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19화 (219/298)
  • 219화. 위대한 제독

    그렇게 영국 해군을 돌려세운 후, 트롬프 제독은 함대 일부를 쪼개 조선의 귀국선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그 임무를 수행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함대의 최선두에 위치한 배 두 척이 파도를 갈랐다.

    크기도, 종류도, 소속된 국가도 전부 달랐지만 두 배는 마치 친한 친구처럼 나란히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통제사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로요.”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내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아왔다. 바다 일로 반쯤 딱딱해진 그의 손길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저는 오히려 예판을 다시 만나지 않길 바랐습니다. 저를 만난다는 것은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일 테니까요. 돌아가시는 길에 사고가 나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저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제사가 조선에 품었던 정을 끊어내려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생각했습니다. 이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사람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나 봅니다. 아마 하늘에 계신 분께서 마지막으로라도 예판을 만나고 가라고 섬나라 해적 놈들을 보내주신 것일지도요.”

    라위터르는 호탕한 웃음을 껄껄 터뜨려댔다. 정말로 모든 번뇌를 털어낸 모양인지, 그의 웃음은 맑고 깨끗했다.

    “그래도 긴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 임무는 어디까지나 조국의 앞바다를 경계하는 일이니까요.”

    “이미 엥겔란드 함대가 있던 구역부터 제일란드 앞바다를 한참 벗어난 곳이 아니었습니까. 섬나라 놈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곳까지 바래다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요. 원래는 예판을 조선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야 했지 않습니까. 약속을 어겨 죄송할 뿐입니다.”

    예전 이야기를 하는 라위터르의 입가에 씁쓸함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만 읽힐 뿐이었다.

    고뇌에서 벗어난 라위터르의 그런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간 것일 뿐이니까.

    헌데, 그제서야 내 눈에는 무언가 이상한 것이 감지되고 있었다. 라위터르가 몸에 걸치고 있는 복장이 무언가 조합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통제사, 그…… 혹시 모자를 잃어버리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왜 그 모자를?”

    “아, 이 전립(戰笠) 말입니까? 사실 마음 같아서는 구군복을 전부 착용하고 싶었으나, 그날 적의 피에 너무 절어 굳어버린 탓에 전포와 전대, 동다리 부분은 입을 수가 없게 되었거든요.”

    “저를 배웅 나오신답시고 준비하신 겁니까?”

    “설마요. 제가 그리 섬세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또다시 라위터르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큰 웃음을 터뜨렸다. 조선에서 즐겁게 통제사직을 수행하던 시절의 그와 다를 바가 없어, 그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도 점점 가벼워졌다.

    “이 복장은 제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판.”

    “마음가짐이오?”

    “앞으로 몸은 조국을 위해 헌신하게 될 테지만, 제게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 준 조선 역시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제 마음 반쪽은 언제나 조선을 향해 있을 테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음까지 온전히 조국에 두셔야지요.”

    “나는 몸이 두 개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마음이나마 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배신자에게도 그 정도는 허락해주시지요.”

    이 무슨 황송한 말씀을. 당신 같은 명제독을 잠시 조선에 빌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내 입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런 입에 발린 말보다 라위터르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으니까.

    “……통제사.”

    “예, 예판.”

    “창덕궁 후원에서 있었던 일, 아직 기억하십니까? 제가 통제사에게 네덜란드로 동행을 요청했던 그날 일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날 예판이 했던 말도 전부 기억하고 있지요.”

    완전히 술에 꼴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위터르는 그날 일을 용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면 굳이 그날 일을 상기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날 술에 취해 보인 추태가 부끄럽다며 너스레를 떠는 라위터르를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라도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아마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직 전하지 못했던 말을 똑바로 전하라는, 그런 기회.

    “통제사, 그럼 이것도 기억하시겠군요. 제가 네덜란드에서 한 가지 말씀을 드릴 것이고, 그것을 진지하게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말씀드렸던 것을요.”

    “예, 그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덴 하흐를 습격하기 전에 하려던 이야기가 그것이 아니었습니까?”

    맞다. 원래는 라위터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 때의 약속을 상기시키려 했었다.

    그러나 그때, 명제독은 스스로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들어간 상태였다. 그런 라위터르에게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아닙니다.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내가 긴 시간을 써가면서 지구 반대편까지 돌아온 이유는, 세상 누구보다도 충무공을 닮은 이 사람의 인생을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중대한 동기 덕분에 라위터르의 미래, 그의 절친 요한 더 비트의 미래, 그리고 네덜란드라는 나라의 미래가 바뀌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라위터르는 이미 내 조언 없이도 네덜란드에 헌신하는 미래를 스스로 찾아들어간 상태였다.

    그렇기에 어떻게 해도 몰려드는 걱정을 지워낼 수 없었다.

    수없는 헌신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 운명이 또다시 그를 향하고 있을지도.

    라위터르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앞으로는 자기 자신도 소중히 해 주십시오, 통제사.”

    “자기 자신을 소중히? 갑자기요?”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만도 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라위터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내 마음은 같았다. 나는 이 위대한 제독이, 그리고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한 사내가 불행한 말년을 맞이하는 꼴만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부당한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

    “제대로 된 지원이 없을 때는 가끔 불평도 하고 그러십시오.”

    “…….”

    “그리고 일도 좋지만 가족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조선에서 들겠다 농담하셨던 새 장가도 드시고요.”

    “……예판.”

    라위터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단호한 기색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 위대한 스승 두 분께서는 그리해선 안 된다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통제사…….”

    “예판이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너무나 잘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조국의 바다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

    “내가 물러서면, 조국의 목덜미가 조여집니다. 내가 무너지면, 조국의 생명선이 끊어집니다.”

    그 단호함에, 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라위터르의 등 뒤로 비치는 그림자는 어느새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예판의 충고, 잊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내 임무, 조국의 바다를 지켜야 하는 내 임무와 예판의 충고가 서로 배치될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내 임무를 수행하는 수밖에요.”

    “통제사…….”

    “예판이 나를 염려하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방금 목격했듯 엥겔란드 놈들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졌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멍하니 있던 손끝에 강한 악력이 전해졌다.

    라위터르의 손아귀에서 그의 강한 의지가 묻어나고 있었다.

    “대신, 우리 훗날 꼭 다시 만나 얼굴을 마주보기로 합시다, 예판.”

    “예?”

    “나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조국의 바다를 지켜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바다가 내가 없어도 안정될 때, 다시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라위터르는 내게 약속을 남기고 있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는 약속.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하하, 군관도감에서 쓸 병서를 편찬하느라 고생하던 시절에 그런 소리를 해 주셨어야죠. 아무튼, 예판이 오늘 해준 귀한 충고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렇게 긴 이야기를 듣게 만들었으니, 예판도 나와 약속을 한 가지 해줘야겠습니다.”

    명제독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심코 나도 그 모습을 따라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예판도 나와 만날 때까지 건강하셔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라니, 누가 할 소리를 빼앗아 하는 겁니까?”

    “아…….”

    “우리, 서로 건강하게 살아남아 반드시 다시 만납시다. 그 약속 하나면 될 것 같습니다.”

    라위터르에게서 역으로 날아든 염려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목이 콱 메이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입니다, 통제사. 우리, 꼭 다시 만납시다.”

    “네덜란드에서든, 조선에서든, 어디에서든.”

    “미힐 더 라위터르, 당신은 내게 영원한 삼도수군통제사일 것입니다.”

    ***

    “그런 일이 있었었지…….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인가.”

    탁. 제독의 주름진 손이 펼쳐놓았던 일지를 덮었다. 그리고 그 손길은 일지 옆에 놓여있던 전립으로 향했다.

    “제독님! 엥겔란드 함대에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작전 개시 신호라도 대기 중이라고 하더냐?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전해라.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은 것을.”

    “알겠습니다! 대기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제독의 발걸음이 갑판 위를 향했다. 과거보다는 조금 몸이 무거워졌지만, 제독의 몸은 여전히 활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제독의 몸이 갑판 위로 드러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병 모두가 부동자세를 취해 경의를 표했다. 제독의 눈은 같은 전열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전함들에게 향해 있었다.

    “드디어 좀 쓸만해졌구만. 같은 왕을 모시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저놈들한테 잔뜩 공을 들인 보람이 이제야 드는군.”

    “그래도 제독님, 원래 아주 글러먹은 친구들도 아니었지 않습니까? 저들이 아니었다면 루이의 연합함대를 우리만으로 저지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겁니다.”

    “알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 불평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안 그런가, 부관?”

    제독은 부관을 향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젊은 시절의 웃음 그대로였다.

    “좋아. 공화국의 용맹한 수병들은 들어라!”

    나이에 걸맞지 않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네덜란드의 기함을 온통 울렸다. 그 목소리를 듣는 네덜란드 수병들은 짜릿한 무언가가 몸속을 훑고 지나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제독의 연설은 길지 않았다. 아니 길 필요가 없었다.

    네덜란드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제독, 그의 존재만으로 해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으니까.

    “……오늘 우리는 되찾을 것이다. 에스파니예 놈들의 손아귀에 잡혀있던 남부의 10개 주를!”

    “예! 제독!”

    “그리고 오늘 우리는 되갚을 것이다. 쫓겨난 엥겔란드의 왕을 핑계 삼아 우리의 심장을 찌르려 들었던 프랑크라이크놈들의 죄악을!”

    “예! 제독!”

    끓어오르기 시작한 병사들의 피가 공기를 뜨겁게 데우는 것이 느껴졌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로 발밑이 울릴 듯했다.

    “이 전장에서 살려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으려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제군들은 이 전장에서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는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반드시 살아남겠습니다!”

    “좋다! 아주 좋다! 나 역시 이 전장이 마지막인 것처럼 싸움에 임할 것이다! 제군들 역시 그러한가!”

    “예! 제독!”

    늦었지만 약속을 지키러 갈 때가 된 것 같소, 예판.

    낮은 목소리로, 제독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때가 되었다! 수많은 세월동안 조국을 핍박한 압제자들에게 우리 네덜란드의 힘을 똑똑히 알려주어라!”

    “예! 제독!”

    쾅. 제독이 들고 있던 묵직한 지휘봉이 갑판에 내리꽂혔다.

    “전군! 작전 개시…!”

    ※ 작가의 말

    원 역사에서 미힐 더 라위터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의 인기를 시기한 빌렘 3세가 그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지중해의 전장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지켜줄 요한 더 비트는 이미 빌렘 3세에게 선동당한 군중들에 의해 길거리에서 잔인하게 죽은 후였습니다.

    하지만 작중에선 역사가 바뀌어, 천연두로 죽었어야 할 빌렘은 살아남았고 그의 아들이 원한을 품을 일도 없어졌습니다. 아마 라위터르는 단결된 네덜란드 아래서, 원 역사의 업적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세워가면서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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