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86화 (186/298)

186화. 사민정책

사실 그리 갑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조선과 네덜란드가 공식적으로 처음 접촉했던 시절에 이미 나왔던 이야기였으니까. 지금은 수십 칸 규모가 되어버린 반촌의 네덜란드 상관, 그곳에서 엘세라크와 밀담을 나누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대만 섬에 사람을 지원해 달라?”

대만에서 온 네덜란드 사절이 상관으로 돌아가자마자 임금은 다시 나를 주저앉혔다. 사절이 들고 온 건이 생각보다 중대했으니까.

“하란타에서 우리에게 기술을 아낌없이 전해준 이유가 있긴 합니다. 사절이 말한 대로 본국에서 인력을 끌어오기에 대만 섬은 너무 먼 곳이니까요.”

“내 생각보다 그곳에 머무는 하란타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주둔중인 병력도 부족하다고?”

“예. 질란디아라 부르는 요새를 지키는 병사만 따져서 겨우 천오백이 넘는 수준이라 했습니다. 거기에 유사시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 거점에서도 보낼 원군도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며 사절이 울상이었습니다.”

바타비아라면 네덜란드의 아시아 본부 거점이다. 현대로 따지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였던가.

사절은 그곳에서 원군으로 보낼 수 있는 병력이 조선군이 사쓰마 정벌에 동원한 병력의 절반도 못 된다고 했다. 정규군도 아닐 테니 전투력은 더 기대할 수 없을 터.

그러니 원 역사에서 남명이 실질적으로 멸망한 후, 네덜란드가 정성공의 독자세력에게도 처참하게 패배하고 대만 섬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

이들이 조선에 손을 내민 이유가 있었다.

“주둔병이 그 정도 수준이라면, 정착시킨 이주민들의 수도 많지 않겠구나. 그러니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가.”

“지금 하란타가 대만 남부에 쓰고 있는 거점은 순수하게 방어만을 위해 선정한 곳이라 마실 물조차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세력을 넓혀가려면 더 내륙에 새로운 거점을 설치할 필요가 있었겠지요.”

“그것을 우리더러 도와달라……. 한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우리가 하란타를 도울 가치가 있겠더냐.”

임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람을 낯선 곳으로 보내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을 테니까.

국초에 사군육진을 개척하며 사민정책, 그러니까 백성 이주를 실시했던 일은 임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가사변이라는 형벌까지 동원해가며 죄인을 먼 북방으로 보내야 했을 정도로 개척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란타가 조선을 접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바다 건너 복건이나 광동에서 명국인들을 데려다 이주시킬 겁니다. 제 기억속의 하란타 역시 그러했고요.”

“그렇다면 우리 백성들을 그들의 노비쯤으로 쓰려는 것인가. 하란타가 그런 저의를 가지고 접근했다면 나는 절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임금의 염려는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네덜란드에 의해 대만으로 이주한 중국인 수천 명이 반란을 일으켰던 적이 있을 정도로, 네덜란드의 소작료 착취는 과중했으니까.

“형님의 추측도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허나 겉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명국과 사실상 동맹 직전인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지요.”

“하란타인들이 우리 백성들을 착취하기에는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는 이야기더냐?”

“예, 그렇습니다. 게다가 하란타의 총독이 요청한 사항이니 다른 조건을 붙인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출장소를 먼저 요청하기도 했으니 우리 관리를 그곳에 파견한다든지…….”

“우리 원양 함대의 기항지를 따로 요구해도 되겠구나. 어차피 거점을 지킬 병력이 부족하다 하소연한 하란타니, 그 제안도 감사히 받아들이겠지.”

관리로 대표되는 행정력과 군대로 대표되는 물리력이 늘 대만 섬에 상주하게 되면 충분히 네덜란드의 돌발 행동을 억제할 수 있다. 네덜란드가 대만 섬에 이주할 우리 백성들을 건드리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정말로 급한 모양인지 물자나 기타 지원은 하란타 측에서 최대한 아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정말로 사람뿐이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하란타의 사절이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본격적으로 대만 개척이 시작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하란타 동인도회사는 그들의 수익 중 사분의 일 이상을 대만에서 뽑아낼 겁니다.”

“별 장점 없는 부스러기라는 표현은 과장인 모양이구나. 게다가 그 말은…… 우리가 본격적으로 개척에 나서면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이다?”

말이 25%지, 한창 황금시대에 접어든 네덜란드의 아시아 수익 중 25%를 대만 섬에서 거두었단 이야기다. 결코 수익이 적을 리가 없다.

유럽으로 교역선을 직접 보내든, 아니면 지금처럼 동인도회사에 투자한 후 네덜란드에게 중개무역을 위탁하는 형식이든 상관없다. 분명 대만에서 수익이 들어오게 된다면 내수사나 호조의 재정 둘 중 한 군데는 또다시 윤택해질 것이다.

“그건 꽤나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인데……, 허나 네가 얼마 전 제안한 일을 생각하면 은편 하나도 아쉬운 상황이지 않느냐. 그것이 마음에 조금 걸리는구나.”

“저수지와 수로를 비롯한 수리시설을 확충해야한다는 제안 말씀이시군요. 물론 지금 쌀 생산량을 감안하면 형님 말씀대로 그쪽이 최우선이 되어야합니다만, 대만 개척 역시 은을 출재할 가치는 충분할 것입니다.”

감자와 고구마의 보급으로 어느 정도 기아는 방지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필요가 있긴 했다. 수리시설 확충은 그 다음 단계인 이앙법(移秧法)을 위한 정책이었다.

지금이야 농가에서 활용할 물이 부족한 탓에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이앙법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다. 아마 이것 때문에 전국으로 이앙법이 조선 전역으로 완전히 퍼져나갔던 것은 구한 말이었다던가.

‘마령서요? 그게…… 아주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하얀 입쌀밥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 않겠습니까요. 물론 보릿고개를 수월하게 넘길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긴 합니다만요.’

어떻게든 조선인 식생활에서 쌀의 비중을 줄여보고자 감자 요리법도 보급해가며 애를 썼지만, 아직 큰 효과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식문화라는 것이 갑자기 바뀌는 것도 아니고.

감자와 고구마를 보급하며 느낀 거지만, 아니 심양관 시절부터 느낀 거지만 우리 민족이 쌀에 미쳐있는 것은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었다. 굶어죽지 않게 되자 쌀부터 찾다니, 나 참.

“어차피 전국에 갑자기 수리시설을 확충할 수도 없을 터. 한수 네 제안대로 내수사 전답에 인접한 수리시설부터 확충하고 천천히 확대해나간다면 두 가지 사업을 한꺼번에 추진할 자금은 어찌 마련해볼 만하다. 다만…….”

“무엇이 걱정되시는 것입니까.”

“대만은 멀고 낯선 땅이다. 그런 곳에 순순히 가겠다는 백성들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선발대를 아무리 소규모로 파견한다 해도 말이다.”

“최대한 유민이나 제 땅이 없는 소작농 위주로 모집하되, 그래도 모자라면 기댈 곳이 한 군데 있긴 합니다. 주상 전하의 뜻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받들 사람들이 교하에 가득하지 않습니까.”

“아……. 그랬었지.”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 점점 난이도가 하락하는 법이다. 이미 엘세라크로부터 가벼운 언질이 나왔을 때부터, 나는 대만에 백성들을 보낼 각을 잡고 있었다.

아직 현 임금의 치세가 얼마 되지 않아, 조선팔도에 퍼져있는 빈곤층은 여전히 많은 상태였다. 그들에게 땅과 지원을 약속하면 분명 응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게다가 내가 심양에 처음 갔을 때 어린 아이였던 속환인 2세들은 슬슬 부모로부터 독립할 나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에도 아마 쪼개 받을 부모의 재산보다 모험을 택하는 자들이 있지 않을까.

정 안 되면 전가사변이나 강제이주도 고려해봐야겠지만, 아직 우리 영토도 아닌 곳에 그렇게 백성들을 보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부담 또한 커지고.

“하란타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한 것이 다행이구나. 그들도 우리 백성들을 정착시키는 것이 이득이 되기에 선택한 것이겠다만.”

“형님이 심양 시절에 보셨다시피 명국인들 중 부지런한 사람은 드물지 않습니까. 아마 반촌에 있는 연일석 상관장이 조선 사람들은 부지런하다는 보고를 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관리를 파견할 수 없는 명국과 달리 우리는 우리 백성들을 다스릴 관리를 함께 보낼 수 있다……. 이제야 그들의 목적이 조금 보이는구나.”

아마 이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대만 남부의 방어 거점은 네덜란드가, 주변 개척지는 조선이 관리하는 형태가 되어 일종의 공동구역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나쁘지 않은 결과다.

무엇보다 수십 년 후 닥쳐올 대기근을 대비해 인구를 조선에서 분리하고 국외의 식량고를 마련하는 차원에서도 이 사민정책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내 말을 들은 임금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지금은 청과 명 사이에서 중계무역이 호황이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언제 달라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일본 말고도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교역로를 이번에 하나 더 마련한다면 나쁠 것이 없겠지요.”

“조선에서 생산하는 물품만으로는 하란타와의 무역에 한계가 있단 얘기구나. 그 교역로를 마련하러 네가 하란타로 가는 것이냐…….”

“처음부터 그리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만, 대만 총독이 이렇게 나온다면 한 번 가는 사행을 유용하게 활용해야겠지요.”

“하……. 나는 네게 휴식을 주고자 하란타 사신 건을 수락한 것이었는데, 너는 또 그렇게 일을 만들어 오다니. 너를 염려하지 않을 날이 언젠가 오기는 할까.”

“제 스승이 누구였습니까. 그분에게 하나부터 열까지를 배웠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형님.”

그래도 몸 걱정을 해가면서 일하라며, 임금은 염려가 가득 담긴 눈길을 내게 던져왔다. 글쎄, 그런 아련한 눈빛을 보내지 않으셔야 제가 일을 덜 할 텐데요, 전하.

“알겠다. 그럼 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수리시설의 확충과 대만 섬 사민에 온 힘을 다할 것이다. 네가 하란타에서 돌아왔을 때 당당하게 얼굴을 들려면 그 정도는 해 놓아야겠지.”

“형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이 나라의 지존께서는 늘 제 앞에서 당당하셔야 합니다, 형님.”

“너무 그러지 말거라. 아우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형이 되고 싶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어쩌다보니 신하가 되어서 임금에게 퀘스트를 던져 준 것 같다. 물론 임금은 절대 그렇게 느끼지 않을 테지만.

그렇게 임금과 어색한 웃음을 교환하던 찰나였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없이 웃고만 있던 임금이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차, 내 오늘 아침에 있던 일을 네게 말한다는 것을 잊었구나. 이것 또한 중요한 일일진대.”

“또 무엇입니까? 형님이 나랏일을 논의하는 일을 잊으실 분은 아닐 텐데요.”

오늘 임금의 오전 일과인 상참이나 경연 자리에서는 중요하다고 말할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무언가 까먹은 것이 있나 해서 기억을 뒤지고 있던 때였다.

“네게 요새 숨겼던 일이 하나 있었다. 그분께서 그리 해달라 요청한 탓에 들어드릴 수밖에 없었던 일이지만 말이다.”

“‘그분’이요? 형님이 말을 높이실 분이라면…….”

“그래, 서궐(西闕, 경희궁)에 칩거 중이신 아버님 이야기다. 매일 아침마다 문안드리는 것을 즉위하고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지. 어쨌건 아버님이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불러들이신 지 조금 되었느니라.”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경희궁으로 물러난 능양군 이야기인가.

그가 이제 조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야 확실했으니, 딱히 내 입장에서는 경희궁에 주의를 돌릴 일이 없었다.

임금이야 어쨌건 혈육이니 계속해서 교류를 이어왔겠지만 말이지.

헌데, 그 능양군이 세자를, 아니 임금을 안으로 불러들여 문안을 받았다고? 반정을 일으켜 자신을 쳐낸 아들을 드디어 용서한 것인가?

“마음의 짐을 하나 내려놓은 기분이시겠군요. 다행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아버님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이유가 따로 있어서 말이다. 하.”

“이유라니요?”

아비와 화해했음을 알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미간에서는 주름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란 것이 도대체 뭐기에.

“아버님께서 앓고 계신 신병이 최근 심하게 악화되었다. 내의원에서도 회복을 장담하지 못한다 하더구나.”

“최근에 학질 비슷한 병을 앓으셨다는 보고는 도승지 시절 내의원에서 들었습니다만, 그 이후 일어난 일입니까. 학질은 제가 고안한 약으로 병세를 잡았을 텐데요.”

“그래. 아무래도 곧 환갑이 가까워지는 나이시다. 병마가 아버님의 신체에 남긴 흉터가 꽤 깊은 모양이로구나.”

임금은 아비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시절에도 효심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착잡한 마음이 내게 그대로 전해져왔다.

“헌데 상왕 전하의 건강 상태를 제게 숨기실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상왕 전하께서도 제게 이런 것을 숨기라 부탁하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당연히 아니다. 아버님이 내게 부탁하신 것은…….”

서안에 팔꿈치를 괴고 이마를 짚던 임금이 시선이 나를 향했다. 무언가 곤란하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한수, 너와의 독대다.”

***

광해군이 아우 정원군의 저택에서 ‘왕기가 흐른다’며 몰수해 지은 이궁(離宮), 경희궁.

임금이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셈 치라며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발도 들여놓지 않았을 공간이다.

상왕은 그런 아비의 사연이 서린 궁궐에서 그동안 몸을 숨기듯 살아왔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를 부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왔느냐. 역적아.”

문을 열자마자 내 코에 끼친 것은 불길한 냄새였다.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상왕의 침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건방진 놈 같으니. 이제는 개호주가 아니라 대호(大虎)가 되어버렸구나. 내 눈은 분명 틀리지 않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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