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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18화 (218/298)

218화. 마지막 걸림돌

네덜란드를 떠난 배는 순조롭게 항로를 따라 나아갔다. 동인도회사에서 원양 항해 경험이 많은 선장을 붙여준 덕분이었다.

헤이그 항구로 배를 돌리는 참사도 벌어지지 않았다. 헨리에트는 염려했던 것이 바보 같을 정도로 선상 생활에 금방 익숙해졌다. 멀미를 앓기는커녕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주어진 공부를 꾸역꾸역 마쳐나가는 모습에 도리어 세자가 머쓱해할 정도였다.

“저하? 낯빛이 좋지 않으십니다. 조금 휴식을 취하셔도 될 터인데…….”

“그 사람도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그보다 못한 모습을 보여서 되겠습니까.”

오히려 무리를 하고 있는 쪽은 세자 쪽이었나 보다. 억지로 멀미를 참아가며 책장을 넘기는 것이 대견하긴 했으나, 굳이 정인에게 잘 보이겠다고 무리하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어머, 그래요?”

“대체 그 표정은 무엇이냐?”

나중에 내 선실에서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요안의 얼굴에는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들이 얼레리꼴레리하고 누군가를 놀리고 싶을 때 짓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

“실은 공녀님도 저하가 무리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분발하고 있으시거든요. 귀여우셔라.”

“그렇다고 몸을 상할 정도로 몰두하시게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뭐, 요안이 네가 알아서 잘 하겠다만.”

“선생님은 두 분이 대견하지도 않으세요? 하여간, 감정이 메마르셨다니까.”

요안의 입술이 삐죽 나온 이유가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나라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라도 퍼지면 안 될 일이기에, 세자와 공녀는 출항 이후부터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세자는 자신이 감정에 휩쓸려 저지른 짓에 책임을 지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몸으로 배우는 중이었다. 그것을 겪으면서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세자가 대견하긴 했으나, 그 대견함은 요안이 말한 것과는 의미가 조금 다를 터.

“서로 만나지도 못하면서도 서로를 위해 목표에 열중하는 그 모습!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겠어요?”

“또, 또 그 이야기.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 동정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하여튼 이쪽 일은 영 젬병이시라니까. 됐어요. 선생님이랑 이야기 더 해봐야 지금 떠오른 좋은 장면이 망가질 것 같으니까.”

요안은 잽싸게 손을 내젓더니 선실을 빠져나갔다. 아마 제 방에 가서 새 작품의 집필이라도 시작할 셈이지 싶었다.

뭐, 어쨌건 그 후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이쯤 되면 조선에 도착할 때까지 헨리에트의 기초 교육을 끝낼 수 있을지도.

물론, 불타오른 두 소년소녀에게 말려들어 괴로운 티조차 낼 수 없게 된 석주와 길산에게는 조금 안 된 일임은 분명했다. 진짜 배려가 필요한 쪽은 이쪽인지라, 나는 수업 중간마다 일부러 휴식시간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

이런, X발.

순조롭던 항해가 방해받은 것은 헤이그를 떠나 바다로 나온 지 나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요한 더 비트의 경고를 조금 더 주의 깊게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오랜만이야? 어디, 저지대 거지들과 어울린 시간은 즐거우셨나?”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너무 들떴던 것일까. 아니면 새 선장의 숙련도가 부족한 탓이었을까.

귀국길 시작부터 가장 큰 걸림돌을 만나버리고 말았다. 바로 오는 길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던 그 사람이었다.

“로버트 블레이크라고 했던가? 우리 배를 막아 세운 이유가 무엇이오?”

“하, 건방진 동방 놈, 말이 짧구나. 이 내가 친히 저지대 말까지 써 줬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고작 그따위냐?”

라위터르가 나를 만나지 못하고 바로 초계 임무에 들어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의 바다에는 잉글랜드의 함대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하필 그 시야에 또다시 걸린 것이 우리 배라는 것이 문제지.

“말이 짧은 것은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니오. 무엇보다, 당신이 우리 앞길을 막을 이유는 없을 텐데?”

“이유는 있지. 우리 호국경 각하께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꽤나 관심이 생기셨거든. 너희가 저지대에서 한 짓들이 우리 브리튼 섬까지 흘러들어왔다는 것, 알고 있나?”

“저지대에서 한 짓이라니?”

“그때는 잘도 나를 속였더군. 겉으로는 단순한 사절처럼 위장했던 놈들이 제법이야? 허나 그런 위장이 언제까지 먹힐 것이라 생각했나?”

말을 들어보니 어느새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에게까지 첩보가 흘러나간 듯했다. 네덜란드 내전에서 조선이 그것을 중재한 일이나, 암스테르담 경매장에서 팔려나간 조선산 도자기가 낙찰기록을 깼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이 벌써 런던까지 흘러들어가? 영국이 네덜란드를 경계하는 수준은 생각보다 높았던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내게 풀어놓는 블레이크의 눈은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쉽구만. 저지대 놈들의 함대가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그 보물들은 전부 우리 차지가 되었을 텐데.”

“안타깝지만 조선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전부 네덜란드에 내려놓고 왔소. 우리를 붙잡을 이유는 더는 없을 텐데요?”

“하, 이유가 없을 리가? 이번 일로 너희가 황금알을 낳는 암탉이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저지대 놈들에게만 황금알을 허락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뭐요?”

“이번에는 순순히 따라와야 할 것이다. 저지대 놈들도 너희에게 용건이 끝났으니 저번처럼 우리를 방해하진 못할 테고.”

이번에는 플리머스가 아니라 런던으로 가는 것에 감사하라며, 블레이크는 입술을 비틀었다. 이거,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놈들을 괜히 섬나라 해적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딱히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저번처럼 그가 발을 딛고 있는 갑판 아래에는 어림잡아 대포 수십 문이 아가리를 비집고 나와 있었는데, 그것들 하나하나가 나를 협박하는 듯했다.

“걱정 마라. 호국경은 자비로운 분이시니까. 그러니 네놈들 같은 동방의 소국에도 이러한 관심을 주시는 것이 아니겠나?”

이가 빠드득 갈렸다. 이 징그러운 섬나라 놈들은 도대체 조선에 무슨 원한을 품었기에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가.

이렇게 된 거, 조금 귀국이 늦어지더라도 런던에 들러 크롬웰을 만나고 갈 수밖에 없을지도. 아마 네덜란드 사람들도 이 정도 상황이라면 잉글랜드와 접촉하게 된 것을 이해해 줄 것이다.

아, 잠깐.

“왜 갑자기 말을 잊었나? 이제야 순순히 말을 들을 생각이 들었나?”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절대 잉글랜드로 따라가서는 안 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배에 타고 있는 오라녜 공의 동생 때문이다.

헨리에트는 잉글랜드에게 있어 잠재적 적국의 사령관 가문이자, 한창 적대중인 스튜어트 왕가와 인척 관계인 공녀다. 이만큼 좋은 인질감이 있을 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떻게든 세 치 혀라도 이용해 이 상황을 빠져나가야 한다.

“이번만은 안 되겠소. 귀하신 분 중에 심각한 향수병에 걸리신 분이 계시거든.”

“뭐야?”

“대신, 다음에 보내는 조선의 배가 잉글랜드에 방문할 것을 굳게 약속하겠소. 그러니 이번만큼은 보내주시오. 우리도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이오. 한시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겠소?”

흥. 블레이크에게서 코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의 오만한 얼굴 한 구석이 찌그러지고 있었다.

“약속? 다음? 그런 허깨비 같은 소리를 지금 나더러 믿으란 소리냐?”

“…….”

“이미 지난번에 나는 네놈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플리머스로 데려가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이 네가 말한 ‘다음’이 아니겠나. 요망한 입은 그만 닥치고 순순히 우리 함대를 따라오도록.”

그때는 블레이크 네놈이 네덜란드 함대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랬을 뿐일 텐데?

역사를 바꾸길 잘했다. 이런 놈들이 네덜란드를 제치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빌렘이 공화파를 쳐부수고 네덜란드를 전제왕국으로 만드는 꼴이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외침 하나가 들려왔다. 망루에 올라가 있는 견시병의 외침이었다.

“사령관! 북동 방향…… 에…… 는 배 그림자…… 발견!”

토막토막 해석되는 영어가 희미하게 들리자마자, 나는 곧바로 품에 넣고 있었던 물건을 뽑아들었다. 아 설마.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매정한 사람이 그랬었지, 이 물건이 우리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 줄 것이라고.

“망할! 저 거지 새끼들은 어째서 늘!”

망원경 렌즈 너머에는 기대하던 광경이 비치고 있었다.

역시, 우리 신묘하신 통제사께서는 이런 일도 전부 예측하신 것이 분명했다.

“블레이크 씨?”

“무얼 또 그리 의기양양해졌나! 퉤!”

블레이크가 분노와 함께 내뱉은 침은 물거품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행동을 보자마자, 나는 방금 망원경 너머로 본 휘날리는 삼색기가 환각이 아니란 사실을 확신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약속을 어찌 다루는지 모르지만, 조선은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나라요.”

“뭐야!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화가 잔뜩 오른 블레이크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이라는 표현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했다. 하긴 두 번 연속 같은 것을 당했으니 오죽 약이 오르겠는가.

그래도 세 번 연속이 아닌 게 어딘가.

방금까지 짜증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가가 스르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번에 내가 네덜란드를 방문할 때는, 반드시 잉글랜드도 방문하겠다 약속을 드리겠소. 다음번 방문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

적백청의 깃발을 휘날리며 접근한 네덜란드 함대는 곧바로 우리 함선과 영국 함선 사이에 끼어들었다. 특히 선두에 서서 달려온 네덜란드 함대의 기함이 가장 기민했는데, 그들은 정확히 나와 블레이크 사이에 배를 멈추었다.

“역시 이놈들은 단순한 사절단이 아니었어! 왜 저번에는 조선 배에 타고 있던 네놈이 저지대 해군의 배에서 나오는 것이냐!”

요청을 받아 네덜란드의 기함에 오르자마자 보인 것은 분을 참지 못한 블레이크가 속사포처럼 비난을 쏟아내는 장면이었다. 그 비난이 향하고 있는 대상은 만나지 못해 아쉬웠던 그 사람이었고.

“네덜란드 해군이 네덜란드 전열함에 타고 있는 데 이유가 있겠소? 그리고 내 이름은 ‘네놈’이 아니오, 엥겔란드 사령관.”

“뭐야?”

“내 이름은 미힐 더 라위터르요. 사령관이 계속해서 바다에서 활동할 것이라면, 이 이름을 앞으로 잘 기억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트롬프 제독은 라위터르의 몇 발 뒤에 서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야 제 자리로 돌아온 건방진 제자가 대견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내 오늘 일을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저지대 놈들, 조선 놈들, 모두 말이다!”

“내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주겠다니 다행이구려. 저번에는 이름도 묻지 않았던 것 같은데.”

라위터르의 입에서 나온 가벼운 비꼼에서는 여유가 묻어났다. 그 말에 구겨지기 시작한 로버트 블레이크의 면상은 꽤나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이름을 기억해준다고 하니, 이것 참 고맙군. 답례라도 할 겸 내 충고 하나 하겠소, 사령관.”

“충고? 저지대 놈 주제에 내게 충고라고?”

“이제 저번처럼 조선의 선박을 함부로 나포하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제 조선은 명실상부한 공화국의 동맹국이거든. 앞으로 그들에게 손을 댔다가는……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지휘봉을 뽑아든 라위터르는 뱃전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블레이크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를 발견한 명 제독은 이쪽을 향해 놀랍다는 표정을 꾸며냈다,

“아니, 예판. 아직도 여기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분명 지금쯤은 더 멀리 가셨을 줄 알았는데.”

“결국 마지막에 통제사를 만나고 가려고 이렇게 되었나 봅니다. 이렇게라도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라위터르는 얼굴 가득히 환한 미소를 띠었다. 나 역시 그를 따라 밝게 웃음 지으며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요한에게서 망원경을 잘 전달받은 모양이군요. 내 예판 흉내를 내 미래를 조금 예측해보았는데, 어떻습니까? 나도 이만하면 꽤 잘 맞추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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