…….”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희미하게 내쉰 시랑은, 내게 예를 갖추고는 뒷걸음을 쳐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의 어깨가 미묘하게 떨리는 것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뱃전 너머 바다에서는 계속해서 무적을 자랑하던 남명의 함대가 박살 나고 있었다. 특히나 지금 대장선의 뒤에서 조선 함대의 우군에게 깨지고 있는 함대는 시랑이 기존에 지휘하던 정성공 함대의 좌군일 것이다.

    그의 감정이 요동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만하면 어느 정도 거래를 할 준비가 된 셈이다.

    그렇게 나는 시랑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등을 돌리려는 순간, 나직이 그를 불러 멈춰 세웠다.

    “정승님?”

    “……조금, 아주 조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시 첨사.”

    “마음이 바뀌셨다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단단하게 버티던 시랑의 표정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한 줄기 희망을 붙잡고 환희를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이번 거래에서는 충분한 이득을 볼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당신에게 단 한 가지 선택지를 주겠습니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것은 당신 마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신 기회, 감사히 고려해보겠습니다!”

    “방금 무역에 빗댄 김에 그 비유를 한 번 더 써 보지요. 아무리 신용을 잃은 거래처라지만 선금을 넉넉히 지급한다면…… 물건을 내주는 것도 고려해봄직 하지 않겠습니까?”

    “넉넉한 선금이라 하시면……?”

    방금까지 강직하기 이를 데 없던 사람이, 이제는 간도 쓸개도 내어줄 표정을 하고 있다. 조금 안타까운 모습이었지만, 이런 자리에 개입할 사적인 감정 따위는 없었다.

    “국성야의 신변을 선금으로 받지요. 살아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상관치 않겠습니다.”

    ***

    사실 시랑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거래다.

    정성공의 정보를 가장 비싼 가격에 팔아치울 수 있는 시기는 지금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 값을 최대한 후려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수입까지 넉넉히 받았고.

    그 자리에서 나와 이완은 시랑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새로운 작전과 정성공의 도주용 쾌속선의 특징, 그리고 팽호 제도의 숨겨진 상륙지 등이 새로 작성된 명령서가 곧 전군 지휘관에 전파되었다.

    “보고! 아직 전투에 말려들지 않은 적 함대가 도주하고 있습니다!”

    “놓아 두어라. 어차피 우리의 목표는 이제 그쪽이 아니니까.”

    적의 후미 함대가 도망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열함 두 척이 선두에 합류한 아군 중군에 의해 이미 정성공의 주력 함대는 박살이 난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만 해협의 망망대해에서 그들이 후퇴할 만한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계획대로 패잔병이 팽호 제도로 도망치면, 그곳의 좁은 지형을 이용해 일망타진하는 것이 훨씬 손쉬운 처리법일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후퇴를 거듭하던 적 대장선을 포위망 한가운데에 몰아넣는데 성공했습니다! 함대는 통상 영감의 최종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격멸해라. 이 바다에 남아있는 적선이 한 척도 없도록 하라.”

    “옛! 영감!”

    잠시 선실로 들어가 작전을 재구성하는 사이, 전황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신무의 전열함과 별동대가 적 중군의 옆구리를 크게 베어 물고 협공하는 양상으로 전환되자, 버티던 정성공의 함대는 물린 꼬리를 잘라내고 후퇴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적이 잘라낸 꼬리에는 그들의 대장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방금까지는 필사적으로 대장선을 후퇴시키려 일부 전선을 돌격시켜 육탄방어까지 서슴지 않던 적들이었기에, 나는 그 보고에서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보고! 아군 정찰선대가 새로운 목표를 포착! 추적에 나섰다고 합니다!”

    “역시나……. 시랑이 제공한 정보가 맞았소, 통제사.”

    “작전을 수정한 보람이 있습니다, 대감.”

    그러나 그 꺼림칙한 기분은 곧이어 들어온 보고에 의해 해소되었다. 시랑이 일러준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 쾌속선 몇 척이 적 주력 함대의 후퇴로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도주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자신의 대장선 또한 언제든지 던질 수 있는 팻감에 불과한 것이었나…….”

    “아까 논했던 상황이 벌어졌군요. 대감, 어찌하시겠습니까?”

    “함대를 분리하시오. 적이 미끼로 남긴 함대는 이제 일부만으로도 충분히 격멸이 가능할 터. 나머지 함대를 재편성해 추적에 나설 것이오.”

    “알겠습니다. 차단 작전 역시 계획한 그대로 시행합니까?”

    “바로 작은 선단 하나를 정찰대에 붙여 따르게 하시오. 적 수괴가 탈출한 쾌속선이 적 본대에 합류하게 두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

    보름달이 너른 바다를 휘영청 밝히던 그날 밤.

    정성공이 조선 함대의 뿌리를 뽑기 위해 고른 보름날 밤은, 오히려 명나라 함대의 비참한 최후를 밝히는 밤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달밤 내내 이어진 추격전은 어느 한 섬에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적은 아직 항복할 생각이 없는 것 같군요, 통제사.”

    이곳은 팽호 제도의 주 섬에서 남쪽으로 삼십 리가량 떨어진 망안도(望安島)라는 섬.

    추적 결과, 적의 본대와 따로 갈라져 도주하던 쾌속선 한 무리가 숨어든 곳이었다.

    도주하는 적 본대의 추격을 맡은 함대에게 적을 견제하되 함부로 싸움을 걸지 말라는 지시를 남기고, 나와 이완은 쾌속선의 뒤를 쫓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먼저 추격에 나섰던 정찰대의 안내를 받아 바로 이 망안도에 도달했다.

    상륙지에 다다르기 전에 꼬리를 잡혔으니, 보통이면 바로 백기를 들어도 모자랄 상황. 그러나 적은 조선 함대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였음에도 항복의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대처는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방포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대감.”

    “이미 적은 궁지에 몰렸소. 그들의 기세를 꺾을 정도로만 포탄을 날려주기로 합시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저기에는 대감 말씀대로 적의 수괴가 있을 가능성도 높기에…….”

    그렇게 쏟아진 조선 함대의 포탄은 적 쾌속선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가해진 포격에도 불구하고, 적들의 기세가 완전히 꺾일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려야 했다.

    결국 그들 사이에서 백기가 올라온 것은 두 번째 포격이 한참 진행되던 때였다. 하지만 항복의 표시로 날아든 것은 백기뿐만이 아니었다.

    “적장이 나를 보길 원한다고?”

    “적선에서 날아온 화살에 꿰인 문서에는 분명 그리 적혀 있었습니다. 시급한 일이니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는군요, 대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라…….”

    “일단 자신들의 전선을 무장해제하는 것으로 진심을 보이겠다고 합니다. 어떤 요구든 수용할 생각이니 제발 긍정적인 답변을 달라고 하는군요.”

    뜬금없는 요구에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도대체 적들이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 눈에 댄 망원경 너머로, 적들이 배에 설치된 불랑기포를 분리해 바다로 던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궁지에 몰린 적이 항복했던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게 나온 것은 또 처음이었다. 그들이 나를 기만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대체 내게 무엇을 원하기에 저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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