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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10화 (210/298)
  • 210화. 연금술사

    며칠 후, 나는 길산이를 대동하고 암스테르담 시내에 위치한 글라우버의 실험실을 찾았다.

    세자와 나머지 아이들은 복귀한 박연을 안내원 삼아 다른 구역의 서점으로 출발한 후였다. 온 유럽의 책이 모여드는 곳이니 아마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어서 오세요! 검은 머리 귀빈 여러분!”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낯선 동양인 둘이 집에 들이닥쳤음에도 글라우버의 부인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를 환대하지 못해 애를 쓰는 모습이었는데, 아마 글라우버가 운영하던 사업이 꽤 힘든 상황에 놓였다는 정보와 관련이 있지 싶었다.

    그의 실험실은 그의 저택 최상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천장이 조금 높은 다락방을 개조한 모양인지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우욱……. 사부, 이 썩는 냄새는 대체 무엇입니까?”

    계단을 오르자마자 앞서 오르던 길산이 녀석이 코를 싸쥐었다. 유황 특유의 달걀 썩는 냄새가 실험실에서 풍기고 있었다.

    “비슷한 냄새를 총통위 병사들에게서 맡은 기억이 없더냐? 화약이 터질 때 나는 냄새를 떠올려 보거라.”

    “아아, 그럼 사부가 만나려는 분은 화약을 만드는 염초(焰硝)장이라도 되는 모양이군요.”

    그럴 리가. 고작 그 정도의 사람이면 만나러 올 필요가 없었다.

    예민해진 내 코에는 유황의 냄새 외에도 희미하게 그을음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이거, 유황을 태우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

    “누구……?”

    “전날 미리 연락을 넣었던 손님이오. 들어가 보아도 되겠소?”

    “아, 동방에서 오셨다던 후견인이시군요.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실험실 문을 노크하자마자 젊은이 하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글라우버의 도제쯤 되는 사람인가. 그의 어깨 너머로 한창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구불거리며 자라난 턱수염과 콧수염이 잔뜩 엉켜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늘상 화합물을 태운 연기를 접하면 저렇게 되는 건가. 배관 두 개가 뻗어 나온 통 앞에서 그는 잔뜩 이맛살을 찌푸린 채로 결과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한 연기가 새어나옵니다. 이걸로 입과 코를 막으십시오.”

    마침 준비한 것이 있었는지, 도제는 물을 적신 천을 나와 길산이에게 한 장씩 건넸다. 그의 입에도 축축한 천이 둘러진 것을 보니, 황을 태운 연기는 아무리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잠깐! 헨드릭! 중요한 순간이다! 방해하지 마라!”

    저 남자가 글라우버인가? 그는 액체가 담긴 유리 플라스크에 연통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채워 넣더니 조심스럽게 흔들기를 반복했다. 그것으로 무얼 만드는지 알 것 같았다.

    “마침 좋은 시간대에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나는 요한 루돌프 글라우버라고 합니다.”

    “조선국 외무장관 안한수입니다. 고명한 화학자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플라스크를 내려놓은 사내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닦더니 악수를 청해왔다. 맞잡아오는 거친 손길에서 그의 손 피부가 이곳저곳 녹아내려 성한 곳이 없다는 사실이 전해져왔다.

    “굉장히 독한 물질을 다루시는 모양이군요. 저 유리그릇 안에 있는 액체도 그렇습니까?”

    “역시. 먼 곳에서 오셨음에도 이 암스테르담에서 저를 찾아내신 분답게 화학에도 조예가 깊으신 모양이군요. 눈썰미가 훌륭하십니다. 그 유리그릇은 플라스크라 합니다.”

    “플라스크라……. 글라우버 씨는 묽은 변을 쏟게 만드는 약을 최초로 만들어내셨다 들었습니다. 그 약에 혹시 들어가는 물질입니까?”

    “예. 정확하십니다. 안 그래도 그 과정을 보여드릴까 했는데, 알고 계시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군요. 여기 완제품을 구경해보시겠습니까?”

    방금은 일부러 화학 실험을 시연해 보인 건가. 내가 도착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글라우버는 막 만들어서 가루 형태인 설사약을 내밀었다. 익숙한 황산나트륨, 아니 황산소듐이다. 그때 라위터르가 보여준 것은 소지가 쉽게 덩어리로 만든 놈이었나.

    그렇다면 이 사람, 내가 찾던 사람이 맞다.

    마지막 질문에 예상하는 답변이 나온다면 이 사람은 조선군의 무장을 한층 진일보시켜줄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거, 혹시 저 플라스크 안에 있는 물질에 소금을 반응시켜 만든 것입니까? 항간에서는 당신의 약을 ‘글라우버의 소금’이라고 부르던데요.”

    “맞습니다. 저 안에 담긴 물질을 저는 즈바블주어(Zwavelzuur)라고 부릅니다. 황(zwavel)에서 나온 산성 물질(Zuur)라는 뜻이죠.”

    찾았다. 강산(强酸)을 만들 수 있는 화학자.

    글라우버가 만들어 플라스크에 담은 물질은 황산이었다.

    ***

    “음……. 굉장히 매력적인 조건이긴 합니다만, 대체 왜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만든 물질은 그저 속을 비우는 설사약에 불과합니다. 그게 조선에서 비싸게 팔릴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짜고짜 준비해온 제안을 글라우버에게 들이밀었다. 그는 마침 파산 직전에 몰려 있던 상태라 했다. 때문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암스테르담을 떠나 고향인 프랑크푸르트 인근으로 돌아가려 했다고 글라우버는 고백해왔다.

    “맞습니다. 조선에서는 당신이 만든 약을 자연에서 캐서 씁니다. 비싸게 팔리는 약재는 전혀 아니지요.”

    “아니, 그럼 제 약이 돈이 되지 않는데도 이런 엄청난 조건을 제시하신 겁니까?”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화학에 쏟아온 열정입니다. 그리고 그밖에 당신이 발견해온 결과물들이 나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하십니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가치를 가진 것들이었습니까? 저는 그저 새로운 물질들을 발견하려 실험을 거듭했을 뿐입니다. 세간에서는 저를 연금술사라 비웃더군요. 금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데…….”

    내가 제시한 금액이 워낙 컸던지라, 제안서를 받아든 글라우버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니면 평생을 바친 연구를 인정해준 키다리 아저씨를 보고 감격한 것일지도.

    사실 원래 초기 예술과 과학은 세 부류의 후원 아래 발전해왔다.

    왕족이나, 괴짜 백만장자나,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은…….

    “당신이 발견한 물질 외에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의 실험실을 채우고 있는 실험도구라든지…….”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당신은 분명 파산까지 몰린 제게 신께서 보내주신 천사가 분명합니다! 그 가치를 알아주신 분은 후원자님이 처음이시거든요!”

    하지만 글라우버는 스스로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가 만든 황산과 황산에 소금, 즉 염화나트륨을 반응시켰을 때 나온 염산은 천금을 주어도 맞바꿀 수 없는 엄청난 물질들이니까.

    게다가 그가 만들어온 실험설비들도 그에 못지않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유리제 실험기구뿐만 아니라 기계장치로 만들어진 실험용 믹서, 그리고 황산을 대규모로 만들기 위한 설비까지.

    이 사람의 지식은 분명 조선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감사를 표하는 사람을 앞에 두는 기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당분간은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글라우버를 앞에 두고 그 기분을 즐겨보기로 했다.

    “헌데 당신을 후원하려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글라우버 씨.”

    “예? 혹시 정말로 어젯밤 꿈에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든지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요?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받았다던 그런 종류의 계시 말입니다.”

    “물론 그런 신성한 계시를 받았다면 좋았겠습니다만 저는 아쉽게도 신자가 아닌지라……. 혹시 동방에 연단술이라는 학문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방금 말씀하신 연금술에 비견되는 학문입니다.”

    “연금술……? 설마 후원자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이…….”

    혹시나 금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사가 제자를 구하려는 것이냐고 글라우버가 헛소리를 쏟아냈으나, 그것을 나는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제조법을 그에게 전달하려면 차라리 이렇게 착각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으니까.

    “당신이 만들어낸 산성 물질, 그러니까 황산의 개선에 대해 나는 큰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 후원을 받아 실험을 대신 해주길 원합니다.”

    “혹시 후원자님은 또 다른 산성 물질을 합성하는 법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 참 대단하시군요! 그래서 저를 찾아내신 거고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면 그 제조법을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물론 조선에서의 생활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셔야 할 테니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요.”

    아마 박연이나 라위터르가 글라우버에게 조선 생활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이다. 빌렘과 협상이 이뤄지는 동안 고향에 다녀온 금발벽안 판관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지만, 그래도 꽤나 개운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럴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글라우버가 잉크를 가져와 계약서에 지장을 찍어버린 것이다.

    “아니……?”

    “갑시다! 조선으로! 이 돈이면 내가 없더라도 내 아들과 아내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 수 있겠지요.”

    “그렇게 빨리 결정하셔도 되겠습니까? 제가 동방에서 온 사기꾼이면 어떡하려고 그러십니까?”

    “에이, 설마 암스테르담 시장이 보증한 분이 사기꾼이겠습니까? 게다가 당신은 사기꾼이 아니란 것을 스스로 증명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글라우버가 공손하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얼마나 급하게 지장을 찍었는지 손바닥까지 잉크가 튀어있는 것이 보였다.

    “제게 말씀하신 새로운 물질의 레시피를 알려주십시오. 그게 진짜라면 당신이 사기꾼이 아니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겠지요.”

    성질도 급하셔라. 혹시나 해서 허리춤에 차고 간 초석 주머니를 그에게 풀어주며, 황산에 초석을 반응시키면 질산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것만으로 이미 글라우버의 눈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이거, 내가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잘못 건드린 건가. 염산과 질산을 3:1로 섞으면 금도 녹이는 왕수(王水)가 만들어질 테지만 그것은 나중에 알려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콰당탕!

    아니, 알려줄 수가 없었다. 이미 내 손에서 초석 주머니를 채간 글라우버는 실험을 위해 실험실로 뛰쳐 올라간 상태였다. 그의 아내만 내게 심심한 사과를 전해올 뿐.

    “죄송합니다. 제 남편이 원래 저런 사람인지라……. 부디 계약만은 취소하지 말아주세요.”

    왜 글라우버의 사업이 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차라리 돈을 지원해주고 좋아하는 실험이나 계속 하는 생활이 그에게는 천국이 아닐까. 그가 오늘 안에 질산 합성에 성공한다면 목표했던 화학물질은 더 빨리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다.

    일단 첫 번째 목표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질산과 황산을 같은 비율로 섞은 혼합물에 목화로 짠 천을 담갔다 씻어내 말리면 되는 물질이니까. 원래 실험실에서 엎지른 화학물질을 앞치마로 닦아내 말리다 그것이 폭발하면서 발견된 물질이기도 하다.

    물론 안정된 제조법을 발견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저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면 생각보다 금방 해낼지도.

    “저, 손님? 괜찮으세요?”

    “아, 실례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군요. 계약엔 문제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말없이 미소를 지으시기에 무슨 일인가 했어요. 그러시다니 다행이네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건가? 하지만 그럴 만했다. 나머지 두 번째 목표의 제조법 역시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다음 목표는 수은을 질산으로 녹이고 거기에 에탄올을 넣어 만드는 폭발물. 불순물을 섞어 다소 민감도만 떨어뜨리면 현재 기술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점화약이 될 것이다.

    글라우버를 조선으로 데려가 연구 결과만 제대로 나온다면……. 총을 격발했을 때 나는 연기 탓에 시야를 가리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잘만 하면 박연이 만든 플린트락 소총은 구시대의 유물이 될지도.

    “사부, 정말로 괜찮으신 거 맞죠?”

    “길산아, 여기서 얻은 것이 조선에 가장 큰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이 냄새 나는 실험실의 주인이 큰 선물이라고요? 사부…….”

    길산이 녀석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내 머릿속에 있는 물질들은 이백여 년 후에야 나올 물건들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나만 알고 있겠지.

    하나는 연기가 나지 않는 무연 화약이다. 니트로셀룰로오스라고 불리는 면화약의 일종.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풀민산수은이라 불리는 점화약, 즉 뇌홍(雷汞)이다.

    ***

    그날 결국 나는 글라우버의 집에서 하루 종일 붙들려 있어야 했다. 질산을 농도별로 제조한 글라우버가 실험 하나를 끝마칠 때마다 그의 실험실로 불려가 강제로 보고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때 마신 유황 가스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과연 이 사람, 제 명대로 살 수는 있을까. 계속 실험 때마다 유독 가스를 마시면 글라우버는 분명 단명할 것이 분명했다. 가뜩이나 면화약과 뇌홍은 개발 초기에는 불안정해 위험한 물질인데, 이 사람에게 맡겨도 되려나.

    한편 그런 고민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내 방에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와 있었다.

    아니, 정당한 방의 주인께서 와 계셨다.

    “오셨어요, 선생님?”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갓과 도포부터 받아드는 폼이 꽤나 그럴싸했다. 하지만 옷에 깊게 배어버린 유황 냄새를 맡고 사레부터 들리는 것이, 녀석은 아직 멀었지 싶었지만.

    “콜록…… 이, 이거…… 무슨 냄새예요? 도대체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나랏일을 하려면 이런 냄새가 가득한 곳에 틀어박힐 줄도 알아야 한단다. 냄새가 그리 독하더냐?”

    “우…… 우욱……. 저, 삼신할미가 후사를 점지해줬나 봐요! 갑자기 구역질이…….”

    요안이 자연스레 호들갑을 떨어대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지 않은가.

    사실 지금이야 이렇지, 요안이 녀석은 내가 헤이그 침투작전으로 암스테르담을 떠나 있던 사이 잠도 잘 못자 아직도 눈 밑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이 고맙기도 하고, 나름 분위기를 바꿔주려고 애쓰는 것이 보여 녀석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주었다.

    “하, 진짜 선생님은 무슨 말을 못 하게 하신다니까. 어서 세신부터 하고 오세요. 오늘은 시내에서 재밌는 것을 배워왔어요.”

    평소에는 내게서 풍기는 먹 냄새가 좋다며 이런 일을 언급조차 하지 않던 녀석이 씻는 일 타령이라. 생각보다 유황 냄새가 몸에 짙게 밴 모양이었다. 옷고름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덕분에 나는 책상 위에 막 벌여놓으려던 일거리를 멈추고 몸부터 씻으러 다녀와야 했다. 피로와 함께 몸까지 녹아내릴 것 같은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섰을 때,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 하고 있는 게냐? 손에 든 것은 또 뭐고?”

    “아, 이거……. 들켜버렸네요?”

    요안의 손에는 사슬에 매달린 동그란 물건이 좌우로 흔들리며 진자 운동을 하고 있었다.

    17세기에도 있었구나, 이거.

    “아무리 똑똑하신 선생님도 이게 뭔지는 모르실 걸요? 작홀로셰(Zakhorloge)라고 하는 건데…….”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 아니더냐. 품속에 넣고 다니는 물건이니 조선말로 고치면 회중(懷中)시계쯤이 적절할 게다.”

    “우씨……. 이번에는 꼭 놀라게 해 드리려고 했는데…….”

    침대에 걸터앉아 회중시계를 흔들어대던 요안은 한쪽 발로 바닥을 구르며 애통해했다.

    아직 네가 나를 놀라게 하려면 한참은 멀었느니라.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고요! 이건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 말고도 또 다른 능력이 있어요!”

    “또 다른 능력? 요안이 너, 이 물건에 달린 작은 금속판, 태엽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구나. 아무튼 그것을 감는 법은 아느냐?”

    “그럼요! 집시 할멈이 드레이페어(Drijfveer)를 감는 법을 신신당부……. 앗, 그러고 보니 얘한테 먹이를 안 줬네?”

    어쩐지 째깍거리는 소리가 안 들리더라. 호들갑을 떨며 태엽을 감는 요안을 보며, 조선으로 돌아갈 때 시계를 선물로 사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헌데 요안이 계획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나보다. 이제야 바늘이 도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계를 들고, 녀석은 의기양양해진 채로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또 무얼 하려고? 나는 마저 나랏일을 해야 한다. 네가 여기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내기에 이겨서기도 하지만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약속 때문이기도 할 텐데?”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이걸 이렇게에 흔들며언……. 사람을 재울 수 있는 힘이 나온다고 했어요!”

    뭐야, 그게. 최면술?

    시계와 바꾸느라 한양에서 제가 따로 사온 장신구를 몇 개나 주었다면서, 요안은 잔뜩 진지한 표정으로 좌우로 흔들리는 시계에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집시 할멈에게 제대로 속은 모양이다.

    뭐, 시계는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으니 아주 사기를 당한 것은 아닌가. 그래도 사실을 알게 되면 녀석의 속이 상할까봐, 잠깐이라도 장단을 맞춰주고자 나 역시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선생님, 덴 하흐에 다녀오시고도 매번 밤늦게까지 안 주무시잖아요. 사람이 가끔 쉴 줄도 아셔야지, 매번 그러다가는 몸이 상한다구요!”

    “그랬구나. 나를 걱정한 나머지 사람을 재우는 술법을 배워 온 것이로구나? 기특하기는.”

    “기, 기특! 아무튼! 제가 언니였다면 선생님을 쉽게 재워드렸겠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이런 것뿐이더라구요.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쪽을 보세요!”

    그런 단순한 손장난에 사람이 어떻게 잠이 들겠냐. 내가 바보도 아니고.

    하지만 그런 어처구니없는 것에도 진지한 것이 정말로 요안답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된 외교에 지쳐있는 나를 달래주려는 녀석의 마음이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올라갔다. 어차피 여기서 시간을 조금 더 보낸다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는 요안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다짐하기가 무섭게, 녀석은 내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하고 나섰다.

    “그건 또 무얼 하자는 것이냐?”

    “이리 와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니, 아무튼 집시 할멈이 이렇게 하라고 했거든요!”

    팡, 팡. 잔뜩 뿔이 난 표정을 지은 요안이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제 허벅지를 두어 번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최면술에 저런 조건이 있었던가? 녀석의 말로는 잠 못 드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집시 할멈이 이렇게 하라 가르쳐주었다는데, 글쎄.

    “내기에 지셨던 것 기억 안 나세요? 그동안 저를 애태우셨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해주셔야죠!”

    “……이번 한 번 만이다. 효과가 없으면 이런 선비 답지 못한 일은 당장 그만둘 것이야.”

    “거 참, 선생님은 속고만 사셨어요? 어떻게 아내 말을 믿지 못하시고…….”

    실망했다며 거짓 울음을 가장하는 녀석을 보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어차피 맞춰주기로 한 거, 한 번 더 맞춰주는 게 문제려고.

    효과가 없으면 당장 일어나 꿀밤을 먹일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녀석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런 어린애 손장난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자, 당신은 처언천히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눈동자는 흐릿해지고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내 말을 제외하고는 들리지 않기 시작합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점점 기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요안의 목소리는 점점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당신은 아주 달콤한 잠에 빠져듭니다아아……. 지금까지 쌓인 피로가 싸악 풀릴 정도로 달코옴하아아안…….”

    간신히 눌러놓았던 피로가 둑이 터지듯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눈꺼풀은 무거워지고, 손끝부터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니, 이런 쇳덩어리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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