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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38화 (238/298)
  • 238화. 카간의 시험

    뚜벅, 뚜벅.

    화려하게 조각된 돌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자금성에 한두 번 와본 것도 아니었지만, 확실히 자금성의 수많은 전각 중에서도 중화전은 특이한 건물이었다.

    보통 자금성의 다른 전각들은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화려하게 꾸민 건물이 대다수였다. 허나 중화전은 일반적인 전각과는 달리 장식이 제한된 데다, 정전인 태화전의 뒤에 숨은 것처럼 위치해 있었다.

    그래, 내가 방금 내관의 안내를 받아 발을 디딘 이곳 말이다.

    이곳 중화전은 황제가 나랏일을 보는 사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중요 인물을 접견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 황제가 머무는 곳이라기에는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다.

    “……침입해온 나선 병력의 수는 적었으나, 놈들이 가지고 온 무기는 확실히 뛰어났습니다. 특히 나선의 총기와 병선 때문에 애를 먹었는데, 카간께서 보내주신 원군 덕분에 놈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총기와 병선이 특히 뛰어났다?”

    “예, 카간. 놈들은 줄지어 서서 일제히 조총을 쏘는 전술을 써 아군 기병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게다가 놈들이 쓰는 조총은 불발도 적고, 사격 간격도 짧아 도저히 제 병력만으로는 상대가 어려웠습니다.”

    “흐음…….”

    “그리고 적의 병선은 거대해 남쪽에서 한조 놈들을 상대하는 우리 군선 없이는 정면승부가 불가능했습니다. 현지에서 징발할 수 있는 배는 조각배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관의 안내를 받아 중화전에 발을 들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건물 안을 울리고 있었다. 태세전환이 특기인 우리 암반 장긴께서 혀에 기름칠을 한 것처럼 러시아 원정대를 상대로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관이 크지 않은 목소리로 내 입실을 알리는 와중에도 그 보고는 끊어지지 않았다. 옥좌에 기대앉은 소년은 눈을 감은 채 샤르후다의 보고를 듣고 있었고, 샤르후다 역시 이쪽을 흘긋 바라보더니 하던 말을 계속했다.

    “마침 그 전투의 주인공이 들었습니다, 카간! 저기 오는 아르가투 장긴이 본인이 데려온 정예병과 신묘한 전략을 써서 나선 놈들을 한 방에 뿌리까지 뽑아낸 사람입니다.”

    그래도 약속은 지키는 사람인가. 샤르후다는 카간 앞에서 내가 세운 전공들을 열을 올려가며 증언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러시아 원정대와의 첫 교전에서 어처구니없이 많은 전사자를 냈던 일을 내가 세탁해주긴 했다. 적을 유인하는 과정과 공성전에서 희생이 발생한 것처럼 보고서를 꾸며주었던 것이다. 그 은혜를 샤르후다는 혀를 놀려 열심히 갚고 있었다.

    “아르가투……. 지략…….”

    “예, 맞습니다, 카간! 말 그대로 눈부신 지략이었습니다! 별동대를 이용해 적 병선을 무력화하고, 몇 겹이나 포위망을 쳐서 놈들의 군세를 단숨에 쳐낸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샤르후다의 급박한 보고와 대조되는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어있던 소년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그의 처진 눈꼬리와 반쯤 감긴 눈꺼풀에서 홍타이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모양이군.

    방년 16세의 순치제를 제대로 마주한 것은 이 자리가 처음이었다. 개선식 자리에서는 높은 단 위에 위치한 그를 멀리서 지켜봤을 뿐이니까.

    “알았다. 닝구타 암반 장긴 구왈기야 샤르후다. 그동안 있었던 일은 이제 충분히 증언을 들은 듯하니, 이제 물러나도록.”

    “예, 카간! 이런 기회를 주신 점, 백골난망입니다!”

    신이 난 샤르후다는 순치제를 향해 넙죽 절을 올리더니, 재빨리 중화전을 빠져나갔다. 내 옆을 지나가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한 것을 보니, 자신의 실책이 완전히 덮여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었다.

    “가까이 오라.”

    변성기가 갓 지난 듯한 황제의 목소리가 중화전 안을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방금 샤르후다의 신명난 보고에 마지못해 대꾸하던 것과는 달리 힘이 가득 담겨 있었다.

    “타스하 잘안 장긴이자 바투루 안 아르가투. 고려에서는 종일품 좌찬성이라…… 상당한 고관이로군. 그런 고관을 고작 군사 오백과 함께 타국으로 보냈다…….”

    “…….”

    “타스하 잘안은 양백기 휘하의 잘안이니, 양백기의 구사 어전인 숙부의 요청이었겠군. 그래, 방금까지 숙부는 잘 뵙고 왔느냐?”

    “……알고 계셨습니까?”

    “자금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짐을 거쳐야 한다. 숙부가 누구를 만나는지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내가 도르곤을 만나러 갔던 일마저 순치제의 감시망에 올라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메마른 말투에서, 도르곤을 향한 경계심과 적의가 살짝 엿보였다.

    “짐이 너를 왜 따로 불렀는지 알고 있나, 타스하 잘안 장긴.”

    “첫 번째는 나선 놈들을 토벌한 일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들으시기 위함이겠고, 두 번째는 짐작이 가지만 섣불리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카간. 그리고…….”

    “카간이라…… 다이칭 구룬을 뜬 지 오래된 자에게 여전히 황제 폐하가 아닌 카간으로 불릴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저는 더 이상 타스하 잘안의 장긴이 아닙니다. 방금 섭정왕에게 장긴의 인수와 함께 명목상으로나마 남아있던 모든 직위를 반납했습니다.”

    “호오…….”

    자신이 지시한 일인 주제에, 순치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아비인 홍타이지와는 달리 내심을 알기 어려운 반응.

    코흘리개 시절부터 권력의 중심지인 자금성에서 황제로 키워졌을 테니 저런 신중한 태도도 이상하지 않다.

    “좋아. 어느 정도 머리가 빠르게 도는 모양이군. 하긴, 그러니 아버님께서 고려 출신의 볼모를 그리 중용하신 것이겠지.”

    “…….”

    “너도 고려국에서 그 정도 벼슬에 오른 자이니, 현재 다이칭 구룬 내부의 상황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짐과 숙부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도. 맞느냐?”

    아직 성장을 덜 끝마친 순치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의 몸처럼 완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청제국의 황제이자 카간답게 상대방을 휘어잡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화전의 낯선 분위기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빈틈을 찔러온 순치제의 칼날은 제법 매서웠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저 칼날은 정말로 실체화되어 나를 노릴지도 몰랐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짐의 부름에 순순히 응했다는 것은 조금 예상 밖이군. 너는 방금 샤르후다처럼 단순히 권력을 쫓는 자인가, 아니면…….”

    “…….”

    “과거 짐을 카간 자리에 올리는 데 기여했던 것처럼 또 다른 쓸모를 증명할 것인가.”

    말을 맺음과 동시에 황제의 손끝이 허공을 갈랐다.

    딱. 그의 손끝에서 퉁겨진 거친 마찰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샤르후다가 나섰던 문으로 일단의 무리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인솔자는 이미 면식이 있는 이들이었다.

    “자, 그럼 우선은 나선 놈들을 쓸어버린 일에 대해서 들어보기로 할까. 짐은 방금 그 무능한 암반 장긴이 하는 말을 전부 신뢰할 수는 없었거든.”

    “무능한 암반 장긴…….”

    “놈의 병력만으로 대등한 전투가 가능했다면 숙부가 고려로 원군을 요청했을 리가 없지. 뭐, 지방군은 그 정도로 멍청해야 된다는 숙부의 판단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지만. 놈들이 혹여나 감히 짐에게 반기라도 들면 곤란하지 않겠더냐?”

    “…….”

    “고작 암반 장긴의 헛소리가 짐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놈의 보고는 미세하게 앞뒤가 맞지 않았거든. 너는 놈과 다를 것을 기대하지. 고려국 좌찬성, 안한수.”

    방금 중화전으로 들어선 이들은 내가 흑룡강 유역에서 포로로 잡은 러시아 원정대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인솔해 들어온 사람은 익히 얼굴을 아는 아담 샬과…… 개선식 자리에서 내게 따가운 시선을 날렸던 낯선 남자였다.

    “아,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겠군. 네게도 아버님께서 내려주신 만주족 이름이 있는데, 다이칭 구룬 안에서는 너를 만주족으로 대우해야 하지 않겠나? 유일하게 바투루 칭호를 받은 고려인에게 내가 실례를 했구나.”

    “……선대 카간과 카간의 은혜가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그럼 아르가투, 네가 이 침입자들을 어떻게 요리했는지 상세히 보고하도록. 내가 어느 부분에 관심이 있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러시아 놈들과의 전투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브리핑이라도 하라 이건가. 그걸 듣고 내가 순치제 당신에게 어떤 쓸모가 있을지 판단하시겠다?

    이거 참, 우리 세자보다 두 살이나 어린 주제에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이미 카간 다운 솜씨가 아닌가. 귀국하거든 세자에게 제왕학을 더 빡세게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포쿨룸 미히 크러스툴룸 데디트, 파툼 둘세 크러스툴룸.”

    “안 장긴이 이 자에게 이상하게 생긴 달콤한 반죽 한 그릇을 지급해왔답니다. 포로의 처우에 관한 건은 이상입니다.”

    왜 아담 샬이 이 자리에 왔나 했더니, 러시아인과의 통역을 위해 불려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독일인과 러시아인 사이에 말이 바로 통할 리가 없었다.

    아마도 저들 사이에서 오간 대화는 라틴어일 것이다.

    후대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을 때도 청과 러시아는 북경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를 불러 라틴어로 의사소통을 했다던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 생긴 달콤한 반죽이라?”

    “낙화생(落花生, 땅콩)을 갈아 만든 저희 군대의 전투 식량입니다. 포로들에게도 같은 것을 지급했습니다.”

    입을 삐죽거리는 저 러시아 놈은 땅콩 범벅을 지급받은 것이 행운인 줄 알아야 한다. 원 역사대로였으면 콩밥에 간장, 그리고 김이 포로에게 지급하는 식량의 전부였을 것이다.

    “아무리 잘 볶더라도 낙화생에서 그리 달콤한 맛이 나는가?”

    “군사는 늘 많이 움직여야 하니 잘 먹어야 하는 법입니다. 때문에 힘을 낼 수 있는 사탕(砂糖, 설탕)을 반죽에 넣었습니다. 아국에서는 이것을 땅콩 범벅이라 부릅니다.”

    덧붙여 설탕을 넣은 덕분에 보존 기간도 길어지지만, 순치제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이미 황제의 머릿속은 그간 포로에게서 들은 증언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고작해야 말단 군사에게 주는 식량에 그런 공을 들여……? 게다가 그걸 포로에게도 지급했다?”

    “낙화생은 키우기 쉽고 수확량도 많은 데다, 여기에 들어가는 사탕의 양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두 가지는 아국에서 자급하고 있으니 그리 큰 비용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선 놈들을 손쉽게 처리한 강군을 만들어낸 것은 오롯이 네 재주였군. 무장부터 훈련, 식량까지 전부 네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지 않은가.”

    순치제는 한껏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담 샬과 함께 들어온 낯선 남자에게, 중원에서 땅콩은 기름이나 짜고 버리는 작물이라는 대답을 들은 후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러시아 포로의 심문은 끝이 났다.

    황제는 북만주에서 벌어진 전투의 내용을 샅샅이 캐냈고, 그 결과 내게 품었던 궁금증을 싹 해소한 듯했다. 내가 북만주에서 러시아 세력을 싹 몰아낸 결과, 네르친스크 조약이 원 역사보다 빨리 맺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긴, 숙부가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조총수들도 네 작품이었다고 했었지. 다른 구사 어전들은 화기 개량에 그리 큰 관심이 없지만 말이다.”

    “예, 그렇습니다.”

    “뭐, 짐은 숙부처럼 조총수 부대에 집착할 생각은 없다. 회수 너머 한조 놈들을 치는 데 필요한 화력은 화포수들이면 충분하거든. 허나, 아버님께서 네게 만주족 이름과 바투루 칭호를 내린 이유는 알 것 같군.”

    어린 황제도 일반적인 만주족들처럼 화약무기를 경시하는 쪽인가. 하긴 도르곤도 타스하 잘안을 특수부대 수준으로 운용했을 뿐 자신의 군대 전체에 호총을 보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순치제는 홍타이지가 그랬던 것처럼 내 발목을 잡으려 들지는 않을지도. 나는 반드시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돌아가야 했다.

    천천히 옥좌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는 황제 앞에서, 입 안이 말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숙부가 고려로 보낸 지 십 년이 넘은 옛 부하에게 그리 집착하던 이유도 알 것 같군. 군략, 통솔, 육성, 내정까지, 확실히 탐나는 인재긴 하다.”

    “…….”

    “이것으로 지금까지 아르가투라는 장긴이 쓸모 있는 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겠다. 그럼 남은 의문은 이제 하나뿐.”

    황제가 보낸 손짓을 따라, 러시아 포로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사내가 옥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눈동자가 보일 듯 말 듯한 그의 찢어진 실눈에서 나를 향한 강한 경계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여기 구왈기야 씨족의 오보이를 소개하지. 양황기의 바야라 장긴(정예특수부대 지휘관)이자 짐의 심복 중 하나로, 앞으로 네가 하는 대답을 짐이 판단하는데 도움을 줄 자다.”

    “구왈기야 씨족의 오보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아, 하긴 방금 샤르후다라는 그 멍청이와 같은 가문이니, 그 입 가벼운 놈이 이미 정보를 흘렸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순치제는 한껏 오보이를 치켜세웠다.

    이번 사천 정벌에서 그가 적의 수괴 장헌충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며 자랑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정말로 아끼는 심복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내게도 익숙했다.

    샤르후다에게 들은 이름이어서가 아니라, 썩 좋지 않은 쪽으로 청나라 역사에 남은 이름이었기에.

    “그럼 너는 이 질문에 대답하라. 앞으로 안 아르가투라는 고려인이 앞으로 짐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또한 너는 고려국의 실세라 들었다. 마찬가지로 네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고려는 다이칭 구룬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황제의 옥좌 옆에 선 오보이는 숫제 꿰뚫겠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자가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다면, 아마 앞으로 크나큰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겠군.

    “답할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을 것이다. 짐은 곧 히오완예이를 보러 가야 하거든.”

    순치제는 나를 향해 빙긋이 미소 지었지만, 웃음기 가득한 입가와는 달리 그의 눈가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내가 이곳에 신경을 쓰지 못하던 사이, 청나라의 17세기 후반부를 이끌어나갈 인물들은 어느새 무대 위로 올라와 있던 모양이다.

    이거, 사태가 재미있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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