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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52화 (252/298)

252화. 타이베이 방어전

네덜란드의 안토니 요새를 공격하는 함대의 지휘관은 본래 정성공 아래에서 좌군의 선봉 선단을 지휘하던 이였다. 그의 이름은 시랑(施琅). 그동안 세운 공을 인정받아 남명의 종2품 도독첨사 자리까지 오른 수군 장수다.

헌데, 한때 선봉 선단을 지휘했을 정도로 함대 내부에서 중책을 맡았던 시랑은 지금은 주(主) 전장이 아닌 곳에 와 있었다. 아마 그것은 최근 시랑과 정성공 사이에서 있던 일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슬슬 갑판 위에서 저 멀리 대만 섬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시랑의 입에서는 탄식 하나가 흘러나왔다.

“그립습니다……. 비홍(飛虹, 정지룡의 호) 어르신…….”

시랑은 불만이 잔뜩 쌓인 상태였다.

이번 일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본래 섬기던 정지룡이 죽은 이후로, 그의 아들 정성공과 의견이 충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일선에서 청나라 수군을 상대로 쌓은 공적으로만 치면 시랑의 공적이 정성공의 것보다 크면 컸지 작지 않았다. 정지룡도 그것을 알아 자식뻘인 시랑을 아들처럼 대했지만, 결국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아들 정성공이었다.

“이제는 내게 이런 푸대접까지 하는구나, 복송(福松. 정성공의 아명) 이놈이…….”

원래대로라면 지금 시랑은 당당히 적을 쳐부술 선봉 함대를 지휘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시랑의 부관이었던 만례(萬禮)에게 돌아갔다. 자신의 경쟁자를 견제하기 위한 정성공의 술책이었다.

사실 이렇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시랑도 대략 넘겨짚고 있었다. 이번에 정성공이 홍모와 조선을 상대로 일으키려는 전쟁을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전방의 일부 함선만 남기고 전부 그들을 토벌하는데 쓴다는 말을 어찌 반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개 해적이나 할 만한 짓거리’라는 표현이 그리도 마음에 안 들었던가? 오만한 자식.”

그동안 별 문제가 없었던 조선을 홍모와 묶어 토벌해야 한다는 정성공의 제안에 대놓고 반기를 든 결과가 이것이었다. 조금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는 것은 시랑 스스로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불이익을 받을 정도의 발언은 결코 아니었다.

후…….

시랑의 입에서 쓰디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를 제어하던 선대 황제와 아버지가 연이어 세상을 뜬 이후로, 정성공은 마치 제 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시랑의 추종자 중에서는 아직 오십대였던 정지룡이 갑자기 세상을 뜬 건을 두고 누군가의 독살이 아니겠냐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는 판이다.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정말로 다른 마음을 품을지도 모르겠구나. 어르신께서 살아계실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순간 시랑의 머릿속을 한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배반(背叛).

그러나 아무리 정성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만주족 오랑캐 놈들이 자신을 순순히 받아줄지도 의문인 데다, 정성공의 평소 심성을 생각하면 배반자의 삼족을 멸하고자 암살대를 보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긴, 그 정성공이 일개 해적과 같다 비난한 시랑을 가택에 연금시키기는커녕, 많지 않은 병력이나마 쥐어주고 전장으로 보낸 것은 화해의 의미가 담긴 행동일지도 몰랐다. 시랑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그동안 정씨 가문의 함대에서 한 일이 얼마인데, 그리도 쉽게 나를 가마솥에 넣고 삶을 수 있겠냔 말이냐.”

다행히 앞에 보이는 목표는 그리 어려운 상대로 보이지 않았다. 앞에 보이는 홍모성(紅毛城, 안토니 요새)이 견고한 요새임은 분명했으나, 보고에 따르면 그곳에 주둔 중인 병력은 많아야 수백 명 규모. 고전할 이유가 없었다.

“포수 전원, 화포를 장전하라! 명령이 내려지면 상륙병을 실은 부대가 해안에 접근할 때까지 엄호 포격을 실시한다!”

그나마 시랑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저 성에 비치되어 있을 홍모 놈들의 포였다. 하지만 놈들의 화포가 뛰어난 성능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것이 의미를 가질 때는 병력이 같은 규모일 때의 이야기.

오십 척이 넘는 함대와 이천 명의 상륙병이 상대라면 아무리 성능이 좋은 포라도 소용이 없게 된다. 화포는 전선의 돛대를 부러뜨릴 수는 있어도 침몰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이 상식이니까. 상륙병들이 육로로 진격하는 이상 바다 쪽에만 화력을 쏟을 수도 없을 것이다.

시랑의 생각이 맞아 떨어진 것인지, 함대가 홍모성을 향해 접근하는 동안 적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성의 배후지에 위치한 홍모의 민간인 마을을 먼저 공격했을 때도 그곳은 이미 텅텅 비어있었다.

홍모 놈들이 겁을 먹기라도 한 것인가? 시랑이 알고 있는 홍이포의 사정거리 안으로 전선이 들어갔음에도 포격은 여전히 날아오지 않았다.

“이거, 이상한데?”

요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미리 상륙한 병력들은 대장함에서 내려진 신호에 따라 목표를 향해 전진했다. 무장한 전선들도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요새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낯선 상황을 마주한 시랑의 머리에 의문점이 하나 스쳤다.

혹시 홍모 놈들은 적이 화포의 사거리 안에서 병사를 상륙시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도 기대하는 것인가? 아무리 능력 없는 지휘관이라도 그런 머저리 같은 짓거리는 하지 않을 텐데?

분명 작전은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한 점 남은 불안감은 여전히 시랑을 짓눌렀다. 그렇게 시랑의 함대와 병력이 홍모성에 어느 정도 가까이 접근했을 무렵이었다.

“부어(vuur)!”

언덕 위에 위치한 요새에서 울려퍼진 외침 하나가 시랑의 귀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성벽에 난 포문이 번쩍 열리더니, 홍모의 화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이 포격을 개시한다! 상륙병 전원에게 산개 명령을! 함포는 전원 포격을 실시하라!”

쾅. 콰쾅.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지축을 울리기 시작했다. 성벽 사이로 난 포문에서 화약 연기가 연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헌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시랑의 귀를 계속해서 울려대는 소리는 오로지 포탄이 땅에 착탄하는 소리뿐. 놈들의 화포는 지상으로 접근하고 있는 상륙병들만을 향하고 있었다.

“뭐지? 이놈들, 우리 함대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건가?”

홍모성의 성벽이 아무리 두껍다고는 하나 도를 넘은 대응이었다.

시랑의 전선에 장착된 불랑기포는 위력과 사거리는 떨어질지 몰라도, 자포(子砲)와 모포(母砲)를 분리해 장전할 수 있는 장점 덕분에 연사속도 하나는 뛰어났다. 포에 가늠자를 달아놓아 근거리라면 나름대로 조준 포격도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성벽 자체를 깨트리지는 못하지만, 이만한 수의 전선에 장착된 함포가 계속해서 조준 포격을 가해댄다면 아무리 포문 사이에 숨은 화포라도 피해를 입을 텐데?

“모든 함포는 적의 포문을 조준해 포격하라! 놈들의 화포를 무력화시켜야 아군이 요새에 진입할 수 있다!”

슬슬 성벽 위에는 총을 든 병사들이 나타나 장거리 조준사격으로 아군 상륙병을 넘어뜨리기 시작했지만, 시랑의 눈에는 조선군 차림을 한 그 조총수들이 비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적의 화포만 제압하면 조총수 따위, 불랑기포의 밥일 뿐이다. 옆구리를 훤히 드러낸 적을 보며, 시랑이 앞으로의 대응책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짜 맞추고 있던 찰나였다.

“대완구가 왔다! 진천뢰를 준비해라!”

요새에서 조선말로 된 어떤 명령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포격 소리에 묻혀 그 내용은 시랑의 함대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전달되었더라도 조선말을 모르는 시랑은 알아들을 수 없었을 테지만.

펑, 펑. 이윽고 성벽 위에서 평소의 포격음과는 다른 폭발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폭발음과 동시에 하늘로 쏘아진 철구(鐵球)들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명나라 전선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으악!”

“적 포탄이 날아든다! 몸을 숨겨라!”

“도독첨사! 피하십시오! 위험합니다!”

드디어 함대로 날아들기 시작한 적 포격에 일부 명 수군들은 혼비백산해 허둥지둥하기 바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시랑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예상외군. 적 화포병은 그래도 훈련을 꽤 잘 받은 정예인가?’

성벽 위에서 발사한 철구 상당수가 명 수군의 전선을 정확히 명중시키기는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바다로 쏘아올린 적 포탄은 소수.

애초에 나무로 만든 목선은 바닷물에 잠기는 흘수선 아래를 피격당하지 않는 이상 잘 침몰하지도 않는다. 함대로 날아든 것이 고작해야 철로 된 포탄 수십 발이 전부라면,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지휘관이 평정을 잃을 만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갑판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선체가 입은 피해는 적었다. 포탄을 직격당한 운 나쁜 병사를 제외하면 인명피해도 거의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어느 수군 장수도 그렇게 판단할 것이었다.

그래서 시랑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어, 오장(伍長)님, 이거 이상…….”

콰쾅. 쾅.

갑자기 있어서는 안 될 폭발음이 갑판 위에서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삐이익─ 갑작스러운 거대한 소음에 청각을 상실한 시랑의 양 고막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내 눈! 내누우우운! 으아아아악!”

“포탄이……. 포탄이 폭발했다!”

“내 손…… 내 손! 흐아아아악!”

폭발음 방향으로 돌아간 시랑의 시선 끝, 그곳에는 어느새 피바다가 되어버린 갑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일백 근 가까이 되어보이던 포탄을 치우려 힘을 쓰던 병사 하나는 상반신이 육편(肉片)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고통도 제대로 못 느끼고 숨이 끊어진 병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도우러 다가가던 병사 하나는 온몸, 그리고 두 눈에 파편이 박혀 피눈물을 흘리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걸레짝이 된 양팔을 든 채 울부짖으며 허우적거리던 병사는 어딘가에 발이 걸려 뱃전 너머로 모습이 사라졌다.

풍덩. 자신도 모르게 뱃전으로 다가간 시랑은 병사의 핏물이 붉은 염료처럼 바다를 물들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그의 허리춤을 끌어안고 몸을 던진 것은 그때였다.

“도독첨사님! 위험합니다!”

콰쾅! 바닥을 구르던 시랑은 그제서야 귀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통증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통증의 근원지로 떨리는 손길을 갖다 대 보니, 오른쪽 귀의 귓불 상당수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방금 폭발한 철구에서 나온 파편이라도 맞은 듯했다. 하지만 다행히 손에 묻은 붉디붉은 선혈이 전한 경고 덕분일까, 혼란스럽던 시랑의 정신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은 전황을 파악하고 함대를 움직여야할 때다.

지휘관으로서 임무를 자각한 시랑은 엎드려 있는 몸을 일으키려 시도했다.

“부관? 이제 일어나도 좋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랑은 여전히 그의 몸을 덮고 있는 부관의 신체가 단순히 축 늘어져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관? 부관!”

부관은 등에 커다란 파편 하나가 꽂힌 채 절명해 있었다. 그러나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의 몸을 밀어내고 겨우 상반신을 일으킨 시랑의 눈에,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 이건…….”

그의 대장선 갑판에서 두 번째로 폭발한 포탄은 파편만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포탄 안에 인화성 물질이 들어 있었는지, 파편과 함께 사방으로 튀어 온 갑판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돛대에 달라붙은 끈적한 액체가 자신을 태우며 나무를 갉아먹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랑의 귀에 다시 한번 예의 그 포성이 들려왔다.

“아…… 아아……!”

성벽 위에서 또다시 발사된 철의 빗방울들이 시랑의 함대를 향하고 있었다. 절망에 빠져 바다로 시선을 돌린 시랑의 시야에, 함대의 다른 전선들도 자신의 대장선과 다를 것 없는 상황에 휘말려있는 것이 들어왔다.

“이거, 설마…… 복송 그 자식이 나를 일부러…….”

**

“보고드립니다! 아군 안토니 요새를 공격한 오십여 척 규모의 적 선단과 상륙병 궤멸! 항복의 의사를 밝힌 적 지휘관은 신변을 구속했습니다!”

기쁜 소식이 전해진 젤란디아 요새, 총독의 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적에게 작지 않은 일격을 먹이고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안토니 요새에서 제압한 적은 정성공의 함대 중 일부. 승리에 취해있을 시간은 없고, 여전히 방심은 금물이다.

“보고드립니다! 적 주력함대가 하문 항을 떠나 팽호 제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때가 되었군요. 통제사, 그리고 선장.”

“예, 그렇습니다. 대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이완과 더 빌트를 바라보며, 나는 감정을 숨기려 애를 썼다. 어차피 앞으로 이겨내야 할 전투는 아직 산처럼 쌓여있다.

그것들을 전부 이겨내야, 오늘의 승리가 왕좌 교체의 신호탄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승리의 함성을 내지를 생각이었다.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너무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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