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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37화 (237/298)
  • 237화. 섭정왕의 진심

    “책임을 지다니요. 그리고 전하께서 잘못되신다니요?”

    “네가 들은 그대로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도르곤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형 홍타이지에 대한 충성심만 제외하면 누구보다 야심에 가득 차 있었고, 누구보다 정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의 젊고 진취적인 예친왕은 온데간데없고, 내 앞에는 천천히 스러져가는 사내 한 사람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형님이 그러하셨듯이, 내 수명은 내가 알고 있다. 어떻게 카간께서 장성하실 때까지 간신히 버텨왔긴 하나,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도르곤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내 이성은 그의 말이 옳다며 편을 들고 있었다.

    이미 원 역사보다 4년을 넘게 더 산 사람이다. 내가 심양에 있던 시절부터 도르곤은 늘 만성피로를 호소해왔다. 나랏일 때문에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가해진 몸이 멀쩡할 리가.

    “너도 느끼고 있는 게냐. 내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

    “그래. 너는 내 곁에 있을 때도 늘 미래를 보는 것처럼 움직였었지. 내 수명을 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닙니다.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섭정왕께서 살아가실 날은 앞으로도 무궁…….”

    “그만. 말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 너는 늘 이런 거짓말에는 서툴렀었지, 아르가투.”

    함께 만주와 화북을 내달리던 그 시절을 도르곤은 되새기고 있는 듯했다. 잠시 허공을 떠돌던 도르곤의 눈동자는 이윽고 다시 내게 내려앉았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네가 고려로 떠난 이후 내 존재 따위는 아주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나를 위해서 이 창칼이 득시글거리는 자금성 조정에 뛰어들 각오까지 보여주다니.”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섭정왕 전하.”

    “안다. 방금 한 거짓말과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다르지 않느냐. 카핫.”

    마른기침을 연이어 뱉은 도르곤은 입가를 닦더니 옆에 있는 주전자를 집어 올렸다. 인삼 향이 나는 것을 보면, 아마 장복하고 있는 약인 모양이었다.

    “네가 준 선물 중에 서역에서 새로 들여온 차도 있는 모양이던데, 그걸 맛보지 못해 아쉽다. 내 이것이 없으면 몸에 힘이 돌지 않아서 말이다.”

    “흑두(黑豆)를 달인 차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말로는 커피라 부르는 물건인데, 건강한 이의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는 있어도 섭정왕 전하의 몸에는 해로울지도 모릅니다. 드시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선물로 가져온 것을 보면, 너도 내 상태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은 하늘이 정하시는 일이다. 나는 형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온전히 해냈고, 카간께서는 늠름하게 장성하시어 이제 내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 갈 정도로 성장하셨다. 더 어떤 미련이 남겠느냐.”

    “하지만…….”

    “너도 앞으로의 일을 예상하고 있으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겠지. 안다. 내가 죽으면 카간께서는 곧바로 나를 역적으로 만들고 내 모든 것을 부정하실 것이다. 그래야 카간 자신의 권위가 살아날 테니까. 나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

    “안타까워하지 마라. 권력이란 원래 그만큼 냉정한 것이다. 너도 고려에서 수없이 겪지 않았더냐? 내게 뒤를 이을 자식이 있었다면 저항이라도 해보았겠지만……. 하늘께서 후계를 점지해주지 않으셨으니 그런 미련조차 남지 않는구나.”

    이것도 하늘이 인도하신 것인가.

    바짝 마른 도르곤의 입술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마 그는 천천히 자라나는 순치제가 언젠가는 넘어야 할 장애물 역할을 충실히 해온 모양이었다. 카간을 자신에게 기대기만 하는 존재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짓밟고 일어서 진짜 우두머리로 거듭나도록 만드는 역할을.

    그렇지 않고서는 도르곤의 지금까지의 행적을 설명할 수 없었다.

    헌데 도르곤은 어째서 아이신기오로 푸린, 순치제에게 이토록 헌신하는가.

    형 홍타이지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고만 해석하기에는 무언가 동기가 조금 모자랐다.

    설마, 야사로 전해지던 금단의 로맨스가 원인은 아니겠지, 설마.

    “미련은 남지 않지만……. 내가 떠나고 나면 비빌 언덕이 없어질 사람이 마음에 걸린다. 그러니 네게 내 딸과 아내를 부탁하는 것이다.”

    “전하…….”

    “재물 모으기만 좋아하던 친형도, 싸움만 잘하던 친동생도 이미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형제들의 자식들은 그들만큼 미덥지도 않다. 그러니 굳이 내 혈육 중 네 나라와 관련이 있는 두 사람만이라도 책임을 져 달라 부탁하는 것이다.”

    “……그 정도쯤이야 은혜를 입은 입장에서 당연히 받들어야 하는 명령입니다. 부탁이라 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아르가투.”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도르곤의 여식은 고작 열일곱 살이다. 설마 그의 어린 딸을 아내로 맞으라는 부탁은 아닐 테고.

    “그러나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으마. 내 정무에 몰두하느라 그동안 딸에게 적당한 혼처도 찾아주지 못했다. 허나 내가 떠난 후 끈이 떨어질 혼혈 여식에게 제대로 된 혼처가 주어지겠더냐? 하지만 너라면…….”

    “저도 이제 딸아이가 있는 몸입니다. 전하의 마음, 어떤지 저도 이제 알 수 있습니다.”

    “젠장, 정 남편감이 없으면 네가 그 아이를 정복진(정부인)으로 삼아도 좋다 말하려 했건만, 그렇게 선수를 치는 것이냐. 하긴, 그렇게 되면 너는 고려를 버리고 다이칭 구룬에서 내 모든 기반을 이어받아야 할 테니 절대 택하지 않을 길이겠다만.”

    분위기에 눌려 꽉 막혀있던 숨통을 틔우려는 듯이, 도르곤은 가벼운 농담을 던져왔다.

    그러나 내게는 그 농담이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나이만 더 맞았더라면, 내게 조선을 향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적었더라면 도르곤은 실제로 이 방법을 시행하고도 남았을 사람이다.

    “물론 그런 것은 원하지 않겠지. 아니면 또다시 과부가 된 마카타라도 대신 책임을 지겠느냐?”

    “황녀 자가는…… 잘 계십니까?”

    “그럴 리가. 네놈이 녀석을 버리지만 않았어도 더 행복할 수 있었던 녀석인데……. 됐다, 이제 더 말해 무엇 하겠느냐. 그렇다고 지나간 과거를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냐.”

    품에서 반쯤 삐져나왔던 비단주머니를 다시 깊숙이 눌러 넣었다. 잘안 장긴의 인수를 반납한 후 돌려주려던 황녀의 머리끈이 담긴 주머니다.

    이렇게 되면 도르곤에게 차마 이걸 대신 전달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 무거운 마음은 어찌해야 하는가.

    그런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도르곤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저 안쓰러워하는 표정은 황녀를 향한 것인가.

    “그리고 두 번째, 앞으로 비빌 언덕이 없어지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또 있다.”

    “곤란해지는 사람이오? 제게 또 부탁하실 사람이 있는 것입니까?”

    도르곤에게서 뜬금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도르곤의 주변인 중에 조선과 관련된 사람이 또 있었던가?

    그러나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보았음에도 딱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런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약을 한 모금 더 삼킨 도르곤은,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바로 너다. 아르가투.”

    “제가…… 말씀이십니까?”

    “내가 가거든 보호해 줄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너와 고려 왕실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이번에 너를 굳이 명분을 만들어가며 북경으로 부른 이유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전하…….”

    “북경에 온 김에, 나 말고도 네 방패가 되어줄 사람을 찾아라. 개선식 자리에서 보아하니 현 카간도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던데, 이젠 내게서 줄을 갈아타도 상관없다.”

    나를 불러들이려고 러시아와의 전투에 조선군을 끌어들인 것이었는데, 그 전투에서 세운 전공이 오히려 카간의 시선을 끌어버렸다며 도르곤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성적으로 계산하면 도르곤의 제안대로 행동하는 것이 맞다. 원 역사에서도 순치제는 도르곤이 죽은 후 반항하는 그의 수하들을 처리하고 도르곤을 역적으로 몰아 모든 칭호와 권한을 삭탈했다.

    그러나…… 도르곤과 나 사이에 쌓인 인연은 그렇게 칼같이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양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도르곤이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무역이 이토록 흥할 수 없었을 테니까.

    “누가 그랬던가, 고려 반도는 중원의 옥새와 같은 존재라고. 카간은 영리한 사람이니, 한때 내 줄을 탔었다는 이유로 너와 고려 조정을 박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로부터 들어오는 교역품은 이제 무시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고.”

    “하지만……. 전하께 그리 은혜를 입은 제가 감히…….”

    “쥐새끼도 침몰하는 배에서는 몸을 피하는 법인데, 하물며 귀한 인재인 너를 그대로 둘 수 있겠느냐? 너보다 나를 더 오래 섬긴 수하에게도 같은 말을 이미 남겼다. 그러니 아르가투 너도 순순히 내 뜻을 따르도록 해라.”

    나라 숙사하(納喇 蘇克薩哈)라는 부하에게도 이미 순치제를 섬기라는 명령을 내렸다며, 도르곤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무거운 말을 전하는 그의 낯빛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 오히려 이 명을 들었다는 것에 너는 자부심을 느껴야 할 것이다. 내 수하 중 쓸모가 적은 놈들은 카간의 분풀이 대상이 되도록 남길 생각이니까. 대들보와 서까래의 대접이 같아서는 아니 되는 법.”

    “…….”

    “그리고, 앞으로는 내게 은혜를 입었다고도 하지 마라. 그 말 한마디가 이제 네 신변에 위협을 가할 수 있을뿐더러…… 나는 지금까지 네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푼 적이 없지 않았느냐.”

    “그 말씀은…….”

    “잊었느냐? 너와 처음 대면했던 자리에서 내가 말했던 것을?”

    그걸 어떻게 잊었겠는가.

    도르곤은 천천히 내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던 대사를 읊었다.

    “너희의 이익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이익이 되는 일을 가져와라. 그렇다면 내 힘을 나누어주는 것을 고려해보겠다.”

    내 입에서도 같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져 한 문장을 읽는 소리가 섭정왕의 집무실을 울렸다.

    “너도 아직 기억하고 있었느냐? 기특한 놈 같으니라고.”

    “……그토록 인상 깊었던 일을 어찌 잊겠습니까.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묘한 재주를 보이라고 불러온 고려인이 내게 그토록 당돌한 제안을 했을 때, 내 기분이 어떠했겠느냐. 그리고 그 고려인이 그 후로 벌인 활약을 생각하면…… 평생 잊을 수 없어야 정상이지.”

    “…….”

    “아르가투, 우리 사이에 오간 것은 내 일방적인 은혜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득을 쥐여 주고 협력을 나눈 관계지. 그러니 앞으로는 그렇게 내게 빚을 진 것처럼 굴지 마라.”

    도르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런 도르곤을 바라보는 내 가슴은 누군가가 꽉 쥐어짜는 듯했다.

    “그러니, 이제는 마음 편히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골라라. 네가 떨어지는 칼날에 집착해 손을 베이는 모습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고작 이런 말을 하시려고 저를 먼 북경까지 부르신 겁니까. 전하께서는 참으로…….”

    “고작이라니? 네 목숨을 살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

    “아, 하긴 고작 수백 단위의 침입자 놈들을 벌하는데 고려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관을 임명하라 압력을 넣고, 개선식을 핑계로 북경까지 불러들인 가장 큰 목적은 따로 있긴 했다.”

    도르곤이 손끝을 까딱거렸다. 자신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오라는 신호였다.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다. 내가 가장 아꼈던, 그리고 가장 아까웠던 옛 잘안 장긴 녀석의 얼굴을 말이다.”

    “전하…….”

    “모질지 못한 놈. 그러나 만주족과는 다른 네가 그래서 좋았다, 아르가투.”

    지난 결정을 후회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이런 사람을 두고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후회 말이다.

    만약 내가 마카타 황녀의 손을 잡고 도르곤의 곁에 남았더라면, 내 미래는 어떠했을까.

    소현세자를 왕으로 올린 것처럼 차라리 도르곤을 카간으로 올렸더라면, 지금 내 마음이 이토록 무거웠을까.

    ***

    북경에 머무는 동안 자주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도르곤은 나를 돌려보냈다. 섭정왕부를 물러나오는 내 걸음은 말 그대로 천근과도 같았다.

    “아, 실례합니다. 혹시 고려국에서 오신 고관 분이 맞으신지요?”

    천천히 자금성의 남문인 오문을 향해 걸어가던 중이었다. 급박하게 뛰어와 내 걸음을 막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내조의 내관 같은데, 무슨 일입니까?”

    “고려 분이 자금성 사정에 밝으시군요? 내조의 온 내관들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나를 찾고 있었다?”

    아, 설마.

    “중화전(中和殿)에 머물고 계신 황제께서 부르셨습니다. 속히 드시라는 황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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