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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23화 (223/298)
  • 223화. 소환장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천천히 맞춰졌다.

    이 시기쯤 청나라가 조선에서 병력을 빼갈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원 역사보다 시기가 조금 당겨진 것 같긴 하지만, 이미 내가 시간의 흐름을 흔들어놓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이 시기 즈음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거쳐 동쪽으로 한창 세력을 뻗쳐나가고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에서 보낸 탐사대가 북만주에서 청나라와 충돌하게 되는데, 아직 남명을 멸망시키지 못해 전선에서 정예병을 뺄 수 없었던 청나라는 조선에게 손을 벌리게 된다.

    “친서에는 영고탑 북방의 나선(羅禪)이라는 놈들이 청의 변방을 지속적으로 약탈 중이라고 적혀있었다. 한수 네가 아는 이야기더냐.”

    “나선은 러시안이라는 단어를 한자음으로 옮긴 단어일 겁니다. 그들의 말로 러시아라고 부르는 나라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란타에서는 모스코비아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역시, 너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돌아오니 이렇게 든든한 것을.”

    북만주에서 러시아 원정대와 청이 충돌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었다. 1640년대 후반 북태평양 연안에 러시아 세력이 도달한 이후로 북만주 지역은 이미 터지기 직전의 폭탄과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 내가 없던 사이 갑작스레 날아든 청나라 황제, 순치제의 칙서에 임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처음 듣는 나라를 북만주 저 먼 땅으로 치러갈 것이니 갑자기 정예 부대를 보내라는 말에 누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고작 모피를 얻으려고 이 먼 곳까지 쳐들어왔단 말이더냐. 아니지, 고작 모피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값이 꽤나 비싸겠구나.”

    “예. 칙서에는 흑룡강 인근 부락이 연이어 습격당했다고 적혀있는데, 아마 그들의 목표는 부락에 보관 중이던 털가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노략질은 점점 청의 세력권까지 뻗쳐들어왔을 것이고요.”

    임금은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외교 관계를 감안해 총통위 병력을 이미 파병한 상태였지만, 청나라 측에서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은 모양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선의 원정대라는 자들은 꽤나 강한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으면 조선에 정예병을 요청할 이유가 없지 않겠더냐.”

    “북만주에 남아있는 병력들이라면 정예병이라고는 결코 부를 수 없는 자들일 테니까요. 아마 아직도 원시적인 칼과 창, 활로 무장을 한 병력이 전부일 것입니다. 반면 러시아 원정대는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을 것이고요.”

    러시아 원정대는 분명 부싯돌로 화약을 점화하는 플린트락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것이다. 원 역사에서는, 이때 노획한 소총이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플린트락 소총이었다고 했다. 내가 박연에게 부탁해 만들었던 그 소총 말이다.

    “청나라 군사들이 고전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구나. 그렇다면 우리 총통위 병력과 무장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뜻이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화약을 점화하는 방식만 같을 뿐, 놈들의 조총은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총통위 군사들은 전원이 총신에 강선을 판 호총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 그 기술은 유럽에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던가. 하긴, 그랬다면 하란타에서 우리 총을 탐낼 이유가 없었겠지. 내가 괜한 걱정을 하였구나.”

    “물론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상대 역시 거친 땅에서 숱한 사냥을 해오며 단련된 강병일 테니까요.”

    러시아 원정대는 원 역사에서도 열 배 차이가 나는 청나라 병력을 가뿐히 물리쳤다. 그 일 때문에 조선 조총수들이 나선 정벌이라는 이름 아래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의 국경분쟁에 말려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정작 청의 북만주 병력이 나선에게 대패했다는 이야기가 칙서 어디에도 없었다. 파병 요청을 전하러 온 칙사의 말로도 아직 교전이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했다).

    뭐지? 내가 아는 나선 정벌은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는데?

    그때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원 역사와 지금 은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칙서에 웬 낯선 부대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보니 조금씩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칙서, 섭정왕이 보낸 것이로군요.”

    “섭정왕? 우리가 심양에 머물던 시절의 예친왕을 가리키는 것이더냐?”

    조선으로 돌려보낸 잘안의 정예병 위주로 파병을 요청한 대목에서 느낌이 왔다. 굳이 파병 대상을 호포대로 딱 집어 요청할 만한 사람은 청나라에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순간, 무언가가 뇌리에 번쩍 스쳤다. 나선 정벌의 시기와 전개가 바뀌어버린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이 칙서를 보낸 것이 섭정왕이라면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는군요.”

    “그것이 무슨 뜻이더냐. 무언가 알아내기라도 한 것이냐?”

    재빠르게 속으로 연도를 계산해보았다. 역사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원래 이 시기에 도르곤이 사망하고 순치제가 친정을 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 도르곤은 살아있었다.

    홍타이지가 원역사와 달리 수명을 깎아 일찍 사망했듯이, 내가 바꿔놓은 역사가 이번엔 도르곤의 운명을 건드렸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섭정왕은 심양 시절에 너와 만나고 나서부터 인삼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긴 했지. 그것이 그의 수명을 늘려놓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원래대로라면 섭정왕은 건강이 상해 있었긴 하나, 사냥을 나갔다 낙마한 후유증이 원인이 되어 목숨을 잃습니다. 남서쪽 구석으로 쫓겨나 숨만 붙어있었어야 할 명국 조정이 남경에서 잘 버티고 있으니, 그 때문에 섭정왕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역시, 호포대 시절의 정예병을 그 어린 황제가 알고 있을 리 없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달라진 상황을 우리가 어찌 대처할 것인지, 지금은 그 계획을 짜야할 때다.”

    임금의 말이 옳았다. 하긴, 도르곤의 수명이 늘어난 이유가 중요하겠는가.

    지금 당장 총통위의 정예 병력은 청군과 합류해 북만주 어디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일어나버린 일, 최대한 조선의 국익에 도움이 되도록 상황을 돌려놓는 것이 내 역할이다.

    “오히려 지금 섭정왕이 북경에 버티고 있는 것이 외교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미 청국 내에서 선대 청주와 섭정왕의 심복 정도로 여겨지고 있으니까요.”

    “섭정왕이 사망한 후에는 반대파가 실권을 장악한다고 했었던가. 네 말이 옳다. 오히려 섭정왕의 생존이 조선에는 호재로 작용할지도 모르겠구나. 허나…….”

    “혹시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오랜만에 접하는 청국어라 읽는 속도가 느려진 모양이로구나. 일단 칙서의 남은 부분부터 마저 읽도록 해라.”

    임금의 반응이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조선에서 정예병을 빼간 것 이상의 문제가 있으려고.

    그러나 내 예상은 철저히 빗나가고 말았다. 칙서의 후반부에는 내가 상상도 못했던 건이 실려 있었으니까. 그것도 두 가지나.

    “…….”

    “이해한다. 말을 잊을 만도 하지.”

    조선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관직에 나선 것이 후회스러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 얼굴을 어제서야 처음 볼 수 있었는데, 내 앞에 또다시 장기 출장이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네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는 핑계를 대고 얼마 전 겨우 칙사를 돌려보냈다. 너를 반드시 원군의 지휘관으로 데려오라는 섭정왕의 특별 지시였다고 하더구나.”

    “하란타에 가 있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을 테니 좋은 핑계를 대셨습니다만, 이 이름은 대체…….”

    칙서에는 분명 내 이름과 함께 직책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려국 예조판서 안한수가 아니었다.

    타스하 잘안의 장긴, 아르가투.

    도르곤이 요구한 사람은 그 사람이었다.

    “그 이상한 이름이 너를 가리키는 것이 맞느냐? 나는 섭정왕이 네 이름을 잊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어째서 네가 만주족의 이름으로 칙서에 올라가 있는 것이냐?

    “그것이……. 아르가투는 청주가 죽기 직전 제게 내려준 만주족 이명(異名)입니다, 형님.”

    임금의 눈에 오랜만에 슬며시 의혹이 서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칙서를 보낸 것이 도르곤이라는 확신이 섰다.

    세상에서 나를 이 이름으로 부를 사람은 도르곤뿐이었다.

    홍타이지가 세상을 뜬 이상, 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둘 뿐이었으니까.

    자금성의 건청궁 동난각에서 홍타이지가 유조를 내리는 자리에는 나와 도르곤만이 있었다.

    “죽은 청주가 네게 만주족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어째서 그 이야기를 내게는 하지 않았던 것이냐?”

    “진정하십시오. 이미 그때는 형님께 청국을 섬기지 않겠다 이미 말씀을 드린 후였습니다. 굳이 형님의 마음을 어지럽혀드릴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나……. 아니다. 너를 잠시나마 의심하려 들었던 내가 우매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찌 너를 의심할 수 있겠더냐. 나를 용서하거라.”

    다행히 임금의 감정이 들끓었던 것은 잠시인 모양이었다.

    손을 들어 가벼운 사과를 전하는 임금에게서 진심이 전해져왔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단단해진 우리 사이가 고작 이런 것으로 흔들릴 사이던가.

    “하오나 저를 만주족 이름으로 소환한 것은 그렇다 치고, 어째서 청국에서, 아니 섭정왕이 아직도 저를 팔기군의 잘안 장긴으로 여기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것이 궁금했었다. 헌데 내 질문을 들은 칙사가 대답하길, 타스하 잘안의 장긴은 계속해서 공석이었다고 하더구나. 니루 장긴 중 한 명이 잘안 장긴을 대리했다며, 조선인 부대라 차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던데.”

    “섭정왕은 여전히 저를 그 부대의 지휘관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일까요. 안 그래도 떠나는 날 그가 잘안 장긴의 인수를 반환받는 것을 거부하긴 했습니다.”

    내가 언급한 잘안 장긴의 도장은 아마 지금 내수사에 있을 것이다.

    도르곤이 내게 청나라와의 독점무역권을 부여하며 그 증거로 다시 돌려준 도장이다. 아직도 상단이 넘어가려면 그 도장이 찍힌 무역허가서가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도르곤의 의도가 읽히지 않았다. 도르곤이 러시아와 전투가 벌어져 조선군을 불러들이는 미래를 보았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때였다. 내 앞에 앉아있던 임금은 표정을 풀더니 가벼운 코웃음을 허공에 날렸다.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구나, 한수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토록 짧은 인연이었음에도, 섭정왕은 너를 참으로 아꼈던 모양이다. 그런 호걸에게서 너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니, 어찌 하늘에 감사하지 않고 배기겠느냐.”

    “아…….”

    “나 역시 너를 잃을 뻔했던 적이 있으니 섭정왕의 심정이 절절히 이해가 되느니라. 섭정왕 역시 그렇게라도 너와의 끈을 하나라도 더 잡아두고 싶었겠지. 너더러 청을 섬겨도 괜찮다 허락하던 그때의 나처럼 말이다.”

    아, 그런 뜻이었나.

    내가 청나라를 떠난 후에도 잘안 장긴의 도장을 지니도록 강제하고, 여전히 청나라 병부에 내 이름을 올려놓은 것이?

    “너 없이 총통위 병사들부터 원병으로 데려간 것을 보니, 지금 북만주의 상황이 급박하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칙사는 다음 번이라도 언젠가 다시 청국으로 너를 데려갈 생각이라 하였다. 그것이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다음번이라니……. 전투는 지금쯤이면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러시아 원정대의 규모는 작고 오랜 전쟁을 견딜 상황도 아닌…… 아, 설마.”

    “그래, 이제 깨달았느냐.”

    임금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오려 했다.

    그래도 다행인가. 칙사가 남긴 말대로라면 운이 좋으면 바로 청나라로 끌려가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마음속에서 작은 희망 하나가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섭정왕이 너를 부른 목적은 원병 때문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너를 직접 보려는 목적이 분명 따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올해가 아니더라도 너를 소환하기 위해 다시 칙사가 압록강을 넘겠지.”

    “…….”

    “네가 하란타 방문 건으로 고생한 것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너를 더는 오랫동안 곁에서 떨어뜨려두고 싶지 않다. 그러니 너를 지금 당장 청으로 보내겠다는 말은 하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형님.”

    내게 가까이 오라 손짓하더니, 임금은 들어 올렸던 손으로 천천히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서 나는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조정 업무는 최소한으로 하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청국에서 다시 소식이 올 때까지 휴식을 취하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도록 하여라.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지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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