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00화 (200/298)
  • 200화.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제독님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덴 하흐를 떠나기 전, 오라녜 공이 저를 불러 거사에 참가하라며 압력을 넣었었거든요.”

    “역시……! 헌데, 장관이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는 말씀이시겠지요?”

    “맞습니다. 저희는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기에……. 헌데, 제독님의 진심 어린 애국심이 제 생각을 바꾸어놓았습니다.”

    트롬프 제독의 눈동자에 기쁨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스승의 그런 모습을 보는 라위터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찡그려진 미간은 여전히 그가 깊은 갈등에 빠져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만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자꾸만 나도 모르게 라위터르를 향하는 시선을 억지로 트롬프를 향해 돌려놓았다.

    “다만 제독님, 저와 조선 사절단이 이 네덜란드에서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자리에는 비교적 단순한 협조를 받으러 올 생각이었거든요.”

    트롬프 제독에게 협력을 시원하게 약속했음에도 뾰족한 수가 바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해군기지에 오기 전 떠올렸던 아이디어는 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니요. 조선은 오라녜 파와 공화파 사이에서 중간 다리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너무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긴, 주변국 중 외교에 신경 쓰는 나라치고 네덜란드의 두 파벌 중 한쪽 과 얽히지 않은 나라가 없을 것이었다. 아예 빌렘의 처가인 잉글랜드는 당연하고, 남부 네덜란드에 개입 중인 프랑스, 스페인도 마찬가지겠지.

    내 생각보다 네덜란드에 조선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작지 않은 모양이었다.

    옆에서 세자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조선은 통교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극동의 나라긴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다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법이지요.”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게다가 극동에서 다른 나라와의 교역이 거의 막힌 지금, 조선에서 공급하는 물품은 암스테르담에서 엄청난 이득을 남기며 전 유럽으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공화파는 조선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하긴, 트롬프의 말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요한 더 비트와 최초 교섭을 할 때도 헤이그에 정박해놓은 배에서 우선 도자기부터 인수하겠다고 덤비지 않았는가. 여기까지 오던 도중,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자바 섬으로 가는 길에도 조선으로 향하는 교역선단을 몇 차례나 마주했었다.

    “그럼 제독께서는 저희가 양 파벌 간의 중재자 역할을 맡아주길 바라시는 것이군요. 그래서 제게 여기 통제사를 통해 정보를 슬쩍 흘리셨고요.”

    “맞습니다. 장관께서 이해를 빠르게 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허나……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서로를 의심할 정도로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입니다. 한쪽은 무력 제재까지 준비하고 있고요.”

    “해 봐야지요. 조국의 미래가 달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와 당신, 모두의 조국 말입니다.”

    늙은 제독의 얼굴은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얼굴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불평도 꺼낼 수 없었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라위터르 역시 스승의 얼굴을 향해 커진 동공을 들이밀고 있었다.

    하긴, 의회를 비롯한 공화파 쪽은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단 요한 더 비트의 도움도 구할 수 있을 테고.

    “……요한 더 비트라, 내가 아는 더 비트는 야코프 더 비트 의원인데.”

    “말씀하신 분이 도르드레흐트의 시장입니까? 그분의 아들입니다.”

    “흐음……. 미힐 녀석의 친분이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은. 그럼 의외로 의회 측은 설득이 먹혀들어갈지도 모르겠군요.”

    “아마 거사 계획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양보를 꽤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강경하게 나올 오라녜 공 측인데…….”

    그래, 빌렘이 가장 큰 문제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놈을 손봐줄 필요는 있지만, 지금 그의 손에는 최소 일만에 육박하는 병력이 쥐어져 있다.

    “장관이 가진 병력은 바닥까지 동원해 봐야 수백 명이라……. 골치 아픈 상대로군요. 아마 제 생각이 맞다면, 총독은 마우리츠 공이 반대파를 제거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오라녜 파와 공화파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그 사건 이후부터였죠. 아, 다른 나라 분인 장관께는 조금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나도 조금은 알고 있는 이야기다.

    현 오라녜 공 빌렘 2세의 큰아버지, 네덜란드의 2대 총독 마우리츠 판 오라녜의 이야기였다.

    독립 전쟁의 시초이자 네덜란드인들의 구심점이었던 초대 총독 빌렘 1세가 암살당한 직후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고 한다. 동맹세력들이 연달아 이탈하거나 배반하고, 마우리츠가 이어받은 총독직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그때 마우리츠 공의 뒷받침을 해준 사람이 요한 판 올덴바르네벨트입니다. 용병 출신인 그는 우수한 전략가인 마우리츠 공과 처음에는 마음이 잘 맞았지요.”

    용병이자 유능한 정치가였던 올덴바르네벨트는 홀란드 주의 법률고문 자리에 올라 마우리츠를 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무역이 번성한 홀란드는 공화국 예산의 육십 퍼센트를 담당하는 주였다.

    그의 도움을 받아 마우리츠는 내정에서 손을 떼고 군사 문제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두 사람의 아래에서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은 반드시 서로를 물어뜯기 마련이다.

    안정된 상태는 잠시였을 뿐, 그리 오래갈 수 없었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갈등은 길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은 마우리츠 공이 칼뱅주의자들을 등에 업고 종교라는 칼을 명분으로 들어 올덴바르네벨트의 목을 치면서 끝이 났습니다.”

    “설마 문자 그대로 목을 쳤단 말씀이십니까?”

    “예. 국가의 종교 정책을 전복시켰다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이었죠. 올덴바르네벨트의 재산까지 몰수할 정도로 엄벌이었습니다.”

    “그런……. 그래서 여기 홀란드 주의 입김이 센 의회와 동인도회사가 총독 가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이군요.”

    “그의 아들 둘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며 나섰다가 하나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고, 하나는 평생 네덜란드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이토록 갈등의 골이 깊은 것입니다.”

    특히 동인도회사는 올덴바르네벨트가 창립자인 회사라고 했다. 지금 네덜란드의 무역이 활성화된 것은 사실상 그가 시초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네덜란드 내부의 갈등은 생각보다 뿌리 깊었다.

    고작 삼십 년 전의 일이 금방 잊힐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다음 총독인 프레데릭 헨드릭 공은 의회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훌륭한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현 오라녜 공의 아버지 말씀이시군요.”

    “그분의 대에 독립 전쟁에 사실상 종지부가 찍혔고, 홀란드 주와의 갈등 또한 훌륭하게 봉합해 무역을 국책사업으로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이 나쁠 수가 없지요.”

    “하지만 지금은 왜……?”

    “현 오라녜 공은 너무 젊은 나이에 총독직을 이어받았습니다. 프레데릭 헨드릭 공이 결혼을 늦게 하신 것이 원인이긴 합니다만…….”

    정치력 제로인 총독이 대를 건너 등장하는 건가. 아니면 아직 정치력을 전수받기 전에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빌렘이 이토록 독선적이 된 건가.

    “물론 의회 쪽도 완전한 피해자는 아닙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군비를 줄여대려 애를 썼거든요. 게다가 오라녜 공의 부인이 엥겔란드 사람인 것도 문제 삼았습니다.”

    “그 내용은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엥겔란드가 잠재적 적국이라 그렇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스페인과 전쟁을 벌일 때야 엥겔란드와 동맹이었다지만, 언제든지 그들이 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장관께서도 네덜란드로 오시는 길에 보셨겠지요.”

    아아, 스페인이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영국과 네덜란드는 말 그대로 오월동주의 형태를 취했던 모양이군. 이제 스페인과 적대하는 상황이 끝났으니 같은 배에서 내려 싸우게 되었고.

    아마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존재 역시 의회가 영국을 경계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은 겉으로 동맹이라지만 크롬웰은 곧 네덜란드의 뒤통수를 치고 항해 조례를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

    “생각보다 네덜란드 내부의 갈등은 뿌리가 깊었군요.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조선처럼 왕권이 강력한 국가에서 오신 분이 희한하게도 이해가 빠르시군요. 하긴, 그 정도의 분이시니 여기 왕세자께서도 전권을 위임하시겠지요.”

    손끝으로 턱수염을 꼬며, 트롬프는 무거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말이 통하는 상대여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장, 마우리츠 공이 정적을 제거할 때 썼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은…….”

    “미힐, 총독은 아직 너무 젊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방식을 시도하기보다는 기존에 선대 총독이 성공했던 방식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지. 마치 네가 나를 닮으려 애썼던 것처럼.”

    “선장!”

    “뭐, 그 덕분에 지금의 결론까지 이를 수 있었으니 다행인가. 하긴 총독이 그 정도로 티를 내고 다녔으니 의회 측에서도 눈치챈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군.”

    “그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덴 하흐에 머물면서 총독과 자주 접촉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의회에서 저를 의심했을 정도니까요.”

    늙은 제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 한숨은 앞으로 해내야 하는 일이 얼마나 까마득한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총독이 마우리츠 공의 방식을 답습할 것이라는 추측 또한 맞을 것입니다. 판단의 이유는 알려드릴 수 없지만 저 역시 총독이 덴 하흐에 체류 중인 의원들부터 체포할 것이라 예상합니다.”

    “그럼 미힐의 인맥만으로 의회를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 친구는 아직 공직에 오른 상태도 아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거, 확률이 점점 떨어지는데…….”

    트롬프의 말이 옳다.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요한 더 비트의 아버지가 당장 공화국 의원으로 헤이그에 체류하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아버지가 빌렘의 손에 억류된 상황에서도 과연 비트는 우리에게 흔쾌히 협조를 해 올 것인가.

    “그래서 말인데, 오늘 저는 제독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안이요? 그 제안이 대체 무엇이기에?”

    “총독은 조선 사절단이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고귀한 신분을 가지신 분을 인질로 잡아두었습니다. 거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의원들을 인질로 잡아 무기로 활용하겠지요.”

    “설마 장관……. 그런 추론까지 끝내고 나를 찾아온 이유가 ‘그 제안’입니까?”

    추론이 아니다.

    빌렘은 원 역사에서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네덜란드 해군의 총사령관인 트롬프 제독이 내 말에 설득력을 느꼈다는 것이 중요하지.

    “마침 제독께서는 여기 통제사를 통해 어떤 정보 하나를 제게 흘리셨습니다. 총독이 함대를 암스테르담에서 철수해달라는 요청을 제독께 보냈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함대를 로테르담처럼 더 전방에 위치한 항구로 전진해서 배치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장관.”

    “그럼 제독님,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제독님의 네덜란드 해군에서는 혹시 전열함 외에 호위함으로 어떤 선박을 운용하고 계십니까?”

    네덜란드 같은 나라의 해군이 단 한 종류의 선박으로 이루어졌을 리가 없다. 화력을 비롯해 전투력 하나는 끝내주지만 기동력이 부족한 전열함만으로는 임무 수행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아마 정찰이나 상선 호위, 수송 등을 위해 분명 빠르고 날렵한 배들 또한 해군에 속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선박의 종류는…….

    “프리깃 말씀이십니까? 그 용도면 보통 플류트가 주로 쓰이지요. 그리고 최근에 퇴역한 전열함 대신 투입한…… 아!”

    “예, 네덜란드의 최신 상선, 스쿠너도 분명 호위함으로 운용하고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조선에서 타고 온 배와 거의 같은 종류의 배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선미(船尾) 부분이 조금 다른 것을 빼면 겉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울 겁니다. 장관은 그것을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독의 함대가 숲이 되어주셔야겠습니다.”

    네덜란드까지 데려온 총통위 병사들은 나와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역전의 용사들이다. 지구 반 바퀴를 도는 동안 해적을 만날 위험 때문에 정예 중의 정예로 선발한 특공대.

    시가지에서 벌어지는 전투도, 속도전 또한 무수히 겪어왔다. 그런 정예병에 길잡이를 맡아줄 사람 또한 있다.

    트롬프 제독의 함대에 섞여 헤이그 항구에만 무사히 내릴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 말씀은, 장관의 병력으로 덴 하흐에 잡혀있는 인질들을 구출하시겠다?”

    “예, 제독님. 협상은 동등한 위치에서 이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우리가 중재자가 되어 가운데에 끼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총독이 제게 거사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일들을 숱하게 겪어왔거든요.”

    “허어, 조선에서는 외교관도 전쟁터에서 단련시키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나처럼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굴러다닌 사람은 아마 세계사에서도 드물걸요, 제독님.

    생각해보니 북쪽의 만주, 동쪽의 일본, 남쪽의 남경, 이번 일로 서쪽의 네덜란드까지 채웠구나, 제기랄.

    “헌데 그런 상황이라면 지휘관이 한 명 더 필요하겠군요. 총독이 인질로 잡은 의원들과 조선에서 잡은 인질을 같은 공간에 두지는 않을 테니.”

    “맞습니다.”

    “그럼 적당한 지휘관을 하나 붙여드릴까요. 내 해군에도 육전을 경험한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덴 하흐의 지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제독의 지적은 옳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나머지 한 부대의 지휘를 부탁할 사람을 마음속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그 사람 말고는 총통위 병사들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이 자리에서 입술만 씹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적당한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군요. 장관, 제게 시간을 조금 더 주시겠습니까?”

    트롬프 역시 알고 있는 모양이다. 라위터르가 지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고향에 다녀온 라위터르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대강 눈치를 채고 있었다. 고국의 상황을 접한 이후로, 네덜란드를 떠나 조선에 정착하기로 했던 그의 결심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라위터르가 깔끔하게 네덜란드를 버릴 생각이었다면, 오히려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의 협력국인 ‘하란타’를 돕겠다는 목적으로 쉽게 작전에 참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지금 북해의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겠지.

    나는 그가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라위터르는 한 번 조국을 버리기로 결심했던 사람이다. 그리 쉽게 마음을 바꾸기는 어려울지도.

    “알겠습니다. 제독님께서 덴 하흐 앞바다에 이르기 전까지 적당한 사람을 추천해주시면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총통위 병력 중에는 아직 네덜란드어에 익숙한 사람이 드문지라.”

    “아, 그런 문제도 있겠군요. 그것은 차차 논의해보도록 합시다.”

    부디 라위터르가 마음을 바꿔주길.

    내가 굳이 조선에 정착하겠다던 라위터르를 데려온 이유가 있었다. 당신은 앞으로 네덜란드의 바다를 호령해야 할 제독이 될 사람이란 말이다.

    그때였다. 트롬프 제독의 방문을 천천히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제독의 부관이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여기 조선 사절단을 찾아왔다는 사람이 기지로 들이닥쳐서 말입니다.”

    “조선 사절단을?”

    “덴 하흐에서 귀빈의 편지를 전하러 암스테르담까지 달려왔다고 합니다. 숙소까지 찾아갔다가 행적을 알 수 없어서 바로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귀빈의 편지? 혹시 인질로 잡혀있는 봉림대군이 보낸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트롬프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자, 당연히 제독은 바로 입실 허가를 내렸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안한수 자의.”

    “……당신은……!”

    “북경에서의 일, 기억하고 계십니까?”

    박연이 통역 일을 잠시 인수인계했다던 선원 피터르가 이 사람이었다고?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 선원 일로 검게 탄 피부.

    나는 그의 얼굴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엘세라크가 처음 조선에 사절단으로 왔을 때도 그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동행했었다. 후에 그가 엘세라크와 함께 조선에 체류하면서 라위터르의 수하가 되어 대장선 화포장으로 탑승했다던 보고를 받았었다.

    “봉림대군께서 사정을 설명하시고 제게 편지를 들려 보내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반드시 조선 측에 협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피터르 판 슈타우텐부르그, 맞나?”

    피터르의 고개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제 본명은 그게 아닙니다.”

    “본명이 아니라니?”

    “피터르 판 올덴바르네벨트. 이게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가 지어주신 제 진짜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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