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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58화 (258/298)
  • 258화. 비밀 병기

    “도독님! 좌군 방향에서 연기가 오릅니다!”

    견시를 맡은 병사가 외치기 전부터, 정성공은 함대의 좌익에서 발생한 이변을 포착하고 있었다. 맑은 날씨 덕에 시야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으니, 하늘을 가르며 솟아오른 어두운 연기를 놓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놈들의 화포, 성능이 뛰어나다더니 화약고라도 관통한 것인가?”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기름과 불화살을 이용해 일반적인 화공을 가하기엔 먼 거리였으니까.

    그 순간, 정성공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좌군 방향에서 연기 몇 줄기가 추가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허공을 뒤덮기 시작한 연기 줄기들은 점점 수를 불려갔다.

    “뭐지? 놈들은 대체 무슨 수를…….”

    지금, 정성공의 해전 지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로서는 드물게 말꼬리를 흐린 정성공의 머릿속에서 온갖 추측들이 충돌했다.

    ‘땔감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망망대해 위에서 갑자기 저런 수준의 화공이라니?’

    ‘훌륭한 전리품이 될 배를 저리 함부로 태워버려? 놈들은 나포라는 개념을 모르는 것인가?’

    그러나 혼란에 빠진 정성공과 달리, 한 번 오르기 시작한 연기들은 멈출 줄을 몰랐다. 좌군 방향의 하늘은 피어오른 연기들로 점점 자욱해졌고, 이제 육안으로는 전황을 관측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때였다. 정성공의 시야에 적들의 중대한 움직임이 잡힌 것은.

    “전방에서 적군 움직임 감지! 적 중군이 아군의 좌군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정성공이 내보낸 좌군과 우군을 제자리에서 맞아 싸우기만 하던 적이 드디어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성공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적 우익과 맞붙은 자신의 좌군을 협공하려는 모양새로 비치고 있었다.

    “아하, 이제 알겠군. 하긴, 놈도 조금은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자였지.”

    연기는 연막에 불과하고, 내 시야를 가리고 몰래 좌군을 협공해 궤멸시키겠다?

    착. 정성공은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제서야 이해가 되지 않던 상황이 한눈에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지! 대기 중인 중군에 전투준비 명령을 내려라!”

    “옛! 도독님! 추가로 내리실 명령은 있으십니까!”

    어느새 눈치를 채고 달려온 부관이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띤 채, 정성공은 부관을 향해 온 배에 들릴 정도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적이 노리는 것은 아군의 좌군이다! 놈들이 협공에 들어가기 전 그 시도를 차단한다!”

    “알겠습니다! 좌군을 구원하러 중군을 출격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전원 대장선을 따라 적 중군의 옆구리를 들이친다!”

    적은 정성공의 눈을 가릴 생각이었겠지만, 자신들의 눈도 가려지는 것은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 같으니라고. 하하!”

    정성공의 입가가 심술궂게 비틀렸다. 거대한 함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없다는 티가 풀풀 나지 않는가.

    놈들의 배에서 화포가 발사되는 자리는 측면이다. 적의 중군이 연기 사이에서 포탄이 쏟아지는 옆구리를 들이밀며 좌군을 두들기느라 정신이 팔려있을 때, 정성공에게는 포탄을 피해 근거리로 접근할 길이 열리는 셈이다.

    “대명의 수군도독, 나 주성공이 명한다! 지금부터 좌군을 노리고 달려드는 저 버러지들을 멸하러 출격한다! 이 명령을 중군 전 함대에 전하라!”

    “예, 도독님! 명 받들겠습니다!”

    연기로 온통 흐려진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성공이 벼락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방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계산이 끝났다.

    이제는 연기 너머로 적의 움직임을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조선 함대가 방금까지 보여준 움직임과 아군 함대의 속도를 고려, 지금 출격하면 적이 먹음직스럽게 드러낸 옆구리를 물어뜯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때, 바다 위에서 잔뼈가 굵은 정성공의 목덜미에 어떤 예감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적들의 좌익은 아군의 우군과 오랜 경합 상태에 빠져 있다. 수적으로 불리한 놈들의 함대가 지금처럼 각개전투를 벌이는 한, 정성공이 패배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을 것이다.

    “기다려라, 안한수! 이제 네놈에게 베풀 자비는 숨통을 빠르게 끊어주는 것뿐이겠군! 하하!”

    그러나 정성공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무릇 포식자가 가장 무방비한 상태에 처할 때는, 먹이를 향해 달려들고 있을 때라는 것을.

    그리고, 조선 함대가 가장 위력적인 송곳니를 지금까지 숨겨왔다는 사실 역시.

    ***

    “……하지만 약점을 노리고 달려드는 짐승 역시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는 법이지.”

    “지금입니까, 좌상 대감?”

    천천히 적 함대가 달려들고 있을 전방의 연기 너머를 주시하던 좌의정의 눈꺼풀이 한번 깜빡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그의 입에서는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이오! 통제사!”

    “포도관! 돛대에 신호기(旗)를 올려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돛대에 연결된 밧줄을 당기는 포도관과 병사들의 팔뚝에 핏줄이 돋았다. 돛대의 하단에 걸려있던 붉은 색 깃발이 작은 마찰음 몇 번과 함께 돛대의 꼭대기에 나부꼈다.

    “아직 좌익 방향에는 연기가 자욱하지 않아 다행이로군.”

    “좌익 함대는 진천뢰 사용을 당분간 자제하라는 명을 내린 보람이 있습니다, 대감.”

    “하지만 이제 깃발이 올라 신호가 전해졌으니 그쪽에서도 연기가 오르기 시작할 것이오. 좌익에 배치된 전열함에서는 답신호가 왔소?”

    “어디보자……. 아직은……. 아, 지금 홍기(紅旗)가 돛대에 올라왔습니다!”

    이완도 갑갑했는지, 자신의 망원경을 뽑아들어 좌익 방향을 향해 들이밀고 있었다.

    그의 반응을 보니 명령이 좌익까지 제대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연기를 뚫고 돌진해올 적과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뿐.

    “좌익 전열함, 휘하 별동대를 이끌고 진형 이탈! 약속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감!”

    “계획대로군. 그럼 통제사, 우리도 이제 전력을 다할 시간이오.”

    “드디어 그 시간이 왔군요. 아끼고 아꼈던 비밀무기를 적에게 공개할 시간이.”

    그동안 잘 참았다. 조선 수군의 총지휘를 맡은 두 사람이 비슷한 성격이었기에, 가장 큰 전력을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고 마찰 없이 버틸 수 있었다.

    맛있는 것은 미뤄놓았다 가장 마지막에 먹어야 하지 않겠냐는 좌의정의 말에, 이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둘에게는 전쟁도 한 끼 식사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전 갑판의 수군 병사들은 들어라! 통제사의 명령이다! 모든 포문을 개방하라!”

    “통상 영감의 명령이시다! 모든 포문을 개방하라!”

    “다시 한번 반복한다! 모든 포갑판의 포문을 개방하라! 그리고 화포장 아래 모든 포수들은 전투준비에 들어간다!”

    선미에 위치한 높은 갑판에서 뛰어내린 이완은 직접 돌아다니며 명령을 전했다. 드디어 전열함의 제대로 된 첫 실전 투입이다. 그가 신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 잠깐.”

    이완이 그의 곁을 떠난 직후, 지금까지 적의 동태에 신경을 온통 집중하고 있던 좌의정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그가 방금 신호기를 통해 명령을 내린 전열함에는, 누구보다 지금 사태에 신이 나 있을 사람이 타고 있었다. 통제사쯤 되는 사람도 저리 신이 나 있는데, 그쪽은 더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거, 계획 밖의 사태가 일어나면 안 될 텐데.”

    ***

    “선장! 카프테인 신! 저기 보십시오! 붉은 기가 올라왔습니다!”

    “나도 보고 있습니다, 더 빌트 선장. 그렇게 귀가 떨어져라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귀가 떨어져요? 재미있는 비유로군요? 아주 재밌는 표현입니다!”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마치 금방이라도 발을 동동 구를 듯이 날뛰는 빌트와 달리, 방향타 옆에 선 돌격장 신무는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겉모습은 침착할지 몰라도 속은 전혀 딴판이었다.

    그는 돌격장에 임명된 이후 일 년 내내 낯선 배의 운용법에 익숙해져야 했고, 대만 해협에서 처음 적을 마주했을 때도 항행 미숙으로 인해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대비해 최전선에 나가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모든 제한이 풀렸다.

    그의 마음속에서 본능을 눌러내던 좌상 대감의 명령은, 방금 본대의 대장선에서 오른 붉은 깃발 한 장에 의해 박살 났다.

    ‘제가 지휘하는 전열함을 당분간 마치 왜군의 안택선처럼 보이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저 지휘관의 위엄을 보이고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든 거대한 선박인 것처럼 움직이란 말일세.’

    ‘이 훌륭한 전선을 굳이?’ 라는 의문을 좌의정이 친히 덧붙인 설명이 해소해주긴 했다. 전열함은 벽란선이나 예성선에 비하면 속도가 느린 편이고, 적의 전선에 비해서 속도의 우위를 가져가기 어려울 테니 추격전이 벌어지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깊숙이 끌어들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격멸하는 것뿐. 신무가 그 의견을 말하자, 좌상 대감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사실 저도 왜 굳이 지리적 이점을 포기하고 먼 바다로 나와 적에게 맞섰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카프테인. 요새를 끼고 유리한 전장에서 싸울 수 있는데 말이죠.”

    “그랬다가는 적이 지금처럼 우리를 얕보고 숫자로 찍어누르겠답시고 돌격해 주는 일이 일어나기 어려웠겠지요. 좌상 대감께서는 적에게 이점을 쥐여주고, 그 대가로 우리에게 더욱 유리한 진형을 유도하신 것입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했다고나 할까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그 표현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조선어로는 그것을 어떻게 발음합니까?”

    네덜란드어로 오가던 대화를 멈추고 신무가 말해준 조선어 구절을, 빌트는 몇 번이고 반복해 되뇌었다. 이번에 들은 비유는 정말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네덜란드 본토의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신무가 조선식 표현을 그대로 직역해 생긴 촌극이었다.

    빌트는 낯선 표현들을 접하며 문화충격에 빠지곤 했는데, 지금처럼 조선어 원문을 알려달라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

    “‘쌀울 네주고 벼룰 취한타.’ 와하하. 이 정도면 훌륭합니까? 나중에 본국에 돌아가서 이 표현을 써먹어봐야겠군요!”

    무언가 발음이 잘못된 것 같았지만, 신무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저걸 고쳐줘 봐야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럴 시간에 대장선에서 내려온 명령에 답하는 것이 급했다.

    이윽고 신무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명령 수신이 완료되었음을 뜻하는 붉은 기를 돛대에 올렸다.

    그리고 돛대에 오른 붉은 깃발은 대장선에게 보낸 회신이 될 뿐만 아니라, 미리 별동대로 선발한 좌익의 전선들에게 보내는 신호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들에게도 명령이 전달되었는지, 전열함 주변에서 전투를 벌이던 벽란선 여러 척의 돛대에서 붉은 깃발이 올랐다.

    “자랑스러운 조선 수군 전열함의 승무원들은 들어라!”

    이윽고 신무의 입에서 전열함 갑판 전체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옆에서는 하멜이 빌트를 향해 열심히 조선어를 통역 중이었다.

    “예! 돌격장님!”

    “너희는 지금까지 적과 피 흘리며 맞서 싸우는 동료들을 보며 가슴을 태웠을 것이다! 허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 기념할만한 조선 수군 전열함의 첫 전투가 시작될 테니!”

    “돌격장님! 그 말씀은……!”

    “전원! 전투 위치로! 함내의 모든 포문은 개방! 포수들은 배치된 포로 긴급히 이동한다! 이동을 완료하는 대로 장전을 비롯한 모든 전투 준비를 끝마친다!”

    신무의 목소리가 잦아들자마자, 전열함 내부는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뒤덮였다. 애타게 첫 전투를 고대해왔던 것은 신무와 빌트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돛을 펼쳐라! 전속력으로! 우리의 목표는 적의 심장이다!”

    “예! 돌격장님!”

    우렁찬 대답과 함께, 훈련 잘 된 병사들은 자신이 맡은 자리로 빠른 속도로 흩어져갔다.

    잔뜩 신이 나 자신이 지휘할 하부 포갑판으로 뛰어내려가는 빌트에게서 웬 이상한 조선말이 들린 것 같았지만 신무는 개의치 않았다. 조선말이 이상한 부분에서 서투른 하멜이 또 잘못된 말을 알려준 것이 분명했다.

    ***

    맑기만 하던 날씨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계속해서 하늘로 피어오른 연기가 옮아간 것인지, 맑았던 하늘에 점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폭풍을 동반할 먹구름은 아니로군. 바람도 평온하지 않은가.”

    “하지만 도독님, 가뜩이나 연기로 방해되던 시야가 더 어두워졌습니다.”

    잔뜩 낀 먹구름과 흘러간 시간 탓에 바다 위에 내리쬐던 태양빛이 줄어들면서, 다소 연기에 가렸음에도 방금까지는 그럭저럭 넓었던 시야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정성공의 자신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어차피 시야가 제한된 것은 적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놈들은 이런 해전에 익숙하지 않을 테지.”

    한창 주위에서 포성이 터지고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이었음에도 정성공은 여유로웠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 조선 함대를 향해 돌격중인 그의 중군 함대는 이백 척에 가까운 대선단이었기 때문이다.

    “어어? 저건 뭐지?”

    돛대 위의 견시병에게서 갑작스러운 외침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무슨 일이냐!”

    “우현 방향에 적 전선, 아니 함대가 나타났습니다! 여러 척 같아 보입니다!”

    ‘호오. 그래도 함정이랍시고 준비한 것은 있는 모양인가.’

    정성공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나왔다.

    “여러 척? 그럼 전선 몇십 척을 분리시켜 나아가 치게 하면 된다. 웬 호들갑이냐?”

    “하지만 참장(參將)님! 적 함대의 선두에 웬 거대한 배가……!”

    견시병과 휘하 장수가 옥신각신거리고 있었지만, 별일은 아닐 것이다. 놈들이 지휘선으로 쓰는 거대한 배는 자신의 대복선이나 왜구의 안택선 비슷한 것이 분명했으니까.

    정성공은 조선 함대에 포함된 정체불명의 서양식 범선을 그저 방어에 특화된 지휘관용 대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만했던 것이, 놈들의 대선은 지금까지 한 차례도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멍청한 놈들, 배울 것이 없어서 왜구에게서 교훈을 얻었단 말인가. 정성공이 적을 향해 조소를 날리고 있던 무렵이었다.

    꽝! 꽈과광! 꽈광!

    정성공의 평온을 단숨에 깨버린 것은 생전 처음 듣는 거대한 포성이었다.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정성공의 시야에, 저 멀리 떠 있는 거대한 선박 하나가 잡히고 있었다.

    “뭐, 뭐야, 저건?”

    그 질문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거대한 선박의 측면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아마도 그것은 화포를 발사할 때 나오는 불빛.

    그러나 문제는 불빛의 정체가 아니었다. 정성공 함대의 후미를 향해 움직이며 드러난 대선(大船)의 옆구리에서는 줄잡아 이십 개 이상의 불빛이 번쩍였다 사라졌다.

    꽈광! 꽝! 꽈광!

    뒤늦게 고막을 후려갈기는 폭음이 몰아닥쳤다.

    그리고 정성공은 깨달았다. 자신이 딛고 서 있는 갑판이 흔들리는 것은, 타고 있는 대장선이 대응포격을 시작했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최초로 마주하는 압도적인 힘 탓에, 그의 목덜미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천하의 정성공이 바다 위에서 공포를 느낀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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