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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88화 (188/298)

188화. 잠시만 안녕

그날 이후, 상왕은 다시는 나를 찾지 않았다.

어차피 임금의 아침 문안은 그 후로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경희궁 방향으로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챙겨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뭐야? 하란타? 나도 데려가 다오!”

“지금 바로 먼 길을 떠나셔야 하는 분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총통위에 가면 사형을 기다리는 병사들이 있을 겁니다. 데리고 얼른 숭례문 밖으로 사라지십시오.”

“야, 인마! 이게 병 주고 약 준다는 그거냐? 내가 왜 그렇게 하란타 말을 열심히 배웠는데? 다 네 장인어른에게서 도망치려고……!”

높아진 충신의 목소리가 고요한 새벽의 궁을 울렸다. 이 인간이 진짜. 방금까지 한 말은 대체 귓구멍으로 듣긴 한 건지.

황급히 충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인간은 은밀해야 할 암행 첫날부터 목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벗의 안전한 암행을 위해 내 업무도 아니건만 새벽잠을 희생해가며 나왔더니 말이지.

고마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방금 편전에서 호서 암행어사의 임무를 내려받고 나온 충신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고작 몇 개월의 자유로는 부족했던 건가. 암행어사를 보내지 말 걸 그랬나?

“읍…… 읍읍!”

“제가 방금 전하 앞에서 강론한 것을 죄다 헛수고로 만들 셈입니까? 귀중한 경험을 전해주려 새벽바람을 맞고 나왔더니 고작 하시는 말씀이…….”

“알았다! 알았어! 내 더러워서 원! 입 다물고 목적지로 떠나면 될 게 아니냐! 다만 내 하란타어 실력은 네 소실에 견줄 만한데, 그 실력이 썩게 된 것이 아쉬워서 하는 소리다.”

“에이, 그렇게 사절단에 포함되고 싶으셨던 겁니까? 허풍도 적당히 치셔야지요. 물론 갈고닦으셨다는 그 하란타어, 조만간에 쓰시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도 김육의 노예 생활을 탈출하긴 그른 것 같다며, 시무룩해져 있던 충신의 얼굴에 약간의 생기가 돌아왔다.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말을 예민한 직감으로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뭐? 조만간?”

“일단 지금 부여받은 임무나 잘 수행하고 오십시오. 호서에도 조선통보가 잘 쓰이고 있는지, 엽전을 사재기하는 놈은 없는지, 금납(金納)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도 말입니다. 기타 탐관오리는 알아서 처리하시고요.”

“안다, 알아! 잔소리에 귀가 떨어지겠다, 인마.”

“그리고…… 그 후엔 전하께서 언제 사형을 부르실지 모르니 준비나 잘 해두시고요.”

“뭐?”

영문을 모르겠다며 눈을 끔뻑거리는 충신이었으나, 스포일러는 여기까지다.

과연 장인어른의 노예 생활이 나을지, 아니면 대만에서 네덜란드인들과 어울려 개척민들을 관리하는 생활이 나을지는 그가 직접 몸으로 판단하게 될 테니까.

하긴, 그걸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지.

장인어른의 요긴한 도구를 빼앗아가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앞으로 대만 섬에 설립될 관아의 장을 맡을 사람은 충신만한 사람이 없었다. 임금과도 이미 뜻이 맞은 상태였다.

중국 남부와 대만, 류큐가 엮인 교역로를 중간에서 관리하려면 충신의 풍부한 상업 경험이 반드시 필요했다. 게다가 네덜란드 인들과의 교제 경험도 두텁다.

돈이 될 거리라면 물불 안 가리는 충신의 성격상 거리로 보면 귀양살이나 다름없는 파견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다. 이미 북경 시절에 도자기 장인을 포섭하러 그 먼 복건까지 다녀온 경험이 있는 충신이다.

“또 무슨 생각을 하며 그리 실실거리고 있냐? 한수 너, 분명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게 있구만?”

“조만간 알게 되실 겁니다. 아, 잠깐…….”

그동안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이 인간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충신의 난봉기가 국제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이번 사절단이 출발하며 대만 또한 들르게 되니, 대만 총독에게 신신당부를 남기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대만의 딸 가진 아비들이여. 절대 소중한 따님들을 조선 관아에 접근시키지 않으시기를.

“넌 또 그 사이에 딴 생각을 하는 게냐? 됐다, 됐어. 이 사형은 쓸쓸히 혼자 목적지로 떠나가련다.”

어느새 우리 둘의 발걸음은 관리들이 창덕궁을 드나드는 금호문에 도착해 있었다.

배웅은 여기까지다. 이제 충신은 마패를 들고 탐관오리들을 조지러 충청도로 떠나고, 나는 예조로 돌아가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아마, 지금 얼굴을 보면 당분간은 만나지 못할 것이고.

“하란타, 무사히 다녀와라. 다음에는 내가 꼭 가고 말 테니, 이번에 가르쳐 준 것처럼 조언도 잘 정리해 오고.”

“사형도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지금 가시는 일,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웃기고 있네. 네가 잘 해낸 일을 내가 못 해낼 것은 무어란 말이냐.”

충신이 주먹을 들이밀었다.

이 손인사를 하기 시작한 것도 언제부터였더라. 이 인간과 우정을 나눈 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었구나.

“……저 따라한답시고 산군 탈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내가 널 왜…….”

“그리고 파견지에서 백성의 아녀자 건드리지 마십시오.”

“……야.”

“그리고 저 없는 사이 혼인이라도 좀 하십시오. 언제까지 그렇게 홀몸으로 사실 생각이십니까?”

몇 살 차이 안 나는 우리 상감마마께서는 아이만 여덟에 얼마 전 늦둥이까지 또 가지신 터였다. 그 원인이 남경에서 들어온 비약에서 캐낸 비결이라는 소문이 궁녀들 사이에 돌던데, 그 진위는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이 인간도 난봉기와 노총각 신세 말고는 이제 부족한 것 없는 신랑감일 텐데, 이제는 좀 번듯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에서 건넨 충고였다.

헌데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방금까지 내 말을 따박따박 받아치던 충신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간 것을.

“……넌 몰라서 그래, 인마. 하긴, 어차피 책임질 사람은 이미 있구나. 이제 네 장인어른께 찬 족쇄도 꽤 익숙해졌으니, 다른 족쇄도 차볼 준비를 해 볼까.”

“사형?”

“농담이다, 인마. 나는 죽을 때까지 이러고 살 테다. 내가 그리 쉽게 바뀔 사람으로 보이더냐?”

웬일로 이 인간이 내 말에 이리 고분고분하지? 이 청개구리가 순순히 말을 들을 리가 없는데?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가 싫었던 걸까.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충신은 몸을 돌려 총통위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멀어지면서도 내게 손을 흔드는 충신의 등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

조선이 중국과 일본 외의 나라에 사절을 파견하는 것은 나라가 세워지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준비해야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전례를 세운답시고 고려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래도 분주하게 일에 몰두한 끝에 준비는 대강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사절단의 구성도 거의 끝이 났고, 예물과 교역품 역시 선정이 완료되어 전국 각지에서 벽란항으로 물건들이 모여들었다.

“오, 우리가 타고 갈 배가 이 배란 말이지. 교역선 주제에 벽란대선과 크기가 비슷하지 않느냐.”

“예, 대감. 이제 타국과의 교역은 완전히 일상이 되었고, 하란타 같은 나라를 대상으로 한 장거리 교역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형님께서 굳이 어명을 내려 건조를 명하신 게로군. 확실히 그럴 만한 가치는 있어 보인다.”

가끔 벽란항으로 시찰을 나갈 때는 늘 봉림대군이 어디선가 나타나 동행했다. 언젠가 말을 같이 달리자던 약속을 벌써 잊은 것이냐며 대군은 반쯤 빈정거리곤 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심양에서 사이가 엇나가기 전의 그를 보는 듯했다.

“일본행도 오래 걸렸지만 그것은 가는 장소마다 통신사들을 오래 붙잡아놓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정말로 먼 거리를 다녀올 수 있겠구나.”

“아마 이 배로는 첫 기항지가 될 하란타의 대만 거점까지 열흘이면 닿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타비아로 가 하란타 총독도 만나보고, 실론(Ceylon, 스리랑카)을 거쳐 아주(阿洲,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그들의 수도로 향하게 되겠지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모험이다. 여정 내내 세자 저하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것은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말이다.”

임금과 대군 사이는 여전히 좋았다. 하지만 세자가 가끔 입궐하는 삼촌에게까지 어리광을 부린다는 사실은 요즘 들어 대군과 접점이 많아지고서야 안 사실이었다. 그래서 임금이 세자를 네덜란드로 보낼 결정을 쉽게 내린 듯했다.

한편, 원 역사와 달리 임금이 되지 않은 것이 대군 개인에게는 다행으로 보였다.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 대신, 미지의 세계에 거는 기대가 대군의 얼굴에 가득한 것이 꽤나 보기 좋았다.

“……통제사가 그런 지시를 내렸다고?”

“말도 마십쇼, 나으리! 아예 선실에 바다에서 올라오는 습기로부터 책을 보호할 보관함을 따로 주문하시는데, 키와 방향타보다 그걸 먼저 챙기셨다니까요?”

어느 날 점검에서는 라위터르의 주책이 대목수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 양반이 진짜.

“어디서 들으셨는지 절에 보관하는 목판은 이렇게 한다며 보관함에 숯과 소금을 깔 서랍까지 주문하시는데……. 실례일지는 모르겠으나 대체 통제사 영감은 무엇 하시는 분입니까요?”

“말 그대로 통제사에게는 그것이 대장경판과 다르지 않다. 원하시는 대로 맞춰 드려라.”

“예?”

그 많은 책을 전부 네덜란드까지 들고 가시려고? 유럽의 서점에 난중일기가 깔리게 되는 날이 생각보다 빠를지도.

옆에서 대화를 엿듣던 대군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그날 바로 원양수영으로 찾아가 라위터르와 술잔을 나눴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그럴 정도면 얼마나 호기심이 생겼단 건지.

어쨌건 그 둘은 긴 세월동안 얼굴을 마주쳐야 할 사이이니 나쁠 일은 아니었다.

“아니, 그럼 강 검상을 그리 먼 곳에? 나중일이라고는 하나 어떻게 내 수족을 그리 함부로 빼앗아갈 수 있는가, 사위!”

“송구합니다, 장인어른.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인재는 적재적소에 써야하는 법이니까요.”

“내가 그를 어떻게 옆에 끼고 키웠는지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는가? 내 그 덕에 얼마나 정승 일이 수월했는데……!”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에 수습해야할 것은 또 있었다. 아끼던 도구를 빼앗긴 우리 장인어른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일이었다.

“그래도 곧 처남이 등과해 조정에 들어올 예정이 아닙니까. 거기에 학당 출신 유망한 인재 한 명을 장인어른께 추가로 붙여드리겠습니다.”

“인재라? 내 눈에 웬만한 사람은 차지 않을 텐데?”

“저번 원정에서 공을 세워 주상 전하의 극찬을 받은 학도입니다. 장인어른께서도 학당에서 몇 번 마주쳐 아실 텐데요?”

“아, 설마 자네의 다른 처남 이야기인가? 그 녀석도 이번 증광시에 급제했던가? 그렇다면 키워볼 만한 인재긴 한데…….”

장인어른이 요운이를 아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어쨌건 ‘그 학당’의 초기 멤버이자 학관 출신이 아니던가.

요운이를 김육의 마수에 희생시키는 것이 조금 꺼림칙하긴 했다. 그러나 당분간 자리를 비울 나보다 더 든든한 배경을 얻는 것도 혈통 페널티가 있는 녀석에게는 나쁘지 않을 일이기도 하다.

절대 충신을 대신할 희생양으로 던져주는 걸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일단 요운 스스로도 본인을 가르치던 우명보다 높은 등수로 급제한 인재기도 했고.

어차피 장인어른은 아들이라고 조정에서 차별대우를 하실 분도 아니었다. 원래 능력자인 처남들이니, 내가 아니더라도 장인어른 손에 골고루 갈릴 운명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 길산아! 이거 신어 봐! 갑판은 미끄럽기 일쑤여서 이런 신발이 꼭 필요하다더라! 내가 만든 거야! 어서!”

“작은어머니, 갑자기 웬일로…….”

“웬일이라니? 내가 너 안 챙긴 적 있었어? 빨리!”

“이거…… 조금 모양도 이상하고…… 양쪽 크기도 안 맞고…….”

“이게! 빨리 안 신어?”

네덜란드 방문이 정해지자마자 가장 신난 것은 이 녀석이었다. 녀석이 이렇게 맑은 미소를 흩뿌리고 다니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덕분에 전방위로 쏟아지는 요안의 ‘챙김’을 받아야 하는 길산이 녀석만 불쌍해질 뿐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아침저녁마다 별채로 불려가 이상한 것들을 받아 나오는 녀석의 어깨는 늘 쳐져 있었다.

그것도 세자 저하를 궁에서 탈출시킨 업보니라. 자식아.

***

“이게 말씀하신 그 배인가요. 언젠가는 저도 이걸 타고 당신과 함께 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조금만 그대 몸을 추스를 시간이 더 있었더라도…….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꼭 같이 다녀옵시다.”

벽란항은 사절단으로 파견되는 가족을 배웅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연이 멀다면 먼 벽란항까지 발걸음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먼 길을 가야하는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것은 역시 아내였으니까.

“언니! 언니! 너도 손 흔들어! 어서!”

“이 녀석! 이게 무슨 추태인 게냐! 네 위치를 자각하라고 이 애비가 그리도 말하지 않았더냐!”

먼저 뱃전에 올라가 있던 요안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물론 그 철없는 모습은 지켜보던 박연에 의해 금방 진압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옆에 서 있던 길산이 녀석만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풋……. 요안이 녀석도 하란타를 다녀오면 어른이 되어 있어야 할 텐데요. 아직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천진난만하니, 원.”

“저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인.”

“하긴, 서방님께서 남편으로서 잘 처신해주시겠지요. 요안이 옆에 당신이 계실 터이니, 저는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후후.”

내가 놓아주지 않은 탓에 여전히 하연의 고운 손은 내 손아귀 안에 얌전히 잡혀 있었다. 내 체온을 느끼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아내를, 나는 나도 모르게 남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끌어안고 말았다.

잠시 무슨 짓이냐며 난색을 표하던 하연은 곧바로 내게 몸을 맡겨왔다. 남들의 시선 따위보다 오래 마주하지 못할 그녀의 향기 한 점이 내겐 더 중요했다.

“정말 당신……. 이런 당신이라 저를 버리고 이 먼 길을 가시는 데도 발병이나 나라고 악담을 할 수가 없네요. 못된 분 같으니라고.”

“그동안 몸조리 잘 하고 계셔 주십시오. 내가 이역만리에서도 그대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소식을 받은 지도 꽤 되었고, 몸도 병을 앓기 전 만큼 가뿐하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서방님. 아……!”

그렇게 달콤한 말을 나누며 하연에게서 스며나오는 매화 향기에 흠뻑 취하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깨달은 듯, 내 품에 폭 안겨있던 하연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향했다.

“말씀드리지 않은 게 하나 있긴 하네요. 헌데 이걸 말씀드리는 게 맞나…….”

“그게 무엇입니까? 부인께서 제게 숨기실 것이 있으셨습니까?”

“숨기는 것이라……. 아닙니다. 하란타에 다녀오시고 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미리 말씀드린다고 달라질 것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후후.”

아내는 다시 한번 팔에 힘을 주어 나를 안았다. 헌데 거기서, 무언가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굳센 느낌이 전해지고 있었다.

뭐지?

“참, 저번에 제가 드렸던 말씀, 기억하세요? 탁발하러 오셨던 노스님 이야기.”

“물론입니다. 내가 그대가 한 말을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분이 그 때 길산이와 저를 모자로 착각하면서 남기신 말씀이 또 있었답니다. 그때는 스님 말을 믿을 수 없어 당신께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요.”

아, 길산이 보고 나라를 덮을 악운을 타고났다 악담을 남겼던 그 노승? 헌데 하연은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사실 그 스님께서 관상을 보시고 나서, 길산이 팔자에 동생이 있다는 말씀도 하셨거든요.”

“예? 길산이의 부모는 지금 생사도 모르는 상황일진대…….”

“글쎄요……. 저도 사실 무슨 뜻인지는 잘 와 닿지 않았답니다. 스님들은 선문답도 종종 남기시곤 하니까요.”

길산이의 부모가 어딘가에 살아있기라도 하다는 이야긴가. 하연 역시 짙은 눈썹 사이를 찡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결국 아내가 내린 결론 역시 나와 같았다.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당신. 서방님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길산이의 부모가 살아있다면 마땅히 찾아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저는 당분간 긴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게 되겠지요. 소첩이 그 사이 아버님께든 오라버니께든 부탁을 드려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앞으로 하란타에서 일어날 일에 신경을 써 주세요.”

내 팔뚝을 살짝 꼬집은 아내가 배시시 미소를 흘렸다.

하, 정말로 너무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사람을 두고 어떻게 멀리 출장을 가라고.

“당신이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이곳의 일은 제가 잘 해낼 수 있답니다. 그러니 마음에 짐 따윈 두시지 마시고 당신 맡은 일을 열심히 해 주세요. 그게 소첩이 원하는 것이랍니다.”

어느새 내 품에서 떨어져 나온 아내가 살며시 내 등을 떠밀었다. 그 손길에서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으나, 그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와 하연의 심정은 완전히 같을 테니까.

“긴 세월도 하루처럼 다녀오세요. 저는 늘 이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부디 건강하게만 있어 주십시오, 부인. 내 이 나라 백성들과 그대를 위한 커다란 선물을 들고 올 테니…….”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서방님.”

하지만 입으로 뱉은 말과 달리 못 박혀 있는 다리는 생각보다 쉽사리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하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그렇게 그녀의 체온까지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좁혀진 순간, 아내가 덮고 있던 장옷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느샌가 하연의 숨결에서 느껴지던 짙은 향기는 내 입술에 옮겨와 있었다.

“……어서 가보세요. 사절단의 정사(正使)시니 챙겨야 할 것도 많으시잖아요.”

“어, 어, 정말로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부인 건강이 우선입니다!”

“후후. 알았다니까요, 정말.”

겨우 발걸음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한 채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도, 항구를 떠도는 갈매기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것은 나도 모르게 다리가 움직여 갑판까지 올라온 후였다.

뱃전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길산이 녀석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우리가 유교 기준으로는 한없이 음란한 짓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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