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자리를 비운 사이
내 휴식은 길지 않았다.
내가 당분간 청으로 불려갈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임금은 마음의 짐을 덜었다는 듯이 전처럼 나를 부려먹기 시작했다. 그나마 당근은 하나 던져주긴 했지만.
“전 예조판서 안한수를 좌찬성 겸 비변사 제조에 임하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네덜란드에서 쌓아온 공이 높다는 이유로 나는 또다시 품계를 높여 달았다. 이제 나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신하는 정말로 몇 명 남지 않았다.
좌찬성은 현대로 치면 부총리처럼 정승을 보좌하는 관직이며, 정승에 오르기 전 거치는 자리기도 하다. 전례대로 세자시강원의 이사(貳師)와 사신 접대를 맡는 예빈시의 제조 역시 겸직했다.
“자네를 사위로 맞길 정말 잘했구만. 나도 이제 은퇴할 날이 머지않았는데, 내 모든 기반을 사위에게 물려주고 생의 끝을 준비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복 받은 생이란 말인가.”
“장인어른…….”
종1품을 찍고 인정전에서 열린 첫 조회에서 물러나오던 때였다. 김육과 함께 오늘의 나랏일을 하러 비변사의 회의실인 빈청(賓廳)으로 가던 길, 나란히 걷던 늙은 영의정이 축하를 전해왔다.
“자네와 만난 이후로 아들 녀석 둘도 대과에 급제해 탄탄대로를 걷고 있고, 내 아내와 딸은 둘 다 정경부인이 되었네. 이 모두가 자네 덕일지도 모르겠구만.”
“아닙니다. 처남 둘 모두 자신의 힘으로 등과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장인어른이 영상 자리까지 올라가신 것도 스스로의 공이시고요. 제 출세 역시 등 뒤를 든든히 받쳐주신 장인어른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 그래도 나는 자네와 만난 것을 일생일대의 천운으로 여길 걸세. 여습도 이 모습을 함께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성 영감, 아니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눈시울이 매워지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알고 있는지, 김육은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런 기쁜 날에 아버지가 살아계셔 함께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분의 품계를 뛰어넘은 지는 한참이 되었지만, 그분보다 나은 신하가 되는 일은 아직도 멀어보였다.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사계절이 몇 번 흘러가는 사이, 조선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늘 그랬듯이 내가 조정에서 몸을 갈아대는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동안 청나라로부터 나를 부르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일단은 임금이 중점적으로 추진하던 사업에 중대한 개혁 하나를 덧붙이는 것이 내 첫 번째 목표였다. 내가 조정에 들어온 지 십 년, 이제 나라에 대강 기초 체력이 붙었으니 제대로 성과를 거두어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내가 네덜란드에 다녀온 사이, 임금은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모내기법을 보급하는데 온힘을 다하고 있었다. 내탕금을 푼 보람이 있는지 꽤 많은 지방에 저수지와 수로가 지어져 백성들이 혜택을 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예산을 썼으니 슬슬 보충할 차례였다.
“이 바쁜 시기에 왜 나를 부른 것이냐? 안 그래도 전하께서 명하신 일의 기한이 다가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마당에.”
“이러시면 섭섭합니다, 사형. 저는 사형 생각에 짧게나마 바람을 쐬고 올 기회를 만들어드렸거늘.”
“바람을?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것이냐?”
방금까지 나랏일에 짓눌려 똥 씹은 표정이던 충신의 얼굴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우리 사형은 이렇게 알기 쉬워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당진현에 새로 저수지를 개축하면서 근방에 시범 실시한 방전법 말입니다. 사형도 호조 일을 하실 때 이 일로 꽤나 골치를 썩지 않았습니까?”
“아, 결부제 대신 시범 시행 중인 그거 말이군. 그 일로 조정에서 격론이 수차례나 벌어졌는데, 내가 어떻게 잊겠냐.”
“헌데, 무엄하게도 당진 현감을 비롯한 인근 수령들이 토지제도 개혁에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형의 힘이 필요합니다.”
나는 승진 기념으로 토지개혁을 숙종 시기 시행되었던 방전법을 당겨서 시행했다.
조선 초기부터 시행해온 결부제(結負制)는 곡식의 생산량에 따라 토지에 선을 긋는 방법이다. 위대한 세종대왕께서 남기신 이 토지제도는 여전히 조선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토지의 질로 6등분, 풍흉의 정도로 9등분.
대왕님의 의도는 사정에 따라 차등을 두어 세금을 걷어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었으나, 문제는 평가하는 사람의 주관과 자의에 따라 장부에 오른 토지의 크기가 널을 뛴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라에서 수리시설을 갖춰준 지방에 한해 시행 중인 새 토지제도는 철저히 토지의 크기만을 측정해 토지대장에 등록하는 방식이다. 네모반듯하게 토지를 측정한다 하여 원 역사에서는 방전법(方田法)이라 이름 붙은 제도다.
“저런 불충한 놈들을 보았나. 전하께서 수리시설을 내탕금으로 확충해 주시면서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것인데,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으려 들어? 쳐 죽일 놈들 같으니.”
“아마 계산대로면 드러나게 될 은결(隱結, 숨긴 토지)과 누결(漏結, 누락된 토지)이 토지대장에 등록된 전답만큼 많으니 애를 쓰는 모양입니다. 여기 한양 조정에서도 딱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가진 놈들의 반발이 없을 리가 없었다.
원래 숙종 시기 황해도에 방전법을 시행한 결과, 개간을 마치고 대장에 아직 오르지 않은 가경전(加耕田)은 2배, 모든 전답을 합쳐 1.5배가 토지대장에 등록되었다. 즉 그만큼의 세금이 누락되고 있었단 뜻이고, 세금이 늘어난다는 것을 환영할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내가 방전법을 교하 일대에 시범 시행했을 때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조정에서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꽤나 많은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지방 토호들과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신료들일수록 강하게 반대했다.
“하기야 조정 대신들부터 그 모양이었지. 아무리 사람의 본성이 받은 것은 쉽게 잊고, 빼앗아 간 것은 잊지 않는다지만…….”
“지금 조정의 중심 세력이 한양에 기반을 둔 한당이니 가능한 개혁입니다. 그나마도 수리시설을 확충해준 지역 위주로 시행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토지개혁이 이 정도로 확대되기도 어려웠겠지요.”
“유학을 공부하고 자신을 수양한다는 성리학자들도 기득권 앞에서는 쉰 떡을 던져준 동네 똥개만도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조금 역겨웠다. 역시 네놈이 아니었으면 이런 더러운 조정 따위는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는데.”
충신이 역겹다는 듯 잔뜩 얼굴을 찌푸리는 이유가 있었다. 쉽게 말하면 한 지역에 저수지를 지어줘 당근을 던져준 대신 그 지역에 토지개혁을 적용하겠다는 것이 정책의 골자였는데, 그것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양심 터진 놈팽이들이 있었으니까.
그나마도 달콤한 당근이 있어서 시행이 가능했던 것이긴 했다. 내가 없던 사이 임금이 시범 케이스로 저수지를 짓고 모내기를 보급한 지역에서 쌀 수확량이 폭등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조정에 없었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하시는 것 치고는 논의에서 꽤나 예리한 칼날을 휘두르시던데요. 영상 대감 이야기만 나오면 진저리를 치시던 분이 맞긴 합니까? 반대 세력을 몰아붙일 때는 호흡이 척척 맞는 것이 누가 보면 사제지간인 줄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그거야 그만큼 갈리다 보면 아무리 그렇게 철저히 당했어도 정이라는 게……. 이거, 영상 대감한테는 말하지 마라. 알았지?”
“물론입니다. 제가 누굽니까, 입 무겁기로는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아닙니까. 아무튼, 단기간이지만 호서에 다녀오실 수 있으시겠지요?”
“물론이지! 이 빌어먹을 궐내각사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만 있다면야! 마패, 마패는 어디 있냐?”
“마패는 승정원에 가서 찾으셔야지요. 아직 나오려면 멀었지만 말입니다.”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로 김육을 공격하는 반대파의 맥을 끊던 충신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내 입가에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헌데 충신은 알고 있을까. 방금 빈청으로 들어온 높으신 양반 한 분이 우리 대화를 들으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참, 이번에는 암행이 아닙니다. 그렇게 아시고 빠르게 다녀오십시오.”
“왜? 어사는 당연히 암행이 기본 아니냐?”
“사형이 저번 호서 암행에서 한 짓거리들을 다 전해 들었습니다. 저를 따라하다가 가짜 어사로 몰리셨다면서요? 그런 사고를 치셔놓고, 또 암행을 가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뭐,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사형이 아니더라도 아랫사람에게 임무를 부여하기 전에는 과거 기록을 살피는 것이 당연하지요. 꽁꽁 숨기셨다 생각했겠지만, 다 캐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귀찮은 암행어사 일이 그렇게 즐거웠던 건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던 충신의 얼굴에서 공기가 빠지듯 활력이 빠져나갔다. 얼굴에 호랑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출두했다가 유명한 소설을 따라하는 관심종자로 몰린 이야기를 요안이 집필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충신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아니……. 그걸 어떻게 한수 네놈이…….”
“그렇게 낙담하는 모습 보이지 마십시오. 제가 나쁜 사람 같지 않습니까?”
“이 악독한 놈……. 나는 그래도 다른 신료들이 너를 사람 가는 맷돌이라 욕하면 끼어들어 말렸건만…….”
“그렇다고 이런 중대한 임무를 거절하실 생각이십니까? 마패는 어명으로 내려지는 것입니다. 얼굴에 불만은 그만 품고 얼른 다녀오기나 하십시오.”
“아무리 어명이라도 그렇지! 네가 전하께 이야기만 잘 해드렸어도!”
“무리입니다, 사형. 그 이야기가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이 중궁전인데, 어떻게 제 힘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었겠습니까. 이번만은 암행을 포기하시지요.”
아무래도 충신은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어사 파견이 청요직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변하면서 바뀐 것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 우리 강 여사님의 입김이 닿은 것이 하나 있었다.
암행어사에게는 총통위 병력을 붙여주는 것이 통례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중전 마마의 영향으로 그 중 한 명은 반드시 기억력이 뛰어나고 입담이 좋은 병사로 선발했던 것이다.
아무튼 일타 작가가 자리를 비운 사이 큰 타격을 받았던 중궁전 서고와 세책점의 신간 목록은 다시 충실해지고 있었다. 일 년 넘게 참아온 강 여사님을 만족시켜야 하는 요안에게 잠시 애도를.
어쨌건 국모의 취미생활은 임금이 어사를 파견해 민생을 살핀다는 홍보를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까짓 거, 결과만 좋으면 됐지, 뭐.
“비변사에서 이게 무슨 소란인가!”
“엇, 영상 대감, 오셨습니까? 전하와의 독대는 별일 없으셨는지요?”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지켜보던 김육이 치고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우리 장인어른께서는 슬슬 대화가 사담으로 치달아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다.
“아, 아닙니다, 영상 대감. 그저 나랏일을 논하는 사이 잠시 가벼운 잡담을 했을 뿐입니다.”
“잡담이라? 요사이 내 그늘에서 벗어나더니 강 사인은 여유가 많이 생겼나 보지? 감히 어명에 거역할 생각일랑 집어넣고 어서 나랏일을 하러 가지 못할까?”
“아이고!”
노비의 소속이 영의정에서 임금에게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충신이 전 주인만 보면 쩔쩔매는 것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꽁지가 빠지게 원래 일을 마치러 공조로 뛰어가는 충신을 보며 김육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격무에 지쳐 저렇게 우는소리를 뱉으면서도 벼슬을 내던지지 않는 것을 보면 타고난 관료 체질인 것이 분명한데, 그걸 모르고 있는 사람은 강 사인 자신뿐일 것이야. 그렇지 않은가, 사위?”
“글쎄요. 제 사형이 관직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어느 분께서 버릇을 제대로 들인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장인어른?”
“아하하하, 그건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긴, 성균관 시절에 조정을 대놓고 혐오하던 충신을 떠올려보면 지금 모습은 환골탈태 그 자체였다. 게다가 나와 좌명이 급제하자마자 조정에서 갈리는 꼴을 보고도, 임금 하나만을 보고 나랏일을 맡기로 다짐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 대견한 사형을 내가 그동안 너무 갈궜던 건가. 안 그래도 임금 부부에게 양쪽으로 갈리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이번에 방전법이 제대로 정착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공을 세우는 격이니 그 상으로 암행을 보내주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숨겨진 토지를 잡아내야 나중에 토지를 기반으로 군포를 부과하는 균역법도 제대로 시행할 수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사위, 오늘 퇴청하고 자네 집에 동행해도 되겠는가?”
“또 말씀이십니까? 어제도 인정이 울리기 전에 돌아가셔놓고…….”
“왜, 문제라도 있는가?”
“아니, 아닙니다……. 저는 그저 장인어른의 건강이 염려되어…….”
“염려는 무슨? 누가 나를 고희를 넘은 노인으로 보던가? 걱정 말고 우리 우희가 등청 전에 무얼 했는지부터 읊어 보게, 어서!”
하아. 첫 손녀도 아닐 텐데, 우리 장인어른은 왜 이렇게 주책이신지.
요새 비변사로 자리를 옮겨 김육과 얼굴을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그에게 시달리던 충신의 마음이 절절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장인어른은 내겐 나랏일로 딴지를 못 거니 지금처럼 틈만 나면 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읊으라며 괴롭혀대셨으니까.
다음번에 충신을 어사로 보낼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반드시 암행을 보내줘야겠다. 충신도 사람이니 두 번 실수는 하지 않겠지.
***
그렇게 방전법 시행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나랏일과 장인어른에게서 해방되어 오랜만에 돌아온 휴일을 즐기고 있는데, 난데없이 날아온 것이 하나 있었다. 대궐에서 내려온 어명이었다.
“전하? 그 차림새는 무엇이십니까? 아니, 길산이도 동행시키라는 말씀을 왜 하시나 했더니…….”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임금이 세자에게 약속했던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급하게 든 편전에서 임금 부자가 나란히 외출복을 차려입은 것을 보며, 휴일을 빼앗긴 도비는 그저 속으로 눈물만 삼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