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뒤처리
“……그래서 전 하란타 공의 영애가 나를 돕게 된 것이다. 참으로 당돌한 아가씨가 아니더냐?”
협상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는 마차에는 봉림대군과 나, 단둘만 탑승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대군은 헨리에트와 있었던 이야기를 대강 털어놓았다.
세상에, 이거 자명고를 찢은 그 공주님 이야기랑 판박이 아니야? 물론 오라녜 가의 공녀님은 나라를 구한 격이 되었으니 조금은 다를 테지만.
사랑은 정말로 위대한 모양이었다. 사실 나부터가 감히 카간의 명령을 걷어차고 하연을 택한 사람이니 딴죽을 걸 처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조금 놀랍군요. 그렇게 열정적인 분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요.”
“뭐, 그 정도면 우리 조카님의 짝으로는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일단 가문보다 저하의 편을 든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분이 대감께 건넨 두 가지 요구가 저하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는 것과, 조선의 세자빈이 되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니……. 저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하와 공녀가 같은 공간에 있을 때 흐르던 미묘한 기류도 그렇고, 나는 저하께서 덴 하흐에서 이상하게 자리를 자주 비우실 때부터 눈치를 챘거늘. 네 소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더냐?”
요안이 고것이 놀릴 생각 전에 똑바로 말만 해줬어도, 확.
하지만 굳이 대군이 언급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양심상 헨리에트에게 진 신세는 갚아야 했다. 게다가 대군의 말대로 그것이 빌렘을 압박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되는 이상, 두 소년소녀의 연애를 막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사절단으로 와서 연애질이나 해댄 세자에게는 특급 훈계 코스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을 세자에게 알려주면 우리 저하께서도 기쁘게 갈굼 타임을 즐기시지 않을까.
“하지만 대감, 공녀께서 좋은 세자빈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결국 공녀가 우리에게 협조했기 때문에 더 관대한 처분을 얻어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가녀린 아가씨가 그런 잔꾀를 썼다고? 뒤에 누군가가 도사리고 있던 것이 아닌 이상 그럴 일은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 하여도 공작에게 내려질 처분이 달라질 것이 없지 않느냐. 좋게 생각하자꾸나.”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하긴, 내 뒤통수를 갈긴 빌렘에게 이런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지금 공작부인의 뱃속에 있는 빌렘의 아들이 공화파측에 원한을 품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오라녜 파와 공화파 사이에 이어질 증오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회담 자리에서 조금 갑질을 하긴 했지만, 결국 네덜란드가 굳건해야 조선에도 이익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녀가 우릴 돕지 않았더라도, 하나 된 하란타가 우리 조선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내가 그래서 네 큰 그림에 동의한 것이다.”
“대군께서 제 제안을 이해해주셔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다만 앞으로도 이 땅에 남아 그들 사이를 조정해 주셔야 할 텐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실 겁니다.”
의젓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군을 보자 무언가 감회가 새로워졌다. 거사를 앞두고 대군이 나와 임금을 돕기 시작한 이후로, 그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있었다.
만약 심양 시절, 소현세자 시절의 임금이 미덥지 않았더라면 당신을 모셨어도 나쁘지 않았을지도. 문득 얄궂은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임금이 왕의 재목임을 확신한지 오래인 지금은 그럴 생각이 절대 없었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니 그 정도는 각오했다. 다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되기만 한 일은 아닐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피터르도 이 땅에 남을 것이고, 통제사도 결국 하란타의 피를 자각했다고 들었다. 조선에서부터 친목을 쌓아온 사람들이 있는데 크게 외로울 일이 있겠느냐.”
물론 부인의 품은 조금 그리울 것 같다며, 나보다 한 살 위의 대군은 입가를 찌그러뜨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말이 순 입에 발린 말이라는 사실을.
대군이 딱히 여색을 밝히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총각 시절의 자유가 그립긴 했을 것이다. 거기에 왕족의 의무까지 족쇄로 더해졌을 테니 대군이 네덜란드 주재 대사 역할을 반기는 것도 조금 이해는 갔다.
물론 가끔 꿈에서 그리운 하연의 얼굴을 보곤 하는 나로서는 백 퍼센트 전부 이해가 가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공녀를 통해 대강 사연을 들었다. 공작은 어려서 부친을 잃고 제왕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모양인데, 내가 옆에 붙어 있으면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 쪽으로 큰 그림을 그리신 것입니까. 저는 사실 공작을 개심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거야 공작은 너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니까 그렇겠지. 허나 비슷한 사람끼리는 서로 알아보기 마련이다. 공작이 성정은 좀 오만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주 근본부터 썩어빠진 사람은 아니란 판단이 들었다.”
예로부터 호부견자는 드문 법이라며, 대군은 자신에게 빌렘의 인격개조를 맡겨보라고 큰 소리를 쳤다. 글쎄, 어쩌면 대군은 빌렘에게서 심양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본 것일지도 모른다.
청에게 더는 협력하지 말라며 내 군막을 찾아왔던 과거 대군의 강경한 모습은 빌렘과 조금 닮아 있긴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대군이 인질로 잡혀있는 동안 빌렘과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 입을 딱 다문 것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맥락에서, 무릇 군주가 본받을 만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신하들도 덩달아 어지러워지는 법이다. 나는 이번 사태의 원인을 이것에서 찾고자 한다.”
“그래서 덴 하흐에서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시면서 공작과 친교를 다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이 땅에서 군주의 역할이 우리 조선과는 사뭇 다르다지만, 그동안 있었던 하란타 총독들은 분명 군주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공작 역시 선대 총독들의 행적을 따른다면 의회의 신뢰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중심으로 네덜란드가 하나로 뭉치는 것이 진정 조선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 아니겠냐며 봉림대군이 덧붙였다.
대군 말대로 되기만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하긴, 선대 총독들이 보여준 군사적 재능과 빌렘의 아들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보인 모습은 당대의 명장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원 역사에서 빌렘이 요절하지 않았으면 좋은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공작부인과의 관계도 있으니 대군이 빌렘과의 관계를 다져주는 일은 나쁜 선택이 되긴 어려울 것이다. 웬일로 대군이 네덜란드에 남겠다며 먼저 제안해왔나 했더니,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헌데 이 양반, 그 와중에 창밖으로 뭘 저리 바라보며 실실거리는 건가.
아, 잠깐, 설마.
“설마 대군 대감, 제가 생각하는 그 이유 때문에 여기 남으시려는 것은 아니지요?”
“뭐, 뭘 말이냐?”
“대감, 지금 시선이 마차의 앞부분에 온통 고정되어 계시지 않습니까.”
대군의 시선 끝에는 흰 말갈기가 걸음을 따라 쉴 새 없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마차를 끄는 저지대 지방 특유의 중형마였다.
이 녀석이야 청나라에서 탔던 말에 비해 훌륭한 녀석은 아니지만 대군이 상상하는 말은 이것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훈련장에서 목격한 기병대의 말은 저 말보다 훨씬 크고 늘씬했다.
몇몇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서 수입한 말이고, 몇몇은 오스만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했던가.
지금 대군의 머릿속에는 그놈들이 떠올라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청나라 시절 제 말을 탐내실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 아니다. 설마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이 먼 나라에 남겠다고 했겠느냐. 다만.”
“그저 한 줄기 위안은 될 수 있다.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거든 넣어두시지요. 입에 흐른 침도 닦으시고요.”
“……너무 티가 났느냐?”
평소에도 대군은 뭐만 하면 함께 말을 달리자고 했었지.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생각해보니 이 인간, 이렇게 덩치도 크고 근육질에 몸 쓰는 걸 좋아하는데, 원 역사대로 보위에 올랐으면 어떻게 참았을까 모르겠다. 그러니 마흔도 되기 전에 요절했을지도.
“뭐, 그래봐야 승마는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
“과거의 대군께서는 조금 그러셨던 것 같긴 한데……. 지금은 그러지 않으시니 다행입니다.”
“뭐야?”
원래 역사대로라면 빌렘은 곧 어차피 곧 명을 다한다.
만약 뒤틀린 역사 탓에 빌렘이 죽지 않는다면 어차피 네덜란드에 남게 될 대군에게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아.”
“무엇이냐? 한수 네놈, 이제야 내게 결례를 저지른 것을 깨달은 것이냐?”
썩은 미소를 지으며 대군이 내게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였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원 역사에서 빌렘이 요절했던 원인이 이제야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천연두.
내가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몇 달 후에, 아니 곧 덴 하흐가 위치한 남부 홀란드 주에 인류 최악의 질병이 유행할 것이다. 미세한 나비효과로 빌렘이 살아남을지도 모르는 것은 둘째치고, 대군을 천연두에 잃지 않으려면 또 머리를 짜내야 했다.
“……대군 대감 덕분에 하란타에서 할 일이 또 늘어났군요.”
“그게 무슨 소리냐? 이토록 훌륭한 계획을 짜냈거늘, 내가 마치 짐덩어리라도 된 것처럼 들리지 않느냐?”
알긴 아십니까? 대감?
***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급하게 편지를 적어 길산이 편에 동인도회사로 보냈다. 네덜란드 어딘가에 있을 특정한 병에 걸린 소를 찾아야 했으니, 그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한숨을 겨우 돌릴 수 있게 된 내게 남은 일은 하나였다. 헤이그 침투 건을 잘 풀리게 만들고, 동시에 잔뜩 꼬아버린 사람에 대한 응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하의 소지품을 함부로 건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저하는 일국의 왕세자십니다! 저하의 혼인은 국가지대사란 말입니다!”
“정인에게 정표 하나 건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그 사람 역시 일이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정표를…….”
우리 저하께서는 이국에서 벌어진 로맨스에 취해 본분을 망각하신 모양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감히 스승인 내 말에 토까지 다는 것이, 드디어 사춘기의 반항기가 세자에게 도래했지 싶었다.
“정표 역시 함부로 주고받을 물건이 아닙니다! 세자의 국혼이 국가지대사라면 남녀 간의 혼인은 가문이 얽힌 인륜지대사입니다! 그것을 어찌 국본의 자리에 오른 분께서 함부로…….”
“스승님께서도 심양으로 떠나실 때 정부인께 정표를 받아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억해 놓았다가 배운 대로 시행했을 뿐인데, 어째서 저를 이리 타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그것은…… 저는 사대부지만 비교적 혼인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몸이었습니다! 장차 조선의 국모가 될 세자빈 자리의 무게를 어찌 일개 사대부의 혼인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청국에서 국혼을 치를 뻔했던 것은 스승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것을 이겨내고 정인과 약조를 지키셨던 분이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아, 아니……. 나도 모르게 세자의 기세에 밀리고 말았다. 세자가 이토록 거세게 반항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내 사생활을 온 한양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 이게 문제다. 아무나 남의 스승이 될 수 없다는 경전 속 격언이 뼛속 깊이 와닿고 있었다.
이게 다 요안이 때문이다. 그 녀석이 소설만 쓰지 않았더라도.
“대군 대감?”
“저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계속 하시지요, 예판.”
헌데 이 상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세자만이 아니었다. 자리에 함께한 대군이 도움을 구하는 내 눈길에 끼어들기는커녕 팔짱을 낀 채 묘한 웃음만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 왕실 어른인 당신이 혼내도 모자랄 판에 이 양반이. 이래 놓고 누가 빌렘을 가르친다는 건지. 진심으로 네덜란드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럼, 저하께서는 어찌하려고 성급하게 약조를 남기신 것입니까? 제가 청국에 다녀와 부인을 맞아들였듯이, 언젠가 하란타로 돌아와 맞아들이겠다는 약속이라도 하신 것입니까?”
“내 보위에 오른 후 언제든 그 사람을 중전으로 맞아들이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일국의 군주가 혼인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 한단 말씀이십니까?”
아직 세자는 세자빈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선발되는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대군이 짓는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예. 바로 그렇습니다, 저하.”
“바로 그렇다니요? 스승님, 그 말씀은…….”
“세자 저하, 지금 전하께서 아직 한창 젊으신데, 보위에 오른 후에 혼인을 하신다면 대체 언제 혼인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역모라도 꾸미시겠다는 말씀은 아닐 테고요.”
이제야 대군이 한 마디를 툭 던져왔다. 꽤 효과적인 말이었던지라, 대군에게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세자가 아연실색해진 사이, 그 틈을 타 나는 세자의 머리에 세자빈이 간택되는 과정을 그대로 때려 넣었다.
기세등등하던 세자의 기운이 꺾이는 것이 느껴졌다.
“……예판의 설명을 잘 들으셨지요, 저하? 공녀께서 그 과정을 통과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그나마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숙부님, 그것은…….”
“지금 저하께서 스승의 과거를 들어 예판에게 대드실 때가 아닙니다. 스승의 허물을 들추는 것은 제자로서 할 행동이 아닐뿐더러, 저하의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여기 예판 한 사람밖에 없을 테니까요.”
“…….”
“그리고, 저는 공작 영애께 들은 이야기가 꽤 많습니다. 나이가 찬 남녀는 정히 구분을 지어야 하는 것이 예의일 텐데, 타국에 있답시고 꽤나 많은 것들을 어기셨더군요, 저하?”
완전히 기가 죽은 세자를 두고 대군이 이죽거렸다.
대군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나도 헨리에트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 여기서 물을 때가 아닌 듯했다.
하긴 이미 혼인 전의 남녀가 은밀히 단 둘이 만나 정표까지 주고받은 것에서 세자는 이미 유교적으로 한참 선을 넘었다. 그것도 세자 신분에 자유연애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특히.
솔직히 내가 당당하게 세자를 혼낼 처지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앞으로 세자가 이쪽 문제로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기회에 세자란 어떤 위치인지 세뇌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럼 저하, 이 못난 스승의 고언을 들을 준비는 되셨습니까?”
“자, 잠깐……. 스승님, 혹시 또 그 벌서인지 뭔지를 시키시려는 것은…….”
“교훈은 직접 몸에 새기는 것이 빠르지요. 이것은 전하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불만은 받지 않겠습니다, 저하.”
그렇게 세자는 헨리에트와의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는 대신, 손에 먹물을 묻혀가며 군왕의 마음가짐에 대해 내가 불러주는 대로 끝없이 써내려가야 했다.
제게 귀찮은 일을 만들어 주셨으니, 이 정도는 감수하셔야지요, 저하.
하지만 생각보다 그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자의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깼기 때문이었다. 노크 소리의 주인공은 동인도회사로 심부름을 보냈던 녀석이었다.
“……병든 소를 찾는 데 동인도회사의 협조 약속은 받았고, 그 밖에 소소한 보답을 해 주겠다고?”
“사부와 함께 계셨던 요한 더 비트라는 분이 사부의 궁금증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부가 궁금해하시던 화학자의 거처를 알아냈으니 요긴하게 쓰시라던데요?”
“아…….”
“그리고 이건 저하께서 궁금해하실 만한 정보입니다. 동인도회사 사람이 암스테르담 시내에 있는 서점의 위치를 약도로 그려주었습니다.”
팔을 감싸 쥔 채 통증을 삭히고 있던 세자가 냉큼 자리에서 튀어나와 길산이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을 낚아챘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더니, 세자가 책을 좋아해서 다행일지도.
물론 세자의 행동에는 아픈 팔을 쉬게 하려는 개수작도 포함되어 있음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과장된 목소리로 길산이에게 서점에 대해 묻는 세자를 도로 자리에 주저앉힌 후, 나는 동인도회사가 보내온 정보에 대해 생각에 빠져들었다.
요한 더 비트가 말한 사람은 처음 암스테르담으로 오는 마차에서 이야기를 꺼냈던 화학자 글라우버임이 분명했다. 그가 황산나트륨을 만들어 상품으로 팔고 있다는 것은 분명 황산을 대량 제조하고 있다는 것.
머릿속에서 강산(强酸)을 이용한 두 가지 발명품이 떠올랐다. 나는 흐릿한 기억을 되새기며, 그것들의 제조법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지 여러 번 곱씹어야 했다.
※ 작가의 말
봉림대군, 즉 원 역사의 효종은 실제로 체구가 크고 우람했으며, 힘이 세기로 유명했습니다. 체구가 얼마나 컸던지 장례를 치를 때는 통짜 판자를 쓰지 못하고 널빤지를 이어 붙여 관을 짜야 했고, 영조 치세에 창경궁에 남아있던 효종의 언월도와 철퇴를 힘이 센 무사들도 들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몸을 쓰기 좋아해서 그런지 효종은 대군 시절부터 여덟 명의 장사를 늘 호위병으로 데리고 다니며 어울렸는데, 작중에도 그 모습이 묘사되어 있을 것입니다.
작중의 세자는 잘 모르고 있지만, 일국의 세자빈을 뽑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국에 혼인을 금지하는 금혼령을 내리고, 사대부가의 여식 서른 명 가량을 선발한 후 세 차례에 걸친 간택을 통해 차기 국모를 선발했지요. 간택 도중 예비 세자빈의 행동거지를 관찰하고, 간택을 통과한 인원에게는 따로 궁중의 일에 대해서 긴 기간 동안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