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47화 (247/298)

247화. 성장의 비결

뚜벅. 뚜벅.

옥좌 아래 서 있던 세자 이백은 천천히 신료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인정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박동하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한껏 긴장한 탓인지 피부에는 소름이 가득했다.

‘아버님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를 주셨구나.’

갑작스러운 조정 데뷔는 아니었다.

임금은 이미 조정에서의 논의를 통해 세자빈 책봉 건을 결론지을 것이라고 세자에게 예고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자의 세 치 혀에 달려있을 것이라 경고한 바도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신하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이 익선관을 쓸 수 있단 말이더냐. 네가 정녕 대업을 잇고 싶다면, 네가 그럴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만조백관 앞에서 증명해야 할 것이다.’

세자로 책봉받고 난 후, 임금은 부쩍 아들에게 엄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곧이어 임금은 자신의 심복을 스승으로 임명하고, 벗으로 붙여준 도령들과 함께 어른에게도 버거운 공부를 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이 익숙해질 즈음에는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보내기도 했다.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려웠지만 좋은 스승 밑에서 끈기 있게 배웠던 덕분에 학문은 일취월장했고, 위험을 감수해가며 방문했던 먼 나라에서는 평생 배필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났다.

‘스승님이 아니었다면…….’

임금이 세자에게 붙여준 조선 제일의 신하가 아니었다면, 세자는 이 경지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풋사랑을 멀리 네덜란드에 묻고 돌아왔어야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인생의 봄에 찾아온 불장난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공녀의 존재는 세자의 안에서 예상보다 더 커져 있었다. 공녀가 애정 어린 연인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자가 꿈꾸는 미래의 조선에 공녀의 혈통과 신분이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대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스승에게, 세자는 마음속으로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올렸다.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행적들이 무기가 되어 세자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으니까.

마침내, 세자가 옥좌 앞에 가슴을 펴고 당당히 섰다. 인정전 안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침묵이 지배하고 있었다.

“신료들은 들으시오. 나, 조선의 왕세자 이백은 세자빈 책봉에 관해 백관들에게 전할 말이 있소.”

***

세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네덜란드 방문기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의 웅변 안에 잘 정리된 핵심들은 듣는 이들의 눈앞에 발전된 네덜란드의 모습을 그려내기 충분했을 것이다.

짜식, 그래야지. 네가 누구 제자인데.

내가 몇 년 동안 세자를 가르쳤던가.

원자 시절 곁다리로 가르친 것을 제외하더라도 십 년을 족히 가르친 아이다. 조선 제일의 일타강사 과외를 그만큼 받았으면 이만큼은 해야지 않겠는가.

“……내가 직접 가서 눈에 담아온 것은 이 정도요. 하란타가 얼마나 부강하고 발전된 나라인지 잘 전해졌을 것이라 생각하오. 그리고, 하란타와의 교류가 시작된 이후로 변하기 시작한 조선의 상황은 조정 신료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

“지금부터는 방금까지 있었던 발언 중 사실관계가 잘못된 것들을 고치고자 하오. 지적은 언제든지 환영하겠소.”

긴장한 티가 아주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세자의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건네준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세자가 제대로 작성했다면, 앞으로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내 예상 질문과 달리, 공녀의 이국적 외모를 공격하는 몰지각한 신하는 없어 다행이었다. 하긴 그런 이야기를 잘못 꺼내 임금 앞에서 선이라도 넘었다가는 바로 좌천일 테니 당연한가. 덕분에 세자의 멘탈은 아직까지 튼튼해보였다.

“흐음…….”

옥좌에 앉은 임금에게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임금과의 약속은 어기지 않았다. 임금이 내게 금지한 것은 오늘 조회에서의 직접적인 개입이었으니까.

스승으로서 예상 질문을 뽑아 제자의 그룹 면접을 조금 도와준 것이 직접적인 개입은 아니지 않은가.

“우선, 하란타와의 교류가 조선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부정할 수 있는 신료가 있소? 없을 것이오. 당장 경들이 방금 마신 흑두차부터가 그들에게서 배운 기술로 만든 선박으로 실어온 것이니.”

“…….”

“하란타의 건축 기술을 받아들인 덕분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나루였던 벽란도는 커다란 항구로 변했소. 그들에게서 들여온 아마라는 식물은 사대부에게 가장 필요한 종이와 먹물 가격을 획기적으로 내려주었소. 이제는 백성들도 책을 접하기 어렵지 않을 지경이지.”

“……저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또한 경들은 오늘 조하에 참석해야 하는 시간을 어찌 맞추어 찾아왔소? 이제 시간을 알려주러 뛰어다니던 주시동이 일거리를 잃었지 않소? 하란타에서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라는 기계장치를 들여온 이후로 말이오.”

뎅. 세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궁궐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네덜란드에서 온 시계 장인이 설치한 시계탑이 한양의 시간을 책임진 것도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게다가 학문의 영역에서는 어떻소? 세자인 나조차도 서양인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기하원본’을 공부하고 있소. 내 듣기로는 일부 신료들 중에 하란타에서 들어온 ‘방법서설’이 유행이라던데?”

“그렇사옵니다, 저하. 신료들뿐만 아니라 유생들 사이에서도 난학을 접하지 않은 이가 없어, 서재에 난학 서적 한 권 갖추지 않은 이가 드물 지경이옵니다.”

네덜란드에서 조선 문화가 유행하고 있듯이, 한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조선에서는 네덜란드의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마치 원래 역사에서 서학에 대한 관심이 생기던 시절을 보는 듯했다.

특히 지금 조선에 유행중인 네덜란드 학문은 수학이었다. 그 이유는 선비의 육예 중에 수학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네덜란드를 오랑캐라 무시하던 선비들도 그들의 문물에 노출되면서 천천히 생각이 변해가고 있었다.

“가문에서 학당을 셋이나 운영하고 있는 영상 말이 그렇다면 틀리지 않겠지. 그 성근학당이라는 곳에서는 아예 난학을 따로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소. 내 말이 맞소?”

“예, 저하. 유형원이라는 뛰어난 교관이 난학에도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지라…….”

“전 산당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김집에게 감사를 해야겠소. 재능이 뛰어난 그의 종손자가 하란타에 머물며 그곳의 지식을 공부해 조선으로 보내고 있으니.”

레이던 대학에서 유학 중인 김만중의 이름이 세자의 입에 오르자, 반대의 중심이던 산당들 사이에서 잠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벗이 자랑스러운 것인지, 세자의 얼굴은 의기양양 그 자체였다.

김만중, 글 쓰는 기계 놈, 어떻게 그 와중에 소설까지 써서 보낼 여유가 난 거지?

현지에서 햇수로 4년 넘게 공부를 한 결과, 만중은 꽤 훌륭한 학문적 성과를 거둔 모양이었다. 현대에 태어났으면 좋은 대학원생 감이다.

“그리고, 내 배필로 논하고 있는 하란타의 공녀는 이렇게 조선에 이익이 되고 있는 하란타와의 교류를 더욱 촉진시켰소. 공녀가 온 이후로, 그저 논밭과 초가집만 늘어서 있던 서소문 밖이 단 몇 년 만에 운종가를 능가하는 거리로 탈바꿈한 것은 경들도 잘 알겠지.”

“…….”

“수백 호 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하란타 정착촌은 어떻소? 처음 공녀와 함께 도착한 일백 호 남짓한 정착민들만 내수사에게 도움을 받았지, 그 이후로는 공녀 스스로의 힘으로 마을의 규모를 키워 나갔소. 그곳에서 생산한 물품이 지금 도성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소?”

“아마도 난품(蘭品, 네덜란드 물품)에 손대지 않은 사대부와 백성이 적을 것이옵니다, 저하.”

“그럴 것이오, 영의정. 당장 그들이 들여와 퍼져나간 소와 돼지, 닭 덕분에 고기와 달걀, 우유를 구하기 쉬워지고 고기가 필요해 농우(農牛)를 도살하는 일도 줄었지 않소? 게다가 하란타촌에서 생산하는 물품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을 터.”

세자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마 지금 가슴이 뜨끔하고 있을 신료는 꽤 있을 것이다.

당장 세자빈 책봉을 앞서서 반대하던 윤선거부터가 네덜란드 정착촌의 공방에서 만든 회중시계를 차고 있는 것을 내가 몇 번이나 봤는데.

“하오나 저하, 소신들은 하란타에서 얻은 이득을 몰라서 책봉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일단 이방인을 세자빈으로, 그리고 국모로 맞는다는 것이 전례가 없지 않사옵니까.”

관복 가슴을 더듬어보던 윤선거가 정신을 차렸는지 그제서야 세자의 말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회중시계, 오늘도 차고 온 모양이다.

“전례는 있소.”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 소신이 알기로는 태조대왕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후로 그랬던 적이…….”

“종묘에 모셔진 왕비 중 외국인 신분으로 그 자리에 올라 친정을 적으로 돌려 가며 임금의 개혁책을 뒷받침하신 분이 분명 계시오. 대사헌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오.”

“그런 분이 계시옵니까? 소신은…….”

그때, 산당의 신료 하나가 재빨리 윤선거의 곁에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송시열 아래에 있는 예조의 관리였다. 윤선거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종묘에 모셔진 건은 대사헌쯤 되는 이도 모를 만한 이야기였나. 외진 신당에 영정만 모셔져, 일 년에 두 번 조촐한 제사를 올릴 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긴, 임금도 잘 모르는 이야기였었지. 적지 않은 신료들이 윤선거와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세자의 공격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저하, 종묘에 모셔진 그분은 전조의…….”

“전조의 임금이셨다고는 하나, 태조대왕께서 업적을 인정해 따로 신당을 차려 모신 분이오. 혹여나 대사헌이 태조대왕의 뜻마저 거역할 생각은 아닐 것이고.”

“저하, 신이 감히 그런 불충한 생각을 품었겠사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윤선거는 세자를 얕봐도 너무 얕보았다.

아무리 세자가 정치판에 처음 발을 들였다지만 저 정도로 크게 보인 빈틈을 찌를 기량 정도는 있었다.

가르친 스승이 누군데, 엣헴.

임금도 비슷한 생각일까 하여 용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임금은 겨우 표정을 다잡고 있었으나, 입꼬리 한 쪽이 슬며시 치켜 올라가는 것만은 막지 못했다.

“그리고, 공녀가 하란타를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염려 역시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소. 방금 내가 했던 이야기 중에 하란타 공이 반정을 일으켰을 때,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혔던 대목을 기억하시오?”

“예, 저하. 저기 있는 좌찬성 안한수가 구출 작전을 성공한 덕분에 대군이 풀려났다 말씀하셨사옵니다.”

“그때 하란타 공의 편을 들지 않고, 좌찬성과 접촉해 중대한 정보를 건네준 것이 헨리에트 공녀요. 그 정보가 없었으면 대군을 비롯한 인질의 구출은 쉽지 않았겠지.”

“……!”

“목격자도 한둘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대군, 대군의 여덟 호위병, 하란타로 파견했던 총통위 병사들까지 그 일을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니. 이제 공녀가 조선의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것이라 말할 수 있겠소?”

무어라 말을 더 꺼내려던 윤선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의심하려 들면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일국의 세자가 이 정도의 명분을 꺼내들었음에도 의심을 거두지 않는 것은 명백한 불충의 증거가 될 것이다. 윤선거도 알고 있겠지.

“덧붙여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하란타가 그런 공녀를 매개로 해 조선에 영향력을 뻗친다? 그것 또한 올바른 추측이 아니라는 것을 대사헌도 이제는 깨달았으리라 생각하오.”

침묵이 도는 인정전 안을 찬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이 침묵은 명백히 세자가 만들어낸 침묵이었다.

“공자께서는 함께 앉아 말하기도 꺼리던 호향(互鄕)에서 온 이에게도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푸셨소. 그리고 사람의 지난날 모습에 연연하여 그것을 가슴에 담지 말라 가르치셨소.”

“불보기왕(不保其往)의 고사…….”

“하물며 공녀가 온 하란타는 호향처럼 악한 자들이 들끓는 고장도 아니오. 게다가 공녀는 담아두지 못할 과거를 가지기는커녕 자신의 위치를 걸고 조선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엄격한 기준 아래 치러진 간택을 통과하기까지 했소.”

“…….”

“조선에 도착하고 짧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조선말을 하고 조선의 음식을 먹으며 조선의 의복을 입는 사람이오. 그런 사람을 출신과 외모만을 보고 반대하는 것이 어찌 공맹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단 말이오?”

세자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뒤이어 세자가 내뱉은 더욱 묵직한 목소리가 인정전을 울렸다.

“내 경들에게 묻겠소. 그렇다면 조선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경계를 무엇으로 삼아야 옳겠소? 머리칼의 색? 눈동자에 비치는 빛깔?”

“…….”

“반역을 저지르고 압록강을 넘어갔다 정묘년과 병자년에 앞잡이가 되어 쳐들어온 한윤과 정명수는 분명 조선 출신이오. 그러나 그 반역자들을 경들은 조선인이라 이를 수 있소?”

“…….”

“두 임금에 걸쳐 온갖 고생을 해가며 오늘날의 원양수군에 이바지한 원양우후 박연은 하란타 출신이오. 그러나 그의 머리칼과 눈동자색이 다르다고 하여 그를 조선인이 아니라 이를 수 있소?”

“…….”

“같은 피가 흐르나 조선을 버리고 타국을 마음에 품은 자, 겉모습이 달라도 주상 전하를 진심에서 우러나 섬기며 조선의 풍습과 도리를 따르는 자. 경들은 그중 누구를 진정한 조선인이라 여기시겠소?”

뒤이어 세자의 입에서는 사기(史記)의 한 구절이 흘러나왔다.

이모취인(以貌取人). 제자인 담대자우(澹臺子羽)의 흉한 외모 탓에 공자가 잘못된 편견을 가졌던 과거를 후회하고 반성하는 구절이었다.

임금이 용상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도 표정이 흐트러졌었는지, 송시열이 옆구리를 꾹 찌르더니 표정 관리를 하라며 손짓을 보내왔다.

“그리고 대사헌이 태조대왕의 언급을 하였는데, 태조대왕이야말로 출신과 외모를 상관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신 분이었소. 그분의 의형제인 이지란 장군부터 시작해, 저 멀리 고창국(高昌國, 위구르)에서 온 색목인까지도 판서에 임명할 정도셨으니.”

“…….”

“위대하신 태조대왕께서도 그리하셨는데, 하물며 후손인 내가 태조대왕의 전철을 밟지 않아서야 되겠소? 대사헌은 어찌 생각하시오?”

***

“하, 하하, 하하하하하!”

조회가 끝나고 나를 편전으로 부른 임금은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들의 성장이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었다.

“이것 봐라, 한수야. 조선의 다음 대 옥좌도 튼튼하기 이를 데가 없지 않느냐?”

“신하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일 것입니다. 양대에 걸쳐 다루기 어려운 임금을 섬기는 것만큼 고달픈 일도 없을 것인지라.”

“세자가 제대로 성장했구나. 아주 큰 성장을 해냈어! 역시 네게 맡기고 하란타로 견학을 보낸 것이 유효했구나. 하하하하!”

물론 약관 열아홉의 세자가 대사헌 윤선거의 주장을 일시에 논박했다고는 하나, 세자빈 책봉은 이대로 끝날 작은 일이 아니었다.

아마 다음 논쟁 때는 반대파에서 새로운 논리를 들고 올 것이다. 안 그래도 세자에게 논박당한 후 화번공주 이야기까지 들먹이며 네덜란드를 의심하던 이들이었다. 중국에서 이민족들에게 황족의 여자들을 정략결혼 시켰듯, 네덜란드도 따로 품은 저의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그들은 네 벗이 꺼낸 조강지처 이야기를 완전히 반박하지 못했지. 하긴, 예조참판 김좌명쯤 되는 이가 조강지처 이야기를 꺼내면 조선에서 누가 반박할 사람이 있으랴 싶다만.”

“일정의 처는…… 아닙니다, 전하. 하오나 아직 세자빈 책봉에 관한 논쟁이 끝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 앞일을 낙관하시는 것은 아닌지…….”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자가 스스로 반대파들의 선봉을 꺾어놓았다는 것. 나는 아비 된 입장에서 최대한 이번 일을 긍정하고 싶구나.”

본디 한 번 기세가 꺾이면 되돌리기 어렵다. 결국 그날 논쟁은 수가 적은 산당이 일단 꼬리를 내리며 막을 내렸다.

아마 이런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헨리에트 공녀는 원하던 세자빈 자리를 거머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강력한 왕권을 쥐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임금이 지금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으니까.

“전하, 기뻐하셔야 할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저하가 활약해주신 덕분에 두 번째 논쟁이 벌어졌을 때, 저와 예판도 꽤나 일이 편해졌으니까요.”

“참으로 교활하구나. 세자에게서 네 입김이 강하게 느껴지더니, 그런 계획을 언제 짜냈었단 말이냐.”

“적의 세력이 약해지도록 유도하고 때를 노려 치는 것이 병법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기본 중의 기본을 해냈을 뿐입니다.”

임금이 입가에 띤 미소가 짙어졌다.

오늘 세자빈 책봉 관련 논쟁이 끝나고 내가 얻은 결과를 보면 임금도 뱃속이 든든할 것이다. 아니, 그 사이 우유에 설탕까지 잔뜩 탄 커피를 몇 잔이고 드셨으니 당연한가.

반대파들의 힘이 빠진 사이, 나와 송시열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걷는 호포제 시행에 관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 은자를 잔뜩 투자한 덕분에 곡식 생산량이 잔뜩 늘었으면, 이제 양반 지주(地主)란 자들도 조금은 뱉어낼 때도 되지 않았는가.

명분도 명료했다. 점점 바다를 통한 무역이 활발해지고 있으니 교역선을 지키기 위한 함대를 늘릴 필요가 있다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산당의 거두 송시열에게 내수사 예산이라는 약간의 당근을 쥐어주고 미리 포섭을 성공한 결과이기도 했다.

“좋다. 그렇다면 계획대로군. 이대로 벽란선 위주로 전선을 늘리고, 하란타에서 초빙한 화포 장인들을 통해 충무포를 개량, 발전시킨다. 이제 날개 꺾인 이무기에게 바다를 더 이상 맡겨둘 필요는 없을 테니까.”

“전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란타와 같은 배를 탄 이상, 언젠가는 부딪힐 상대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선은 충분히 그럴 만한 역량을 가지게 되었고요.”

“그래. 그 주성공이라는 자에게 불리한 교역을 강요당한지가 몇 년 째더냐. 대국이면 대국답게 굴어야 대국 대접을 받는 법이다. 이제는 우리가 품고 있던 뜨거운 맛을 보여줄 때도 되었다.”

임금의 힘 있는 손끝이 동아시아가 그려진 지도를 천천히 짚어나갔다.

제주 성산항에 처음 내리찍은 임금의 손끝은 대만 남부의 젤란디아 요새를 거쳐, 대만 해협 반대편의 대륙까지 나아갔다. 그 행동에 실린 뜻은 명확했다.

“이제부터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중원이 둘로 쪼개졌다지만, 이제부터는 이 나라 조선의 역사상 처음으로 천명을 거스르는 일이 될 테니까.”

***

그 후로 몇 번의 사계절이 흘러갔다.

그렇게 바람이 잔잔해지는 계절이 왔을 즈음, 대만에서 달려온 예성선 하나가 급한 소식 하나를 풀어놓았다.

대만 섬 남부에 설치된 조선의 행정구역, 오륜(五倫)현에서 보내온 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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